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오웰 [엽란을 날려라] 미리 읽기 모임

D-29
특히 저는 중년 남성 작가의 소설에서 중년 남성 캐릭터가 나이 차이 많이 나는 젊은 여성이나 소녀랑 썸을 타기 시작하면 작가를 의심하지 않기가 어렵더라고요. 네, 하루키도 그런 면에서 별로 곱게 보지 않고 있습니다.
오 저는 1Q84를 읽고 늙은 아재(무라카미 하루키)의 성적판타지가 반영 된 것 같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더라구요.. 제가 너무 평면적으로 보는 걸수도 있지만 읽는 내내 조금 불편한 감정을 느꼈던 기억이 나네요ㅎㅎ (굳이 10대 소녀여야만 했냐)
저도 덴고와 후카에리가 섹스를 하는 데 이르러서는 ‘꼭 이래야 할까’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댄스 댄스 댄스』 이후로(어쩌면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부터) 중년 남성과 어린 소녀 사이의 성적 긴장감이 하루키 작품 세계의 주요 키워드인 듯한데, 『1Q84』는 너무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사단장 죽이기』에서는 조금 나아진 거 같기는 하더라고요.
아직 초반부를 읽고 있는데, 개인적인 이야기를 써보고 싶습니다. 돈에 관한 고든의 패배주의와 이중적 태도를 보면서, 답답함과 경멸을 느끼는 동시에 왠지 저를 보는 것 같아서 뼈를 맞는 기분이 들었어요. 저는 가난까지는 아니지만 풍족하지도 않은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어릴 때는 '부족함 없이' 크고 있는 줄 알았는데, 대학에 가서 "남부러울 것 없이" 자란 친구들을 보면서(물론 그 친구들에게도 부러운 남이 있었겠지요), 가져본 적 없는 것에 대해 부족함을 못 느끼는 건 당연한 거였구나 싶었죠. 스스로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 점점 자본주의와 노동에 환멸을 느끼게 됐고, 돈이 삶에서 너무도 중요하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고 싶어졌습니다. '아끼는' 행위 자체가 돈에 굴복하는 거라고 여기게 되어, 취미생활에 큰돈을 선뜻 지불했고요. 딱 욜로 플렉스였죠. 그러다 통장 앞자리가 바뀌면 밤에 잠을 못자고 다음날 밥을 굶는다든가 하는 식으로 돈에 얽매여 갔습니다. 지금은 어떻게 돼도 굶어죽진 않겠지, 라는 생각으로 좀 가볍게 지내고 있지만 여전히 스스로 채운 돈의 수갑을 깨부수진 못한 것 같아요. 아래는 제가 서평단에 신청하며 썼던 글의 일부입니다. "돈을 경멸할수록 전전긍긍하게 된다... 꼭 제 상황 같아요. 자본주의를 경멸하고 온갖 부조리에 환멸을 내면서도, 늘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리며 끊임없이 남과 저를 비교하고 고통을 자초해요. 조지 오웰의 날카로운 시선이 저를 꿰뚫고 상처를 입혔으면 좋겠어요. 그 자리가 단단하게 아물도록요." 이 소설이 제게 그런 흉터를 남겨주기를 기대합니다.
저는 20대에 가난을 남성적 매력 부족과 동일시했습니다. ‘돈=힘=남성성’이라고 여겼고, 사실 아직도 그런 관념에서 완전히 벗어났는지는 자신이 없습니다. 그래서 20대에 데이트를 할 때에는 제 지갑 사정이 상대에게 들킬까봐 전전긍긍했어요. 관심 있던 이성 앞에서 무리하게 돈을 쓰고 생활비 지출을 줄이는 경우가 잦았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웃기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네요. 그러면서도 자동차를 사지 않았던 건 신기하기는 합니다.
구구절절 공감합니다. 오웰이 지적한대로 가난은 결국 계급 제도와 사회 제도가 빛어내는 현상이 다 인지 책을 읽을수록 생각이 깊어지네요.
p.227_아침의 편안하고 느긋하던 기분은 산산이 부서져버렸다. 그 자리에 지긋지긋하고 괴롭고 익숙한 문제가 되돌아왔다. 돈 걱정. 8펜스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당장 실토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데 드는 돈을 그녀에게 빌려야 할 것이다. 한심하고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그의 용기를 북돋워주는 건 배 속에 든 와인뿐이었다.8펜스밖에 없다는 혐오스러운 감정과 와인의 온기가 고든의 몸 안에서 막상막하의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75쪽, [그 후로 엽란은 고든에게 일종의 상징이 되었다. 영국의 꽃, 엽란! 사자와 유니콘 대신 엽란이 우리의 문장(紋章)이 되어야 한다. 창가에 엽란들이 놓여 있는 한 영국에 혁명은 없으리.]
