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소해의 장르살롱] 13. 추리소설로 철학하기

D-29
Henry님의 물음에 대한 답변)) 1)추리소설을 이해하기도 전에 미리 추리소설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하는 느낌이 너무 싫어 연구해 보기로 작정했습니다. 1990년대 후반에도 헌책방 파웰사나 아마존에 들어가면 크리스티에 대한 연구서가 20권 넘게 주르륵 리스트가 나왔거든요. 그때 가령 이문열이나 박완서에 대한 연구서가 한권씩이나 있었을까요? 뭔가 불편한 인식의 괴리를 느꼈습니다. 흔히 추리소설=부르주아 문학 이라고 퉁치더군요. 한데 챈들러의 소설은 프롤레타리아의 정서를 담은 노동문학의 구조라고 보는 학자도 있더군요. 결국 연구없이 그런 결론이 앞선 거죠. 또 일제강점기 탓에 고통스러운 과거를 기억할 수밖에 없었던 우리는 추리소설에 감춰진 시간약화현상을 이해할 수 없었다고 봐요. 이게 추리소설을 오해(어쩔 수 없는 역사적 측면이 있지만)하는 가장 큰 요소가 되었죠. 2))추리소설 공부에 한정하면 보루미스님도 지적해듯 지젝입니다. 서구 현대문학과 추리소설이 발생기가 거의 일치한다는 지젝의 지적은 제게 많은 암시를 줬습니다. 모더니즘과 추리문학의 그 어떤(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친연성이죠. 이브 뢰떼르의 "추리소설이란 무엇인가"가 모더니즘을 주창한 <문학과 지성사>에서 출간한 것은 그런 의미로 우연이 아닙니다. 리어리즘을 표방했던 <창작 과 비평>이나 <실천문학사>에선 언감생심 꿈도 못꿀 일이죠.
답변에 감사드립니다. 무언가를 '추가'한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는 글이기도 했습니다, 제게는. 모더니즘과 리얼리즘으로 출판사별 태도, 지금은 희미해졌지만,를 통해 추리문학을 대했던 예전의 업계/학계의 경향을 가늠케 해주시니 더 잘 와닿았습니다^^
Henry님에 대한 답변)) 1) 2)는 관념적 이유이구요. 1994년 부산 국제신문 주최 김성종 추리문학에 대한 강연회가 있었는데요. 활동 안한 지 오래된 유우제 작가가 토론자로 전 옵저버 자격으로 참석했습니다. 강연이 끝나고 부산 수산대 우듬지 문학동아리 멤버(대학 2학년생 정도)가 김성종 선생을 불륜과 선정적 주제나 다루는 3류 작가로 몰아붙이는 것이었습니다. 선생님은 나름 대답을 하셨지만 제겐 만족스럽지 않았어요. 그때 느낀 당혹감이 <김성종 읽기>를 쓰게 된 동력이었구요. 1995년, "추리소설은 살인을 가르치는 교과서다"라는 SBS방송이 나갔어요. 기자의 그 멘트와 함께 교보문고 추리소설코너를 카메라가 잡았는데 이태영이라는 우리 회원 작품도 포항됐죠. 사단은 명문대 출신의 교수가 재산을 노려 아버지를 죽인 사건 때문인데, 서재에 일본 추리소설 몇권이 꽂허 있었나 봐요. 범행수법이 유사하다 아니다 설왕설래가 많았구요. 이 양반 몇년 전 만기출소했는데 동기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의 허락으로 유산 70억을 물러받았다네요. 암튼 그때 서부구로지법을 들락거리면서 판사가 진짜 추리소설의 추자도 모른다는 생각생각이 들었고 추리소설을 제대로 연구해 봐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어요.
추가로 실질적 이유를 사건을 들어 알려주시니 더 그 순간의 마음을 가늠할 수 있었습니다. 언제나 어떤 사안에 대해서건 각자의 의견들이 있고 그것을 표방할 자유도 있겠으나, 또 언제나 그 표현의 방법과 태도 또한 잘 선택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충분한 조사를 거쳐야 함은 물론이고요. 거듭 답변에 감사드립니다.
인식의 확장이란 무게를 달고 글을 쓴다..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 지점으로부터 해방되고자하는 욕구도 분명 존재할듯 보이는데요. 새로운 걸 대중에게 보여주고, 그들에게 지평을 열어주는 판을 깔아준다는 측면에서는 어느 정도 의무감도 가질 수 있겠지요. 그런데 그 욕구로만 글을 쓴다면 어디까지를 작가라고 봐야하는것인가라는 질문이 따라오는 주제일듯 하네요. 엘리트주의라고 비판의 소리가 들어올거 같기도 하고요. 결국 형식미에 사로잡힌 기존의 틀을 깰려고 또다시 다른 준칙을 가진다는 순환론적 담론이 이어질 수도 있는 모습도 감지가 됩니다. 그책에서도 오스틴의 사례처럼 말이지요.
