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금, 그믐
생각나면 쓰는 부주의한 기록 / https://blog.naver.com/gibbs0929팀버튼 감독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감독이 후속편을 기대하지 않아서인지,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물론, 그 후작인 ‘거울 나라의 앨리스’ 요소도 함께 품고있다. 타르트를 훔쳐 먹은 하인에게 불 같이 화를 내는 하트의 여왕은 ‘이상한 나라’출신이 맞지만, 여왕의 반려동물(?)인 재버워키와 밴더스내치, 그리고 접접새는 모두 ‘이상한 나라’가 아닌 ‘거울 나라’ 출신이다.
아무튼, 중요한 건 앨리스가 보팔 검으로 재버워키의 목을 치는 영화의 후반부. ‘보르고보들이 우울침해하고 집떠온 래스들이 꺼억꺼억꺽 우는’ 어둑한 회색 하늘을 배경으로 옅은 긴 금발 곱슬 머리를 휘날리는 앨리스가 보팔 검을 꼬옥 쥐고서 생각한다. “불가능한 일을 생각해.” 여섯가지 불가능한 일을 외우면서 재버워키의 무지막지한 공격을 날렵하게 피하면서 앨리스는 이상한 나라의 모두가 바라던 영웅이 된다. 불가능함을 믿는 건 빅토리아 시대의 사회 규칙 속에 잃어버렸던 ‘대단함(muchness)'을 되찾는 마지막 관문이었던 셈이다. 마지막 여섯 번째 불가능한 일.“I slay the Jabberwocky. (난 재버워키를 쓰러트려.)"를 외고 나서, 정말로 검술 훈련 한 번 받지 않은 앨리스는 보팔 검으로 재버워키의 기다란 목을 단 칼에 잘라버린다. ‘이상한 나라’에 어른이 되어 돌아온 앨리스가 ‘거울 나라’의 붉은 여왕의 노하우로 커다란 시련을 이겨내는, 앨리스 시리즈 열렬한 팬인 나에게는 너무나 기념비적인 장면이었다.
1865년 첫 출간 된 루이스 캐럴의 앨리스 시리즈가 약 150년 이상 지난 지금도 어린아이는 물론 어른에게도 꾸준히 사랑 받는 이유는 독자인 우리 모두가 시리즈 기저에 깔려있는 불가능함의 유쾌함에 끌리기 때문일 것이다. 말장난과 상상력으로 중무장한 이 세계에서 현실세계에 규칙에 얽매여서는 절대 앞으로 나아갈 수도, 누군가와 소통할 수도 없다. 이 허무맹랑하고 어이없어 웃음이 터져나오는 상황에 물 흐르듯이 적응하는 수 밖에.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불가능해!’ 같은 말을 해봤자 할리우드 공포영화 속, 영화 시작 30분 안에 죽는 캐릭터처럼 흐름에서 밀려나 도태 될 뿐이다.
앨리스 시리즈는 작품 속 앨리스와 인문들이 이 불가능함에 순응하는 태도를 현실로 가져가라고 힘껏 조언한다. 엉뚱하고 허무맹랑해 보일지라도 한 번 믿어보라고. 한 번쯤은 의구심을 버리고 ‘이상한 나라’로 향하는 토끼굴 속으로 몸을 던져보라고. 다섯살, 혹은 정확하게 일곱살 하고도 반살인 앨리스가 아닐지라도, 불가능함이라는 가능성으로 가득한 그 ‘이상한 나라’는 우리를 반겨줄거라고.
무라카미 하루키는 이 ‘잡문집‘에서 소설 내지는 문학을 일종의 ‘백마법‘에 자주 비유합니다. 마법 같은 힘으로 사람을 돕는다는 의미로 받아들였습니다. 좀 더 풀어 쓰면, ‘현실의 삶에 악영향을 미치지 않는 정도로의 환상으로의 초대장‘ 같은 느낌 같아요. 하루키의 표현대로 우리는 책장을 넘기면서 이세계로 입장하고, 그 세계에서 만큼은 물리적 충격에 완전 면역이 된 상태로 비현실적인 경험을 누리죠. 사이비 교단에 침투하여 비밀을 캐내거나, 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들이 세운 문명을 헤맨다거나, 아니면 감옥이나 갱단 중 하나에 무조건 소속 되어야 할 것 같은 상대와 사랑에 빠진다거나... 모험의 종류와 상관 없이 책을 다 읽고 나면 내가 누리고 싶은 삶의 종류를 생각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그 힘으로 현실을 헤쳐나간다면, 백마법의 힘이 제대로 먹혀든거겠죠.
