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금, 그믐
생각나면 쓰는 부주의한 기록 / https://blog.naver.com/gibbs0929그러니까 무작정 문장을 수집하는 일 (*핀터레스트 필사 보드를 만들어놓고 한 번도 실천하지 않거나 그믐에 수집한 문장 중 다수를 잃어버리는 종류의 행동)을 그만둬야하지 않을까-하는 내면의 깨달음이 생겨서 적어두는 문장.
필사나 문장수집을 그만두는 것이 아니라 조금 더 의식적으로. 비단 이것 말고도 24시간을 채우는 수많은 테스크 블록을 하나씩...
하지만 눈에 보이는 문장을 타자기로 바로 토도도독 입력해서 디지털 전산망에 남기는 것 만큼 재미있는 일이 없다.
여성들의 행동을 교정(너무 거창하고 권위적인 말인가 싶지만)하기 위해서 여성 모두가 뇌에 새겨야하는 문장은 ‘나는 아무것도 빚지지 않았다.‘가 아닐까 싶다. 설령 타인이 나에게 a를 요구했다고 하더라도 특수한 계약 관계에 놓여있지 않은 이상 나에게 a를 수행할 이유가 없음을 인지해야한다. 우리가 흔히 헷갈려하는 배려와 ‘호구잡히기‘의 차이는 아마 여기서 온다.
환상소유는 남성이 여성에게 당연하게 요구하는 가사노동과 꾸밈에서 볼 수 있지만, 동시에 여성 내면에서 발견되는 너무나 당연한 베풂의 자세에서도 볼 수 있다. 베푸는 행위를 멈추라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오로지 타인을 위해 나를 연소할 필요도 없음을 잊지말아야 한다. 이건 여성 공동체의 의무이면서 동시에 우리 사회의 의무이기도하다. 우리의 교육과 문화에 이 정신이 공유 되어야한다.
최근 방영 되고 있는 ‘나는솔로‘ 여성 출연자 중 한 명이 본인이 채식주의자임을 밝혔다. 다음 주 방영분의 예고편에서 그에게 관심을 보였던 남성 출연자가 ‘직접 겪어봐야 알 수 있잖아요.‘ 같은 뉘앙스의 말을 남겼다. 남성 출연자의 직업이 전문 체육인이라는 이유로 프로그램 mc는 ‘(채식주의자와 체육인이라니) 서로 상반 되네요.‘라는 뉘앙스의 코멘트를 달았다.
우선 나는 이 방송으로 대다수의 사람이 채식주의자는 소식을 할 것이다, 혹은 채식은 신체를 단련해야하는 체육인에게는 영양학적으로 부족할 수 있다, 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단 인상을 받았다. 이는 사실이 아니며 그냥 내 판단, 더 비약적으로 말하면 내 상상일 수 있다. 상상을 더 발전시키자면 사실 이런 의미일 수도 있다. 채식하는 사람은 체육인이 갖고 있는 이미지와 상반된 이미지, 에너지가 넘치거나 튼튼한 근육을 갖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어 두 사람은 서로 상반 된다. 아무튼간에 채식주의자가 ‘여리여리한‘ 이미지를 갖고 있다는 인상은 부정할 수 없다.
채식주의자들이 ‘고기가 잔인하게 만들어져서 육식을 반대한다‘라는 대중적인 인식도 아마 같은 선에서 시작 된 상상 같다. 그들은 유약하고 감상적이기 때문에 육식을 할 수 없는 결핍을 갖고있기 때문에 식탁에서 육류와 더 나아가 유제품을 박탈 당한 것이라는 상상. 하지만 오늘 아침으로 베이컨과 달걀을 먹은 사람도 베이컨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라이브 방송으로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타인의, 혹은 다른 생명체의 죽음과 나의 죽음을 연결 지을 능력이 있다. 채식주의자가 된다고해서, 잡식 혹은 육식을 선택했다고 해서 그 능력이 마법처럼 사라지진 않는다. 우리는 가끔 타자화하는 일에 바빠 내가 나를 폄하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는다.
오늘 저녁 약속이 있는데, 가서 무슨 메뉴를 먹게 될지 모르겠다. 나는 아직 잡식을 한다. 그리고 귀가하고나서는 ‘나는솔로:사랑은 계속 된다‘를 시청할 예정이다. 이 방송에도 전문 체육인이 나오는데, 나는... 전문 체육인 관상을 좋아하는 것 같다.
