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맥주의 블로그
제 독서 메모는 마음대로 퍼 가셔도 괜찮습니다. 상업적으로 이용하셔도 됩니다.무국적 배경에 외국어 고유명사가 넘치는 독특한 성장소설, 혹은 반(反)성장소설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청소년들이 주인공이지만, 부모 세대보다 나은 인간으로 묘사되지 않는다.


고대 이스터 섬, 마야 문명, 아나사지 문명, 노르웨이령 그린란드 등 몰락한 사회를 찾아 원인을 분석한다. 책에 따르면 위의 사례들과 마찬가지로 지금 우리 세계 역시 고 립된 단일 문명이며 인류는 환경에 엄청난 충격을 가하는 중이다.


세 이야기가 마침내 만난다. 전작 주인공들의 비중은 꽤 달라진다. 결말은 살짝 타협적인 것 같기도 하지만 그래도 나는 감동 받았다. 어쩌면 ‘문학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가장 화끈 한 답안을 내는 소설 아닐까.
신화와 SF의 결합, 지식 과시, 마초스러운 분위기가 젤라즈 니를 연상케 한다. 그보다 덜 우아할지는 몰라도 야심과 박력은 엄청나다. 끝을 보려면 『올림포스』를 읽어야 한다.
제주 여행 세 번째 숙소는 여러 면에서 첫 번째, 두 번째 숙소와 달랐다. 이 숙소는 산방산 아래 있는 펜션이었는데 바다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커다란 종처럼 볼록 솟은 산방산이 방 정면으로 보였다. 두 번째 펜션보다 더 고급스러운 자재를 썼고 디자인도 세련되었다. 방에 들어설 때 HJ는 “아, 편백나무 냄새”라고 중얼거렸다.
우리는 복층 객실에 묵었는데 첫 숙소였던 호텔 객실과 달리 창문이 벽 아래에서부터 위까지 통으로 연결된 것은 아니었고 위 아래로 따로 떨어져 있었다. 산방산은 아래 창문을 가득 채웠는데 그 전망도 훌륭했다. 억수처럼 비가 쏟아지던 날 우리는 오후 내내 음악을 틀어놓고 멍하니 산방산을 바라보았다.
첫 번째, 두 번째 숙소는 건물 앞에 근사한 올레길이 있었고, 동으로든 서로든 주변 경치를 감상하며 보행자 전용 산책로를 이용할 수 있었다. 주변에 걸어 갈 수 있는 식당과 카페도 많았다. 길이 편해서 꽤 오래 걸을 수 있었다.
세 번째 숙소는 그렇지 않았다. 앞에는 차도였는데, 한 쪽에 보행자들이 걸으라고 만든 공간이 있었지만 그다지 안전해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실제 거리는 멀지 않은 식당이나 카페에 가는 일이 불편했다. 조금 멀리 나갔다 돌아오려면 그때마다 택시를 불러야 했다. 그런데 비가 오거나 밤이 되면 카카오택시로도 차를 부르기 어려웠다.
16년 전인지 17년 전인지에 HJ와 제주도에 처음 같이 놀러왔을 때에는 빨간색 스포츠카를 빌렸다. 11년 전에는 자동차 담당 기자를 하며 제주도에 와서 신차 시승 행사에 참석했다. 하지만 그때도 운전을 좋아하지 않았고, 나이가 들면서 더욱 더 싫어하게 됐다. 내가 인명 사고를 낼 가능성을 차단하고 싶다. 차로 사람을 치는 것과 내가 차에 치이는 것 중 굳이 선택하라면 후자를 택하련다.
그러나 40대 남자가 대한민국에서 자가용 없이 살면 자신이 퍽 비루하고 궁상맞게 느껴지는 순간들이 있다. 이 숙소에서도 그랬는데, 편의점이라도 가려고 차도 옆을 걷다가 달려오는 차를 피할 때면 조금 어이없지만 서럽다는 기분이 들었다. 펜션 주인은 왜 렌트카를 이용하지 않느냐며 우리를 이상하게 여겼다.
