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보르헤스 읽기] 『픽션들』 같이 읽어요

D-29
퀘인은 책의 「서문」에서 브래들리가 가정한 도치된 세계를 언급하는데, 그 세계에서는 죽음이 탄생보다, 상처의 딱지가 상처보다, 상처가 가해 행위보다 앞서 나타난다. 그러나 『에이프릴 마치』가 제안하는 세계는 시간 역행적이 아니며, 단지 이야기를 서술하는 방식이 그렇다. 내가 앞서 말했던 것처럼 ‘역행하고 그물눈처럼 갈라지는’ 소설이다. (...) 가장 뛰어난 것은 퀘인이 처음에 구상했던 X4가 아니라 환상적 성격을 가진 X9이다. 다른 것들은 싱거운 농담들과 쓸모없는 유사 정확성으로 손상되어 있다. 그 책을 시간 순서로 (가령 X3, Y1, Z의 순서로) 읽는 사람들은, 그 이상한 책의 특별한 맛을 음미하지 못한다. 두 개의 이야기(X7과 X8)는 특별한 개별적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 그것들은 서로 병렬해 두어야만 효과를 보인다…….
픽션들 허버트 케인의 작품에 대한 연구,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에이프릴 마치> 작품 설명이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당시에 보르헤스에게 영감을 준 이런 시간역행적 가지치기(?) 서술 방식의 책이 있었을지, 또는 보르헤스가 이 비슷한 방식으로 작품을 시도한 적이 있었을지도 궁금해지네요. (역시 보르헤스의 작품세계 전체나 당대 문학 사조에 대한 지식이 좀 있어야 작품을 더 풍성하게 즐길 수 있는 걸까요? 허허. 그런 지식이 부족한 저는 머릿속에 물음표가 가득 ㅎㅎ 하지만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즐거움은 있네요)
보르헤스와 동시대에 활동했던 라틴아메리카 작가들 특유의 마술적 분위기와 흐름이 있는데 그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았나 합니다. 본문에도 간혹 언급되는 동시대 소설가로서 비오이 카사레스도 있고, 더 이전으로는 우나무노의 『안개』 같은 소설도 있습니다. 더 이후의 코르타사르도 비슷한 주제를 다루기도 했고, 조금 결이 다르긴 하지만 유명한 마르케즈의 작품도 있습니다. 소설의 형식에 천착하고 틀을 비트는 시도가 라틴아메리카 문학에서 많이 나오는 듯합니다. 흔히 소설은 유럽적인 그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라틴아메리카 문학을 읽으면 또 그렇지도 않다는 걸 알게 됩니다. 어떤 점에서는 놀라울 정도로 동아시아의 인식과 흡사한 구석도 많습니다. 그래서 더 친근하고 재밌죠. 한번 천천히 읽어보시기를 바랄게요:)
페드로 파라모멕시코 현대문학의 거장 후안 룰포의 대표작 <뻬드모 빠라모>가 출간됐다. 이 소설은 가히 멕시코의 국민문학이라 할만 한데, 평생 단 두권의 작품만을 남긴 후안 룰포의 문학세계가 국내에 본격적으로 소개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안개존재 의지를 희구한 실존철학자이자 소설 구조를 혁명적으로 전복한 20세기 스페인 문학의 선구자, 미겔 데 우나무노의 1914년작 소설이다. 불멸에 대한 집념과 인간 자아에 대한 믿음, 변하지 않는 사랑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이야기한다. 소설 속의 주인공을 작가인 자신과 대면시키고 논쟁하는 독특한 형식의 작품이다.
모렐의 발명보르헤스와 함께 중남미 환상 문학을 이끈 거장 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의 대표작. 외로운 망명자인 '나'가 끊임없이 같은 동작을 반복하는 '이상한 사람들'을 몰래 숨어서 지켜보다가, 놀라운 사실에 직면한다는 줄거리의 소설이다. 공상과학 소설, 추리 소설, 환상 소설의 측면을 동시에 지닌 흥미로운 작품.
