장맥주의 블로그
제 독서 메모는 마음대로 퍼 가셔도 괜찮습니다. 상업적으로 이용하셔도 됩니다.관조하는 동시에 육감적인 문장과 장면들. 중독은 정신의 문제이고 또 몸의 문제이기에. 볼에서 입으로, 입술로, 가깝고 먼 거리를 탐색하다 혀에서 오래 머물고, 혀뿌리를 지나 사랑니와 치근에까지 이른다.
2000년대 한 국 영화와 소설의 묵시록 서사들을 분석. 책에 나온 프레드릭 제임슨의 말을 조금 변형해서 옮기면, 나는 엇비슷한 종말물들은 그냥 작가가 미래를 상상하는 능력이 부족한 탓 아닌가 의심한다.
200쇄를 찍었다기에 궁금하기도 하고 시대정신을 알 수 있겠다는 생각에 집어 들었고, 한 자리에서 다 읽었고, 저자의 조언 한 가지는 이후에 계속 실천한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기지개를 펴고 이불을 개고 물을 한 컵 마시라는 것. 스노우폭스 브랜드가 괜히 친근하게 느껴져 도시락도 몇 번 사먹었다. 우습게 볼 책 아님.
개인적으로는 해외 진출을 다룬 11장을 특히 흥미롭게 읽었다. 『노르웨이의 숲』으로 대성공을 거둔 작가도 《뉴요커》에 단편을 싣기 전까지는 미국에서 미적지근한 대우를 받았다니. 하루키가 직접 발로 뛰어다니며 미국 에이전트와 출판사를 ‘필사적으로’ 접촉하려 했다는 점도 놀라웠다. 그 배경에 일본 문단의 비판에 대한 분함이 있었다는 고백에는 갑자기 친근해진 기분.


뒤표지에 외신들의 서평 일부가 적혀 있다. '단정하고, 간결하고, 차가운 문장들'은 그러하다 싶고, '정확함에 대한 열정'이나 '완전무결한 단호함'에 대해서는 그런가 보다 한다. '불에 덴 상처와도 같은'에 대해서는, 불에 덴 지 오래되어 이제 열기도 통증도 남지 않은 흉터라면 그럴 수도 있겠네, 했다.


이런 책 좋다. 몰랐던 세상을 알려주면서 그 말을 하는 사람에 대해서도 들려주고, 현실을 분석하고 비판하면서도 누구를 탓하지 않고 희망을 이야기하는 책. 도서관의 고민을 알게 되었고 도서관의 역할을 상상해보게 되었다. 저자가 출판사를 구하느라 애를 먹었다고 하고, 그 과정에서 특정 챕터를 덜어내라는 제안도 받았다고 한다. 그 장이 핵심 같은데.
설 연휴 셋째 날에 동생 차를 타고 의정부에 가서 새롱이를 받아왔다. 동생은 강아지 가정 분양을 하는 인터넷 카페에서 새롱이 소식을 듣고 신청했다고 한다. 그 카페는 분양업자를 막기 위해 회원들이 딱 한번만 새끼 강아지를 분양할 수 있게 허락한다고 한다.
동생이 운전하는 차는 처음 타봤다. 그렇게 강아지 입양을 도와주고 데려다주기까지 하는 것이 무척 고마웠지만 남매답게 차 안에서 별 얘기는 안 했다. 게다가 나는 차에 올라타고 나서 얼마 안 있어 금방 잠에 빠져버렸다. 깨어났더니 목적지인 의정부시 주택가였다. 동생이 준비한 동물 운반용 케이지를 들고 차에서 내렸다.
개를 분양해주려는 집은 빌라의 1층이었다. 친절하고 인상 좋은 젊은 여성이 대문을 열고 나와서 우리를 안내했다. 집에 들어가자 안에 있던 개들이 펄쩍펄쩍 뛰며 좋아서 난리가 났다. 현관과 마루 사이에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 개를 세 마리 두고 있었는데 어미 개는 흰색, 두 어린 남매 강아지는 검은색이었다. 모두 토이 푸들이었다.