소설이 기본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사람들의 영혼을 안전한 (적어도 위험하지 않은) 장소로 데려가 자연스럽게 연착륙하는 일입니다. (p.418)
이 백마법의 힘을, 물질적인 세계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쉽게 간과하는 것 같습니다. 소설보단 자기계발서가 나의 미래에 더 도움이 된다는 편견, 그리고 앉아서 팔랑팔랑 책장을 넘기는 시간은 너무 길고 지루할 것 같다는 편견이 아직 대중적이라고 생각해요. 이 대중적인 편견들이 일명 ‘독서붐‘을 책 읽는 사람들은 체감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고요. 다들 책에서 물질적인 무언가를 얻어내지 못하면 아쉬워하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책을 금광으로 보는거죠. 금을 캐낼 수 있는 책이 아니라면 그 가치가 없다고 판단하는 것 같아요.
단순한 취미로 부업을 시작하라는 메세지를 보내는 사회에서 어쩌면 당연한 모습일지도 몰라요. 심지어 책을 읽는 사람에게 독서 계정을 만들어서 책을 협찬 받고 콘텐츠를 생산하라는 메세지도 자주 보이니까요. 투자한 시간만큼의 물질적인 가치를 생산해야한다는 무언의 압박이 대한민국 사회에서는 산소만큼 자연스럽죠. 아무것도 하지 앟을 때 채워지는 에너지의 중요성이 조금 더 알려져야 할 것 같아요. 현실과 잠시 단절 되고 안전하게 누리는 이세계 속 모험에서 우리는 현실에 치이느라 잊었던 전통적인 가치(사랑, 우정, 배려 등)을 새삼스레 되새길 수 있고 소중히 여길 기회를 얻을 수 있으니까요.
국가권력은 헌법과 법에 의해 통치되고 통제 되고 있는가? 우리는 여전히 한 사람의 양심과 그 사람의 ‘영웅됨’에 나라의 운명을 맡기고 있지 않은가? 그 사람이 소위 말하는 ‘정의의 편’을 골랐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시스템이 붕괴 될 수도 있는 도박장 같은 정치를 펼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국가라는 시스템의 생존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정의의 편’을 고를 수 밖에 없는 양심을 배양해나가야겠다. 새로 이 땅에 태어나는 생명들과 이 땅에 이미 존재하고 있던 낡은 영혼들이 공유할 수 있는 법적 공감대를 형성해야 한다. 그리고 법이 이를 빠르게 반영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의 법은 국민의 법적 감수성을 제대로 따라오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나이 많은 기득권자들이 권려을 붙잡고 있는 까닭도 있겠지만, 그 늙은 기득권의 늙은 정신이 젊은 ‘기득권 워너비’들에게 그대로 전이 되는 문제도 있다. 사회가 안정 되지 않으면 유약한 개인은 권력과 돈의 유혹에 쉽게 넘어가버린다. 2030 중 절반은 ‘극우’인 것 같다는 불안한 사회양상이 펼쳐지고 있다. 반대를 위한 반대가 문화로 굳어지기 전에 바로 잡아야한다는 법적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기는하다.
약자가 강자의 혹은 일반 시민의 주머니를 약탈하고 있지 않다, 는 너무 당연한 사실을 우리 모두가 공유해야 한다. 누군가의 권리신장은 나의 권리 약화를 의미하지 않는다. 만약 그러한 경우에서 나의 권리가 제한된다고 느낀다면, 실상 제한된 것은 나의 권리가 아니라 나의 특권 즉, 내가 나도 모르게 사회 시스템에 기대어 불합리하게 취해왔을 이익일 것이다. 교과서 속의 배려와 나눔이 학교를 졸업하고 난 뒤에도 모두의 머리와 양심에 남아있을 수 있는 세계가 되길 바라게 된다.
