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생애-이승우

D-29
여기저기 추천 받아서 읽게 되었다.
사건이라고? 그렇다. 그는 인정하고 싶지 않을지 모르지만, 거의 온종일 한 사람만을 생각하는 것은 사건이다. 큰 사건이다. 그는 사랑에 걸렸다. 그는 자기 가슴속에 그녀가 가득 차서 거의 자기 자신이 그녀로 이루어진 것 같은 느낌을 받기도 했는데, 그렇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거처를 제공했다는 뜻이다. 다른 사람이 그의 내부에서 살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그가 살도록 허락했다는 말이 아니다. 사건은 계약이 아니다. 허락이나 동의가 필요한 영역이 아니다.
사랑의 생애 34-35쪽., 이승우 지음
나도 통제가 안되게 한 사람만을 생각할 때가 있었지.
가득 차 있는데도 왜 비어 있는 것 같은가. 형배는 자기 안의 누군가에게 심문하듯 질문을 던졌다. 아무것도 더 넣을 수 없을 정도로 그 사람으로 충만한데도 왜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은 것처럼 허전한가. 왜 외로운가. 가득 차기 전보다 더 비어 있는 것 같고 그 어느 때보다 외로운가. 공허한가. 형배는 가득 들어찬 사람이 꿈속의 존재와 같아서 실체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부피만 있고 무게가 없다는 것을 모르거나 인정하지 않고 있다. 마치 온 존재가 그 사람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압도적임에도 불구하고 그 존재를 어떻게 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을. 허락할 수도 거부할 수도 없기 때문이라는 것을. 만질 수도 내쫓을 수도 없기 때문이라는 것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라는 것을. 어떻게 해도 어떻게 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러니까 한 사람으로 가득 차 있는데도 불구하고 어느 대보다 심하게 외로움을 느낀다면, 허전하고 안타깝다면, 그것이 증거이다.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니라 사랑에 들렸다는 증거이다. 허락 없이 덮친 사람을 겪고 있다는 증거이다.
사랑의 생애 36-37쪽., 이승우 지음
그는 사람들의 관계, 특히 애정 문제가 결부된 남녀 관계에 대해 일종의 원칙 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당사자 해결 원칙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것이었다. 누구도 그 관계에 끼어들어 의미 있는 역할을 할 수 없다. 왜냐하면 당사자들이 아니고는 그들 사이의 사연의 골과 감정의 주름들을 속속들이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제삼자에게 알려진 것들은, 설령 거의 다 알려졌다고 해도, 실은 아주 조금밖에 알려지지 않은 것이다. 다 알리려고 해도 알려지지 않는 것, 알려질 수 없는 것이 있다. 그리고 그 알려지지 않는 것, 알려질 수 없는 것이야말로 진짜로 알아야 할 것이다. 제삼자에게 알려진 거의 모든 것들은 알리지 않아도 상관없는 것들이다.
사랑의 생애 60-61쪽., 이승우 지음
죄수는 탈옥을 해서 감옥 밖에서 새로운 삶을 살고 싶은 욕망을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감옥을 잘 개조해서 그 안에서 살고 싶은 욕망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두 개의 욕망은 충돌한다. 감옥에서 나가려고 하면 개조해서 살려는 욕망이, 개조해서 살려고 하면 탈옥의 욕망이 맞선다. 그는 나가지도 못하고 개조하지도 못한다. 그는 온통 그녀 생각에 사로잡혀 지내면서도 그녀를 사랑하게 될까 봐 두려워한다. 그것이 카프카의 난처한 심리적 포지션이었다.
사랑의 생애 66쪽., 이승우 지음
세상을 굴러가게 하는 원리는 대개 비슷한데, 어떤 일의 성취에 있어서 노력이 차지하는 비중은, 노력의 가치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숨겨진 의도가 없다고 할 수 없는 일반적인 주장과는 달리 그다지 높은 편이 아니다. 슬픈 일이지만, 노력 없이도 얻을 수 있는 것이 있고, 노력으로도 얻을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뜻이다.
사랑의 생애 70쪽., 이승우 지음
사람은 많은 부분을 다른 사람과 공유하지만 전부를 공유하지는 않는다. 공유하고 있는 많은 부분이 아니라 공유하지 않은 아주 작은 부분이 개체 간의 차이를 만들고, 그 차이가 그 사람만의 고유한 성격, 그 사람의 정체를 형성한다. 그리고 아주 작은 그 차이 속에 매력이 잠겨 있다. 똑같은 사람이 한 명도 없으므로, 세상의 모든 사람이 다 고유하고 특별하므로 모든 사람을 고유하고 특별하게 대해야 한다. 유일한 사람으로 대해야 한다. 사람의 매력은 한 줄로 순서를 매겨 세울 수 없고, 비교 불가능하다. 사람(의 매력)이 다르므로 연애도 다르다.
사랑의 생애 72쪽., 이승우 지음
개개인의 차이에 민감하여 각자에게서 각자의 고유한 매력을 발견한 사람은 자기의 필요가 아니라 상대방의 필요를 향해 섬세하게 응대한다고 준호는 말한다. 사람은 다 다르니까, 다 모르는 사람이니까 긴장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처음 만나는 사람이고 모르는 사람이기 때문에 생기는 긴장, 무엇을 발견하고 어떤 것을 체험할지 아직 알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떨림, 그것이 연애가 제공하는 진짜 기쁨이라는 것이다.
사랑의 생애 74쪽., 이승우 지음
결혼은 필요하지만 사랑 때문에, 혹은 사랑을 위해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사랑은 필요하지만 결혼 때문에, 혹은 결혼을 위해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사랑의 생애 80쪽., 이승우 지음
사랑에 대해 두려움을 갖고 있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상대적으로 사랑에 대해 더 진지하다. 더 진지하기 때문에 함부로 하지 않는다. 함부로 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시도하지 못한다. 함부로 하는 것은 사랑을 모독하는 것이기 때문에, 함부로 함으로써 모독하느니 아예 하지 않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기피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두려움은 멸시가 아니라 공경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싫기 때문에 다가가지 않는 것이 아니라 존경하기 때문에 다가가지 못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다가가지도 못하고 떠나지도 못하는 비극이 그래서 생겨난다.
사랑의 생애 82쪽., 이승우 지음
뭐 볼 게 있어서 좋아하는 거 진짜 사랑 아니다, 뭐 볼 게 없어서 사랑하지 않는 거 아니라는 뜻이야
사랑의 생애 92쪽., 이승우 지음
사랑을 내세워서 무엇을, 그것이 무엇이든, 요구하는 사람은, 그 사람이 자기 사랑을 얼마나 대단하고 절실한 것으로 표현하든, 사랑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무엇을 요구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다. 요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요구할 수 없는 것이 사랑이다. (중략) 사랑은 강요하는 것이 아니고, 강요하지 않는데도 강요받는 것이다. 강요하는 이는 없고 강요받는 이만 있다.
사랑의 생애 98쪽, 이승우 지음
이 문장 다시 보다보니 이 책으로 독서토론해도 재밌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마다 사랑에 대한 가치관과 생각이 다양할테니. 그만큼 이 책이 사랑에 대한 다양한 입장을 담아냈다. 정답을 찾으려고 하며 읽었는데, 역시 답은 없었다. 애초에 정답이 없는 것이니까. 사랑이고 사랑이 아니고가 아니라 그 모든 것이 각자의 사랑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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