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보르헤스 읽기] 『불한당들의 세계사』 같이 읽어요

D-29
서문과 함께 라자루스 모렐까지 읽었습니다. 제가 가진 책은 1판 28쇄, 2015년 2월 11일에 다시 찍은 책인데요. 아마 독특한 표지가 동일하다면 다들 1994년 9월 25일 디자인이 결정된 책들을 읽고 있을 것 같네요. 개인적인 리스트를 살펴보니 1994년의 베스트 셀러는 '일본은 없다', 최저임금은 1085원, 가장 흥행한 영화는 '너에게 나를 보낸다'였다는 군요. 2015년의 베스트 셀러는 '미움받을 용기', 최저임금은 5880원, 가장 흥행한 영화는 '베테랑'이고요.
아주 흥미로운 접근이네요. 제가 가진 책은 1판 33쇄로 20년 9월 2일에 찍은 책입니다. 구글링 해보면 1994년의 이슈가 나옵니다. 거의 모든 세대는 자기 시대가 어떤 극점이라고 믿고, 그래서 지금 내가 처한 현실이 최악이거나 최고이며, 기념비적인 세대라고 믿는 것 같아요. 1994년에도 마찬가지였겠죠(https://news.kbs.co.kr/news/pc/view/view.do?ncd=3747040 [KBS 뉴스, "1994년 사건, 사고 많았다"]). 1994년은 청일 전쟁 발발 100주년이었고, 같은 해 7월에는 김일성 주석이 심근경색으로 사망했으며, 연쇄살인을 저지른 지존파가 경찰에 체포되었던 시기이며, 1994년 9월 23일은 국제원자력기구(IAEA)에서 북핵문제를 거론하면서 핵안전협정을 이행할 것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발표했습니다. 또 그로부터 약 한 달 뒤인 10월 21에는 성수대교가 붕괴되었죠. 그리고 그러한 해에 이 책이 최초 발행되었구요. 2020년은 코로나19가 범유행하던 시기였고, N번방 사건의 주동자인 조주빈이 체포되었으며, 같은 해 6월 16일 오후 2시 49분에는 개성의 남북공동연락사무소가 폭파되었고, 홍콩에서는 국보법이 중국 상무위원회를 통과하면서 중국의 일국양제가 사실상 무력화되었습니다. 9월에는 방탄소년단이 빌보드 핫100차트 1위를 달성했고, 10월에는 영국 레이싱 선수 루이스 해밀턴이 레이싱 레전드 미하엘 슈마허의 기록을 깨고 포뮬러 원 최다 우승 선수에 등극했으며, 코로나의 여파인지 대한항공이 아시아나 항공을 인수하는 것이 공식 확정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12월에는 일론머스크의 스페이스X에서 스타십이 발사되었습니다. 제가 가진 33쇄가 찍힌 해에 벌어진 이슈는 대략 이 정도입니다.
책을 열자 마자 느껴지는건 엄청난 세월 감각입니다. 고색창연한 글꼴과 편집 감각, 그리고 주석 방식. 서문에서, 작가가 인용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생몰년도에서 느껴지는 오랜 세월들(1934년이라니 대체 언제입니까). 더 이상 잘 인용되지 않는 버나드 쇼를 다시 보는 아득함. 특히 8과 6이 위로 튀어오르는 숫자 글꼴에는 애수를 느끼지 않을 수 없네요.
책의 편집도 시대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 같아요. 유행하는 서체도 다를테고, 스마트폰 시대에 맞춰서 레이아웃도 조금씩 변화가 있는 듯합니다. 과거 책은 좌우 여백을 많이 두고 텍스트 박스도 책등 쪽으로 몰려 있는 듯합니다. 반면 요즘에 나오는 책들은 판형이 작을 뿐만 아니라 좌우 여백이 매우 좁고 한줄에 들어가는 글자 수도 적습니다. 전체적으로 화려해졌고 얇아졌으며 길고 좁아졌습니다. 에세이가 강세인 현 트렌드가 반영된 것일테지만, 트렌드를 차치하고서라도 행을 빠릿빠릿하게 넘어가는 감각을 더 중시하는 듯합니다. 스마트폰으로 스크롤하면서 텍스트를 읽는 감각과 흡사해지고 있지 않나 합니다. 그게 좋은지 나쁜지는 더 두고 봐야 알겠지만요.
각주가 많은 책이니만큼, 읽는 방식을 결정합니다. 서문과 라자루스를 읽고 결정한 것인데, '일단 고유명사도 무슨 뜻인지 모르고 원문을 다 읽고난 다음 나중에 각주 읽기' 방법을 선택하기로 합니다. 대부분 편집자 주이므로, 원문을 읽던 사람들도 친숙한 내용도 있었겠지만 생경하게 읽고 나중에 알게 되었을 수도 있다는 그 마음으로.
