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금, 그믐
생각나면 쓰는 부주의한 기록 / https://blog.naver.com/gibbs0929“I sent Hilary Craven off on a journey to a destination unknown, but it seems to me that her journey’s end is the usual one after all”
concludes Jessop at the end of the book, in an allusion to Shakespeare.
In Twelfth Night, Feste the clown sings “Journeys end in lovers meeting” – so you can already guess that it has a happy ending.
출처 : https://therealchrisparkle.com/2020/09/22/the-agatha-christie-challenge-destination-unknown-1954/
<장례식을 마치고> 이후 두 번째로 읽는 애거서 크리스티 추리소설인데, 지금까지 봤던 여느 스파이-추리 장르의 영화보다 섹시하다. <장례식을 마치고>, 그리고 <목적지 불명> 모두 사랑은 어슴프레하게만, 그것도 끝에가서야 슬그머니 보여준다. 오타쿠 몰이법을 제대로 아는 작가 같다. 책 끝에 미끼를 매달아 영원히 영원히 책을 좇게 만드는 무시무시한 전법. 뻔하지만 효과적인 정공법이다.
뱉은 말은 주워 닮을 수 없다는 말이 이토록 무섭고 로맨틱하게 들릴 수 있도록 만드는 책이 있을까. 내가 만든 소리가 파동이 되어 영원히 구천을 헤맨다. 오배송 된 소리는 영원히 한을 풀지 못한 귀신처럼 지상을 떠돌면서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의 귀로 가서 택배 상자처럼 활짝 펼쳐진다. 메세지를 전한다.


보고싶은대로만 보는 눈과 마음에 관한 짧은 영화. 14분 남짓 되는 러닝타임 내내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객관성은 내가 나를 탈출 했을 때만 생기는 힘으로, 거의 모든 비극이 객관성의 결여에서 시작되는 것 같다. 나의 영혼은 내 몸에 담겨있을 때만 나의 것인데 그럼 나의 객관성은 어떻게 획득해야할까? 정답은 대화인데 우리는 대화를 제외한 모든 방법을 시도한 뒤에 만싱창이가 되어 포기한다. 오늘부터 내 목표는 너한테 참 완벽한 사람이네, 라는 감탄사에 대한 응답으로 너도 그랬어, 라는 말을 듣지 않기.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아.
애길은 그해 이렇게 말하는 자신의 목소리를 분명하게 들었다. 쾰른에서도 오랫동안.
다들 그렇게 살아, 라는 암송은 좌절을 평범으로 만든다. 다들 좌절하며 산다고 말하며 대상을 그 자리에 주저앉힌다. 암송이 혼잣말로 바뀌면 영원히 빠져나올 수 없게 된다. 애길은 성당을 지날 때마다 암송이 들려와 귀를 틀어막는다. 나는 어떤 암송 앞에 가장 유약해지나 생각해본다. 의외로, 나에게 들려오는 ‘다들 그렇게 살아‘라는 암송은 내가 이미 빠져나온 자리에서 들려온다. 다들 월급 받고 살아. 다들 회사에서 소속감을 느끼며 살아. 너는 왜 다른 길을 선택하고 그러니. 2년 전에 창업을 하고서도 친척들한테는 말 한 마디 하지 않았다. 다행히 나의 암송은 내 안에서만 들려온다. 그정도는 음악과 영화, 책으로 틀어막을 수 없다.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라는 암송의 힘이 더 세다.
물에 빠져 익사하면 인간이고 생존하면 마녀다. 자유 낙하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 있다면 인간이고, 그렇지 않다면 봇(bot)이다. 남성은 다양성 목적으로 채용하지만 기괴할 정도로 백인만 있는 레코딩 회사. 작사를 하고 페미니스트인 라라는 본인이 남자친구의 의뢰로 만들어진 여성형 로봇이라는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다. '너를 다시 잃기 싫어서' 로봇으로 만들었다는 남자 친구의 말에 반항하기 위해 라라는 자유 낙하한다. 가상 현실에 갇힌 스텝포드 와이프의 탈출기부터 자유 낙하하는 여성까지. 우리는 많은 길을 왔지만, 이제 증명을 위해 바둥거리는 대상을 바꿔야 할 때가 왔다. 지배 우위에 서려는 존재에게 증명을 요구해야한다. 추락 뒤 흘러나오는 것이 피인지, 빨갛게 염색한 모터 오일인지 혼란스러워할 대상은 우리가 아니다 .


3월 생. 겨울도 봄도 아닌 계절의 이음다리에 태어난 3월 생의 자아 같았던 시집을 끝냈다. 새순이 씨앗 껍질과 물에 젖은 흙을 밀어내고 나오기 직전의 어려움, 새카만 흙 속 으로 돌아가고 싶은 충동과 눈부신 빛으로만 채워진 바깥으로 향하고 싶은 분노어린 열망 같은 글이 서른 한 편 실려 있다. 같은 달에 태어난 사람들은 무언가 공유하고 있다고 믿는다. 계절적 특성이든, 아니면 저 먼 밤하늘의 별자리에 실린 미지의 신비한 힘이든. 무언가가 우리 사이를 이어주고 있다. 우울하지만 음습하길 선택하지 않은 3월생을 위하여!