세 번째 숙소의 주인 부부는 골든 리트리버를 두 마리 키웠다. 골든 리트리버 치고도 아주 큰 녀석들이었다. 처음에 우리를 보고 한 번 짖은 뒤로는 내내 온순하게 굴었고, 나는 세 번째 숙소에 머무는 동안 이 개들과 자주 놀았다. 놀았다고 해봐야 쓰다듬거나 안거나 곁에 붙어 커피를 마시는 정도였지만.
큰 개들과 그렇게 가까이 있어 본 건 처음이었다. 두 마리 개 중 어느 한쪽만 쓰다듬으면 다른 한 마리가 자신도 만져달라고 머리를 거칠게 들이밀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개들이 나에게 완전히 경계심을 푸는 것 같지는 않았다. 주인 부부와 있을 때와 비교해 보면 긴장해 있음이 분명히 느껴졌다.
개들과 놀다 보면 갑자기 무서워지는 순간도 있었는데, 유튜브에서 보던 셀럽 골든 리트리버들과 달리 이 녀석들이 무표정한 편이어서 특히 더 그랬던 것 같다. 개들이 나와는 전혀 다른 곳을 보고 있고, 눈동자를 통해서 어떤 생각도 읽을 수 없을 때, 이 녀석들이 갑자기 나에게 달려들거나 나를 물어뜯으면 꼼짝없이 당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커다란 개 등에 한 팔을 올려놓고 앉아서 먼 곳을 바라보며 커피를 마시고 있으면 근심 걱정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주인 부부는 이 개들을 거의 묶어두지 않아서, 두 녀석들은 마당을 자유롭게 뛰어 다니고 옆집의 밭이나 멀리 차도까지 나갔다. 밖에서 택시를 잡다가 어슬렁어슬렁 도로를 가로지르는 이 골든 리트리버들을 마주친 적도 있었다.
손님 중에도 개를 무서워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고, 개가 차에 치일 수도 있는데 걱정이 되기는 했다. 그러나 나로서는 그런 걱정보다 매이지 않고 자유를 만끽하는 대형견의 모습을 보는 데서 오는 흐뭇함이 더 컸다. 두 번째 숙소의 진돗개 잡종견과는 아주 딴판인 삶을 살고 있었다.
혹시 이 동네에서는 주민들이 개들을 그렇게 풀어 키우는 데 관대한 건가? 펜션의 골든 리트리버 외에도 목줄 없이 활보하는 개들을 두 마리나 더 봤다. 마당 계단에 궁둥이를 깔고 앉아 커피를 마시며 일광욕을 하고 있는데 난데없이 웰시 코기 한 마리가 멀리서 내 앞으로 달려왔다. 그리고 나는 난리법석을 피우는 골든 리트리버 두 마리와 웰시 코기 한 마리 사이에 몸이 끼었다. 식당 근처에서도 황구 한 마리가 어슬렁거리는 걸 봤다.
세 번째 숙소에서 머무는 동안 송악산 둘레길을 걷고 근처의 탄산수 온천에 갔고, 배를 타고 가파도에 가서 청보리밭 사이 길을 걸었다. 송악산은 커다란 분화구 안에 작은 분화구가 있는 구조의 오름이다. 산책로는 바깥쪽 분화구 벽 위를 한 바퀴 도는데, 바다 쪽으로는 해안 절벽이 이어지고 산 정상 쪽으로는 나무 없는 초지가 펼쳐졌다.
우리가 하늘에 구름이 많고 바람이 제법 불던 날 올라서인지 평화로우면서 쓸쓸하기가 이루 말할 데 없었다. 처음에는 3분의 1 정도만 걷고 내려올 생각이었는데 경치가 너무 마음에 들어 한 바퀴를 다 돌았다. HJ는 이어폰을 귀에 꽂고 음악을 들으며 걸었고, 나는 새 소설을 구상했다.