어떤 노예들은 병에 걸리거나 죽는 배은망덕한 죄를 저지르곤 했다. 그들은 이 불확실한 재산으로부터 최대한의 이윤을 뽑아내야 했다.
불한당들의 세계사 잔혹한 구세주 자라루스 모렐, 19p,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노예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적나라하고도 간결한 설명이었습니다. 죽는 것마저 죄로 이해되는 상황에서, 한술 더 떠 착취하는 라자루스.
한국인들은 아마도 이런 악당의 어처구니 없는 결말에 익숙할 겁니다. 한국의 근현대사적 불한당들도 보통 이런 식으로 생을 마감하곤 했으니까요. 다른 묘사들보다 이 자가 죽이기로 결정한 사내의 마지막 기도조차 들어주지 않았다는게 그 악랄함을 배가 시킵니다. 라자루스는 아마 나사로의 다른 쓰기 같은데, 그가 예수에 의해 되살려졌다는 아이러니가 함께 담긴게 아닌가 싶네요.
별 신경 안 쓰고 읽었는데, 라자루스 모렐의 스펠링이 Lazarus Morell이군요. 하나 배워갑니다. 그렇게 보면 나사로가 되살아온 이야기와 흑인들이 자유와 속박을 왕복하는 이야기가 겹쳐보이기도 합니다.
조금 다른 이야기입니다만, 각주 6에서 비센떼 로시Vicente Rossi의 생몰년도가 (?)로 되어 있는데, 영어 스펠링으로 검색해봐도 간단히 (1871-1945)임을 알 수 있네요. 그간 세계가 얼마나 변했는지 곱씹게 됩니다.
화제로 지정된 대화
[~잔혹한 구세주 자라루스 모렐] 모렐의 사진이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은 모든 것이 기록되는 오늘, 영상매체와 고화질 사진에 익숙한 현재와 비교하면 무한한 상상력을 열어줍니다. 조금 다른 얘기같지만 우리가 책을 읽는 이유도 거기 있지 않을까 합니다. 구체적인 영상이나 사진 이미지로 특정되지 않는다는 것이 우리의 상상을 자극하니까요. 이런 것을 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달리 자유와 권한이 아니라 속박과 한계에서 상상력이 나온다는 생각이 듭니다. 라자루스 모렐은 자신의 언급만큼이나 주변 사람의 풍문으로 완성되는 인물입니다. 그는 불완전한 모자이크 조각의 집합처럼 얼기설기 이뤄져 있고, 서술 방식도 그를 닮아 있습니다. 한편 모렐은 흑인 노예들에게 '자유'를 주겠다는 말로 꾀어서 노예를 다른 농장에 팔아먹기를 반복합니다. 그런데 이런 약탈꾼이 어떤 국면에서 구세주의 행위처럼 묘사됩니다. "범죄적인 것이 구원과 역사로까지 칭송받게 되는 그런 반란." 요약하자면, 자유를 원하는 흑인들에게 잠시간의 자유를 맛보게 하고 오래도록 속박함으로써 종내에는 흑인 전체가 해방을 열망하게 이끌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라자루스 모렐은 흑인을 꾀어 이득을 취했다는 점에서 잔혹한 수탈자였지만, 결과적으로는 흑인들을 더 큰 혁명으로 이끌었다는 점에서는 구세주입니다. 이런 구절도 떠오릅니다.
요컨대, 자유롭게 생각한다고 해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되는 것은 아니다. '이성의 공적 사용'을 통해 기존 질서의 약점과 불의를 목격하게 될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통치자에게 개혁을 호소하는 것이다. 한 발 더 나아가 G.K. 체스터턴처럼 능동적으로 생각하거나 의심할 수 있는 추상적 자유가 실질적 자유를 제한한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우리는 대체로 자유사상이라야말로 자유를 막아내는 최고의 안전장치라고 말할 수 있다. 현대식으로 말하자면, 노예의 정신의 해방이 노예의 해방을 막는 최고의 방책이다. 노예에게 그가 자유로워지고 싶은지 아닌지 고민하라고 가르쳐보라. 그러면 그는 스스로를 해방하지 않을 것이다."
멈춰라, 생각하라 - 지금 여기, 내용 없는 민주주의 실패한 자본주의 25쪽, 슬라보예 지젝 지음, 주성우 옮김, 이현우 감수
멈춰라, 생각하라 - 지금 여기, 내용 없는 민주주의 실패한 자본주의지구의 종말을 상상하긴 쉽지만 여전히 자본주의의 종말은 상상하기 어렵다. <멈춰라, 생각하라>는 잠시 행동을 멈추고 현 체제의 본질과 유지 원리를 곰곰이 생각하고 고민해야 할 시기라고 제안한다.