새벽에 백휴 선생님이 답글 달아두신 걸 쭉 읽다가 왜인지 눈물이 살짝 맺힐 것 같습니다. 선생님의 추리소설과 한국 추리소설을 보며 느끼는 다양한 감정이 느껴졌거든요. 선배님들의 고독과 고뇌를 딛고 후배들이 한발씩 앞으로 내디디고 있습니다. 좀 더 좋은 작가, 좀 더 좋은 이야기를 쓰는 작가, 좀 더 뚜렷한 개성을 가진 작가, 그저 제대로 된 작가가 되려고 애쓰는 이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백휴 선생님이 이 책의 2편을 쓰시게 된다면, 그때는 지금까지의 고뇌와는 결이 다른 이야기를 담으실 수 있을 거라고,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후배로서 주제넘은 말일지도 모르지만 이 말만큼은 남기고 싶습니다.
Fatman님 좋은 의견 감사합니디. 엘리트주의는 언제든 어느 시대든 논쟁의 대상이 될 겁니다. 저는 그 전단계의 얘기입니다. 자기의식을 갖기 위한 고통의 몸부림과 비명의 외침요. 전 보편적 추리소설이란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추리소설은 달처럼 반사체일 뿐입니다. 발광체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죠. 제 세대의 느낌과 팻맨님 세대의 느낌은 분명 다를 겁니다. 제 인상은 한국 추리소설이 문학귄력과 자본주의(한국 추리작가의 작품은 수준이하이므로 히가시노 게이고 류의 작품을 번역 출간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아직 활동중인 어느 출반사 사장님 말씀) 사이에 끼어 신음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한국 추리소설가의 관점은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어요. 저는 그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그럴려면 권력구도에 도전할 수밖에 없으며 인식문제가 따라나온다고 봤어요.
무경님, 덕담 고맙습니다. 노력해 보겠습니다. 하지만 팻맨님 지적처럼 제 의견은, 지금 시점에서는 이미 늦어버린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저는 젊은 작가나 독자들이 젊은 시각으로 참신한 의견을 제출하길 바라고 있어요. 제가 추리소설가로서 느낀 불만은 제도권 비평가들이 한국추리소설가를 대개는 사회사(사회현상)의 일부로서 취급한다는 점이었어요. 저는 작가로 대접해 주고 싶었어요. 그러다 보니 부메랑 효과(네 글은 별로던데)를 알면서도 추리문학비평을 하게 된 것입니다. 젊은 작가들끼리 서로 그런 토론과 논쟁이 왕성해졌으면 합니다.
그런데.. 책 후반으로 갈수록 제목에 나온 사상가들보다 다른 사상가들의 사유와 추리소설 작가의식이 더 밀접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는데요. 예를 들어 서미애와 칸트에서는 칸트보다는 어쩌면 사드와, 그리고 지젝과 황세연에서는 지젝보다 로티와, 류성희와 한나 아렌트에서는 아렌트의 정치공간보다는 칸트의 취미판단에 더 밀접하고 정유정과 조르조 아감벤에서는 아감벤보다 알랭 바디우의 입장이 제게 더 강한 인상을 남기고 갔어요... 처음에는 제목에 나온 사상가의 이론이 작가의식과 관련된 것 같다가도 또 변증법적 합?또는 반보다 더 한 반?이 나오듯 결국 다른 사상가의 이론에 다가가는 반전이 보이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그리고 이전 챕터에서 다음 챕터의 추리소설의 예고편이나 복선처럼 다음 사상가의 생각들이 살포시 엿보일 때가 많습니다. 이런 것에서 저는 마치 추리소설을 읽을 때 범인이라고 처음에 다들 의심했던 사람이 red herring이고 결국 전혀 뜻밖의 사람이 범인으로 지목되는 그런 구조가 생각났는데요. 혹시 작가님이 그런 것을 의도한 것일까요?
만약 그렇다면 12장에서 나온 '내포의 누적이 필연적으로 외적 대상 - 쌓인 증거가 필연적으로 범인k를 가리킨다는 것-을 지시한다는 것을 의심하게 한 것처럼 작가님은 이를 통해 어떤 사유를 유도하는 것일까요? 저는 실은 이건 우리가 항상 '당연시'했던 관점을 무너뜨리는 데 의의가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예를 들어 진화론과 phylogenetics 등이 발전하기 전에 우리는 동물의 종이든 인종이든 성별이든 뭔가 시각적인 단서들을 종합해서 뚜렷하게 분리되고 규정된 분류와 정의에 익숙했는데 알고보니 당연히 그렇게 보였던 분류가 실은 전혀 틀렸던 패러다임의 변화처럼 우리가 실은 당연하다고 생각하던 개인적 심리 또는 사회적 구조 또한 실제로 파헤쳐보면 다른 이면이 있다는 것을 경고하고 조금 더 심층적으로 생각해보라고 권유하는 듯 하네요.