송악산 둘레길을 걸은 날 저녁에 편의점에서 산 금성맥주와 다른 맥주들을 마셨다. 금성맥주는 얼마 전 GS25에서 GS리테일 창립 50주년을 기념해 만든 이벤트 맥주다. GS그룹의 전신인 옛 골드스타 브랜드 로고를 라벨에 그렸고,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합니다’라는 당시 광고 문구를 ‘순간의 선택이 오늘을 좌우합니다’라고 바꿔 넣었다. 그런 복고 감성이 MZ 세대의 관심을 끄는데 성공해서 출시 이틀 만에 10만 캔이 팔렸다고 한다.
GS25와 손잡고 실제로 맥주를 만든 업체가 제주맥주이고, 제주산 황금향이 첨가되어 있다고 하니 제주도와도 그럭저럭 관련이 있다. 그냥 포장을 재미있게 했을 뿐 내용물은 특징 없는 보통 라거겠거니 하고 한 모금 마셨는데 꽤 괜찮았다. 바디가 가벼운 골든 에일이었다. 하긴, 골드스타라는 이름에는 골든 에일이 어울릴 것 같기는 하다.
순간의 선택에
몇 년이 좌우된다면
무섭지 않은가
탄산수 온천에는 거대한 실내 목욕탕과 혼탕인 노천 온천이 있었다. 노천 온천에는 너무 추워서 우리가 들어가지 못한 작은 수영장 크기의 냉탕을 제외하고도 크고 작은 탕이 다섯 개 있었다. 밤이 되자 손님들도 거의 다 빠져나가서 느긋하게 여러 탕을 돌아다니며 몸을 물에 불렸다.
한쪽 벽에는 보름달 모양의 커다란 조명 기구가 한쪽에 설치돼 있었다. 그 조명 기구는 은은한 노란 빛을 내고 있었는데 달의 바다와 분화구도 제대로 묘사되어 있었다. 뜨끈한 탕에 수영복을 입고 앉아 조명 기구 앞으로 수증기가 물안개처럼 피어올라 바람에 쓸리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니 최면에 빠지는 듯했다.
온천탕 대표가 온천수를 발견하게 된 경위가 한쪽에 비석으로 적혀 있었는데 약간 과장이 있는 듯했지만 재미있었다. 옛날 옛적 제주도에 전염병이 돌았을 때 책임감 강한 사또가 약을 찾아 헤매다 산신령이 나오는 꿈을 꾸었다. 산신령은 ‘붉은 박쥐 깃털’을 찾으라고 했다. 아, 신령들은 왜 매번 그렇게 애매하게 힌트를 주는 거냐.
그러던 어느 날 사또는 서귀포시 안덕면에 있는 단산 아래에 이르렀다. 세 봉우리가 거대한 박쥐가 날개를 편 모양으로 생겼다고 해서 바굼지 오름이라고도 부르는 곳이다. 마침 해가 지고 있었고, 산은 석양에 붉게 물들었다. 사또는 산신령이 말하던 ‘붉은 박쥐 깃털’이 바로 이 산을 가리키는 것임을 깨달았다. 그래서 거기 있는 우물의 물을 길어다 사람들이 마시고 몸을 씻게 했더니 역병이 사라졌다는 것. 그리고 온천탕 대표는 이 전설을 믿고 첨단 지질탐사 장비를 동원해 이 부근을 탐색하다가 지하 600미터에 있는 섭씨 31도의 탄산 온천수를 발견했다나.
제목보다 영어 부제 ‘Real things and why they matter’가 주제를 더 잘 설명한다. 아날로그 유행의 핵심은 ‘삶이 가상화되는 듯한 느낌’에 대 한 반감이라고. 그런 유행이 있다는 사실은 물론 인정하지만, 그것을 위력적인 반격으로 봐야 할지는, 나는 모르겠다.
음모론이나 추측 없이, 실명 인터뷰와 공식 기록으로 쓴 CIA의 역사. CIA는 기괴할 정도로 무능한 조직이었다. 미국 대통령들은 그 실상에 경악하고 분노하고 좌절했다. 그 자신이 CIA 국장을 지내기도 했던 아버지 부시는 대통령이 된 뒤 “CIA보다 CNN이 더 낫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저자의 진짜 질문은 ‘문명은 어떻게 발전하 는가’이며, 까마득히 높은 관점에서 답을 풀어간다. 장쾌하달까, 읽는 내내 희한한 흥을 맛봤다. 글도 매우 재미있다.
