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들다 보니 세상 돌아가는 일이 선과 악, 빛과 어둠으로 완벽히 갈리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더라고요. 저는 자기만 옳다는 확신을 가진 채 편을 가르며 절대적인 진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을 우리 사회에서 가장 위험하고 해가 되는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정치인뿐만 아니라 정치에 몰입한 사람 중에서도 그런 사람을 참 많이 봤습니다. 홍위병 같은 존재들 말이죠. 주인공과 전 여친의 이름 둘을 같게 설정한 것도 그런 생각을 반영한 결과이고요. 서 있는 위치가 다르면 다른 풍경이 보이는 법이잖아요. 내겐 똥차였던 사람이 남에겐 벤츠일 수도 있으니까요.
[장맥주북클럽] 2. 『괴로운 밤, 우린 춤을 추네』 함께 읽어요
D-29

꿀돼지

장맥주
누가 제일 좋아하는 색이 뭐냐고 믈어보면 회색이라고 답합니다. 그 사실이 자랑스럽습니다. 늘 경계인이고 싶습니다.

꿀돼지
저 역시 경계인을 지향하고 회색인 사람이 사회에 더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뉴스를 볼 때마다 극단으로 치닫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모든 걸 엉망으로 만들어 버리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어요.

장맥주
동감입니다. 극단주의자들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는 상황이 무섭습니다.
푸른태양
아... 너무 공감 합니다. 어릴 때는 잘 몰랐어요. 모든 세상을 내 중심으로만 생각했었는데... 나이가 드니 점점 중심에서 떨어져나와 세상을 보게 되더라고요. 저는 아직도 철이 덜 들어서 권선징악, 빌런과 히어로가 명확한 이야깃거리들을 좋아하긴 하지만... 세상은 절대 동화가 아니라는 생각을 절실히 깨달으며 살고 있습니다.
[현실은 '삼국사기'지 '삼국유사'가 아니야!] - 다시금 떠오르는 문장이네요.ㅎㅎ

꿀돼지
적당히 착하고, 적당히 정의로우며, 적당히 나쁘고, 적당히 비겁한 사람들이 서로 부대끼며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게 우리가 사는 세상이 아닐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게으른독서쟁이
맞습니다. 적당히의 선이 각자 다르다는 게 매우 어렵고 힘든 지점이지만 그렇게 부대끼는 게 우리 사는 세상이죠.
숨쉬는초록
1. 무슨 책이었는지 기억나진 않지만, 현대에 들어서 생명의 탄생과 죽음이 우리 일상에서 멀어졌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어요. 예전에는 집에서 산파의 도움으로 아이를 낳고 집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장례를 치렀는데, 이제는 생명의 탄생과 죽음이 전문가인 의사의 영역으로 넘어갔다고요. 요즘은 생로병사를 모두 의사에게 의존하는 것 같아요.
2. 중세 후기 유럽에서는 '죽음의 춤' (Danse Macabre)이라는 예술 장르가 유행했다고 합니다. 기근, 전쟁, 흑사병으로 숱한 죽음을 경험하면서 생겨난 예술 장르라고 해요.
이를 음악으로 표현한 것으로는 19세기 프랑스 작곡가 생상스의
교향시 <죽음의 무도>가 있어요.
https://youtu.be/Mhkg3umJdzI?feature=shared
김연아 님의 피겨스케이팅 프로그램 음악으로도 쓰였지요. https://youtu.be/0qMW8ZJsU_c?feature=shared

장맥주
『문명화과정』을 쓴 노르베르트 엘리아스의 『죽어가는 자의 고독』 아니었을는지요. 저 어릴 때만 해도 댁에서 돌아가시는 분들이 계셨고 장례도 집에서 치르는 경우가 간혹 있었는데 요즘은 도통 못 본 거 같습니다.
《죽음의 무도》는 생상스의 관현악곡만 알고 있었는데 이게 하나의 장르인 줄 몰랐습니다. 중세 후기 유럽의 한 문화에서 비롯된 건줄도 몰랐고요.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죽어가는 자의 고독 - 개정판<문명화 과정>으로 사회학계의 거장 반열에 오른 노르베르트 엘리아스가 말년에 남긴 죽음에 대한 성찰, 고독한 죽음의 사회학이다. 현대인은 전례없이 풍요로운 시대를 살고 있고 평균수명도 크게 늘었지만, 오히려 외로운 죽음은 점점 늘고 있다.

