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일본 사소설 작가들은 작품 소재가 떨어지면 바람을 피운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작가님들의 이처럼 치열한 직업정신 덕분에 저희가 즐겁고, 감동적이고, 또 생각하는 시간을 갖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장맥주북클럽] 2. 『괴로운 밤, 우린 춤을 추네』 함께 읽어요
D-29

SooHey

꿀돼지
소재가 떨어지면 바람을 피운다... 이거 범죄를 소재로 소설을 쓰면 범죄를 저지르겠군요 ㅎ

거북별85
ㅎㅎ 칭찬으로 들어야 하는 거겠지요~^^;; 저도 너무 실감나는 소설을 읽을 때마다 살짝 의심하게 되긴 하더라구요 작가님보고 들은 소재로 그렇게 풀어나가시는게 대단하세요
배우분들께서 악역 연기를 너무 잘할 때마다 아주머니 팬들한테 등짝 스매싱 당하시는 것처럼요~~^^

꿀돼지
실제로 몇 년 전 제 아내가 일일드라마에서 얄미운 역할을 했을 때 길에서 할머니들이 등짝 스매싱(장난이 반쯤 섞인)을 하시더군요. 말로만 들은 이야기를 직접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아내는 이미 몇 번 겪어봤는지 웃으며 넘기더라고요.

장맥주
정말 그런 분들이 계시군요. 가상현실 기기가 필요 없네요. ^^

선경서재
17. 영생하는 사람과의 사랑이라... 드라마 <구미호뎐>의 이동욱이 생각나네요. ^^ 한 사람만을 사랑하고 싶은 것은 욕심일까요? "당신이 죽을 때까지 당신과 함께하기보다는 당신과 잠시 스치는 인연으로 만나는 게 가슴이 덜 아프다는 사실을요. 저는 이미 제 앞에서 죽어가는 당신의 모습을 여러 번 지켜봤어요. 당신이 가졌던 많은 이름을 모두 기억하진 못하지만, 이별의 순간에 관한 기억만큼은 아직도 제 가슴에 전부 깊게 남아 있어요. 마치 나무에 박힌 못을 뽑아내도 그 흔적은 그대로 남아 있듯이 말이죠. 저는 당신과 짧게 만나되 영원히 만나는 길을 선택했어요.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흘러도 당신은 언젠가 반드시 지금과 또 다른 모습으로 제 앞에 나타날 테니까요. 그렇게 되면 저는 늘 당신에게 새로 운 여자이고 당신은 제게 새로운 남자일 테니 얼마나 설레는 일인가요? " p176 웅녀의 말이 답이 되어주는 듯 합니다.

지호림
저는 당신과 짧게 만나되 영원히 만나는 길을 선택했어요.
『괴로운 밤, 우린 춤을 추네 - 정진영 소설집』 234쪽, 정진영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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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rasoop
사랑의 유통기한은 장편으로 다시 써 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이대로 끝내기에는 이야기가 너무 많이 담겨 있네요~
화제로 지정된 대화

장맥주
@모임
18. 웅녀는 사랑하는 이가 나이 들어 고생하다 세상을 떠나더라도 자신은 건강하게 지내며 그걸 지켜봐야만 하는 운명입니다. 그러다 보니 ‘죽을 때까지 함께하기보다는 잠시 스치는 인연으로 만나는 게 가슴이 덜 아프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저는 이 단편을 읽으며 조금 엉뚱하게 반려동물의 운명들에 생각했어요. 우리가 사랑하는 반려동물들은 대부분 우리보다 수명이 짧습니다. 그리고 그들 역시 생의 마지막에 많은 고통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인간과 달리 ‘존엄하게 죽고 싶다’는 의사 표시를 하지 못합니다. 너무 나이 들고 치료할 수 없는 병에 걸린 반려동물에 대해 안락사라는 결정을 내리는 사람도 있지요. 여러분은 사랑하는 반려동물이 고 통스러운 불치병에 걸리거나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노쇠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죽을 때까지 함께 하기’를 선택하실 건가요, 아니면 신은 아니지만 그들이 보기에는 신과 같은 존재인 여러분이 그들의 운명을 거두어가는 게 책임 있는 자세라고 보시나요?

마키아벨리1
어려서는 반려동물 특히 강아지를 정말 좋아했지만 다양한 종류의 이별을 경험하면서 반려동물과 같이 하는 것을 이제는 피하고 있습니다. 반려동물과 사는 생활을 오랜 기간 하지 않아 확실하지는 않지만 제 생각으로는 고통스러운 불치병에 걸린 경우는 고통을 덜어주는 쪽으로, 하지만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노쇠한 경우는 끝까지 함께 하는 길을 택할 것 같습니다.

