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한 장소를 소진시키려는 시도》를 저지하려는 의도

D-29
@스마일씨 @호디에 비오는 오후.두 분 정말 존경합니다!
짧은 글이지만 신선하고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그냥 흘려보냈을 생각들을 모임에 적어야겠다고 생각하니 정리하게 되어서 좋아요. ^^ 옮긴이의 시도 부분도 재미있습니다. 저는 ‘소진’이라는 단어를 선택한 것이 정말 좋아요. 퍼내기는 지나치게 역동적인 느낌이 들고, 고갈은 이미 그러한 상태에 대한 묘사 같아서요. 점진적으로 닳아가는 과정에 딱 적합한 단어라 생각합니다. 페렉이 관찰한 것들은 결국 그 실체가 아닌 상호작용이나 관계를 통한 인식이 되니, 소진되는 것은 페렉이 될 수밖에 없겠습니다. 결국은 이야기도 작가의 주관적 의도와 텍스트의 객관 의미 사이에 일어나는 상호작용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니 페렉이 하나의 글쓰기 방식으로 이런 시도를 한 게 아닐까 짐작해 봅니다. 후설이나 사르트르의 현존, 베르그송의 지속을 연관시키면 더 깊은 사유가 될 것 같아요.
아...'소진'이란 단어에 제가 표현하고자 했던 점을 딱! 집어주셔서 기쁩니다😁 이 책에 대한 단상이나 의견 더 기다려집니다.
《파리의 한 장소를 소진시키려는 시도》는 사실 단순한 전제를 지닌 매우 심플한 책입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때 일어나는 바로 '그것'을 묘사하는 것이죠. 여기서 '그것'은 @호디에 님의 문장 수집에서 알 수 있듯이 '보통은 언급하지 않는 것들, 주목하지 않는 것들, 중요하지 않은 것들' 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의미를 조금 더 되새기면 '일상의 사소한 것, 하 찮은 것' 을 기술하는 것입니다. 어찌보면 '설명할 필요가 없었던 것을 설명하려는' 시도에 가깝습니다. 이 책에 대한 해외 평가를 보면 '좋은 글쓰기의 예' 라고 하는 반응이 있는데, 만약 독자가 이 책의 저자가 조르주 페렉이란 걸 모른채 이 평가의 정보를 먼저 접하고 독서한다면 이런 짧은 단문들과 개연성 없어 보이는 문장들에 의해 '낚였다' 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저의 생각으로는 이 책이 '좋은 글쓰기의 모범'이라는 평가는 글쓰기에 앞서 아마 페렉이 강조하는 '응시'에 방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페렉에게 '보는 것'은 역설적으로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보는 방법'을 위해 '관심 없는 것', 가장 '흔한 것', '무색한 것'을 천천히 들여다보고 결국에는 그것을 치열하게 적어 보는 것입니다. 일종의 관찰과 글쓰기 훈련 같은 거겠죠. 그럼에도 담을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대게 우리가 읽는 소설은 서사나 사건으로 이루어지고 그것을 기반으로 삶이 표현됩니다. 하지만 사실 우리의 하루를 이루는 것은 대부분 시시한 일상 그리고 규칙, 반복과 같은 것입니다. 이런 요소들이 모여 하루가 되고 하루가 모여 삶으로 전진합니다. 소설과 같은 서사나 사건의 발생은 굳이 도량 하자면 개인의 일생에 있어서는 '쌀알' 정도겠죠. 하지만 시람의 일생은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사소한 것들이 뭉쳐진 시간입니다. 그런 것들을 눈 여겨 봐야 한다는 거겠죠. - 이상 저의 생각이었습니다 -
물론, 이 책에는 어떤 특정할 수 있는 줄거리가 없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더 많은 상상과 서사를 만들 수 있는 재료를 풍부하게 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당시 '파리의 한 공간'을 실황하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하고요. 마치 제가 그곳에 앉아 멍 때리며 앉아 있듯이....문득 이 책의 일본어판 제목을 번역하면 "파리의 한 구석을 실황 중계하려는 시도" 였던 것을 보고 실소 했던 것이 생각나네요. . .제목은 확실히 저희 것이 멋진 듯 합니다. <다시 검색해보니 일본번역서의 제목은 "파리의 한 모퉁이를 생중계하려는 시도: 일상의 인류학(소설의 즐거움)" 였습니다.>
페렉은 다음날 비슷한 시각, 같은 장소에서 어제의 기억을 되짚으며 차이를 비교합니다. 저는 어제와 어떤 차이가 있는지보다 과연 어제에 대한 기억이 실제 일어났던 사실(페렉의 눈을 관통한)과 '얼마나 일치할까'에 대해 생각해봤습니다. 기억과 기록. 여기에 기록의 유의미성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7장에서는 페렉의 생각들이 더 많이 개입하는 느낌입니다. 기록한 요일이 아니더라도 글 전체에서 주말이라는 분위기가 풍깁니다. 결혼식을 비롯한 공원의 풍경, 저녁 시간이 아님에도 영화를 보러 가는 남자 등. 전 이 짧은 글에서 생뚱맞게 학창시절이 떠오르네요. 글(지문)을 통해 독자가 유추할 수 있는 것들? (이래서 문제풀이 교육이 무섭습니다. ㅜㅜ)
@호디에 님이 이렇게 정리해주니, 다시 페이지를 들여다보며 행간을 들여다보게 되네요. 글이 작성된 것은 주말이 맞습니다. 저런 풍경이 그렇게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을 것 같아요.