문명화과정 1근대 유럽문명의 심리적이고 사회적인 기원을 밝히는 엘리아스의 역저. 서구 상류층 사람들의 일상 의례를 역사적으로 비교 분석하였다. 엘리아스는 12∼19세기의 식사예법, 방뇨행위, 코 풀고 침 뱉는 행위, 잠자는 습관, 남녀 관계 등 일상의 변화를 살핀 뒤 문명화 과정이 개인적인 차원에서 시작되어 오랜 시간에 걸쳐 형성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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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쉬는초록
2. 삶이란 무엇일까요?
믿었던 사람의 배신, 소중한 사람의 질병이나 죽음, 사고나 재난, 전쟁을 겪을 때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다고 느낄 겁니다. 내가 지금껏 알아왔고 믿었던 세계가 무너지는 경험. 지금까지의 내 삶이 부정당하는 경험.
삶은 이해하고 납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많은 사람들이 납득할 수 있다면, 그건 규범, 관습, 지식, 언어의 영역 안에 있기 때문일 겁니다. 삶은 규범, 관습, 지식 (앎), 언어의 영역을 넘어선다고 생각해요. 소중한 사람을 잃고 어찌 제정신일 수 있을까요. 나의 세계가 무너지는데 어찌 남들이 납득할 수 있게, 규범에 맞게 행동할 수 있을까요?
지수 남편의 직업을 안과 의사로 설정한 것도 작가님께서 의도하신 건가요? 남의 눈을 고쳐주는 사람이 정작 자기 아내의 마음을 '들여다보지' 못했고 아내의 죽음을 '예견'하지 못했죠. 인간이 아무리 똑똑하다고 해도 자신과 타인에 대해, 삶과 죽음에 대해, 이 세계에 대해 알지 못하죠. 무지한 자신의 눈을 찔렀던 오이디푸스 왕이 떠오르네요.
지수 남편이 조문하러 온 화자에게 "당신을 압니다"라고 말하죠. 지수 남편은 무엇을 안다고 말하는 걸까요? 화자의 이름을? 그의 존재를? 상처를? 감정을? 생각을? 삶을?
지수 남편은 자신이 모른다는 걸 알까요? 아는 줄 알았는데 자신의 앎대로 삶이 굴러가지 않아서 미친 사람처럼 노래부르는 걸까요?

장맥주
덕분에 무심코 지나쳤던 대목들을 천천히 곱씹게 되네요. 저는 안과 의사는 수입이 좋지, 하고 넘겼는데요. "당신을 압니다"라는 말도 그 표현에 대해 여러 가지를 생각해보게 됩니다. 지수 남편은 그 순간 자신이 알던 것이 모두 무너지는 상태이고 그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무심결에 "선생님 말씀 들었습니다"가 아니라 "당신을 압니다"라고 말했던 건 아닐지, 그 말이 사실의 진술이 아니라 세상에 대한 그의 주장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드네요.
숨쉬는초록
아...그렇게 볼 수도 있겠군요. 자신의 앎이 무너지는 걸 받아들이기 힘들어서 "자신은 알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장맥주
뭔가를 주장할 때 자신에게 주장할 것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자존감에 조금 보탬이 될 때가 있더라고요.
숨쉬는초록
3. 화자는 역사학도이면서도 이야기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사건(역사)만으로는 삶과 세계를 다 그릴 수 없습니다. 지수의 죽음 이후에 남은 이야기, 남아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역사에 삶의 이야기가 채워져야, 나와 타인의 이야기가 더해져야 이해하기 어려운 삶을 그려낼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제 세계가 무너지는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오랫동안 생각하는 것도, 글 쓰는 것도 힘들었어요. 머릿속엔 헝클어진 실타래가 그득했고 마음속엔 뿌연 물로 가득 차서 바닥을 들여다볼 수 없었어요. 헝클어진 실타래를 풀어보려고 글을 쓰려하면 내 심정을 담아낼 단어를 찾을 수 없었고 문장을 갖추지 못한 분절된 단어들만 흩어놓곤 했어요. 나의 세계가 무너졌는데, 그 누구도 내 삶을 이해하기 힘든데, 기막힌 내 심정과 삶을 지금까지 알던 언어로 그려낼 수 있을리가...
지금 이렇게 글을 쓸 수 있는 건, 오랜 시간에 걸쳐 어찌할 수 없는 일은 받아들이려고 애써왔고, 힘든 삶 가운데 여기저기 박혀있는, 눈부신 햇살 조각, 산들바람, 웃음을 발견했기 때문이에요. 지금 내가 누리는 것에 감사하려고 노력하기도 하고요. 생각해보면 운이 나쁘기도 했지만 운이 좋기도 했어요. 삶이 버겁긴 하지만 불행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어요. 그저 운이 나빴을 뿐이에요. 그런데 운이 나쁘다고만 말할 수 없는 게 시련을 겪으며 배우고 깨달으며 성장하기도 했거든요.
이 작품 속 인물의 이야기를 들여다보면서, 삶이란 납득할 수 있는 게 아니란 걸, 내 삶만 힘든 게 아니란 걸, 삶은 나를 배신하기도 한다는 걸, 모든 사람들은 살면서 힘든 순간을 겪는다는 걸 또다시 느끼고 위로받았어요. 이야기가 삶을 구하고 나를 구한다고 생각해요. 자신과 타인을 구하기 위해 글을 쓴다는 아니 에르노의 말이 떠오릅니다. 작가님도 글쓰기로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을 구하시는 겁니다.