드러누운 밤단편소설의 대가이자 라틴아메리카 붐 소설의 선두 작가로 꼽히는 꼬르따사르 환상문학 대표 중단편 작품을 모은 작품집. 이번 작품집은 꼬르따사르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국내에서 첫 출간되는 책이다. 그간 몇몇 선집에 극히 일부만 소개되었을 뿐인 꼬르따사르의 독특한 문학세계를 조망하게 해주는 대표작을 모두 담았다.
사랑과 다른 악마들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1994년작. 광견병에 걸린 개에게 물린 후 악마에 씌었다는 오해를 받고 수녀원에 감금된 열두 살 소녀와 그녀에게 엑소시즘을 행하라는 명을 받은 서른여섯 살 신부의 금지된 사랑을 종교적 억압과 시대적 광기 속에 순수하고 아름답게 그려냈다.
감사합니다. 마치 <라틴아메리카 환상문학 입문> 수업 교재같군요. 시간을 내어 조금씩 읽어보렵니다(마르케스는 완전 좋아해요!). 코멘트랑 생각할거리 던져주셔서 항상 감사합니다. 뭔가 의미있는 답글을 달 깜냥은 안되어 눈팅할때가 많지만 작품을 읽어내는 데 많은 도움이 됩니다. :)
천천히 읽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저 역시 깜냥은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냥 지껄이는 거라고 해도 할 말은 없다고 생각해요. 근데 뭐 그럼 어떤가요😅
. . . .사실 그는 아주 분명하게 자기의 책들에 담긴 실험적 성격들을 감지하고 있었다. 그 책들은 열정적이라는 장점 때문이 아니라 새롭고 간결하면서도 완전하다는 면에서 칭찬을 받을 만한 것이었다.. . . . . 그리고 ‘’나는 예술에 속하지 않고 그저 예술사에만 속해 있다네.“라고 덧붙였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역사보다 저급인 학문은 없었다. P.89 그는 좋은 문학은 아주 흔하여 길거리의 대화조차도 대개의 경우 그런 수준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미학적 행위에는 놀라움이라는 요소가 반드시 수반되며, 암기에 의헤 놀라움을 느낀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고 보았다. 그는 쾌활하고 솔직하게 지나간 과거의 책들을 ‘비굴하고 고집스럽게 보존하는 행위’를 개탄했다. . . . P.91 . . .하지만 보다 이질적인 작품은 ‘역행하고 그물눈처럼 갈라지는’소설 [에이프릴 마치(April March)]이다. 이 작품을 분석한 어느 누구도 이것이 놀이의 일종이라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나는 언젠가 그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 나는 이 소설을 위해 대칭이나 자의적 법칙을, 지루함 등 모든 놀이의 근본적인 특장들을 이용했네.“. . . 이 책의 <서문>에서 브래들리가 가정한 도치된 세계를 언급하는데, 그 세계에서는 죽음이 탄생보다, 상처의 딱지가 상처보다, 상처가 가해 행위보다 앞서 나타난다. 그러나 [에이프릴 마치]가 제안하는 세계는 시간 역행적인 아닌, 단지 이야기를 서술하는 방식이 그렇다. 내가 앞서 맗했던 것처럼 ‘역행하고 그물눈처럼 갈라지는’ 소설이다. P.91-92