8, 9장에서는 비내리는 일요일의 한가로움이 느껴집니다. 페렉은 '무료한 순간들'이라고 썼는데요, 저는 어쩐지 쓸쓸함으로 읽혔습니다. 이것으로써 완독입니다. 처음 모임지기 님의 글이 아니었다면 아마 한번에 쓱 읽어버렸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문장수집에 올렸던 15쪽의 글이 와닿아 천천히 읽기도 했지만, 지기님의 글이 즐겁게 읽는 데에 도움이 되었습니다. 감사드려요. 성탄절이 지나면 바쁜 일이 끝나서 시간적 여유가 조금 생길텐데, 페렉의 시도를 저도 한 번 도전해보려고 합니다. :)
밤이고, 겨울. 즉, 행인들의 비현실적 모습.
파리의 한 장소를 소진시키려는 시도 p51, 조르주 페렉 지음, 김용석 옮김
@ 완독 하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독서하시다 이상한 점은 없으셨나요? 예를 들어 로마자숫자 ' I '밑에 아라비아 숫자'1'이 왜 없는지 같은 것...
사실 제가 많이 궁금해서...남겨봅니다. 어떤 이유가 있는지... 17페이지 보시면 로마자숫자 ' I '밑에 아라비아 숫자'1'이 없습니다. 반면에 장소를 이동하거나 날이 변하면 로마자 숫자를 기입하고 그 밑에 아라비아 숫자를 기입했는데.. 처음에는 원서의 편집 실수였다고 생각하고 바로 잡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1975년 초판본부터 최근까지도 원서는 그대로 유지해서 저희도 그냥 놔두었습니다. 하지만 의도는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임막걸 아, 그러네요.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생각을 좀 해봤는데요, 로마자숫자가 요일 구분을 기준으로 하잖아요. 애초에 요일을 구분할 계획은 있었던거죠. 그런데 앞으로 쓸 글에 대해 얼만큼의 분량으로, 어떤 내용을 쓰겠다는 계획이 구체적으로 없었다고 생각해요(그야말로 관찰 자체가 목적이라는 전제 하에서). 그래서 처음에는 크게 구분 짓지 않고 써내려갔다가 예상보다 분량이 많아지면서 혹은 장소를 이동함에 따라 그 필요성을 느껴서 2번부터 생긴 것 아니었을까요? 전 책을 읽으면서 시간의 흐름을 관찰하는 행위가 의식의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도 좀 들었는데요, 이 책 자체가 그 흐름에 맡겨진 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호디에 아, 그렇겠군요. 근데 페렉은 그냥 왠지 장소랑 날짜만 구분해서 관찰을 적었을 것 같아요. 이후에 책을 편집하는 과정에서 편집자가 했겠지요.
로마자는 날짜 구분(18일, 19일, 20일)이고 숫자는 휴식으로 구분되는 하나의 챕터로 보입니다.
@위버m 네, 근데 전 왜 아라비아 숫자 1 이 빠졌는지 그게 의도인지 실수인지 그게 좀 아리송해서요 눈 밝은 독자분들은 한국어판을 보시면 "편집 실수"라고 생각하실 수 있거든요. 근데, 그게 의도인지 실수인지 몰라서 그냥 고민 끝에 원서대로 한거라서요.
들여다보면 이상한 것도 있는데, 내용 상 좀 믿기지 않는 것도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64page에 "오토바이 91대를 앞세우고 미카도가 애플 그린색 롤스-로이스를 타고 지나간다." 라는 문장이 있는데, 각주에서 밝혔듯이 이 날에 'le mikado'에 대체할 인물이 파리를 방문했던 기록이 없습니다. 그 어떤 VIP조차 없었습니다. 70년대이긴 한데 오토바이 91대, 90대도 아니고 91대 라는게... 이것을 세었을 리도 없고요. 사전에 어떤 행사 정보를 페렉이 뉴스나 신문을 통해 들었을 수도 있지만, 순전히 눈에 보이는 것을 기술하는 것이라면 왠지 속된 말로 '구라' 거나, 우리가 전혀 감지할 수 없는 불어의 말장난 같을 수 있겠다 생각했습니다.
원문을 알 수 없으니 (봐도 프랑스를 전혀 못 해서 ^^;) 정확한 해석은 어렵지만 여러 가지 생각을 해봅니다. mikado와 rolls-royce를 넣어 검색해 보니 "The clean lines of this Mikado silk gown are as classy as that Rolls Royce!" 이런 문장이 뜨는데 혹시 미카도 실크 원단을 비유한 말이었을까요? 그렇다고 해도 91대는 여전히 이상합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사이사이에 확인할 수 없는 거짓을 끼워 넣었을 확률이 높은 것 같아요. 페렉의 의도는 무엇일지 생각하게 되네요. 관찰하고 있는 그대로 서술한 것처럼 보이는 글이지만 '사실'과 다르다는 예증을 만들고 싶었을까요? 아주 가볍게 읽을 책이라고 생각했는데 대화 나눌수록 재미있습니다.
@위버m 저희 편집자는 거짓말 같다고 확신하더군요.
한편으로는 비슷한 시기에 '레나타 테발디'라는... 마리아 칼라스와 비견되며 사치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이탈리아 여가수가 파리에 있었던걸로 추정됩니다. 미카도가 오페라랑 연관이 있는 단어이기도 한데....그저 추측의 확장입니다. 증거는 없습니다.
건물 모형을 든 한 남자가 지나간다.(정말 건물 모형인가? 마치 내가 그 건물 모형을 만든 것 같은 생각이다. 그래서 다른 것일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하는 것)
파리의 한 장소를 소진시키려는 시도 조르주 페렉 지음, 김용석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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