두 마리 강아지는 생각보다 컸다. 어미 크기의 3분의 2 정도는 됐다. 속털이 쥐색이었는데 자라면서 그렇게 색이 변할 거라고 했다. 장남인 새롱이는 인형처럼 귀여웠다. 눈이 까맣고 초롱초롱했고 약간 불쌍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런 인상과 달리 격하게 날뛰면서 어미와 싸웠다. 분양인은 “얘가 엄마를 자꾸 이겨먹으려고 해요”라고 설명했다. 어미가 새끼를 세 마리 낳았는데 한 마리는 이미 전날인지 며칠 전인지에 입양을 보냈다고 했다.
사교성 좋은 동생이 분양인과 대화하고 새롱이와 인사하는 동안 나는 한 걸음 뒤에서 어색하게 서 있었다. 그때서야 비로소 태어난 지 두 달밖에 안 된 새끼 개를 어미로부터 떼어내 낯선 사람이 있는 낯선 장소로 데려가는 것이 정말 잔인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내가 하려는 일이었다.
어린 강아지한테 이 상황을 뭐라고, 어떻게 납득시켜야 할까? 사람이 하는 말로 사람 아기한테 하듯이 천천히 말해봤자 알아듣지 못할 테지 않은가. 가족과 헤어지는 법을 가르쳐주는 훈련 같은 건 없나? 개가 막연하게라도 입양 가족에게 친밀감을 느끼게 할 의식 같은 건?
우리는 그냥 그 집에서 분양인과 10분 정도 담소를 나누고(그나마 나는 거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새롱이를 운반장에 넣어 나왔다. 친절한 분양인은 새롱이와 어미에게 먹이던 사료와 간식을 비닐봉투에 담아 주었다. 우리에게 선물로 케이크까지 주었다.
강아지가 든 운반용 케이지를 가슴에 안고 조수석에 올랐다. 강아지도 나도 긴장하고 겁을 잔뜩 먹었다. 개가 겁에 질리고 흥분해서 울부짖거나 토하거나 기절하거나 똥오줌을 지리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가는 길에 배가 고프거나 목이 마르지는 않을까?
몇십 분 전까지 활달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새롱이는 애처롭게 낑낑댔다. 케이지 입구를 열고 안에 손을 넣어 강아지를 쓰다듬어주었다. 강아지는 머리를 입구 밖으로 내밀고 그 불쌍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겁을 먹고 불안해하는 것은 틀림없었지만 짖지는 않았다. 몇 번인가 가슴까지 몸을 우리 밖으로 내밀기도 했지만 내가 다시 집어넣었다.
사람 아기에게 하듯이 개에게 계속 말을 걸라고 동생에 조언했다. 그러나 나는 쑥스러워서 그러지 못했다. 조카와 매제가 동생에게 전화를 걸어 강아지 잘 데리고 오고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차창 밖으로 도봉산을 바라보다 강아지를 바라보다 했다. 새롱이는 마침내 잠이 들었다.
“눈을 뜨고 자네.” 내가 말했다.
“눈이 커서 눈꺼풀이 안구를 다 덮지 못하는 거야.” 동생이 설명했다.
동생은 나를 부모님 댁 앞에 내려주고 집으로 갔다. 부모님 댁 마루에 운반장을 놓고 문을 열었지만 겁을 먹은 강아지는 한참 동안 그 안에서 밖으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5분 정도 기다리다가 내가 케이지를 분해해서 강아지를 꺼냈다. 새롱이는 아직 주변 환경이 어색한 듯했고, 마룻바닥을 걷다가 종종 미끄러졌다.
부모님이 강아지를 너무 좋아하셔서 퍽 놀랐다. 나 때문에 억지로 키우는 건 아닌 게 확실했다. 특히 무뚝뚝한 아버지가 개를 보며 연신 웃으시는 모습이 뜻밖이었다. 사실 두 분 모두 나보다 개에 더 관심이 많았다. 조카들과 함께 있을 때면 부모님은 나에게는 거의 눈길을 주지 않는데, 새롱이와 있을 때도 그랬다.
개가 바닥에 똥을 싸자 내가 얼른 휴지를 들고 와서 치웠다. 오줌도 닦았다. 개똥이 예상보다 단단해서 별로 더럽다는 기분은 들지 않았다. 그렇게 기꺼이, 자연스럽게 개똥을 집어 들고 바닥을 닦게 될 줄 나도 몰랐다. 어쩌면 나는 나이 든 개를 사랑할 수도 있고 개가 죽어가는 모습도 지켜볼 수 있을지 모른다.