픽션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허버트 퀘인의 작품에 대한 연구] 3중 구조로 된 소설 『에이프럴 마아치』와 그 모방인 2중 구조의 희극 『비밀의 거울』의 설명은 흥미롭습니다. 가만히 읽다 보면 이 소설집이 쓰여진 방식도 그러지 않을까 짐작해보게 됩니다. 예컨대 2중 구조로 된 희극 『비밀의 거울』의 1막에서 나오는 인물들은 2막에서 전혀 다른 이름을 가진 인물로 나온다고 설명합니다. 전혀 다른 이름과 직업의 인물이 사실은 같은 인물이었다고 보르헤스는 해설하고 있지만, 독자들은 『비밀의 거울』의 원전을 읽어볼 수 없기 때문에(보르헤스의 말에 따르면 그것이 소실되었기 때문에, 혹은 『비밀의 거울』이 허구의 희극이기 때문에) 그 진위를 판별하기보다는 그저 보르헤스의 해설을 믿고 읽어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두말할 것도 없이 하나의 작품은 구체적인 한 시대의 산물입니다. 뛰어난 작품들은 자신이 처한 여건과 한계를 최대치로 활용했습니다. 오늘날처럼 모든 정보가 온라인상에 아카이빙 돼 있고 누구든 원한다면 발언의 사실 여부를 검증할 수 있는 시대와 달리, 보르헤스가 살았던 시대에서는 주로 책을 통해 정보를 제한적으로 얻었습니다. 원전이 소실될 위험이 늘 상존하는 것, 정보의 검증이 제한된 사람들에 의해 제한된 매체로만 행해졌다는 것, 이는 분명 당대의 한계였습니다. 하지만 걸출한 인물들이 그렇듯이 보르헤스 역시 이 제약과 한계를 발판 삼아, '없는 원전'에서부터 자신의 픽션을 출발시키고 있습니다. 이런 말을 하면 기술 발전에 대한 신포도 증후군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과연 인간된 한계를 하나씩 지워가는 기술 발전이 좋기만 한 것인지 묻게 됩니다. 현대의 기술 발전은 인류 진보가 아니라 조급증의 산물일 수 있습니다. 어느 철학자는 지하실에서 불이 났다는 걸 아는데도 불을 끄기보다는 하늘에 더 가까워지려고 지붕을 올리는 미치광이 같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문제는 인간된 한계가 아니라 그 한계를 대하는 우리의 방식과 대처일 수 있습니다. 돌이켜보면 과거 인류는 얼마든지 낯선 곳에서 길을 잃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처럼 구글맵스가 가야할 목적지의 최단 경로와 환승구를 알려주는 것과 다르게요. 무지와 위험의 영역은 넓었지만 꼭 그만큼 세계를 넓게 상상했습니다. 현재 우리는 원하면 비행기를 타고 48시간 내에 지구 어디든지 갈 수 있지만 정확히 그 이유 때문에 아무데도 가지 않기도 합니다. 가능성으로서 전능함이 완벽한 무능함으로 반전된 시대라고 하면 과장일까요.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다고들 말합니다. 하지만 그런 세상에서 어쩐 일인지 사람들은 모두 원하는 일을 하면서 살지는 않습니다(그게 좋은 것도 아니고요). 탈진한 채 번아웃에 빠져서 히키코모리가 된 사람은 늘었습니다. 탈진과 번아웃의 세계는 '할 수 있을 수 없음'으로 정의되기도 한다고 들었습니다.
퀘인은 항상 독자란 이미 멸종된 종족이라고 주장하곤 했다. "잠재적이든 실제적이든, 작가가 아닌 유럽 사람은 단 한 명도 없거든."이라고 그 이유를 설명하곤 했다. 또 그는 문학이 줄 수 있는 많은 행복 중 최고의 것은 상상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그런 행복을 누릴 수 없기에, 많은 사람들이 비슷하게 흉내 낸 것에 만족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대중'이라는 이름의 그런 '불완전한 작가들'을 위해 퀘인은 『성명서』에 실린 여덟 개의 이야기를 썼다. 작품 하나하나는 훌륭한 이야기라는 것을 예시하거나 약속하지만, 작가에 의해 의도적으로 좌절된다. 어떤 이야기는⏤가장 훌륭하다고 볼 수 없는⏤두 개의 줄거리를 암시한다. 허영심에 눈이 먼 독자는 자신이 그 이야기를 창작했다고 믿는다. 나는 세 번째 이야기인 「어제의 장미」에서 「원형의 폐허들」이라는 작품을 끄집어낼 정도로 순진했다. 이 작품은 『두 갈래로 갈라지는 오솔길들의 정원』이라는 책에 실린 이야기 중의 하나이다.