그 말이 나에게는 무한한 것이 된다. 그 말로 나는 한없이 치유 받았다. (p.14)
우리의 삶은 우리가 인지하는대로 이루어진다. 물레 위에 올린 흙이라고 생각하면 편하겠다. 물레는 (아주 자주) 나의 의도와는 별개로 끊임없이 돌고있고, 물레 위의 흙은 유연하고 연약하게 흔들린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나마 흙이 내가 원하는 바 대로 빚어지도록 온정신을 집중하여 정성스레 성형하는 것 뿐. 물레에게 그만 돌라고 빌 수도 없고, 흙에게 알아서 바로 서라고 소리 지르는 건 물레에게 간청하는 것보다 더 소용 없다. 흙이 되려 ‘제발 잘 해봐!‘라며 나를 기다리고 있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인터넷의 다정한 목소리들은 자극적인 뉴스에 상처 입고 헐떡이는 사람들을 돌보기 위해 이런 말을 자주한다. ‘인터넷을 끄고 본인이 통제할 수 있는 것들에 집중하세요.‘ 심호흡, 그리고 방 청소 정도.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세상은 당장 내 눈 앞의 내 방 뿐. 경계 안의 공간까지 붑정적인 언어를 끌어들일 수는 없으니 그럴 때는 꼭 좋아하는 크리에이터의 브이로그를 크게 틀어두고 몸을 움직인다. 브이로그 속 언어는, 미학적 아름다움을 위해서라도, 단정하다. 방치해뒀던 옷더미를 치우고, 쌓인 빨랫감을 정리하고. 싱크대에 숨죽이고 누워있던 접시를 닦고. 반짝이는 집을 보며 ‘진작 움직일걸!‘하고 뿌듯한 한탄을 한다. 그런 언어들이 내 물레 위의 흙을 단정히 바로 잡아준다.
나 혼자서는 어쩔 수 없는 엄청나게 큰 물레와 엄청나게 축축하고 유연해서 파도처럼 나를 덮칠지도 모르는 흙. 대한민국이라는 사회가, 그리고 나의 세계가 물레에서 춤을 춘다. 어떤 언어로 우리의 세계를 바로잡을 수 있을까. 그 흙에 손대기 전에 내 작은 물레 위 내 작은 흙부터 손보고 있다. 출렁출렁 춤추는 거대한 흙더미 앞에 가져가보이고 싶다. 나는 이런 화병을 만들었어요. 우리, 이걸로는 뭘 만들 수 있을까요?
나는 일정에 쫓기는 여행은 도무지 여행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계획한 일정을 다 마무리하면 당연히 뿌듯한 맘이 들지만, 여행의 매력 중 하나는 예상치 못한 크고작은 풍파에 무방비로 노출 되어도 괜찮다는 마음가짐 아닐까? 매사에 대비하는 긴장감은 집에 두고왔다.
한 번은 다른 사람들이 왜 그렇게 촘촘한 일정에 목숨을 거는지 고민해봤다. 아마, 여행이 특별한 이벤트라 그럴지도 모르겠다. 한 달 혹은 1년 그 이상의 시간을 여행만 바라보고 달려왔다면 학수고대한 그 시간을 알차게 보내고 싶은 맘도 이해한다. 하지만, 회사에서 돈 받고 하는 일도 닥달하고 전전긍긍하는 태도로 임하면 다 망가지고 꼬여버리기 일수인데 내 돈 내고 가는 여행은 좀 더 부드럽고 섬세한 맘으로 대해야하지 않을까? 조금 더 느슨한 태도로 임하면 계획을 모두 따라야한다는 부담도 덜하고 보다 자유로워지지 않을까? 늦잠도 잘 수 있고 계획한 관광지 대신 호텔 앞 골목과 공원을 산책할 수도 있고. 회사에서 발휘 못한 자유의지를 차고 넘치도록 발휘하는 시간이 여행이라고 생각한다.
김선아 작가의 말대로 여행은 놀고 먹는 즐거움과 '여긴 뭘까?'하는 호기심만 챙겨가도 충분하다. 그러니까 한 계절 내내 기다리던 휴가지에서도, 잠깐 숨돌리기 위해 떠난 호캉스에서도 우리 모두 이 시간의 효율성을 쥐어짜내고말리란 각오는 내려놓고 눈을 감아보자. 들숨 날숨을 반복하며 내 안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자. 위장에서 무슨 음식을 원하고있는지... 어느 카페의 커피가 땡기는지...
<여기가 좋은 이유>에서 소개 되는 공간은 주거 이외의 용도로 사용 되는 공간이지만, 85페이지의 이 문장은 우리가 우리의 집에 정체성을 부여하는 방식과 거의 일치하는 것 같다. 우리는 알게모르게 우리의 생활공간을 브랜딩하고 있는 것 아닐까?
대한민국의 집은 다 거기서 거기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아파트, 아니면 아파트형 주거 공간에 살 가능성이 가장 높다. 추가 된 팬트리 여부 정도의 차이를 빼고나면 다들 엇비슷한 레이아웃의 집에 살고 있다. 그래도 까보면 사람 사는 모습은 다 다르다. 너의 주방과 나의 주방이, 옆 집의 침실과 나의 침실은 다 다른 생활 습관을 담고있다. 벽지, 바닥재, 침구와 가구, 그리고 갖가지 잡동사니와 구분가지 않는 소품까지. 우리는 각자 나름의 방식대로 공간을 구획하고 거기에 이름을 붙이고 사용 될 방식을 결정한다. 브랜딩이다.