이러한 견딜 수 없는 문화에 기진맥진하고, 극심하게 구타당한 땅은 몇 년 가지 않아 황폐해지고 말았다.
불한당들의 세계사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황당무계한 사기꾼 톰 카스트로~] 이상한 얘기 같지만, '내가 나임을 증명해주는 것은 무엇인지'에 관한 웃긴 일화로도 읽힙니다. 난파된 증기선에 타고 있었던 영국인 로저 찰스 티치본은 명백히 죽었지만, 어쩐 일인지 그의 어머니는 아들이 죽었다는 사실을 믿지 않고 14년 째 신문기사에 아들을 찾는 광고를 내고, 그러한 부름에 응답해서 오턴과 보글 일당은 죽은 티치본 행세를 하며, 오턴의 채권자들은 자기 이익을 위해서 오턴이 티치본이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가 한 푸줏간집 주인의 아들이었고, 어린시절 런던의 빈민가에서 무력한 가난을 경험했고, 바다에 대한 유혹을 느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것은 기이한 일이 아니었다. 바다로 도망하는 것(run away to sea)은 아버지의 권위에 대한 전통적인 영국식 결별, 즉 영웅적 출발을 의미한다.
불한당들의 세계사 29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황당무계한 사기꾼 톰 카스트로]까지 읽었습니다. 일자를 보니 기타 등등 이후 수록된 것들 읽을 시간이 따로 없어보여, 작가 연보와 대담, 옮긴이의 말도 읽었습니다. 대담에서는 히피에 관한 질문과 대답이 길게 나오는데 시대상이 느껴졌고, 눈이 안 보여져가는데 국립 도서관장을 맡게 된 아이러니도 들었습니다. 50세 이후에는 눈이 안보여 저술을 어머니 및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았다고 하는데 그런 글쓰기는 어떤 것인지. (머릿속에 굴릴 수 있는 글의 부피에 맞춰 단편을 써왔다고 하는데...)
나중에 한번 다시 다룰 생각이었습니다만 한번씩 남는 시간에 들춰봐도 좋을 듯합니다. 일단 해설 같은 경우는··· 개인적인 소견입니다만, 글을 쓴 사람의 의도와 별개로 작품의 답안지처럼 읽혀지는 점이 있어서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읽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뭐라 드릴 말이 없네요. 대담은 확실히 재밌어보입니다. 다만 소설가의 인터뷰 또한 소설의 한 부분처럼 읽어야 한다고 보는 입장이기 때문에, 개별적인 사실 관계에 대해서는 뭐라고 말하기가 어렵네요. 이유야 뭐 늘 나중에 달라붙는 게 아닐까 합니다.
아, 반갑습니다. 저도 작품 해설은 거의 안 읽는 편입니다. 제가 읽었다고 언급한 목록에도 작품 해설은 없답니다 :P 제가 알기로 왜인지 한국 문학에서만 뒤에 작품해설이 붙는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고, 금방 책을 읽었는데 다른 감상이 제 여운에 침투하는걸 싫어하는 편이기 때문에 피하는 편입니다. 인터뷰도 소설의 한 부분이라... 흥미롭네요. 저는 소설을 더 알게 만드는 인터뷰보단 모르게 만드는 인터뷰 쪽을 좋아하는 편입니다.
작품 해설은 잘 써도 욕먹고 잘 못 써도 욕먹는 분야라고 들었습니다. 고충이 많을 듯합니다. 저도 아예 안 읽는 것은 아니고 조금 읽어보고 흥미가 가는 글은 읽기는 합니다. 다만 기존에 많이 보이는 것처럼 작품의 가장 뒤쪽에 해설을 소개하는 편집 방향 자체가 이제는 조금 식상하고 마치 답안지처럼(?) 오해받을 여지가 다분한 듯합니다. 해설이라고 제목은 붙이지만 책의 마지막에 붙는 만큼 형식이 어느 정도 정해지는 것도 한계입니다. 조금이라도 비판적인 논조를 섞으면 자칫 남의 잔칫집 가서 훼방놓는 꼴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톰 카스트로를 과연 사기꾼으로 봐야 하나 싶을 정도로 말 잘 듣는 인간으로 다가옵니다. 제가 제목을 지었다면 '황당무계한 사기꾼 보글'이라고 짓지 않았을지 싶은 내용이었어요. 저는 지금까지 이 책의 사건들이 보르헤스가 만들어낸 소설이라고 생각했는데 기타 등등 뒤에 참고 문헌이 있더군요! 그 중 The History of Piracy를 많이 인용했는데 검색해보니 실제 있는 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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