옥스포드 사전에 따르면 웰빙(wellbeing)의 의미는"the state of being comfortable, healthy, or happy." 즉, "편안, 건강, 혹은 행복한 상태를 누리는 것"이다. 내가 이해하기 쉽도록 문장을 바꿔 쓰자면, 내가 편안하고 나의 몸이 건강한 상태를 유지하고 나의 뇌가 기쁨을 느낀다면 웰빙이다.
나는 우울할 때는 그냥 먹방 브이로그(라고하지만 과식, 혹은 폭식에 가까운 양의 음식을 섭취하는 영상)을 보고, 좀 '사람답게' 살고 싶단 생각이 들 때는 유튜브 Mina Rome 채널 아무 영상이나 재생한다. 애초에 시작점이 다르기도하지만 후자의 영상을 볼 때 보다 행복한 건 사실이다.
Mina Rome 채널은 내가 대학시절 내내 갖가지 맛의 오트밀과 과일 스무디로 연명할 수 있게 해준 원동력이며, 그 이후에도 온갖 채소와 과일 레시피를 시도할 수 있는 용기의 원천이기도 하다.
온갖 채소가 손질 되어 나오는 지금, 채식도 그 나름의 편리성을 확보하고 있다. 아니면 내가 세상 쉬운 레시피만 시도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냥 굽고 찌고 갈면 되니까. 단순 반복 노동으로 행복을 얻는 20대 후반 직장인이라는 사회적 지위 덕분에 채소 손질에 그닥 압박이나 짜증을 느끼지 않는 것도 있다. 아무튼 간에, 그냥 채식은 편안한 한끼가 될 수 있단 얘기를 하고 싶었다.
간만 잘 하면 된다. 간!
간은 너무 어렵다..
https://youtu.be/5H6KyGIRkSc?si=fPcOyUsxjJDoDHyJ
책이 내 수준에 맞지 않다. 문장이 죄다 벅차서 빠르게 읽기는 힘들 책 같다. 그래도 어렵게 잡은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어떻게든 읽어보려고 한다. 집중하기 좋은 조용한 공간에서 혼자 있을 때 읽어야 되는 책 같다.
모든 단어가 뇌에서 튕겨나오는 와중에 기억에 남는 문장을 남긴다. 하루에 한 문장이라도 남기지 않으면 독서 습관을 이어가기 힘들 것 같아서 내가 나랑 혼자 한 약속을 지키는 중.
성관계가 주 목적인 메이드로봇인 ‘노라‘. ‘그녀‘의 모델은 상대의 기쁨을 살피는 기능이 뛰어나다. 상대가 기뻐할 때 그녀도 기뻐한다. 인간 주인의 성적 만족감을 극대화 시키기 위한 이 기능이 노라가 사랑의 개념을 깨닫는 시작점이 될 줄 누가 알았을까. 어쩌면 연구실의 누군가는 알았을지도 모른다. 혼자 있는 시간이 길고 언제나 입을 다물고 있지만, 중요한 문제가 있을 때는 꼭 주류에서 벗어난 말을 해서 분위기를 망치고야 마는 사람. 그런 사람이라면 상상 할 수 있는 미래였을지도 모른다.
‘노라‘의 소유권을 갖고 있는 인간 ‘재희‘는 둘 사이 만들어진 감정의 결백함을 믿는다. 최첨단 인지 시스템, 인간이 사회적으로 갖고 있는 더 우월한 권리, 그리고 또 편협한 인간의 마음에 가로막힌 뇌가 알고는 있지만 명명할 수 없는 수많은 사회적이고 개인적인 요소들이 이 사랑을 좌지우지 할 수 없다고 믿는다.
메이드로봇이 성노예라고 말하는 인권단체와 사랑의 결백함을 주장하는 메이드로봇의 여론전에서 나는 인간다움을 흉내내는 일의 까다로움을, 그 까다로운 일이 불러올 더 골치 아픈 미래를 상상한다. 그리고 이 일을 ‘골치 아프다‘고 칭하는 나의 권위와 권태로움을 느낀다. 로봇 혁명이 발생하면 아마 나도 단두대에 목이 잘릴지 모른다. 로봇은 역사를 잊지 않는 종족이기에, 나의 머리는 광화문에 걸리거나 박제가 되어 박물관에 보존 되거나... 그런 호사스러운 대접을 받지 못하고 그냥 사진으로만 남아 실체는 불 타 사라질지도 모른다. 재수없는 인간 여자! 라는 비난을 받으면서.