나는 나의 집이 아주 어둑하고 보송한 공간이길 바란다. 큰 불은 켜지 않고 군데군데 심어 놓은 듯한 조명을 등불처럼 켜고 더듬거리면서 살고싶다. 발을 헛딛어 고꾸라지면 어디에서나 푹신한 곳에 코 박고 넘어질 수 있음 좋겠다. 나의 집은 안전지대이길 바란다. 푹신함의 늪. 책과 영화, 내가 찍은 사진과 온라인에서 긁어모은 음악이 끊이지 않고 오븐에 구워 한뜸 식히고 있는 케이크 시트의 냄새가 나면 좋겠다. 나의 집이 이런 모습이길 바란다면, 나의 추구미도 결국 이런 모습이지 않을까? 집의 브랜딩이 곧 나의 브랜딩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의식적으로 당분을, 그리고 나아가서는 '간이 너무 센' 음식을 줄이려는 행동은 분명 효과가 있다. 인간은 습관의 동물이라 기름지고 달고 짠 음식을 반복 섭취하면 나중엔 '밋밋하지 않나?'라는 허무맹랑한 생각을 할 정도로 그 자극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만, 마찬가지로 의식적으로 달고 짠 음식을 피하다보면 그 진짜 밋밋함에 익숙해질 수 있다. 다이어트를 목적으로 커피에서 시럽을 빼는 것이 일상인 사람들이라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시럽을 뺀 말차 라떼가 얼마나 텁텁하고, 또 말차 향이 진한지 말이다.
철부지 어린애 처럼 자라는 어른들이 많아지고 있는 21세기에서 흐름을 거스르고 밋밋한 저자극 생활 추구자로 자라기는 정말 어렵다. 그야말로 정신줄을 꽉 붙잡고 즉각 자극 요소로 가득한 세계에서 눈을 돌리고 느릿함의 세계로 뚜벅뚜벅 내 의지에 의지해서 (말이 웃기지만) 걸어가야한다. 스 크린 타임을 줄이고 책을 읽어야하고, chat gpt 같은 인공지능이 아닌 내 지능을 사용해서 글을 써야 하고, 배달 라이더를 기다리는 대신 소박하게 나마 내 밥상을 차리는 연습을 해야한다.
남녀평등 문제를 납작하게 ‘성별 갈등‘이라는 언어로 찍어누르는 시대를 살면서 가장 많이 마주하는 언어는 평등의 언어 같다. 성별 간 평등은 실생활에서 어떻게 실천 될 수 있을까?라는 주제로 시작 되는 인터넷 토론 혹은 인터넷 싸움판은 오늘도 아마 못해도 수 백 건 이상은 될 것이다. 그런 싸움판에서 유의미한, 즉 싸움판에 참여한 모두가 더 행복한 내일을 추구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될 수 있는, 결론값이 나올 가능성은 희미하다. 평등을 ‘모든 상황에서 동일한 결론값을 갖도록 하는 것‘이라는 억지 부리는 목소리가 너무 크고 많기 때문이다.
99페이지의 이 문장은 그래서 의미 있다. ‘국가‘라는 하나의 거대한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국가를 이루는 국민 개개인이 평등하게 시스템 구성에 참여할 수 있어야한다. 성별, 나이, 재산 등을 이유로 누군가의 입김이 더 세게 작용하여 타인이 시스템을 누릴 권리를 침해해서는 안 된다. 이 논리는 비단 성별을 넘어서 다양한 방식으로 국민을 카테고리화하는 수많은 이름표들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
<우리에게는 헌법이 있다>를 선택한 최초의 이유는 분노였다. 자칭 강경 우파, 타칭 인셀(*그네들을 우파라고 부르는 것은 우파의 수치라고 생각한다)이 헌법의 권위를 무시하고 본인의 권위와 권력을 앞세와 제왕적 정치를 펼치는 윤석열을 가엾게, 혹은 위대하게 여기는 행태를 보자니 화가났다. 샤워할 때도, 밥 먹을 때도 심지어는 침대에 누워서도 내 머리에서는 인셀들과의 토론-말 다툼-싸움판 시뮬레이션이 재생 되었고, 그 시뮤레이션에서 이기고 싶었다. 헌법을 무시하지말라!고 외치고 싶은데 내가 헌법이 뭔지 설명을 할 수 없어서 분한 마음에 읽기 시작했다.