세계적인 추리소설가 119명이 선배들의 작품 121편을 열성 으로 추천하니, 그저 즐거울 뿐. 문학이란 무엇이고 장르란 무엇인가, 여성 작가들의 이름은 어떻게 지워졌나, 나는 왜 소설가가 되었나, 작가와 작품은 분리해야 하는가와 같은 근사한 질문과 답변이 가득하다. 그 와중에 제프리 디버는 밀레니엄 시리즈를 거의 대놓고 씹는다.
이세돌 9단과 알파고의 대국 이후 ‘특이점’이라는 단어는 한국에서 작은 인터넷 유행어가 됐다. ‘특이점이 온 듯’, ‘특이점이 온 누구누구’ 등의 댓글을 종종 본다. 대충 뜻은 긍정적인 방향의 ‘미쳤다 미쳤어’ 정도인 듯하다.
꼭 10년 전, 레이 커즈와일의 『특이점이 온다』가 국내 번역될 때와 비교해 보면 격세지감이다. 당시만 해도 생소했던 기술적 특이점이라는 개념을 한 줄로 설명하기 위해 출판사는 고심을 거듭했다. 한국어판 부제인 ‘기술이 인간을 초월하는 순간’은 그야말로 절묘한 설명인데, 담당 편집자였던 현 조성웅 유유출판사 대표가 아이디어를 냈다. 원서 부제인 ‘인간이 생물학을 초월할 때(When Humans Transcend Biology)’보다 낫다고 본다.
그런 부연설명 자체가 필요 없을 지금도 이 840쪽짜리 책을 읽어야 할까? 그렇다는 게 내 생각이다. 특이점이라는 개념은 이제 익숙하더라도, 특이점을 둘러싼 논의는 그렇지 않다. 그리고 그 논의에서 가장 극단적인 주장이 이 책에서 상세히 펼쳐진다.
커즈와일의 태도는 너무 낙관적이어서 도리어 심란하다. 이런 식이다. ‘노화와 죽음은 나쁜 거잖아. 기술로 정복해야지. 일단 나는 영양제를 매일 250알씩 먹고 있어. 종교가 죽음을 신성시하는 거야 여태까지 다른 방법이 없었으니까 그랬던 거고. 인공지능이 인간을 지배할 거라고? 우리가 인공지능과 결합해서 포스트휴먼이 되면 되잖아.’
인류가 수백 년 안에 광속을 넘어설 거라거나 우주가 우리의 지능으로 가득 차게 될 거라는 등의 의견은 물론 당치도 않게 들린다. 그러나 신경계 안에서 가상현실을 만드는 기술이라든가, 반대로 나노봇이 이미지와 음파를 조절해 현실세계 자체를 가상현실처럼 바꾸리라는 예상이나, ‘경험파 송신’을 통해 타인의 삶을 문자 그대로 체험할 수 있으리라는 가능성은?
읽다 보면 ‘특이점 논의’에 저절로 참여하게 된다. 저자는 기다렸다는 듯 ‘비판에 대한 반론’이라는 장까지 내놓는다. 그 반론이 기술지상주의의 한계에 갇혀 있기에 책장을 덮은 뒤에도 비판적 독서는 이어진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청춘 3부작에 나오는 등장인물 ‘쥐’는 초월적인 존재인 ‘양’과 결합해 세계를 바꿀 기회를 거부하고 파멸을 택한다. 쥐는 그에 대해 “여름햇살, 바람 냄새, 매미소리, 너와 마시는 맥주와 같은 나약한 것들이 무작정 좋아서”라고 설명한다.
인간과 결합하려는 인공지능은 이에 대해 뭐라고 말할까? 살아서 그 답을 듣고 싶기도 하고, 가능하면 그 순간을 미루고 싶기도 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