픽션들 96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Quain would often argue that readers were an extinct species. "There is no European man or woman" he would sputter, "that's not a writer, potentially or in fact." He would also declare that of the many kinds of pleasure literature can minister, the highest is the pleasure of the imagination. Since not everyone is capable of experiencing that pleasure, many will have to content themselves with simulacra. For those "writers manques," whose name is legion, Quain wrote the eight sto­ries of Statements. Each of them prefigures, or promises, a good plot, which is then intentionally frustrated by the author. One of the stories (not the best) hints at two plots; the reader, blinded by vanity, believes that he himself has come up with them. From the third story, titled "The Rose of Yester­day" I was ingenuous enough to extract "The Circular Ruins" which is one of the stories in my book The Garden of Forking Paths.
픽션들 ⏤Andrew Hurley, Collected Fictions, p. 111.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바벨의 도서관~] 하루 늦게 올립니다. 이 작품에서 흥미롭게 보았던 부분은 도서관 사서의 이야기입니다. 그 사서는 한 권의 책을 발견한 자로서, 나머지 모든 책의 암호 해독서이면서 완벽한 개론서를 그가 발견했다고 합니다. 사서는 독특한 지위에 놓입니다. 구체적으로 책에 어떠어떠한 내용이 있는지는 일일이 기억하지 못하지만, 어떤 책이 어디에 있는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존재입니다. 사서는 지식의 담지자라기보다는 지식의 위치를 특정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사서가 되기 위해서는 책의 내용을 알기보다는 책이 진열되고 배열되고 배치되는 도서관의 구조도가 머릿속에 펼쳐져 있어야 합니다. 이는 내가 무엇을 알고, 또 무엇을 모르는지 아는 것과 결부되는 능력입니다. 소설에 나오는 '나'는 사서가 발견했다는 '다른 모든 책의 암호 해독서이면서 완벽한 개론서'인 그 한 권의 책을 찾기 위해, 그 책에서 뻗어나온 무수한 곁가지를 빙글빙글 돌아야 했는데, 심지어 그렇게 했음에도 그 책을 찾지 못하고 인생을 허비했다고 말합니다. 여담인데, 전혀 다른 책을 읽다가 공교롭게도 「바벨의 도서관」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힌트를 얻었습니다. 부분이 전체를 닮은 프랙털 구조의 역사를 다루는 한 수학자의 책이었습니다. 프랙털은 브누아 망델브로라는 수학자가 발견한 기하학의 한 분야라고 합니다. 이 프랙털 구조는 부분이 전체를 닮고 전체가 또 부분을 닮은 자기유사성을 띤다고 합니다. 짐 홀트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인슈타인이 괴델과 함께 걸을 때 - 사고의 첨단을 찾아 떠나는 여행오늘날 최고의 과학 작가이자 철학자인 짐 홀트가 쓴 과학과 수학, 그리고 철학사에서 중요한 분기점이 된 쟁점과 주제를 다룬 책이다. 특유의 명쾌함과 유머를 발휘하면서 저자는 양자역학의 불가사의, 수학의 토대에 관한 질문, 그리고 논리와 진리의 본질을 파헤친다.
자기유사성이 무슨 의미인지 알기 위해 집안일의 한 사례를 살펴보자. 콜리플라워(꽃양배추)가 좋겠다. 이 채소의 머리 모양을, 즉 그것이 작은 꽃들로 이루어진 방식을 관찰해보라. 이 작은 꽃들 중 하나를 떼어내보라. 어떤 모습처럼 보이는가? 그것은 콜리플라워의 작은 머리처럼 보이는, 역시 자신의 작은 꽃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제 다시 이 작은 꽃들 중 하나를 떼어내보라. 어떤 모습처럼 보이는가? 여전히 더 작은 콜리플라워다. 이 과정을 계속한다면⏤곧 확대경이 필요해질 테지만⏤더욱더 작은 조각들이 전부 제일 처음 나왔던 머리 모양을 닮아 있을 것이다. 따라서 콜리플라워는 자기유사적이라고 할 수 있다. 각 부분이 전체를 닮았기 때문이다. 저마다 독특한 형태를 띠는 자기유사적 현상으로는 구름, 해안선, 번개, 은하단, 인체 속의 혈관계, 그리고 어쩌면 금융시장의 상승과 하강 패턴 등이 있다. 해안선을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매끄럽지 않고 더욱 꼬불꼬불한 형태로 보이는데, 각각의 꼬불꼬불한 구간은 더 작은 비슷하게 꼬불꼬불한 구간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런 것들을 기술해주는 도구가 바로 망델브로의 방법이다. 자기유사적 형태는 본디 삐둘빼둘한 까닭에 고전적인 수학은 이런 형태를 다루기에 부적절하다. 고대 그리스부터 지난 세기까지 수학의 방법들은 원과 같은 매끄러운 형태에 더 잘 맞았다. (원은 자기유사적이지 않음에 유의하라. 만약 원을 더 작은 구간들로 나누면, 각각의 구간은 거의 직선이 된다.)