장맥주
제가 이별하는 게 너무 슬플 거 같아 개를 키우지 않았는데 부모님이 키우시는 개가 요즘은 삶의 커다란 낙이에요. 부모님이 당신들도 연로해지시고 그 개도 나이 들면 저더러 데리고 가라고 하시는데 그럴 생각입니다. 저는 제 개가 말은 하지 못해도 정말 고통스러운 상황에 있는 것 같다고 판단되면 안락사를 시키게 될 거 같습니다(확신은 없네요). 그것까지도 그 아이에 대한 저의 책임이라고 생각해서요.
쩡이
사람이든 동물이든 생명이 있는 것에 인간이 멋대로 개입하거나 판단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해요. 태어날 때 우리가 태어나고 싶다고 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듯이 죽음도 죽고 싶다고 해서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거나 남에게 죽음을 의뢰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죽을 때까지 함께 하는 것이 인간의 도리라고 생각해요. 삶이 나의 선택이 아니듯이 죽음 또한 그렇다고 생각해요. 삶과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1인입니다.

장맥주
‘죽음보다 못한 삶’이 있느냐는 문제에 답하기 늘 조심스러워요. 제 경우에는 소설이나 영화에 나오는 끔찍한 고문을 받고 있다면 그 고통을 이어가기보다 죽음을 택할 거 같거든요. 누가 죽여주기를 바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로서는 상상이 되지 않는 고통을 강인한 의지와 희망으로 이겨내시는 분들이 있다는 사실도 분명하지요.

로미
정말 쉽게 대답할 수 없는 질문 같아요. 가족처럼 지낸 반려동물의 목숨을 사람이란 이유로 좌지우지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죠.
스위스나 안락사를 허용하는 나라들의 사례를 참고로 반려동물에게도 적용할 수 있는 안락사 시스템이 체계적으로 생길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연해
어릴 때 반려동물을 키웠던 적이 있는데, 너무 수명이 짧았던 아이들(올챙이, 병아리, 햄스터 등)이라 깊이 정들기도 전에 죽음을 맞이해 땅에 묻어줬던 기억이 납니다. 그나마 오래(?) 키웠던 거북이도 지방으로 이사가던 때에 다른 분에게 부탁드렸었고요.
근데 만약 지금 나이에 반려동물을 키우게 된다면, 그리고 그 아이가 불치병에 걸리거나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노쇠한다면... 과연 제가 그 아이의 죽음을 선택할 자격이 있는지는 여전히 모르겠습니다. 고통스러워도 연명하기를 바라는지 아니면 차라리 죽음을 바라는지 그 아이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으니까요. 제 욕심만 생각하면 계속 함께 있고 싶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제 욕심일 뿐이라 더 조심스러운 것 같아요.
다만 저는 안락사 자체에는 어느 정도 찬성하는 편입니다. 어디까지나 제 목숨에 한해서는요(합법화는 악용될 수 있어 반대하는 편). 전에 장작가님 블로그에도 죽음에 대해 비슷한 댓글을 달았던 적이 있는데, 가령 삶이 힘들어 자살하려는 사람이 있을 때, 과연 우리가 그 사람의 죽음을 막을 수 있는 타당한 근거(?)가 있느냐는 글을 남겼었죠. 언젠가 좋은 때가 올 거라는 책임 없는 공수표나 생명은 아름답고 소중하다는 근거 없는 말 외에 어떤 말로 상대를 설득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었죠. 과학적인 이유로 그 사람을 설득하고 싶은 욕심도 없고요.
이 글을 써 내려갈수록 글이 어두워질까 봐 살짝 걱정이 되기도 하는데, 인생을 고작 34년 밖에 살아보지 않은 제가 감히 건방지게 삶에 대한 미련이 없다고 떠들고 싶은 것은 아닙니다(저는 지금 제 삶이 충분히 즐겁거든요). 다만, 삶의 목적을 잃고 방황할 때, 우울함이 급속도로 심해졌을 때 종종 죽음에 대해 생각했던 적이 있었던 것 같아요. 태어난 것을 선택한 것이 아닌 것처럼 죽음에 대해서도 선택할 권리가 없다면 좀 억울할 것 같아서요. 특히나 고통까지 안고 있다면 더더욱 안락사에 대해 생각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작가님의 질문으로 돌아가 반려동물의 운명을 거두어가는 게 책임 있는 자세인지는 여전히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더 키울 자신이 없어요. 어떤 방식으로든 이별은 늘 아픈 것 같습니다. 사람이 오고 가는 것에 꽤 무던한 편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아쉬움이 없는 관계일 때나 가능한 일이고, 좋았던 관계는 작별의 순간이 다가올수록 마음 한구석이 여전히 아린 것 같아요.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고 어느 정도의 경험치가 쌓여야 만나고 헤어지는 일들에 일일이 마음 쓰지않고 덤덤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넬 수 있을지 여전히 어렵습니다.

