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오 그런 의혹을 받았군요. 하긴 저도 줄리아 크리스테바 이름만 들어보고 책은 추리소설도 문학평론 책들도 못 읽어봐서 가장 생소했는데 다행히 비잔틴 살인사건 및 다른 논픽션들이 많이 번역되어있더라구요. 그런데 정확히 여기서 나온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이론의 토대가 나온 논픽션들 어떤 책들을 참고한 건지 참고문헌 각주가 없어서 좀 아쉽네요.
[박소해의 장르살롱] 13. 추리소설로 철학하기
D-29

borumis

무경
문헌 각주가 없는 건 저도 좀 아쉽긴 했습니다만, 한편으로는 다행이다 싶기도 했습니다. 그 문헌들 다 찾아다니는 새로운 수렁(?)에 빠질 수도 있겠다 싶 어서요... ㅋㅋ

borumis
저도 다 찾아다니는 것은 무리인 것 같아 작가분이 추천한 비잔틴 살인사건과 symbolique/semiotique에 대한 에세이들이 담긴 Desire in Language만 읽어보려구요. 그 외 다른 참고문헌과 작품들도 지금 당장은 못 읽어도 언젠가 읽어볼 수 있겠죠^^;;

무경
나중에 백휴 평론가님이 여기 라이브채팅 오실 때 참고문헌 여쭤보시는 건 어떨까요? ㅋㅋ (근데 그게 라이브채팅에서 소화 가능한 분량일까는 걱정이 됩니다만...)

박소해
미리 사전 질문을 던져드리면, 라이브 채팅 때 스윽 꺼내주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
제가 라이브 채팅 며칠 전에 여러분에게 사전 질문을 요청드리려 합니다.
감자쿵야
공부하면 읽느라 속도가 잘 안나가네요.
진찌 오랜 만에 하나하나 찾아보고 공부하며 읽는데 요런 재미 오랜만에 느껴서 좋아요!!
읽으면서 읽어보고 싶은 책이 더 많아졌어요.
아직은 인용된 책들을 많이 읽어보지 않아서 나중에 다 읽어보고 읽으면 더 재미있을거 같아요

박소해
@gamja 님 합류를 환영합니다. 계속 함께해주세요.
저도 열공모드로 밑줄을 그어가며 공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틈틈이 발견하는 새로운 추리소설을 독서목록에 올리며 읽고 있는 중입니다. :-) 활발한 참여 기대하겠습니다.

예스마담
요즘 다른 평론집을 한권 읽었는데 보르헤스에 대해 언급이 몇번 있다보니 1장은 자연스럽게 두 작가님이 다가왔어요. 검은 고양이를 TV에서 본지 50여년전이라 충격받았다는 말은 전에도 드렸는데 그때부터 어린 마음에 공포라는 개념을 심어주었던것 같아요. 이후에 전설의 고향 쯤은 두 눈 동그랗게 뜨고 봤으니까요. 이후에 책으로 읽고 여러 추리소설을 접했는데 코난 도일과 애거서 크리스티였어요. 철학과 결부시킨 이유가 작가 자체가 소설가이면서 사상가라는 점이고 추리소설에서 철학할수있는 통찰력과 인생전반에 걸친 삶과 시대를 반영하는 작품을 통해 유추할수 있다고 보여지네요.

박소해
장르 평론 자체가 드문 한국에서 철학과 추리소설을 결부시킨다는 건, 색다르고 파격적이며 가치 있는 시도입니다. :-)

무경
<탐정은 기호학자다: 움베르토 에코가 앓는 형이상학적 질병>에서는 움베르토 에코의 저작을 읽은 사람이라면 무척 재미있었을 거 같습니다. 그의 소설 말고도 기호학을 다룬 여러 글들이 불쑥불쑥 모습을 보이니까요. 저는 <장미의 이름>이 많이 언급될거라고 예상했는데, 뜻밖에도 <전날의 섬>과 <푸코의 진자>의 비중이 커서 좀 놀랐습니다. 그러고 보면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은 양립하기 어려운 입장이 부딪치는 갈등 양상을 주로 다루고 있었지요. '세상은 이렇다' 혹은 '세상은 이러해야 한다'라는 관념이 도전받는 여러 상황들... 이 글을 읽으며 새삼 그 점을 되짚어보았습니다.
세상을 자기 관점대로 해석하려는 인물이 마주하는 충격을 계속해서 탐구하는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을 분석한 이 글을 읽다가 저는 문득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그 두려움의 정체는 잘 모르겠군요. 어쩌면 저 역시도 세상을 바라보는 틀이 부서지는 공포를 느낀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박소해
<장미의 이름>은 재미있게 읽었지만 <푸코의 진자>나 <전날의 섬>은 어렵게 읽은 사람으로서 이 장은 저에게 쉽지 않게 다가왔습니다. 저는 오히려 줄리아 크리스테바 파트가 쉬웠어요. ㅎ