약간 딴 얘기인데 저희 동네 공원에 무궁화 화단이 생겼습니다. 저한테는 무궁화가 좀 이상한 꽃입니다. 실물보다 상징으로서 더 친숙한 꽃이니까요. 실물을 한참 보다 보니 이게 이렇게 큰 꽃이었나 싶더라고요. 계급장 같은 걸로 알다 보니 크기에 대한 감을 잡지 못했던 모양입니다.
한국 사회의 문장(紋章)을 풍자적으로 다시 정한다면 어떤 동물이나 식물이 좋을까요? 치킨의 주재료인 닭? 혹은 전 세계적으로 멸종위기종이지만 남한에는 아주 흔하며 우둔함과 로드킬의 대명사와도 같은 고라니? ‘○○이 있는 한 한국에 혁명은 없으리’라고 말할 수 있는 상징물이 뭘까요?
동식물이 아니라서 원하는 답변이 아닐수도 있지만 '부동산'은 어떨까요. 극빈층에서 최상류층까지 극단적인 고시원에서 한국 특유의 전세를 거쳐 투기에 이르기까지. 한국은 기형적으로 토지나 주택에 자금이 쏠려있다고 하는데. "주택이 없는 그대여, 이잣돈을 내기 위한 노-력을 하라. 상류층인 그대여, 가족의 명의로 된 토지가 개발되기를 고대하라. 그러면 이 세상은 평온해질 것이니."
와, 멋진데요. 구체적인 형태가 필요하다면 ‘주상복합아파트’로 할까요?
아마 그런 단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마침 같은 아파트라고 하더라도 임대주택과 자가주택 사이에 갈등이 빚어지는 일이 잦다고하고 실제로 그런 이야기를 다룬 단편 소설도 보았습니다. (김혜진의 『미애』)
아, 추천 감사합니다. 읽어보겠습니다. 김혜진 작가님이 한국 경제나 노동 문제를 잘 다뤄주셔서 속으로 흠모하고 있어요. 지향점이 비슷해 보이는 소설가들끼리 그런 테마로 앤솔로지를 내면 어떨까 생각도 하고 있는데, 잘 될지 모르겠습니다. ㅎㅎㅎ
지난해 말 최양선 작가님의 『세대주 오영선』을 읽었는데, 무척 좋았습니다. 부동산 문제가 이제 한국 소설의 소재가 됐구나 싶어 반가웠고요. 얼마 전에는 최하나 작가님이 『강남에 집을 샀어』라는 책을 내셨는데 부동산 문제를 다룬 추리소설이라고 해서 언젠가 읽어봐야겠다고 벼르고 있습니다(그런데 저는 이런 책이 너무 많아서 대부분 다 못 읽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 사이에 조남주 작가님의 『서영동 이야기』도 나왔네요. 서점 홍보 문구에는 ‘부동산 하이퍼리얼리즘 소설’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단어가 약간 와닿았습니다. (지만지본) "돈은 낙관주의의 대가요. 분명히 말하지만, 주당 5파운드씩 내게 주면 사회주의자가 되겠소." -168p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달리 극빈층에게 이외로 사회주의는 와닿는 단어가 아닙니다. 당장 하루의 일과, 일주일의 계획, 한 달의 지출을 생각하면 이데올로기적 문제는 공허할 뿐이죠. 오히려 상류층이라 할만한 레블스턴이 사회주의를 주장하는 이상한 장면까지 나옵니다.
76쪽, [좋아, 그렇다면 ‘성공’과 관련된 모든 것을 거부하리라. ‘성공하지’ 않는 것을 삶의 목적으로 삼으리라. 천국의 노예가 되느니 지옥의 왕이 되겠다. 열여섯 살에 이미 고든은 자신이 어느 편인지 알았다. 그는 돈의 신과 그 야비한 사제들의 적이 되었다. 돈에 선전포고를 했다. 물론 아무도 모르게 혼자서.]
아무도 모르게 혼자서 혼자 선전포고를 한 대상이 있으십니까? 저는 있습니다. 20대 시절에 거의 폭압적으로 느껴지던 수많은 긍정론들에 질려서 혼자 전쟁을 선포했지요. 절대 '나는 할 수 있다'는 마음으로 살지 않겠다고. 20년 동안 비관적인 견해를 쌓아올린 끝에 장렬히 패배했습니다(우울증 걸림). 사람은 긍정적인 마음가짐으로 살아야하더라고요.
요즘도 혼자 선전포고를 한 대상이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소셜미디어입니다. 책도 홍보해야 하고, 그믐 이벤트도 홍보해야 하니까 이용은 합니다만... 싸울 방법을 이것저것 모색하고 있고 그믐 활동도 그 중 하나입니다. 소셜미디어를 상대로 나 홀로 선전포고를 한 지는 몇 년 되지 않았는데 숙적이 생기니까 좋더라고요. ‘사람은 적수가 누구인지 알 때만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된다.’ 새뮤얼 헌팅턴의 말입니다. 제가 데뷔작에서도 두 번인가 인용했습니다.
그믐 자체도 소셜미디어의 정의에 해당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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