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천재 푸네스] 이 단편의 스페인어 제목은 ⟨FUNES EL MEMORIOSO⟩이고, 영역본 제목은 ⟨FUNES THE MEMORIOUS⟩입니다. 개인적으로 '천재'라는 늬앙스까지는 과해 보입니다만, 비상한 기억력을 강조하는 표현으로 이해하면 될 것 같습니다. 푸네스는 비상한 기억력을 갖게 되었지만 그 때문에 도저히 잠에 들 수 없을 정도여서 저주라고 불러야 할 정도입니다. 흔히 우리는 '기억'에 '힘 력(力)' 자를 붙여서 '기억력'이라고 부릅니다. 기억은 어떤 능력에 가깝고, 기억력이라고 할 때 그 능력은 일종의 '암기력'에 더 가깝게 받아들여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학자들은 기억과 암기는 다를 뿐 아니라 기억 작용의 핵심에는 망각이 있다고 말합니다. 이 망각으로써 개별적인 경험은 테두리가 깎여나간 강가의 조약돌처럼 일반화되고 개념화되면서 비로소 유의미해집니다.
망각은 변화하는 환경에 더 잘 대처할 수 있도록 해준다는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 특정 장소에서 쥐에게 약한 전기충격을 주면 쥐는 다시 그 장소에 들어갔을 때 공포를 느낍니다. 처음에는 공포 기억이 생겼던 환경에서만 공포 반응을 보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유사한 환경에서도 공포 반응을 느끼는 일반화 현상이 일어납니다. 하지만 망각하지 못하도록 조작된 쥐는 일반화된 공포 반응을 보이지 않고, 종내에는 더 위험한 상황에 처한다고 합니다. 푸네스의 완벽한 기억력이 역설적이게도 결함투성이인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모든 경험을 기억하지만 그것들을 유의미하게 분류하지는 못하는 거대한 용량의 데이터 저장 장치와도 같습니다. 각각의 정보를 인간이 일반화해서 범주화하기 위해서는 그 유사성을 인식해야 하지만 푸네스에게는 "모든 숲의 모든 나무들의 모든 나뭇잎"이 다르게 보였던 탓입니다. 나중에 푸네스는 "독창적인 숫자 체계"를 고안해내는데요, 숫자 하나하나를 기호로 보고 자신의 경험을 각각에 대응시키는 식입니다. 그런데 숫자와 대응되는 경험들 사이에는 아무런 관련성이 없습니다. 푸네스가 왜 하필 숫자를 택했는지는 쉽게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 숫자는 무한하기 때문에 각각에 대응되는 경험이 무한해도 상관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숫자는 단순한 기호가 아니라 수 체계를 지닙니다. 따라서 푸네스에게 시간은 수 체계에 따라 순서대로 적층되는 시계열을 따르지 않고, 각각이 따로 떨어져 있는 1초 이후의 새로운 1초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잠들지 못했을 테고요.
이런 푸네스는 은유를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은유는 단순히 시적인 표현법에만 국한되지는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은유는 유사성과 차이성의 긴장을 품은 사고의 추상화를 보여준다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은유에서는 'A는 B다'라고 말하면서 두 관념 사이를 단번에 잇습니다. 이때 주목해야 하는 것은 유사성입니다. 즉, 범주화에 필요한 미세한 차이를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것입니다. (한 철학자도 말한 바 있습니다. '먼지 하나도 똑같지 않기 때문에 논리학의 동일성을 받아들이려면 대강 보는 눈이 필요하다.') 이 정신의 은유 작용을 필요한 정도에 따라서 섬세하게 조절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지닌 독특한 능력입니다. 지나치게 세세한 디테일에 주목하게 되면 은유 작용은 일어나지 않을텐데, 아마 세상 모든 사물에 라벨을 붙이다 죽게 될 지도 모릅니다. 본문에서 존 로크가 17세기에 모든 사물에 고유한 이름을 붙이려는 시도가 실패로 돌아간 것도 이와 비슷하지 않나 합니다. 머신러닝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오래전부터 인간이 추상화하는 능력을 통해서 어떻게 사물을 범주화하는지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2018년, AI가 블루베리머핀과 치와와를 구분하지 못한다는 짤이 돈 것도 비슷한 맥락입니다. 물론 지금은 상황이 달라져서 AI가 인간 수준을 뛰어넘는다고 합니다만, 앞선 사례를 단순히 웃어넘기지 말고 진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아무리 어리숙한 사람이라도 치와와와 블루베리머핀을 즉시 구분할 줄 압니다. 이는 놀라운 일입니다. 머신러닝 개발자들은 머핀과 치와와를 단번에 구분하는 인간의 이 자연스러운 인지 과정을, '전혀 자연스럽지 않은' 인위적인 연산 과정으로 기계에게 학습시려고 갖은 노력을 해왔습니다.
여담으로, 올리버 색스의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에서는 푸네스의 정반대 사례가 등장하니 한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개정판. 일상생활에 불편을 겪는 경증 환자부터 현실과 완전히 격리될 정도로 중증의 정신질환을 겪는 환자들까지 올리버 색스가 엄밀히 관찰하고 따뜻하게 써낸 '우리와는 조금 다른' 사람들의 독특한 임상 기록이다.

6은 나무 7은 돌고래박상순의 시는 우리 시의 새로운 방향을 암시하는 매우 전위적이고 따라서 낯선 느낌이 드는 시이다. 어느 시대에나 전위적인 예술가들은 당대의 미적 인식을 부정하는 자기 파괴성을 보여준다. ─이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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