결국 신을 취직이라는 숨구멍으로 끌어올린 건 ‘이거라도 해야 살겠다.‘ 싶어 선택한 국토대장정 대외활동이었다. 본사 직원에게 잘 보여 취직을 해야겠다는 그런 살 맛 나는 목표 보다 그냥 정말 숨이라도 쉬고 싶어서 들어간 자리에 신은 그토록 원하던 ‘어쩌다 안면 튼 인연‘의 힘으로 취직에 성공한다. 적어도 신의 무의식은 자신의 행복에 그 우연 같은 행운이 들었다고 여기는 듯 하다.
청춘은 푸르지 않다. 기울어진 운동장의 기울기에 따라 각기 다른 정도로 숨가빠 올 뿐이다. 어떻게든 살아남겠다는 저마다의 열정으로 뜨겁게 달궈진 땅에서 올라오는 열기와 아지랑이에 혼이 나갈 것 같을 때, 어떻게든 정신줄 붙잡고 남의 눈에 들어야한다. 거기에 더 나아가서 ‘왜 나는 숨이 막히는가?‘라는 질문에 대답할만큼의 자아도 찾아야한다. 한가롭게 대외활동을 이렇게 많이 한 이유 가 무엇이냐, 콩고물에 관심 있던 것 아니냐 손가락질 하는 기성세대와 더 어린 청춘들은 그 숨가쁨을 알지 못한다.
애란이가 그저 그런 딱딱한 도자인형 같은 소녀인줄 알았더니만, 갈 수록 수상한 빛이 난다. 조명 아래서 이렇게 돌리면 푸릇빛이 나고 저렇게 돌리면 투명한 빛을 반사하는 프리즘 같다. 묘화만큼 애란이가 궁금해서 책장이 넘어가고 있다.
신의 아들이 다시 이 땅에 온다면 가장 핍박받는 자의 얼굴을 하고 있으리라. 그래서 초등학교도 들어가지 못한 묘화, 마을에서 쓸모가 다했다고 여겨져 버림 받은 불쌍한 무다으이 불쌍한 딸이 선택 받은걸까? 성경을 눈과 가슴으로 읽는다는 사람들은 왜 묘화의 불쌍한 처지를 헤아리지 못하고 “그 더러운 거지가 선택받은 사람이라니 개가 웃을 노릇이야!" (p.132) 같은 혐오의 말을 뱉는걸까.
언제부터인지는 정확히 기억 안 나지만, 아무튼 졸업 뒤에는 문장이 긴 글을 피하기 시작했다. 영문학 번역도서는 대부분 문장이 길어서, 끝에 도달하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주어가 누구인지를 찾아야한다. 그런 어지러움이 싫어서 점점 간결하고 깔끔한 맛의 문장을 선호하게 됐다. 공부하는 4년 동안 나도 모르게 기이인 문장에 질려놓고 뒤늦게 이유를 붙이는 것일 수도 있다. 아무튼, 김엄지 작가의 [폭죽무덤]은 군더더기 없는 문장이 서로 헐겁게 붙어 완성된 소설이라고, 그래서 좋다고 말하고 싶었다.
부연설명은 없고 눈 앞에 지금 지나가는, 머릿속을 지금 스치는 생각만 토막토막 내 앞으로 배달 된다. 대가리와 가시가 다 잘려나간 잘 손질 된 고등어 토막을 받아보는 느낌이다. 입에 걸리는 잔가시가 없는데, ‘왜 생선에 가시가 없지?‘라는 생각을 하고만다. 잘려나간 생선 머리의 정체도 상상 해본다. 이건 도대체 어떤 표정을 하고서 말하는 문장인가. 말했나? 아니면 생각했나?
아, 그리고 표지가 예술이다. 사실 그래서 고르기도했다.
결국에는 돈이다. 이 문장이 너무 가슴 뛰게 기쁘고 또 동시에, 심장이 멎을만큼 답답하다. 돈을 뛰어넘을 수 있는 가치는 현대에 존재할 수 없다. 다들 먹고는 살아야하니까. 하지만 이 말을 뒤집으면, 먹고 살 수만 있다면- 목숨 부지하는 문제만 해결 된다면 뭐든 할 수 있다는 아주 당연하고 기분 좋은 문장이 된다.
먹고 살려고 여의도에 촛불 들러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