무경
<미로 속에서는 자신이 어디 있는지 중요하지 않다: 형이상학과 추리소설, 폴 오스터의 <뉴욕 삼부작>>은 제목을 본 순간 반가웠습니다. 폴 오스터의 작품 중 유일하게 제대로 읽은 게 이 책이었기 때문에... 이 책을 읽으며 혼란스러웠던 기억이 납니다. 가장 또렷하게 기억나는 첫 이야기만 떠올려봐도, 시작 부분은 추리 장르의 모습을 흉내내고 있지만 그 내용 전개가 서서히 장르의 것과는 달라져 가고, 결말 또한 이게 뭐지? 싶은 느낌이었으니까요. 뭐랄까, 갑자기 뚝 끊겨버린 음악 같은? 그런데 그게 끊긴 게 아니라 음악가가 정말로 거기서 음악을 마무리한 걸 안 황당함?
이 글에서 특히 중점적으로 다룬 '유리 도시'에서는 '폴 오스터'라는 이름으로 탐정 활동을 하는 작가의 이야기가 나오지요. 작가와 작중 탐정 사이의 관계를 두고 고찰(혹은 장난)하는 이 작품에서 탐정을 하기로 한 작가의 이름이 퀸임을 떠올리고 웃음이 나왔습니다. 엘러리 퀸을 연상하게 하는 이름이니까요. '작가=작중 탐정'의 구도로 가장 유명한 이름! 하지만 엘러리 퀸의 작품과는 달리 폴 오스터 탐정(작가)은 혼돈을 질서로 바꾸지 못하고, 오히려 혼돈을 더욱 큰 수렁으로 확장시킬 뿐이었지요. 이 글에서는 미로라고 표현한... 하지만 어질러진 무언가에 질서를 부여하려는 시도 역시 결국은 새로운 무질서를 만드는 것이 아닐까. 이 글에서 그런 생각을 슬쩍 본 듯합니다.
(여담이지만 제가 최근 준비중인 작품의 가제를 <부산 3부작>이라고 정한 것 역시 폴 오스터의 이 책 제목을 빌려온 것이었습니다. 본질은 취하지 않고 껍데기만 취하는 듯합니다만... 물론 정식으로 나오면 제목은 바뀔 겁니다.)

borumis
아 무경님도 작가이신가보네요! 부산 3부작! 흥미롭습니다.
전 실은 뉴욕3부작을 폴 오스터 작품 중 가장 좋아해서.. 보르헤스나 울리포 집단 등 이런 메타 픽션적 요소가 있는 책을 일부러 한 때 많이 찾아 읽었어요. 레이몬드 챈들러의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이 패러디 요소가 많이 담겨있듯 고전적 추리소설도 그런 전지적 역사적 구조가 반추리소설에 의해 뒤집혀질 가능성을 많이 담고 있어서 이를 통해 더 넓은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두는 반면 더 해체와 무기력의 방향으로 나아갈 발판이 된 문학적 흐름이 흥미롭네요.

무경
제 프로필 사진에도 걸어두었습니다만, 일제강점기 배경으로 추리소설 써서 책 냈습니다. <부산 3부작>도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고요. (이참에 홍보해두자... 허겁지겁)

박소해
폴 오스터를 가장 좋아하지는 않지만 가장 중요한 작가 중 하나로 생각하는 이유는 그가 가지고 있는 ‘현대성’ 때문입니다. 백휴 작가님이 이번에 다뤄주신 게 계기로 <뉴욕 3부작>을 다시 재독하게 될 듯합니다.