아인슈타인이 괴델과 함께 걸을 때 - 사고의 첨단을 찾아 떠나는 여행 130-131쪽, 짐 홀트 지음, 노태복 옮김
각각의 진열실 중심에는 낮은 난간으로 둘러싸인 커다란 통풍구가 있다. 그 어떤 육각형 진열실에도 위에 있는 층들과 아래에 있는 층들이 무한하게 보인다. 진열실들은 모두 동일하게 배치되어 있다. 각 진열실에는 스무 개의 책장이 있다. 두 면을 제외한 각 면마다 다섯 개씩의 책장들이 늘어서서 네 개의 면을 덮고 있다. 책장의 높이는 바닥에서 천장 높이와 같고, 보통 키의 사서보다 조금 큰 정도이다. 책장이 놓여 있지 않은 두 면들 중의 하나는 일종의 좁은 복도와 연결된다. 그 복도는 모두가 똑같은 형태와 크기를 가진 다른 진열실과 이어져 있다. 복도 좌우로 아주 작은 문간방이 두 개 있다. 하나는 선 채로 자는 방이고, 다른 하나는 생리적인 문제를 처리하는 방이다. 이 공간으로 나선 계단이 지나가며, 이 계단은 아득히 먼 곳으로 내려가거나 올라간다. 좁은 복도에는 거울 하나가 있는데, 그 거울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복제한다.
픽션들 98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도서관’의 모든 사람들처럼 나는 젊은 시절 여행을 했다. 나는 한 권의 책, 아마도 편람 중의 편람일 책을 찾아 돌아다녔다. 이제 내 눈은 지금 내가 쓰고 있는 것조차 알아볼 수 없고, 나는 내가 태어난 육각형의 방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죽을 준비를 하고 있다. 내가 죽으면, 자비로운 사람들이 나를 난간 위로 던져 버릴 것이다. 내 무덤은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허공이 될 것이고, 내 육체는 끝없이 떨어질 것이고, 썩을 것이며, 내가 아마도 무한하게 떨어지면서 만들어 낼 바람 속에서 분해될 것이다.
픽션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아마도 늙고 두려움을 느끼는 탓에 내가 속고 있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유일한 종족인 인류가 멸망 직전에 있다 해도 ‘도서관’은 불을 환히 밝히고 고독하게, 그리고 무한히,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소중하고 쓸모없으며 썩지 않고 비밀스러운 책들을 구비하고서 영원히 존속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픽션들 바벨의 도서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바벨의 도서관] 계속해서 말해보면, 이 단편에서는 지식의 담지자가 아닌 사서를 더욱 부각합니다. 사서는 지식 자체보다는 지식의 편집자를 자처하는 존재입니다. 본문에도 나오듯 책의 내용에서 그 의미를 추구하는 존재와는 좀 다릅니다(133쪽). 엄청나게 많은 물건을 파는 잡화점, 편집숍, 빈티지숍에 들어가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으리라 짐작합니다. 당장 다이소에만 가도 알 수 있을 텐데요, 우리가 찾는 물건이 있는지 점원에게 물어보면 점원은 그 제품이 있는지 없는지 대답하는 것은 물론이고, 물건이 있다면 그것이 어느 섹션에 있는지 번호까지 알려줄 것입니다. 이런 과정은 '거의 즉시' 일어납니다. 생각해보면 놀라운 과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쩌면 「바벨의 도서관」은 이전까지 존재했던, 그리고 앞으로 있게 될 모든 책들의 역사를 쓰고자 했던 장황한 기획이 아니었을까 짐작해봅니다. 단편 중간에 나오는 에피소드를 봐도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책장들 속에 진귀한 책들이 있다는 것은 알지만 그것을 찾을 수 없어서 절망합니다. 극단주의자들은 불필요한 책을 모두 불살라버림으로써 원하는 책을 찾겠다는 허황한 계획을 세우기도 하는데요, '불필요한 책'을 몇몇 사람이 지정할 수 있고, 나아가 거리낌없이 불태울 수 있다는 그 사고방식에서 역사의 몇 가지 사례가 떠올랐습니다. 개인적으로 마지막 한 문단은 섬세하게 읽혀야 하지 않나 합니다. 