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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콜세지에 대한 생각
2022-06-27 17:17:52- 스콜세지 <카지노>와 <뉴욕, 뉴욕>을 (다시) 봤는데, 전자는 정말로 서늘하고, 후자는 매우 쓸쓸하다. 마틴 에이미스가 우리가 어떤 작가(ex)디킨스)를 언급할 때는 언제나 그 작가의 절반만 지시하는 거라고 말한 적 있다. 스콜세지의 작품 절반만. 스콜세지가 1997년 이후에 만든 작품들은 비평적으로나 상업적으로나 재앙이었다. <월가의 늑대> 전까지 20여년간을 하락세를 겪은 것이다. 얼마나 서러웠을까.
- 우리한테 익숙한 스콜세지 <좋은 친구들>, <성난 황소>(혹은 <순수의 시대>), <비열한 거리>, <택시 드라이버>. 이 네 편이 영화사의 정전에 오를 수 있는 영화다. 그런데 그건 사실 소위 뉴할리우드(아메리칸 뉴 시네마, 무비 브랫 세대로 명칭되는) 영화 감독들 전부가 겪었던 일이다. 소서러 : 프리드킨의 재앙(크루징이나 투 다이 포 엘에이, 킬러조 등이 훌륭한 건 제외하고). 지옥의 묵시록 : 코폴라의 재앙(아웃사이더, 2000년대 말에 다시 부활한 작품들은 제외하고). 보그다노비치는 첫 두 편 제외하면 내리막길로. 드 팔마의 불균질한 커리어. 할 애쉬비나는 이른 나이에 죽긴 했지만, 그가 기억되는 방식을 고려하면.
- 클래식 헐리우드 감독이나, 2차 세계 대전 때 도미한 독일 출신 영화감독들은 뉴할리우드처럼 커리어가 불균질하지 않았다. 이스트우드가 최후의 고전 영화 감독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영화 형식에도 있지만, 비교적 균질한 커리어에 있을 것이다. 뉴할리우드는 '첫끗발이 개끗발', '아도친 다음은 폭망이다'라는 시장의 냉혹한 리얼리즘에 박살나고 말았다.
- 그럼에도 스콜세지의 <성난 황소>, <카지노>, <앨리스는 더 이상 그곳에 살지 않는다>, <뉴욕, 뉴욕>은 그의 걸작에 준할만큼, 아니 그보다 더 빼어난 에너지를 포함하고 있다. <카지노>는 뭐랄까, 좀 이상하다. <굿 펠라스>와 많이 비교되지만, 그런 활기가 없고. 훨씬 더 신경증이고 불안에 가득 차 있다. 유대인 갬블러로 나오는 드 니로의 편집증, 이탈리안 갱 조 페시의 폭발하는 폭력과 분노. 시종일관 영화를 보는 우리도 불안할 수밖에 없다. 이들이 어떤 행각을 펼칠지 모르니까. 캐릭터들이 행동하는 데 동기가 부재해있다는 점은 스콜세지 영화에서 제일 두드러진다. 이 인간들은 도대체 중간을 모른다. 변덕은 죽쓰듯 일어나고. 전부 서로가 배신할까, 전전긍한다.
- 완전히 또라이들이 벌이는 잔치다. 스콜세지는 보이스오버가 재즈 보컬처럼 리드미컬하게 밀려오는 <쥘 앤 짐>의 오프닝을 2시간으로 늘린 것이 바로 <좋은 친구들>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절반만 진실이다. 스콜세지는 <쥘 앤 짐>의 비극을 분명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쥘 앤 짐>의 변덕스러운 삼각관계, 지배욕으로 부글거리는 여성과 그녀를 사랑하는 나약한 남성, 둘의 사랑에 휘말리는 플레이보이의 삼각관계는 수시로 관계의 방향을 뒤바꾸면서 그들을 파국으로 밀어넣는다. <카지노>의 삼각관계, <뉴욕, 뉴욕>에서 벌어지는 남녀간의 전쟁.
- <카지노>와 <뉴욕, 뉴욕>에서 이미지는 쉐보레나 포드의 크롬처럼 반짝인다. 드 니로가 연주하는 색소폰은 보석처럼 번쩍이고, 심지어 갱스터 보스가 대화를 하면서 휘두르는 손조차 번쩍거린다. 모든 이미지들이 도금된 것처럼 빛나는데, <택시 드라이버> 초반 장면에서 차창에 비치는 네온사인을 연상케 한다. 스콜세지 이미지는 발광체다. 댄 그레이엄의 형광등처럼. 스콜세지의 화면은 고든 윌리스의 자연주의와 다른 것 같다. <택시 드라이버>나 <비열한 거리>의 밤은 어느 정도는 밤이라기보다는, 검정색이다. 즉 스콜세지는 케네스 앵거의 <스콜피오 라이징>에서 유래된 이미지를 재활용하고 있다. 미국이라는 이미지 그 자체.
