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과 공학은 장애를 극복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저도 느끼지만, 그것이 장애인들에게 사회적 환경이나 여건이 비장애인의 생활만큼 보장되지 않는 소수자의 위치 때문에, 소수자가 시스템에 맞춰서 스스로를 바뀌려는 방향으로 가는 건 아닌가 생각도 들어요. 장애를 '극복'의 시각으로 보는 것에 대한 고민이 좀 있고요. 영영 극복되지 않는 장애에 대한 생각도 스칩니다. 하반신을 움직일 수 없는 분이 걷거나 뛰는 것 자체를 원할까, 아니면 자유롭게 문화생활을 하거나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은 걸까 고민했어요. 만약 후자의 상황이 잘 보장되는 환경이라면 꼭 걷거나 뛰고 싶다는 열망을 가질까? 라는 생각도 하고요.
저의 회사 동료 자녀분이 지체 장애를 가지고 있고, 가까운 지인이 특수 교사이고, 글을 사랑하는 저의 친한 친구가 계단을 사용하거나 빠르게 걷거나 하지 못하는, 움직임이 어려운 병을 가지고 있는데요. (어떤 병인지, 장애로 명명되는 건지는 모르겠습니다. 따로 캐묻진 않았어요.) 최근에 그믐 북클럽의 선정도서였던 김승섭 저자의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공부>책을 읽으면서도 장애와 병을 가진 저의 지인들이 떠오르며 생각이 많아지더라고요. 장애와 다를 수도 있겠지만 최근에 우울증을 앓은 지인이 약을 먹고 우울의 증상이 사라졌을 때, 자신의 일부가 사라진 느낌을 받았다고도 하고요.
소연이가 나눴던 필담도 비장애인의 세계에선 당연한 대화처럼, 소연이에게는 부족함 없이 진심으로 정확하게 범우를 향한 이야기를 한 거라고 볼 순 없을까, 목소리가 아니라고 아쉽거나 부족하다고 느낄 수밖에 없는 인식은 어디서 오는걸까, 이런 인식 바깥에서 소연이와 범우가 함께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싶었어요. 갑자기 벚꽃이 피어날 수 있는 가상의 공간인데, 소연이가 '말'을 활용해서 전달하지 않아도 범우가 소연이와 소통할 순 없었을까 생각해보기도 했고요.
물론 제가 생각한 방식으로 소설이 진행될 필요는 없지요. 소설에서 도덕적 옳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지도 않고요. 그냥, 그게 정말 소연이의 행복일까?라는 고민을 해봤어요. 이런 생각을 하는 독자도 있더라 참고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관련해서 김승섭님이 번역한 킴 닐슨의 <장애의 역사>라는 책도 떠오릅니다. 이 책은 소장 중이고 아직 읽진 못했는데요. 그래도 책 꽂기에 같이 꽂아둡니다. 위의 대화에서 <아픔이 길이 되려면>이라는 김승섭 저자의 다른 책도 언급이 된 걸 봤는데요. 김승섭 저자의 관련 책이 자꾸 나오네요.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공부소수자의 건강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질문해 온 김승섭이 그간의 연구를 소개하는 공부의 기록이자, 그 과정에서 겪은 시행착오를 고백하는 분투의 기록이다.

장애의 역사 - 침묵과 고립에 맞서 빼앗긴 몸을 되찾는 투쟁의 연대기『아픔이 길이 되려면』 『우리 몸이 세계라면』 몸을 사유하며 건강한 사회를 질문하는 세 번째 여정. 김승섭 교수 번역·해설. 장애라는 프리즘을 통해 미국 역사를 다시 바라보고 읽으며 몸의 정의, 정상성의 정의에 대해 질문하고,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책장 바로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