새벽서가
저는 2022년 2월 25일에 반려묘를 잃었어요. 만 4세 생일을 지낸 아이였고, 제가 우윳병을 줘가며 키워서 제가 낳은 아이들이 보행기에 앉아 있을 나이때 그랬던 것처럼 화장실조차 따라오는 엄마 바라기같은 그런 아이였어요. 일요일밤에 화장실을 못가고 안절부절하는 모습을 보고 다음날 아침에 재택근무였던 남편에게 동물병원에 데려가 달라는 부탁을 하고 저는 출근을 했었더랬죠. 아이에게 필요하다며 응급 수술에 들어갔고,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세 차례의 응급수술과 입퇴원을 반복하다가 금요일밤 자정전 상태가 이상함을 감지하고 응급실로 운전해 가던중 제 품에서 마지막 숨을 내쉬었습니다. 일이 생기고 나서야 동물병원 원장님이 후회하듯 말해주더라구요. 수 술을 잘 받고 평범하게 살아갈 가능성인 30%도 안되었다고. 그런 아이를 몇차례 수술을 하고 괴롭게 하다가 보냈다니, 제게 알려주셨다면 전 그 아이가 최소한의 고통을 받다가 무지개다리를 건널 수 있도록 도왔을거에요. 우리가 신이 아니니 아무리 반려견/묘라 하더라도 그들의 마지막 순간이 언제일지 결정하는건 가벼운 문제가 아니라 생각합니다. 다만, 반려하던 아이들이 고통에 있다면 그 고통을 최소화해주는 것이 함께 살아온 집사/가족의 의무와 사랑의 태도라고 생각해요.

장맥주
@연해 @새벽서가
새벽서가님 그런 일이 있으셨군요. 심심한 위로 말씀을 보냅니다. 이 질문을 드릴 때는 솔직히 저도 제 답은 없었거든요. 그런데 말씀 듣고 보니 저도 새벽서가님 같은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그것이 평등하지 않은 관계에서 인간이 지녀야 할 의무와 사랑의 태도라고 생각해요.
저도 연해님처럼 어린 시절 올챙이, 병아리, 햄스터, 거북이를 키우다 떠나보냈네요. 그때도 마음이 아팠지만(특히 햄스터가 떠났을 때) 개와 고양이처럼 인간과 교감하는 동물과 이별은 더 견딜 수 없을 거 같습니다. 그런 마음을 보면 ‘생명에는 경중이 없다’는 말을 제가 받아들이지 못하는 건 분명해요. 심지어 꽤 타당한 논리적인 이유도 만들어낼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오랫동안 개를 너무 사랑하면서도 키우지 않은 이유도 그 때문이었어요. 한때는 어떤 주인 없는 개와 운명적인 만남을 할 수 있기를 아이처럼 은근히 소망하기도 했습니다. 제가 입양하려고 한 게 아니라, 입양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어 키우는 시나리오였죠. 동네에서 길 잃은 개를 만난 적이 한 번 있는데 그때 진지하게 이게 운명인가, 이 아이를 키워야 하나 하고 즐거운 고민을 했어요. 다행히 30분쯤 뒤에 주인을 찾았습니다.
이별에 덤덤하게 웃을 수 있을 거 같지는 않지만, 나이가 좀 더 들면 개를 입양하고 싶습니다. 아낌없이 사랑을 주고, 제가 그 아이의 운명을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 왔을 때, 책임을 피하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맑은주
고통을 최소한으로 낮출 수 있는 약물치료를 받으면서 같이 보낼 수 있는 시간을 최대한으로 마련하고 싶어요. 근데 이건 반려동물과 함께하지 않는 지금의 생각일 뿐이고, 현실이 되면 어떤 결정을 하게 될지 저도 모르겠어요. 정말 어려운 질문이에요.

거북별85
18 반려동물이라면 고통스러운 불치병을 옆에서 계속 지켜보고 있기 힘들거 같네요 만일 죽을 때까지 함께 하기를 선택한다면 그냥 살려두는게 아니라 죽음을 준비하는 그들 옆에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어야 하는게 아닌가 싶네요
고통스러운 불치병을 겪는 반려견을 홀로 집에서 겪는건 사랑이라기 보다 고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빨강말랑
제가 수십년전 키우던 마당개(진도믹스)는 존엄하게 죽어갔다고 생각해요. 나이 많은 암컷 개였는데 어느 순간부터 동네 개들과 잦은 다툼을 하더니 어느 날은 피를 잔뜩 흘리며 돌아왔더라구요. 이걸 어쩌나, 좀 지켜보자 하고 있었는데, 다음 날에 사라졌습니다. 저는 그 강아지가 자신의 죽음을 알리지 않기 위해서 멀리 가서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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