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슘페터가 보았을 때, 1차대전 이후 유럽에서 좌우익 사회당이 정치적 승리를 거둔 것은 경제적 성공만으로는 사회적 생존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증거였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는 불안정한 혼합물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성공한 사업가들은 새로운 경쟁업체의 진입을 차단하기 위해 정치가들과 결탁할 것이고, 정부 관료들은 세금과 규제로 혁신을 억압할 것이고, 악의적인 지식인들은 자본주의의 도덕적 결함을 공격하는 동시에 전체주의 정권을 찬양하고 때로는 심지어 서구의 숙적들에게 (은밀하게 혹은 공공연히) 도움과 편의를 제공할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부르주아 사회가 마르크스의 예언대로 자기의 무덤을 팔 무덤지기들을 양산하리라는 그의 우려는 확신으로 굳어져 있었다. 다른 오스트리아 망명자들이 미국에서 전쟁 수행 노력에 힘을 보탠 것과 달리, 56세였던 슘페터는 자신의 불길한 우려를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라는 책에 쏟아냈다. 아이러니스트라는 그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책이었다. 서구에서 자유기업에 대한 신념이 약화되고 있던 1942년에 출간된 이 책은 추도사로 변장한 찬송가이자 자본주의 속에 실패의 씨앗이 내재해 있다는 케인스의 결론에 대한 도전장이었다. 자본주의는 금융위기, 불황, 계층갈등 등 여러 가지 결함을 가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인류사 속에서 시종일관 예속과 가난에 시달렸던 "인류의 9할"에게 재화를 안겨주었다는 것은 자본주의의 본질적 속성이었다. 미국 GDP가 대공황 수준을 겨우 벗어날까 말까 하던 시점이었지만, 슘페터는 "자본주의 엔진은 시종일관 대량생산 엔진이다."라고 자신했다. 슘페터의 자주 인용되는 구절을 빌리면, 그 엔진 덕분에 현대의 어린 여공들은 한 세기 전에는 여왕에게 조차 너무 값비쌌던 스타킹을 사 신을 수 있었다. [……] 경쟁이란 창의성을 활용하고 생활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해서 동원되는 기발한 사회적 장치라고 주장한 후, 슘페터는 곧바로 이 쳬제의 죽음을 예언했다. "자본주의가 생존할 수 있겠는가?"라는 수사적 질문을 던지고 "아니다. 생존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자답했다. 소련에서뿐 아니라 서구에서도, 경제적 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공격받고 있고, 이와 함께 기업가(자본주의의 성공에 필요한 창의력)도 공격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어느 서평가가 논평했듯, 슘페터는 "사회주의의 승리를 예언했지만 결국은 자본주의라는 경제체제에 대한 어느 누구보다 열렬한 옹호론을 썼다. ”
『사람을 위한 경제학 - 기아, 전쟁, 불황을 이겨낸 경제학 천재들의 이야기』 p. 560-562 ch. 13장 망명: 전쟁 중의 슘페터와 하이에크 , 실비아 나사르 지음, 김정아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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