꿀돼지
독자분의 감상이나 분석에는 끼어들지 않고 관망하려고 했는데, 신기해서 몇 마디 보태고 갑니다. 2009년에 이 소설을 쓸 당시 제 머릿속을 들여다보신 것 같아서요. 몇 가지는 다시 한번 짚고 가야겠습니다. 독자는 작가보다 종종 더 많은 것을 안다는 느낌을 다시 한번 받고 갑니다.
1. 세상 돌아가는 일에 절대적인 게 없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 주인공과 전 연인의 이름을 똑같이 지었습니다.
2. 지수의 남편을 안과 의사로 설정한 이유도 말씀해 주신 의도와 거의 일치합니다. 많은 가족이 몸만 같이 살 뿐 마음속은 들여다보지 못하고 살지 않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제가 오래 사귄 첫사랑에 대해 잘 몰랐듯이.
숨쉬는초록
작가님도, 저도 자신의 세계가 무너지는 경험을 했다는 공통점이 있어서, 비슷하게 느끼고 생각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

장맥주
감사한 말씀입니다. 글을 쓰면서 다른 사람을 구한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어요. 오히려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겠다는 마음으로 글을 쓰곤 했어요. 그 자체에 대해서는 의의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계속 이런 글을 쓸지, 아니면 제 글이 바뀔지는 저도 모르겠어요. 일단은 팔리는 글부터 써야 하지만...
게으른독서쟁이
슬프지만 슬프게 보이지 않으려 노력하는 모습이 더 슬퍼 보이는 법입니다.
『괴로운 밤, 우린 춤을 추네 - 정진영 소설집』 <괴로운 밤, 우린 춤을 추네> p. 28, 정진영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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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른독서쟁이
이 작품 내에서 가장 공감이 가는 문장이긴 한데 사실 저는 슬프지만 슬프게 보이지 않으려 노력하는 모습보다는 슬프게 보이지 않으려 노력하는게 아니라 그저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이 항상 더 가슴아프고 슬프게 다가오더라고요.
초연한 것도 아니고 슬프게 보이지 않으려고 일부러 애쓰는 것도 아니고 어쩔 수 없이 담담해보이는... 감정을 숨기는 게 아니라 상황을 잘 이해하고 받아들인 게 아니라 어떤 감정인지 잘 느끼지 못하고 어떻게 표현해야하는지 잘 몰라서 그저 담담해 보이는 것 같은 모습이랄까... ??
특히 감정을 마구 드러내도 되는 어린 아이들이 그럴수록 더 슬프고 그렇더라고요. 모든 아이들이 빨리 철들지 않으면 좋겠어요. 빨리 철들고 어른스러운 아이들을 생각하면 저는 그냥 막 속상해요. 어른들이 그렇게 만든 것 같아서....
푸른태양
[나는 지수의 죽음을 직접 보지 못했다. 나는 그저 지수와 나눈 추억을 서랍 속에 잠시 넣어두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나와 지수는 아직 이별하지 않았다. 나는 말도 안 되 는 억지 논리를 펼치며 지수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 저는 이 부분을 읽다가 문득 나도 그런 것은 아닐까 되짚어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일이 너무 버거워서 회피하고 있던 것일까? 그래서 나의 밤이 괴로워진 것일까? 그렇게 복잡한 심정으로 읽으면서, 인물들 모두의 복잡한 상황과 사정과 감정들을 이해할 것만 같은 그런 단편이었다고나 할까요. 그래서 저는 [온갖 쌍시옷이 들어간 접두어를 더해 인물들 모두다 그냥 행복해지면 좋겠다라는 말을 씹어서 뱉어냈]습니다.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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