무경
6부까지의 독후감을 무척 산만하게 늘어놓았습니다. 사실상 인상을 스케치한 정도에 불과한 듯합니다. 글들을 읽으며 머릿속에서 몽글몽글 솟아오르는 생각이 많았지만, 그것들이 두부처럼 제 형태를 굳히려면 아직 시간과 계기가 필요할 거 같습니다. 유념해 주셨으면 합니다.

borumis
움베르토 에코는 지식인으로서 예전부터 보수적 파시즘에 대항한 자유 지성을 옹호하면서도 또 이에 반해 민주주의가 포퓰리즘이나 우민정치로 변질될 위험을 경계해온 딜레마를 작품에서 보여주는데 그렇기 때문에 대중적인 장르 추리소설을
택하면서도 쉽고 명확한 결론을 내려주지 않는 듯합니다. 애드소를 화자로 택하거나 회고 방식을 택한 것도 좀더 객관적인 거리를 두려고 한 것 같았는데 또 정답을 쉽게 도달할 수 없는 망설임을 보여준 것일 수도 있겠네요. 이런 딜레마가 지금도 문학적 해석 뿐만 아니라 우리의 정치사회적 향후 앞길과 맞닿은 문제의식을 과거에 대한 해석으로부터 이끌어내는 점에서 에코의 소설들이 전 매력적이었어요.

박소해
아마 에코는 본인의 철학을 가장 대중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분야가 추리소설이라고 생각해서 그 형식을 채택해 자신의 생각을 펼쳐보인 게 아닌가 싶습니다. 문학이 재미로만 그치지 않고 의미를 확장해나가는 모습이 멋져 보입니다.

박소해
여러분 안녕하세요? 지금에야 짬이 나서 접속했습니다.
다양한 의견들이 쏟아져나오는 활발한 토론이 아주 보기 좋군요. 덕분에 살롱이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됐어요.
적극적으로 참여해주신 여러분에게 박수를 보냅니다...!
저도 프롤로그부터 6부까지 독서하고 사유한 내용을 여기 정리해볼게요. :-)
<프롤로그: 나는 왜 추리소설로 철학을 해왔는가>
첫 두 페이지에서 추리소설가로서의 백휴 작가님의 울분(?)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마치 우리 철학이 서구나 중국 철학과 다른 주변부 철학 취급 받듯이 추리소설 역시 순문학이라는 강력한 헤게모니 외곽에 위치한 주변부 문학 취급을 받았다는 것이죠. 여기에서 추리소설로 철학을 해보자는 동기가 태동하게 됩니다.
“추리문학은 오락이다, 그리고 한국 추리문학은 수준 이하다”라는 고정 관념에서 탈피하기 위해 백휴 작가님은 국내 작가들의 작품 속 핵심 키워드를 살펴보면서 추리소설로 철학하기를 시도한 것이죠.
서구 추리소설은 인간과 세계라는 이항적 세계관(신과 신의 피조물인 인간)이 일항 세계관(신은 죽었으므로 인간은 스스로 고통을 감내할 수밖에 없다)으로 변해가는 시기에 탄생한 문학입니다.
“추리소설은 메타(초월)을 가능하게 한 은유(메타포)를 의심하는 정신이 분명하다.” 저는 이 말은 추리소설의 핵심 정신이 의심이자 회의이며 기존 헤게모니에 대한 전복이라는 뜻이라고 봅니다. 백휴 작가님은 제대로 살기 위해 낡은 집을 버리거나 새 단장을 하듯이 우리는 매 순간 삶의 요구에 부응하는 새로운 사유를 찾아 나설 수 밖에 없다고 주장합니다. 덧붙여 유교 국가인 한국에서 추리소설은 범죄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기존 사유를 전복하거나 보완하는 역할을 해왔고 앞으로도 해줄 것이라 강하게 주장합니다. 추리소설이야말로 우리 사유를 새 단장하게 하는 문학이란 뜻이지요.
“니체는 철학이 위험하다고 말했다. 한번 시작된 철학적 사유는 휴식을 모르기 때문이다. ”
추리소설은 살인사건을 다룹니다. 살인은 인간의 극단적 행위죠. 사유 또한 극단적인 사색으로 점철돼 있습니다. 그러니 추리소설 만큼 철학적 사유 또한 위험합니다. 위험한 문학을 다루려면 위험한 사유의 세계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사유와 추리소설은 공히 위반의 문제’란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생각이 옳아 보인다고 백휴 작가님은 결론을 짓죠. 추리소설과 사유에서 ‘극단’을 보았기에 평생 철학하는 추리소설가가 되었다는 백휴 작가님과 함께 자,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추리소설로 철학하기> 읽기를 시작해 봅시다. :-)

박소해
추리소설이 메타(초월)를 가능하게 한 은유(메타포)를 의심하는 정신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추리소설로 철학하기 - 에드거 앨런 포에서 정유정까지』 백휴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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