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신자와 영웅에 관한 논고] 보르헤스가 한 이야기를 구상하고 있음을 고지하고 있는 첫 문단은 입구입니다. 이는 영화관이나 미술관, 아니면 편집숍에 들어가는 행위와 같습니다. 우리는 어떤 공간의 입구로 들어서면서 그 공간에서 누릴법한 경험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암묵적 합의하에 행동합니다. 예컨대 편집숍에 들어가서 옷을 갈아 입을 공간을 찾는다거나, 영화관에서 휴대전화를 끄고 조용히 한다거나 하는 행위들은 그 공간에 들어설 때부터 우리가 요구받지 않아도 암묵적으로 행하는 것들입니다. 보르헤스가 제시하는 첫 문단도 마찬가진데요, 이는 '픽션 면책 조항'처럼 기능합니다. 좀 싸구려(?)처럼 말하면 '이제 구라 좀 풀게'와 같습니다. (약간 딴 얘기를 하자면, 보르헤스의 소설에서는 꽤 다양한 픽션 면책 조항이 있습니다.)
픽션 면책 조항(All persons fictitious disclaimer)이란 영화나 드라마 앞 쪽에 "본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 제품 및 단체는 실재와 무관한 것으로 허구임을 밝힙니다" 따위의 문구를 말합니다. 이는 두 가지 기능을 하는데요, (1) 픽션이 현실의 인물을 공공연히 암시해서 명예를 훼손하거나 사실을 왜곡할 목적으로 작품을 만들지 않았음을 사전에 고지함으로써 향후 법적 분쟁을 피하기 위한 수단임과 동시에 (2) 곧 막이 올라가고 픽션이 시작될 것임을 알려주는 표지입니다. 이 단편에서는 두 번째 기능에 더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 같습니다. 여담이지만 저러한 면책 조항은 모든 픽션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뒤집어 말하면, 픽션 면책 조항은 해당 작품이 현실과 매우 근접하다는 것, 나아가 법과 법 아닌 것의 경계에 놓여 있다는 것, 일정 정도 분쟁이 불가피할 정도로 픽션이 현실을 강하게 흡인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본문 얘기를 해보면, 이 소설은 다양한 레이어가 있어서 조금 복잡하게 느껴집니다. 바깥쪽에는 화자인 라이언이 있고, 좀 더 파고들면 그의 증조부인 퍼거스 킬패트릭과 그런 킬패트릭의 죽음을 역사적 사건으로 만들고자 했던 번역가이자 동료 제임스 알렉산더 놀란이 있는 식입니다. 아일랜드 역사를 무대로 한 연극은 또 하나의 역사가 됩니다. 킬패트릭은 놀란의 기획에 힘입어 문학을 연극함으로써 해방 운동이라는 역사를 창출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킬패트릭의 역사는 실존하는 역사가 아니라 보르헤스의 머릿속 허구라는 점에서 한편의 문학에 종속됩니다. 그렇다면 이는 역사가 역사를 표절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역사가 문학을, 문학이 역사를 표절함으로써 종내에는 문학이 문학을 모방하는 이야기로 나아갑니다. 이는 역사와 문학이 얼마나 밀접한 위치에 놓여있는지를 방증합니다. '픽션 면책 조항'을 떠올려 보세요. 현실과 픽션의 경계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는 곳에서만 우리는 '픽션 면책 조항'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저는 현실과 가상의 경계가 무너진다는 말을 믿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늘 어느 한쪽을 명확하게 선택하고 있으니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