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파인먼의 삶 들여다보기

D-29
이제 '맨해튼 프로젝트' 부분을 읽고 있습니다만, 전쟁에 대비하여 건국 이후 사상 최대규모의 민간-군 조직이 형성되는 모습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지금 이름만 들어도 잘 알고 있는 기업들, 이를테면 제너럴일렉트릭(GE), 웨스팅하우스, 듀퐁, 앨리스-차머스(Allis-Chalmers), 크라이슬러, 유니언카바이드 같은 기업들과 수십 개의 중소기업이 참여(232p)하여 거대한 생산단지를 건설한 것이네요.
파인먼은 실무위원회에 계속 참석하면서, I.I. 라비, 리처드 톨먼Richard Tolman, 그리고 J. 로버트 오펜하이머와 처음으로 인사를 나눴다. 오펜하이머는 파인먼과 닮았다면 아주 닮았고 다르다면 아주 다른 물리학자로, 향후 3년 동안 파인먼의 운명을 좌우할 인물이었다.
파인먼 평전 - 괴짜 물리학자가 남긴 현대 물리학의 위대한 이정표 237p, [프린스턴], '전쟁준비'중에서, 제임스 글릭 지음, 양병찬 외 옮김
1942년 말, 드디어 영화 <오펜하이머>의 주인공이었던 오펜하이머와 리처드 파인먼이 처음 만나던 시기를 언급한 대목에 이르렀네요. 제 기억이 맞다면, I.I. 라비 역시 영화에서 자주 나왔던 과학자입니다. 얼굴이 동그랗고 통통한 과학자로요. 핵무기 개발에 참여했지만, 훗날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핵무기가 사용되고 나서 자신이 무슨 일을 한 것인지 멈춰서고 회의하는 과학자로 나왔던 것 같습니다. 다시 영화를 봐야겠네요.
영화 <오펜하이머>와 관련한 과학사 도서를 찾다가 발견한 도서라 추가해봅니다. 2018년에 출간되었다가 다시 올해(2023년) 개정판이 나왔네요. 아마도 <오펜하이머> 개봉에 맞추어 다시 소프트커버 버전으로 나온 것 같습니다. 양장본으로만 있던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가 영화 개봉에 맞추어 보급판(소프트커버)으로도 나온 것 처럼요. 특히 <천 개의 태양보다 밝은>은 나치 독일이 활개를 치던 30-40년대에 작가이자 저널리스트로 활동했고, 다큐멘터리 영화도 만들었다고 하네요. 원자폭탄이 투하되기 전과 후를 모두 목격했던 저널리스트가 기록한 미국과 독일의 원자폭탄 개발 프로젝트에 대해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어서 흥미롭습니다. 추후 독서 목록에 올려두고자 수집합니다.
천 개의 태양보다 밝은 - 우리가 몰랐던 원자과학자들의 개인적 역사미국과 독일의 원자폭탄 개발 프로젝트를 다룬 전 세계 최초의 간행물로 인류의 급변기를 담아낸 전 세기 최고의 과학·논픽션이다. 영화 <오펜하이머> 개봉을 계기로 원자폭탄의 탄생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어 하는 독자들을 위해 재출간되었다.
막스 플랑크의 양자역학을 빛과 전자기장 문제에 적용하며, 파인먼은 "중대한 난점을 만족스럽게 해결하지 못했다"라고 적었다. 아울러 다른 상호작용에 대해서도 최근에 새로운 입자들이 발견되면서 비슷한 난점들이 제기되고 있다고 지적하며 이렇게 썼다. "중간자장론meson field theory은 전자기장론에서 유추하여 수립한 이론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유추가 너무 완벽해서 무한대 답이 너무 자주 나오고 의미도 헷갈린다."