요약하자면 세계는 무한하지만 쓰여질 수 있는 책의 숫자는 유한하다는 의미로 저는 읽었는데요, 이것이 「바벨의 도서관」을 단순한 '무한'으로 설명할 수 없게 만듭니다. 단순히 어떤 것을 '무한'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무지의 토로일 수 있습니다. 보르헤스는 책의 숫자는 유한하지만 그 파생본은 무한할 수 있다고 믿는 것 같습니다. 스물두 개의 알파벳과 마침표와 쉼표, 그리고 한 개의 공백이라는 유한한 기호로 도서관의 책들이 쓰여진 것처럼요. 현실의 도서관은 유한한 현실의 지면 위에 유한한 크기로 지어질테지만 그 속에는 거의 무한한 세계와 그 세계가 파생할 가능성이 담겨 있다고 해도 될 것입니다. 일찍이 시인 보들레르는 미를 이렇게 정의했다고 합니다. “그것은 유한 속의 무한(l'Infini dans le fini)이다.” 8자를 옆으로 누인, 무한대 기호를 닮은 여덟 번째 단편에서 뵙겠습니다:)
나는 사서들이 책에서 의미를 찾으려고 하는 헛되고 미신적인 습관을 거부하고, 그러한 행위를 꿈이나 한 사람의 손바닥에 나 있는 뒤엉킨 손금들을 가지고 의미를 찾으려고 하는 행위와 똑같이 취급하는 한 난폭한 지역을 안다······. 그들은 글쓰기의 발명가들이 원초적인 스물다섯 개의 알파벳을 모방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한 적용이 우연에 불과하고, 책들은 그 자체로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픽션들 133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 드디어 마지막 단편입니다. 모두 수고하셨다고 미리 말씀드리면서 시작합니다. 1부의 표제작이기도 한데요, 제가 보르헤스의 『픽션들』에서 「기억의 천재 푸네스」, 「칼의 형상」과 함께 가장 좋아하는 단편 중 하나입니다. 이 이야기는 1차 세계 대전 당시 연합군과 전쟁을 벌였던 독일군 소속의 중국계 스파이 유춘 박사의 구술서 형식을 띱니다. 앞서 살펴본 작품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역시 '소실된 원전'과 '개인적인 구술'이라는 두 가지 서사적 알리바이가 활용되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알리바이로 인해서 허구의 상상력이 틈입될 여지가 생겨나고 있습니다. 제가 이 소설을 좋아하는 이유는 내용 자체도 재미있지만 형식이 매우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시작도 끝도 없는 완벽한 원으로 된 아름다운 미궁이 있다면 바로 이 소설이 아닐까 합니다. 본문으로 돌아가면, 쫓고 쫓기는 관계에 있는 유춘 박사와 매든 대위는 닮아 있습니다. 유춘 박사는 중국인 출신의 독일군으로서 1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의 하나였던 영국군에 스파이로 잠입해 있습니다. 동료 한 명과 함께 "앙크르 강변에 주둔한 새로운 영국 포병대의 정확한 위치"를 독일군에 발설하려 했지만, 연합군 소속의 매든 대위에게 스파이임이 발각당하고 쫓기는 처지입니다. 유춘 박사는 독일군에 특별한 소속감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자신이 영국 포병 부대의 위치를 알리려는 이유는 "한 사람의 황인종이 그의 군대를 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함입니다. 매든 대위가 스파이인 유춘 박사를 잡으려는 이유도 비슷합니다. 영국-아일랜드의 오랜 역사적 분쟁을 생각하면, 영국군 소속의 아일랜드인인 매든 박사의 위치 또한 위태롭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매든 대위에게 스파이 색출은 아일랜드인으로서 출신지 때문에 의심받는 영국군에 자신을 증명할 "기적적인 호기"일 것입니다. 쫓는 자와 쫓기는 자는 이렇게 연결돼 있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원이 그 시작도 끝도 알 수 없는 무한한 꼬리잡기 게임처럼 그려지는 것과 두 사람은 맞물려 있다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나는 비겁한 인간이다. 