저녁으로 떡국과 갈비찜을 먹고 부모님 댁에서 잤다. 밥을 먹으며 나는 7, 8월에는 내가 서울을 떠나 원주에 있게 될 거라고 (그러니 그 기간에는 부모님이 새롱이를 돌봐줘야 한다고) 여러 번 강조했다. 어지간하면 7월 1일에 원주로 떠나 8월 31일까지 기간을 꽉 채워 머물면서 그 사이에 되도록 서울에 오지 않을 마음이었다.
냉장고에는 칼스버그 대니쉬 필스너 한 캔과 테라가 여러 캔 있었다. 칼스버그 대니쉬 필스너는 전에는 그냥 칼스버그라는 이름으로 팔렸는데 재작년에 로고와 포장, 이름을 바꿨다. 내게는 여태껏 깔끔하다는 인상 정도가 전부인 맥주였는데, 앞으로는 다르게 기억되겠구나 생각했다.
밤에 나는 손님방 침대에 누웠고, 새롱이가 깔고 잘 방석은 침대에서 좀 떨어진 자리에 뒀다. 개는 무서웠는지 낑낑대며 잠을 들지 못했고 나는 몇 번 침대에서 내려와 녀석을 안아주며 달랬다. 그러다 어느 순간 새롱이가 제 방석에서 나와서 침대 옆, 내 머리맡 아래에서 자고 있는 걸 발견했다.
그걸 보고 가슴이 뭉클해졌다. 만난 지 하루도 안 된 사이인데, 내가 그렇게 믿을 만 해? 푹신한 방석 위에서 자는 것보다 딱딱한 방바닥이라도 내 옆에서 엎드려 자는 게 더 좋아? 나는 개 방석을 침대 옆으로 가져왔고 새롱이를 거기 눕혔다. 그렇게 다음날 아침까지 어린 개와 나란히 누워 푹 잤다.
강아지를 데리고 온 날
덴마크 왕실 공식 맥주를 마시고
행복한 기분으로 잤습니다
대학 두 곳에서 강의할 때 첫 수업 숙제로 부모님이나 친구를 인터뷰해오는 과제를 내줬다. 살면서 가장 무서웠던 일, 혹은 가 장 슬픈 일에 대해 육하원칙에 맞게 자세히 들어오라고. 학생들은 인터뷰를 하면서 무척 놀란 것 같았다. 인터뷰는 깊은 대화이고, 깊은 대화는 그 자체로 힘이 있어서, 제대로 하고 나면 인터뷰어도 인터뷰이도 정화되는 듯한 기분이 된다. 그런 활동을 정기적으로 하는 오프라인 모임에 대해 이것저것 상상해본다.
대학 시절, 교양영어 수업 시간에 충격적으로 읽었던 「제비뽑기」와 다른 단편들. 「제비뽑 기」는 분명 걸작인데 나머지 글들 중에는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것들이 많았다. 불길하고 으스스한 분위기를 의도한 작품들이라고 받아들이고 넘어가야 하나?
「제비뽑기」가 뉴요커 지에 처음 실렸을 때 독자들의 항의가 바로 이 작품 속에서 돌을 던지는 마을사람들의 모습과 겹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비뽑기」를 좋아하는 사람도 많았고, 각색하기 편한 내용이어서 단편 영화, TV와 라디오 단막극, 그래픽 노블로 만들어졌다. 그러니 용감하게 쓰자. 마릴린 맨슨의 〈Man that you fear〉 뮤직비디오도 「제비뽑기」의 영향을 받았다. 그냥 보면 알 수 있는데 맨슨이 인터뷰에서까지 밝혔다.
호불호가 엄청나게 갈릴 책. 나로 말하자면 매우 재미있었고 한 대 목 한 대목이 다 통렬했다. 그리고 사림과 586의 공통점이 단순한 우연인지, 아니면 필연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떤 공통의 지리적 요소에서 비롯된 것인지 궁금해졌다. 외부와의 경계가 확정적으로 보이면 사람들은 내부 권력 투쟁에 몰두하게 되는 걸까? 그런 때 실력을 쌓는 일보다 패거리에 소속되고, 도덕과 명분을 앞세우는 것이 비용효과적인 전략인 걸까? 인구 밀도가 높고 구성원의 교육 수준도 전반적으로 양호하다는 점이 그런 전략 수립에 영향을 미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