파인먼 평전 - 괴짜 물리학자가 남긴 현대 물리학의 위대한 이정표 241p, [프린스턴], '논문 마무리'중에서, 제임스 글릭 지음, 양병찬 외 옮김
파인먼은 맨해튼 계획이 사실상 시작된 직후인 1942년 6월에 박사학위를 받았다고 하네요. 지도교수 휠러의 요구로 당시까지 학위논문에 충분한 결과가 있다면서, 본격적으로 국가 프로젝트에 참여하기 전에 학위를 받도록 신경을 써주었네요. 그러므로 '맨해튼 프로젝트'는 파인먼이 학위를 받던 시절, 그리고 직후의 가장 중요한 커리어였던 셈입니다. 학위논문의 주제만 가지고 짐작해보면, 곧 이어 등장할 양자전기역학(QED)의 아이디어가 이미 마련되어 있었네요. 또 파인먼의 학위 과정의 의미는 막스 플랑크로부터 시작된 양자역학의 창시자들 이후 양자역학을 다음 세대로 이어주며 보다 정교하게 다듬는 역할을 했다고 평가해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파인먼은 장의 개념에서 적어도 '파동을 실어나르는 자유매질'이라는 낡은 관념만큼은 제거해 버렸다. 파인먼은 장을 파생개념으로 규정하며 이렇게 적었다. "실제로 장은 입자에 의해 전적으로 규정된다. 장은 단지 수학적 구성물일 뿐이다."
파인먼 평전 - 괴짜 물리학자가 남긴 현대 물리학의 위대한 이정표 241p, [프린스턴], '논문 마무리'중에서, 제임스 글릭 지음, 양병찬 외 옮김
진동자로 연결된 두 역학계가 사라지고 나니, 그 자리에 진동하는 장을 매개로 상호작용하는 두 입자가 나타났다. 진동하는 장은 이번에도 제거되었고 마침내 빈 서판blank slate상태의 새로운 양자전기역학이 탄생했다.
파인먼 평전 - 괴짜 물리학자가 남긴 현대 물리학의 위대한 이정표 242p. [프린스턴], '논문 마무리'중에서, 제임스 글릭 지음, 양병찬 외 옮김
오늘까지 읽은 부분에서 인상적인 내용을 알려 주세요.
특히 이론학자들은 추상적인 칠판과학 blackboard science의 타당성을 궁극적으로 검증한 셈이었다. 처음에는 아이디어를, 이제는 불을 얻었다. 결국 그것은 일종의 연금술, 즉 금보다 더 희귀한 금속을 납보다 더 유해한 원소로 바꾸는 연금술이었다.
파인먼 평전 - 괴짜 물리학자가 남긴 현대 물리학의 위대한 이정표 254p, [로스앨러모스] 중에서, 제임스 글릭 지음, 양병찬 외 옮김
이 부분은 로스앨러모스에서 인류 최초의 원폭실험인 트리니티 테스트 이후, 이 실험의 역사적인 의의를 설명하는 대목입니다. 특히 실용학문으로서 과학의 힘을 압도적인 주목거리로 과시한 사건이 아닐까 싶은데요, 냉전 시대의 본격적인 서막을 예고하는 사건이기도 할 것 같습니다. 이후에 이데올로기와 접목되며 기획되는 '거대과학'의 예고편이기도 하겠지요. 인간이 환경을 이용하고 경관을 바꾼 최초의 도구이자 원리로서 '불'을 꼽을 수 있다면, 원자폭탄은 인류에게 또 다른 종류의 '불'을 가져다준 셈이겠네요.
오늘은 어디에서 이 책을 읽었나요?
<파인먼 평전>은 무겁다보니 항상 집에서 읽게 됩니다. 다른 일에 온 신경을 쓰다보니 며칠이 휙 가버렸네요. 어서 ‘로스 앨러모스’의 풍경 속으로 들어가봐야 겠습니다. ^^
마음에 드는 문장을 수집해 주세요.