지금은 시뻘건 분노보다는 뭔가 청명한 감정이 든다. 아수라장에서 벗어날 숨구멍을 발견하는 기쁨으로 책장을 넘기고 있다. 우리는 나라를 잃었던 순간 부터 ‘국가‘라는 하나의 시스템을 제대로 운영하기 위해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왔고 지금도 마찬가지구나. 점점 나아질 수 있는 가능성은 내가 행동해야만 생기는거구나. 어떻게 다른 사람들에게 나와 함께하자고 설득할 수 있을까. 그런 평화롭고 생동력 있는 생각을 할 수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쓴 <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을 읽고 있지만, 번역과 나의 무지와 사전의 중요성, 기타 등등 하루키를 제외한 모든 것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어서 남기는 짧은 글.
해후(邂逅)는 '오랫동안 헤어졌다가 뜻밖에 다시 만남'이라는 의미다. 이 때 사용한 해(邂)는 '만날 해'이다. 이 단어를 몰랐던 나는 앞선 문장에서 '서서히 물이 스며드는 느낌'을 이야기해서 그런지 어쩐건지, 자연스레 삼수 변을 쓰는 해(海)를 떠올렸다. 그래서 '해후'가 정확히 어떤 단어인지는 모르지만 앞 문장과 어우러지는 이미지를 가졌겠거니 여겼다. 그래서 참 시적인 문장 구성이구나, 매끄럽게 읽히고 삼키는 맛이 있구나, 하루키는 이런 문장을 쓰는구나, 식으로 생각을 이어가다가 탁! 하고 '이건 번역자가 옮긴 글이지 하루키만의 문장이 아니었지!'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키와 번역가의 공동 노력이 포함 된 문장이라고 인지하고 나서야 '해후'의 정체를 찾아볼 맘이 들었다. 번역가의 정체가 내 맘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 정확히 알아챌 수는 없지만 작가의 문장이라면 '내가 모르는 무언가 영적인 프로세스를 거쳐 만들어짐'의 느낌이고, 번역가의 문장은 '고뇌와 고찰, 그리고 사전으로 이루어진 기술력의 집합체'라는 느낌이라 그런가. '해후'를 모르면 그 노력을 무시하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작가의 글에서 모르는 단어가 나왔을 때 찾아보지 않는단 말은 아닌데, 아무튼간에.)
글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하루키를 알고 싶어서 하루키의 책을 읽지만 결국 내가 읽고 있는 문장은 하루키와 번역가의 문장이라는 점, 사전이 없었다면 내가 하루키, 혹은 하루키와 번역가의 문장을 그냥 내 취향 섞인 맛대로만 읽고 고찰하지 않았을거라는 점 등등.. 온갖 생각이 들었고, 이걸 글로 써두지 않으면 내내 이 거대한 실타래를 갖고 놀다 책은 한 자도 더 들여다보지 못할 것만 같았다.
24년 11월 즈음 그믐을 시작했는데, 두 달 내내 거의 매일 들락거리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나는 어딘가에 내 혼란을 풀어놔야한다. 혼탁함은 여기에 풀어버리고 나는 또 쌩쌩한 마음과 눈으로 책을 읽어한다. 나는 또 하루키와 번역가의 책을 읽으러가야지.
정당화될 수 없는, 자의적인, 불평등
표현을 세 도막 내어서 반복해서 읽어봤다.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가진 개인이 모여 만든 사회 시스템 안에서 재화를 나눌 때 그 누구도 정당하지 않은 처우를 받지 않도록 하는 것이 정말 정치의 목적이라면, 억울한 사람이 너무 많지 않나.
안 좋은 기억이 더 오래가기 마련이라지만, 나는 정치가 엉뚱한 사람의 손에 들린 칼이 되어 죄 없는 사람들의 머리털과 (가끔은 목숨줄을) 댕겅 끊어가는 꼴을 너무 많이 봤다. 명예를 실추 시키고 목숨을 앗아가는 정치를 너무 오래 목격했다. 어떤 대통령은 죽음 이후에도 조롱 당하고, 어떤 대통령은 국민을 총으로 쏴죽여도 자연사하는 사치를 누렸다. 정치의 목적인 정의는 사라지고 피와 똥을 서로에게 던지는 더러운 여론전의 시대에서 살고 있는 것 같다.
그래도 <우리에게는 헌법이 있다>를 읽으면서 어딘가 숨통이 트이는 건, 내 안에 내제 되어있는 권력의 언어로 정의 된 헌법과 정치에게 본래의 옷을 입혀주는 느낌이 들기 때문인 것 같다. 본디 우리가 추구하는 정치, 그리고 그 정신이 담긴 헌법의 형태와 역사는 이렇다- 라는 가르침을 받고 싶어서 뚜벅뚜벅 나아가듯이 페이지를 넘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