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쟁이님 너무 잘 읽었습니다. 저도 동감하면서, 맞아, 나도 그 부분은 그랬게 느꼈어, 이런 부분도 신경쓰였어, 하며 읽었어요. 제가 엔딩에 느끼는 미묘한 마음들을 상세하게 설명주셔서 읽는데 두근두근했답니다. 이 영화의 엔딩이면서 아이들의 생존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라서 더 마음에 걸리는 거 같아요.
저도 처음에 영화를 봤을 땐 당연히 죽었구나 결국 그렇게 됐구나, 생각했고요. @siouxsie 님이 언급하셨던 것처럼 미나토가 아이들이 죽었다고 꾼 꿈에서 감독님이 살아있다고 그러니 마음껏 내달려도 되고, 여태까지 내지 못한 큰 소리를 내도 된다고 하셨지요. 저도 그 말이 감동적이었지만 수지님 말씀대로 약간은 일부로 아이들을 위해서 하는 말 같다고도 느꼈고요. 그런데 영화에 대한 칼럼이나 정보를 찾아보고 여러 번 반복해서 보니까, 아 감독이 확실하게 아이들이 살아있다는 걸로 마무리를 맺었구나 싶었어요. 제가 생각한 것들을 나눠볼게요.
(이 이야기를 나누기 전! 아무래도 제가 모임지기이고 여러 번 봤다는 걸 언급하고 있어서 제 말이 정답이라고 강요하는 느낌이 들까 봐 걱정되는데요. 그렇게 느껴지지 않게 쓰려곤 하는데 미숙할 수 있습니다. 제 나름 알게 된 정보들을 나누는 정도로 받아드려주시길 부탁드리면서.. 마저 이야기해볼게요!)
태풍이 오기 전에 열차는 온전하게 세워져있었죠. 그런데 태풍이 오고 나서 열차가 옆으로 뉘어집니다. 그래서 창문으로 사오리(미나토 엄마)와 호리선생님이 아이들을 부르며 소리를 질렀지요. 그런데 아이들이 없어요. 어두 컴컴한 열차 내부와 네모 모양의 구멍이 장면으로 보여주고 장면이 전환됩니다. 그 네모 모양의 구멍은 반대쪽 창문일까 싶어요. 아이들이 그쪽으로 빠져나와서 밑에 연결된 배수구로 내려옵니다. 미나토가 먼저 내려오고 요리를 잡아주는 장면이 나오죠. 그리고 엉금엉금 기어서 좁은 배수구를 빠져나와요. 이 루트를 보여주면서 아이들이 생존되었다는 확실하고 현실적인 근거를 갖게 된다고 봤어요. 그리고 빠져나온 두 아이가 바깥으로 걸어나오고 "우린 다시 태어난 걸까?", "아니, 그런 건 없는 것 같아.", "다행이다." 라고 말하면서 환한 빛을 받으며 달려 나가는 거라고 봤어요. 아이들이 죽었다고 생각하는 이유 중에 기찻길에 막혀있던 철망이 사라진 게 환상이다, 라고 언급이 많이 되는 것 같은데요. 그건 태풍으로 인해 떨어져 날아갔다고 보고요. 그리고 사카모토 류이치의 <아쿠아>. 아이들이 그렇지 못한 현실에서도 스스로를 긍정했고, 아이들의 살아있음에 마음을 담아서 축복하려는 걸 느꼈어요. 마지막 밝은 빛이 아이들의 죽음을 떠올릴 수 있음에도, 내내 어두운 필터를 씌운 듯 불안하고 영화 속 아이들에게 햇살를 선물해주고 싶은 마음도 알 것 같았어요.
죽음이 아니라 아이들의 생존이 기쁘면서도 현실을 먼저 살고 있는 어른들은 자꾸 마음이 아프죠. 세계는 변하지 않았으니까요. 그 세계에서 아이들의 앞으로에 대한 걱정과 불안이 어른의 몫으로 남았고요. 이렇게 나름의 엔딩을 생각해서 설명하면서도 해소되지 않는 묵직함이 남아 있는 것 같아요.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공부>라는 책에서 해소되지 않는 질문의 긴장으로 나아가는 거라고 했는데요. <괴물>의 엔딩도 저희에게 그런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이 드네요. 끝내 풀리지 않아서 더 오래 맘에 두게 되고요.
아 그리고 고레에다 감독이 원래 마지막에는 포스터처럼 아이들이 달려나가다가 뒤돌아보는 걸로 영화를 끝내려고 했다고 했다네요. 그런데 고민하다가 뒤돌아서 관객을 보는 장면은 없앴다고 해요. 대신 포스터로 아이들의 마지막 시선이 관객을 보고 있다는 걸 보여준 것 같아요. 사실 엔딩에서 그 장면이 없앴음에도 느껴지고요. 그렇기 때문에 저희가 이렇게 만나서 이야기 나누고 아파하고 함께 고민하게 된 것 같습니다.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공부소수자의 건강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질문해 온 김승섭이 그간의 연구를 소개하는 공부의 기록이자, 그 과정에서 겪은 시행착오를 고백하는 분투의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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