1945년 7월 16일 오전 5시 29분 45초, 이미 오래전부터 호르나다 델 무에르토 Jornada del Muerto, 즉 '죽음에 이르는 길'이라고 불려 온 이 지역에 동이 트기 직전, 한 줄기 아침햇살 대신 원자폭탄의 섬광이 번쩍였다.
파인먼 평전 - 괴짜 물리학자가 남긴 현대 물리학의 위대한 이정표 252p, [로스앨러모스], 제임스 글릭 지음, 양병찬 외 옮김
불덩어리가 하늘을 5km쯤 뒤덮었을 때(파인먼이 '뭔가가 구름을 만들어내는구나!'라고 생각했던 바로 그때), <바가바드 기타>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고 한다. "나는 이제 죽음의 신,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노라.
파인먼 평전 - 괴짜 물리학자가 남긴 현대 물리학의 위대한 이정표 255p, [로스앨러모스], 제임스 글릭 지음, 양병찬 외 옮김
원폭실험 책임자인 케네스 베인브리지Kenneth Bainbridge가 오펜하이머에게 이렇게 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제 우린 모두 개새끼가 된 거야." 라비는 뜨거운 구름이 가시자 오싹함을 느꼈다고 토로했다. 쌀쌀한 새벽공기 때문이 아니라 고향의 목조주택이 불타는 장면을 상상했기 때문이었다.
파인먼 평전 - 괴짜 물리학자가 남긴 현대 물리학의 위대한 이정표 255p, [로스앨러모스] 중에서, 제임스 글릭 지음, 양병찬 외 옮김
하지만 파인먼의 기억에 의하면 침울한 표정을 짓고 있던 사람이 단 한 명 있었다. 그 사람은 바로 파인먼을 맨해튼 프로젝트에 끌어들였던 장본인, 로버트 윌슨이었다. 그는 불쑥 이런 말을 내뱉어 파인먼을 놀라게 했다. "저 끔찍한 걸 우리가 만들었다네." 폭탄 개발자들이 그 순간의 기억을 다시 떠올린 것은 그로부터 한참이 지나서였다.
파인먼 평전 - 괴짜 물리학자가 남긴 현대 물리학의 위대한 이정표 255p, [로스앨러모스] 중에서, 제임스 글릭 지음, 양병찬 외 옮김
영화 <오펜하이머>에서 원자폭탄을 테스트하는 트리니티 실험 장면이 떠오릅니다. 책에 나온대로 파인먼은 차유리가 자외선을 막아줄 수 있다고 여겨서 차 안에서 보호경을 벗고 유일하게 맨눈으로 원자폭탄의 폭발 장면을 보는 장면이 나오죠. 차 밖에서 보호경을 쓰고, 두껍게 자외선 차단제를 얼굴에 바른채 앉아 광경을 지켜보던 에드워드 텔러의 모습과 함께 나옵니다. 에드워드 텔러는 훗날 오펜하이머의 뒤를 이어 수소폭탄 개발을 지휘한 인물입니다. 오펜하이머를 주저 앉혔던 안보청문회에서 오펜하이머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여 그의 부인인 키티가 텔러의 악수도 거부하고 경멸하는 심정을 억누르는 표정 연기를 하는 장면이 또한 기억에 남습니다.
영화 <오펜하이머>에서 트리니티 실험에 성공한 후 모든 사람이 성공에 기쁨을 감추지 못합니다. 파인먼도 20대의 젊은 치기가 보일 정도로 흥분하며 좋아하죠. 영화에서는 파인먼의 트레이드마크인 봉고드럼을 치는 장면도 나오는데, 제가 알기론 그가 봉고드럼을 치기 시작했던 것은 교수가된 이후였던 것으로 알고 있어요. 그러니까 파인먼이 로스앨러모스에서 봉고드럼을 친 것은 파인먼임을 보여주려는 영화적 장치가 아닌가 싶은데, 시기적으로 이십대에 봉고드럼을 친 것 같지는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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