누구가 되었든 간에 위험하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을 어떤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한 지금 나는 그렇게 말하고 있다. (···) 나는 인류가 점차로 보다 대담한 일에 자신을 내던지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곧 세상에는 전사들과 도적들밖에 없게 될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충고를 하고 싶다. ⟨대담한 어떤 일을 수행하는 자는 자신이 이미 그것을 완수했다고 생각해야 하고, 마치 과거처럼 절대로 바꿔놓을 수 없는 미래를 자신에게 강요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이미 죽은 거나 다름없는 나의 눈들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그날의 해거름과, 밤의 도래를 새겨 담는 동안 나의 계획을 진척시켜 나아가고 있었다. 기차는 물푸레나무들 사이를 감미롭게 덜커덩거리며 달려가고 있었다.
픽션들 150쪽, 152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 이야기 자체는 어렵지 않으니 쭉 따라 읽으면 될 것 같습니다. 그보다 저는 보르헤스가 '거울'만큼이나 자주 다루는 소재인 '미로(또는 미궁)'에 대해서 말해보고 싶습니다. 본문에서 유춘 박사는 한 평생 '미로'(소설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 )를 만드는 데 매진하다 죽은 취팽이 자신의 선조임을 밝힙니다. 여기서 잠시 다른 얘기를 해야 하는데, 한국어 판본에서 '미로'로 번역된 단어는 스페인어 원문으로 'Laberinto'입니다. 영어 번역본에서는 'Labyrinth'입니다. 보르헤스전집 판본과 세계문학전집 판본 모두 '미로'로 번역돼 있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제 개인적인 견해로는 '미궁'이 더 적절해 보입니다. 미로(maze)과 미궁(Labyrinth)은 비슷해 보이지만 역사적인 연원이나 사용되는 맥락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정확히 같은 사례라고 보기는 어려우나, '성경'과 '성서'의 차이만큼이나 다르지 않나 합니다. 성경이 종교적 맥락이 더 부각된다면 성서는 책으로서 맥락이 더 부각됩니다.) 제 개인적인 살을 덧붙여서 얘기해보겠습니다. 미로와 미궁은 다릅니다. 본문에서 취팽이 고안하고자 했던 것은 '미궁' 쪽에 더 가깝습니다. 국어 사전에서 정의는 둘을 특별히 구분하지 않고 있기는 합니다. "갈림길과 막다른 골목으로 이루어져서 한번 들어가면 빠져나오기 힘든 구조물", "어지럽게 갈래가 갈라져서, 한번 들어가면 다시 빠져나오기 어려운 길"이라는 사전적 정의에 더 부합하는 쪽은 '미로'로 번역되는 'maze'에 가깝습니다. 미로에서는 분기점이 많아서 길을 찾는 것이 어렵지만 일반적으로 한 가지 올바른 길과 출구를 상정합니다. 반면 '미궁'으로 번역되는 라비린토스(Labyrinth)는 신화, 종교, 문화적 배경이 더 부각됩니다. 목적지 자체가 의미 있다기보다는 그 통로들이 녹아내린 마시멜로처럼 적층된 모습을 보이고, 반복적인 패턴, 루프 구조가 보입니다. 미로 연구가 헤르만 케른에 따르면 기원전 1세기부터 발견되는 '미로'는 비교적 후대에 발명된 것으로서, 중세를 거쳐 오늘날에 이르면서 점점 방문자로 하여금 길을 잃도록 만드는 특성에 집중된 것으로 보입니다. 반면 라비린토스, 즉 미궁은 좀더 이전의 것으로서 그 원형을 기원전 2000년 경에 부흥했던 크레타 문명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미로에서 통로는 여러 갈래로 갈리며 방문자를 혼란스럽게 만들지만, 미궁은 그렇지 않습니다. 미궁은 그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에움길이며 오직 하나의 길만 있습니다. 미로의 목적은 방문자를 길에 가두고 의도적으로 혼란을 주어 길을 잃게 하기 위함이지만, 미궁은 하나의 공간을 남김없이 산책하게 만들며 엄청나게 우회하지만 계속해서 걸으면 누구나 그 중심부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즉, 미로가 의도된 혼란의 공간이라면 미궁은 내면적이고 명상적인 산책 공간에 가깝습니다. 