- 스콜세지의 빛은 광원을 반사하지 않는다. 스스로 빛나야 한다. <카지노>의 한 장면에서 스콜세지는 강렬한 조명을 뒤에 인위적으로 놓는다. 마치 천사처럼. 타락한 인간들이 순수해지는 길은 죽음밖에 없다는 듯. <뉴욕, 뉴욕>의 화려한 세트도 마찬가지다.
- 그러므로 스콜세지의 남성성(평자들이나 연구자들이 대체로 오해하는)은 가부장제의 규범을 따르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성가족을 고통스러워 한다. 스콜세지에겐 갱스터-공동체를 추앙하는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예컨대, 토드 솔론즈나 토드 헤인즈의 인물처럼, 그들은 정상성에서 벗어나려고 허덕거리는 신경증자다. 종종 파시즘적 폭력 예찬자로 오해받는 슈레이더 영화의 남성들은 규범이나 정상적 남성의 이미지를 현실에서 과잉수행하다가 파괴된다. 그들은 그들이 선택하기를 종용받는 정상적 규범에 담긴 폭력과 도착성을 증명하는 하나의 은유다.
- 저 관점을 채택하면, <뉴욕, 뉴욕>이 뮤지컬 코미디나 재결합 코미디를 소재로 삼고 있는 이유도 설명이 된다. 나는 헐리우드 문법에 많은 사람들이 편견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헐리우드 영화의 남성성이 가부장적이다. 전부 헛소리. 스크루볼 코미디에서 남성은 항상 남성이 아니다. 그들은 성적으로 불완전하다. <왓츠업 덕>에선 라이언 오닐은 거의 무성애자다. 그걸 급진화하면 일레인 메이의 <새로운 잎>이 된다. 혹스나 루비치의 스크루볼 코미디, 오드리 헵번이 나오는 <마이 페어 레이디>, 빌리 와일더의 <아파트 열쇠를 빌려주세요>(와일더 느와르의 여성 캐릭터는 또 어떤가?) 조셉 로지와 핀터의 협업은 또 어떻고?
- 공식 : 무성적 존재->유혹과 우연적 마주침->남성. 헐리우드 영화의 남성성은 엄청나게 다양하고, 복잡한 장치들로 창조된다. 1980년대 젠더 스터디와 결합된 장르 영화 연구의 일부기도 하고.
- <베트남에서 레이건까지>의 로빈 우드가 할리우드의 남성성에서 동성애/동성애 공포의 흔적을 발견하는 방법은 그가 혹스 영화를 '스토아주의'로, 즉 금욕주의로 미봉된 남성성으로 해석한 데서 출발하지 않았을까? 남성성은 회로다. 그건 결코 납작하게 환원될 수는 없다.
- 나는 남성성에 관심이 많다. 내가 쓴 많은 글도 그렇고. 전인권이나 허문영에게 영향을 받았지만. 아무튼 그건 나를 이해하기 위해선 과정이다. <뉴욕, 뉴욕>은 그것을 남녀간의 전쟁으로 확장시킨 영화고. 그 계보에는 라스 폰 트리에의 <멜랑콜리아>(이 영화에서 남성들은 감쪽같이 사라진다, 우울증 3부작에서 남성들을 생각해보라), 폴 토마스 앤더슨의 <팬텀 스레드>(pta는 파월의 <내가 가는 곳은 어디인가?>, 조지 큐커의 <가스등>, 히치콕의 <레베카>를 참조했다). <뉴욕, 뉴욕>에서 여성은 수동적이지 않고, 오히려 남성을 더 작게 만드는 존재다. 미넬리는 드 니로보다도 더 재능 있고, 강력한 존재고. 아들 이름조차 미넬리가 짓는다. 드 니로는 결국 가족도 포기하고, 떠난다.
- 스콜세지 영화의 남성들이 성공하고, 실패하는 그 모든 과정에는 앞서 말한 형광등 같은 번쩍거리는 이미지와 정상규범에서 탈출하고자 하는(전후 미국 소설이 만든 어떤 남성들) 남성 형상이 연금술적으로 결합한다. 성공을 향한 미치광이같은 욕망과 사랑받지 못하는 두려움으로 전전긍긍하는. 스콜세지는 절대로 그걸 옹호하지도 않고, 연민에 빠지지도 않는다. 물론 스콜세지에게는 과거를 향한 노스탤지어가 있다.
- 이 계보의 첨단에는 <장미의 전쟁>이 있다. PTA가 언급한. 펭귄맨 조니 드 비토가 만든 걸작. 여기서 여자와 남자는 진짜 서로를 증오한다. 사랑도 아니고 증오. 물리적 폭력은 물론, 테러, 배신을 감행한다. 남은 것은 무엇인가? 죽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