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생애-이승우

D-29
내가 그래서 그 사람을 그렇게 많이 괴롭힘 (하고 정신승리해봅니다.)
당신이 태어나기 전에 형성된 세계인 그 사람의 과거를 질투하는 것은 부당하고 비합리적이고 무엇보다 불가능하다. 당신이 태어나기 전의 세계인 연인의 과거는 당신의 출입이 가능하지 않은 영역이기 때문이다.
사랑의 생애 247쪽., 이승우 지음
배려는 이기심을 넘지 못한다. 배려보다 이기심이 더 큰 사랑의 증거로 간주된다. 사랑하기 때문에 떠난다는 수사가 이 세계에서 위선과 변명의 표현으로 인식되는 이유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떠나는 사람은 사랑하기 때문에 파멸에 이르는 사람을 이기지 못한다. 자기는 물론 연인(사랑하는 '사람')의 파멸조차 감내하는 극한의 이기심을 사랑은 요구한다. 그, 또는 그녀가 이기적인 것이 아니다. 사랑이 이기적인 것이다.
사랑의 생애 255-256쪽., 이승우 지음
사랑과는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 단죄한 두려움이나 연민도 사랑으로 가는 길이 된다. 길들 가운데 하나가 된다. 두려움이나 연민이 곧 사랑이라는 뜻은 아니다. 사랑이 두려움이 아니고 연민과도 다르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러나 그것들이 사랑으로 가는 길일 수는 있다. 사랑 아닌 것이 사랑으로 가는 길이 된다. 강력한 것도 길이 되지만, 보잘것없는 것도 길이 된다. 보잘것없는 것은, 보잘것없기 때문에 더 길이 된다. 형배는 그 사실을 몰랐고, 몰랐으므로 신중하지 못했다.
사랑의 생애 264쪽., 이승우 지음
사랑의 신비 속에서는, 우월하지 않은 것이 더 우월하기도 하다는 사실을 몰랐고, 어느 것이 더 우월한지 규정할 수 있는 객관적 기준이 없을 뿐 아니라 아예 우월함이 분류의 항목에 들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몰랐고, 몰랐으므로 알았다면 하지 않았을 행동을 했다.
사랑의 생애 265쪽., 이승우 지음
영석에게 달려가는 일이 시급했기 때문에 그녀는 형배를 방면했다. 형벌보다 구제가 중요하다. 벌을 주는 일은 누군가를 구제 하는 일에 우선할 수 없다.
사랑의 생애 270쪽., 이승우 지음
우리는 우리의 의도와 상관없이 누군가의 사랑을 돕거나 방해한다.
사랑의 생애 271쪽., 이승우 지음
진정으로 살지 않는 자가 삶이 무엇인지 묻는다. 참으로 사랑하지 않는 자가 사랑이 무엇인지 알고자 한다. 중요한 것은 아는 것이 아니라 '삶을 하고' 사랑을 하는 것이다. 정의 내리는 것이 아니라 경험하는 것이다. 그 속에 들어가는 것이다. 어떻게 해도 정의되지 않는 것이 신이고 삶이고 사랑이기 때문이다. 형배는 자기가 물속으로는 들어가지 않고 물 밖에서 물의 성분과 성질을 따지는 연구자와 진배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선희와 영석은 물 안에 있었다. 그들이야말로 사랑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행하는 이들이라는 사실이 깨달아졌다. 물속에 들어가 물의 파동에 몸을 맡긴 사람은 물 밖의 조건들과 상태에 연연하지 않는다.
사랑의 생애 285쪽., 이승우 지음
사랑이 그처럼 불완전하고 모순된 것은 사랑을 하는 인간이 그처럼 불완전하고 모순된 존재이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인식했다.
사랑의 생애 288쪽., 이승우 지음
세상에 완벽한 사랑은 없어. 완벽한 사람도 없듯이.
삶은 결국 사랑인가 싶다가도, 사랑이 사치라고 느껴질 때가 있다. 사랑은 남 이야기 같기도 하고, 나에게는 먼 이야기 같을 때도 많다. 그럼에도 이 책과 연이 닿아 읽게 되었다. 같은 책이라도 어느 때는 한 단어, 한 문장 한 구절이 깊이 이해가 되고 문장을 넘어 통찰하게 되는 경우가 있고, 어느 때는 검은 것은 글씨요 흰 것은 종이다 할 때가 있다. 같은 페이지를 읽어도 그러니 그것은 책의 탓이 아니라 나의 탓이겠지. 막상 나는 크게 달라진 것이 없는 것 같은데 답답하기도. 이제는 어떻게든 애쓰기보다는 흐르는대로 가려 한다. 읽히면 읽히는대로, 안 읽히면 안 읽히는대로. '이 시간이 아닌가보다, 이 타이밍이 아닌가보다' 때로는 '이 책이 내겐 아닌가보다'하면서. 책을 한 권 내리 읽는 습성에 반하게 한참을 덮어두었다 펼치고, 또 덮어두었다 펼쳤다. 책을 펼치고 얼마 안 있어 노잼 시기와 사랑이 밥 먹여주니 시기(?)를 맞이했기 때문에 깊은 감동 없이 읽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밑줄 그은 문장이 처음부터 끝까지 꽤 있는 걸 깨닫고나니 다른 어플에 준 이 책 별점이 너무 박했나 재고하게 된다. 내가 사랑을 하는게 아니라 사랑이 내 안에 들어와 생애를 시작하는 개념이 신박하게 다가왔고, 사랑에 대한 여러 고찰과 통찰이 깊은 책이었다. 비슷한 류로 알랭 드 보통의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가 있다는데 그것도 사놓았지만 아직 인연이 안 닿음. 언젠간 읽어봐야지. 다른 책으로 넘어가서 이 책을 완전히 덮기 전에, 그믐에 쓴 문장을 한번 더 곱씹어봐야겠다. 사랑을 기다리며. (그나저나 그믐 완전 짱. 혼자 읽기 해 놓으니까 그냥 빈 모임으로 끝나는 게 영 마음에 걸려서 밑줄 친 것 쓰게 되고, 결국 생각도 쓰게 된다.)
아니, 나 이 책 무표정으로 마지못해 읽었는데, 그믐에 밑줄 문장 옮기며 문장 곱씹고 생각 확장하니 재밌게 읽었네ㅎㅎㅎ언젠가 재독 기회가 오길 바라며, 고마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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