이런 사실을 알고 본문으로 다시 돌아가면 보이지 않던 것들이 조금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정원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이 단편에서 '갈라짐'은 혼란을 초래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인생의 끝없는 분기점' 전체를 상정하는 하나의 상징 공간으로 기능하고 있습니다. 과거 문학가들이 '거울'만큼이나 '미궁'에 이끌린 것도 바로 이러한 점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본문 얘기를 좀 해보면, 중간 부분에 스티븐 알버트가 유춘과 나눈 선문답 같은 대화에서도 앞선 사고방식을 엿볼 수 있습니다. 스티븐 알버트는 그 해답이 '장기(chess)'인 수수께기를 낼 때, 절대 해서는 안 되는 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장기'라는 단어라고 말합니다. 이는 미궁의 중심부가 텅 비어 있는 것과 비교될 만합니다. 미궁은 거대한 에움길로서 중심부를 에워싸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작 그 중심부는 텅 비어 있습니다. 방문자는 텅 빈 중심부를 추측하면서 그 사색적인 에움길을 걷습니다. 취팽에게 책을 쓰는 일과 미궁을 건설하는 일이 같은 일이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미궁이 단순한 구조물에 그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누구나 한 권의 책을 끝까지 읽으면, 또 반복해서 읽으면 이 미궁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끝까지 읽어도 어떤 책들은 그 의미를 알지 못합니다. 남는 것은 의미의 진공, 텅 빈 중심부입니다. 하나 재미있는 점은 미궁의 텅 빈 중심부에 도달하는 순간 우리는 미궁이 바로 '안팎이 뒤집어진 공간'이라는 인식 하나를 얻게 된다는 점입니다. 미궁의 텅 빈 중심부, 그 막다른 벽을 본 사람은 다시 걸어온 모든 걸음을 걸어서 입구로 되돌아가는 길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나아가 미궁은 방문자로 하여금 다시 왔던 길을 돌아나가게 하는 구조 자체에 목적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박술 번역가는 매우 탁월하게도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다이달로스=비트겐슈타인이 구축한 미궁의 가운데에는 무엇이 있는가? 거기에는 아무런 답도 없다. 그토록 두려워했던 미노타우로스도 없다. 그곳은 길이 끝나는 곳이다. 걸어온 모든 길이 뒤집히는 곳이다." 한 권의 의뭉스러운 책을 읽는 것, 미궁의 에움길을 걷기, 저는 이 두 가지가 같다고 봅니다. 미로와 미궁의 차이를 잘 정리한 글이 있으니 한 번 살펴보시기를 바랍니다. 출처: [미로와 미궁] https://brunch.co.kr/@soolpark/2.
나는 나와 피를 나누고 있는 어떤 사람이 붓으로 정교하게 쓴 다음과 같은 문장을 뚫어져라 읽었다. 나는 그 말뜻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는 다양한 미래들에게(모든 미래들이 아닌)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을 남긴다.⟩ 나는 다소곳이 편지를 돌려주었다. 알버트가 계속 말을 이어갔다. "나는 이 편지를 입수하기 이전에 한 권의 책이 무한한 책이 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었습니다. 나는 단지 순환적인, 원형의 책 이외에는 그 어떤 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습니다. 마지막 페이지와 첫번째 페이지가 동일해 무한히 계속될 수 있는 그런 책 말입니다. (···)"
픽션들 158-159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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