침묵의 무엇이 ‘흰’가? 마디마디가 굳은 손이 흴까, 아니면 아무것도 채워지지 않은 침묵이 흰가. 그것도 아니면 길었던 하루가 끝나고 우스갯소리처럼 ‘하얗게 불태운’ 내가 흰 것일까?
너희가 사랑을 알아? 사랑에 빠진 나를 그렇게 잘 알아? 그럴듯하게 어른스러운 훈수를 벗어나 말도 안 되는 선택을 일삼는 어린 사랑의 풋풋함은 지구를 사는 99%의 우리에게는 순도 99%의 판타지다. 그래서 하늘에서는 핑크색 UFO가 내려오고 내 마음을 사로잡은 소녀는 형광 초록색으로 빛난다. 내 심장은 사랑으로 요동치는 동안 아마 너네는 답답해서 가슴이 터져버리겠지만, 어쩔! 나는 사랑으로 모든 걸 이겨낼테야.


혹시 졸더라도, 아님 골아떨어지더라도 핸드폰 진동 소리를 듣고 깨길 바라는 마음. 베개 대신 쓰는 솜인형 보다는,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밤새 귀에 울리는게 불편해서 발치로 치워버린 메밀 베개가 핸드폰 진동에 더 부산스럽게 울릴 것 같아서 다시 머리께로 끌어올리던 사뭇 비장한 마음을 기억한다. 그렇게 용을 써도 결국 새벽 2시가 지나면 얼만큼 진동이 울리든 잠이 깊게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내가 답하지 못한 메세지가 있으면 아쉽고도 뿌듯해고, 내가 봰 답장이 마지막인 날에는 왠지 안심 되면서도 서운했다. 사람 마음이 간사하다는 것을 그때 깊게 이해했다. 어떤 상황도 나를 100퍼센트 만족 시켜줄 수 없었으리라.
그렇게 밤을 샐 각오를 한 만큼 좋아했던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빨리 나를 떠났다. 이제와서 돌아보면 그 나름대로 긴 시간 내 옆에서 버텼지만, 그 시간에 혼자 우두커니 남겨진 내가 느끼기에는 우리가 나눈 얘기들은 다 형편없이 짧거나 무의미했고 나는 그 무가치한 것들에 마음을 다 던져버린 바보 같았다. 그런 찌꺼기 같은 우울함은 일주일 정도 울다 잠들면 눈물에 녹아 사라졌다. 그 일곱 번의 밤동안 나는 상대를 저주하다가, 그를 욕하는 나를 욕하다가 이내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중노동을 반복했다.
그리고 오랜만에 나를 좋아하는 상대가 나타났을 때, 나는 그 사람의 문자에 답장하지 않았다. 그 사람의 무례함과 우악스러움을 알기도 전부터 내 안의 무언가가 내 답장을 가로막았다. 나와 연락을 그친 사람들도 이 비슷한 과정을 겪었을까? 갑자기 몸이 차다.
루이지니아의 악어 투어 가이드와 결혼한 신비한 팝 스터 라나 델 레이(Lana Del Rey)의 가장 유명한 히트 곡으로는 아마 영화 <위대한 개츠비>의 사운드 트랙인 ‘Young and Beautiful'을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가사 중에 이런 청원이 등장한다.
Dear Lord, when I get to Heaven
Please let me bring my man
When he comes, tell me that you'll let him in
Father, tell me if you can
주여, 제가 천국에 갈 때 (*천국에 갈 수 있다는 당당함이 좋다)
제 남자도 데려가게 해주세요
그가 온다면, 그도 들여보낼거라고
아버지, 그럴 수 있다고 해주세요
디킨슨의 시 ‘그런 상실을..‘에 담긴, 연인을 저승으로 데려간 하나님을 향한 분노와 라나 델 레이의 이 노래에 담긴 소유욕이 그리는 대비감이 좋다. 전자도 후자도 연인을 마치 내 소유물이자 재산처럼 대하고 있다는 점도 좋다. 사랑에 눈 먼 사람만 내뿜을 수 있는 오만한 소유권이다.
다시 라나 델 레이의 ‘Young and Beautiful‘로 돌아가서. 내가 죽을 때 나의 연인도 함께 데려가달라는 말은 어떻게 실행에 옮길 수 있을까. 먼 옛날의 순장 풍습을 되살려야할까. 그가 거부한다면? 아니 혹시, 그가 디킨슨의 시를 외우며 나를 앗아간 하나님 아버지를 저주한다면 순장 청원 정도는 물려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