보루미스님께)) 우리 언어에 시간의 축적에 대항하는 현존적 요소가 있다는 말, 흥미롭군요. 저는 개인적으로 관계성이 강한 언어에 불만(어쩌라고?)이었어요. 고독이라는 말도 기존 관계의 단절을 말하고(부모를 잃은 고아 고/자식을 잃은 늙은이 독) 고독을 부정적 으로 봐요. 개별 항보다는 관계가 우선인 문화니까요. 우리에겐 solitude란 단어가 없어요. 관계의 단절로서의 외로움, loneliness이죠. 에밀 시오랑이 solitude 그 자체가 하나의 관점이라고 했을 때 묘한 기분이었어요. 단어가 없으면 세계도 없다는 작은 깨달음을 얻었어요. 그 후로 사람들한테 신조어를 만들라고 얘기하고 다녔구요. 보루미스님의 환경/기질 및 체질을(잘은 모르지만) 보니 큰 기대가 되네요. 체험으로 느꼈고 들뢰즈도 말했듯이 사람들은 생각하는 걸 별로 좋아하 지 않는 것 같아요. 제가 좋아하는 작가 대부분이 어릴 때 부모가 울타리가 못 되어준 유년기를 보냈더군요. 페르난두 페소아,프데데리크 시프테, 토마스 베른하르트, 네르발 등등 참고로~~ 알랭 바디우가 <비트겐슈타인의 반철학>에서 문학에 관심이 많고 고백을 좋아해(?) 내면일기를 남기는 니체, 키르케고르, 루소 등의 작가를 사유에 늘 잔여물(무한에 직면하여)을 남긴다고 했어요. 상징체계를 세우려는 수학적 철학자와 상반된다는 의미에서 말이에요. 김진영 철학자도 독문학과를 졸업했어요. 그 후 아도르노/벤야민을 전공하셨구요. 우울증 탓에 학위를 마치지 못하고 독일서 귀국했구요. 2018년 암으로 작고하셨는데 자신은 멜랑콜리커라고 가끔 강연중에 말하시더군요. 시간이 흘러 모든 게 사리지는 걸 늘 고민의 주제로 삼고 계셨죠. 사랑의 기원이 허무라고 말한~ 조용한~~~~은 58세부터 64세까지의 내면기록인데 전 몽테뉴의 수상록 같은 책이 꼭 나왔으면 싶 었는데~~많은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외롭고 힘들 때 수상록처럼 큰 도움이 되는 책이었어요. 다만, 나이가 들어 쓰신 책이라 젊은 친구들한테 권하기에는 약간 망설여지더라구요. --몰락은 가깝고 구원은 멀다. 어찌할 것인가?
아, 안그래도 책에서도 나온 loneliness와 solitude 간의 차이, 여기서 나온 차이를 예전에 생각해봤는데 저희 아들 같은 경우는 사회성이 떨어지지만 친구를 갖고 싶어 아이들 주변에서 아이들 노는 것을 바라보며 맴도는 loneliness를 느꼈지만 저는 친구들은 이상하게 주변에 많았지만 혼자 있는 solitude를 즐기는 자발적 아웃사이더여서 아예 시선이 다른 사람들을 향한 게 아니라 제 자신을 향해 있는 편이거든요. 이렇게 각자의 성향에 따라 관점이 다르더라구요. 그 외에도 한국인들이 미국에 와서도 Our mom이라고 표현하는 걸 보고 제가 '그건 아니지, 너의 엄마가 어떻게 내 엄마가 되니?'하고 반문했을 때 우리 나라, 우리 엄마, 우리 집 등 모든 것에 '우리'를 강조하는 '우리'말이 제게 생소한 걸 느꼈어요. 그 외에 우리 말은 조사 등의 postposition이나 어미 등의 suffix도 인접한 품사와 그 전체 문장의 문맥에 따라 형태(~을/를, ~은/는 등) 뿐 아니라 의미(~의, ~에서 등)가 너무 달라지는 걸 보고 확실히 사람들 뿐만 아니라 단어 하나하나가 관계에 민감한 것을 느꼈어요. 반면 우리 말은 프랑스어나 스페인어 등보다 확실히 과거나 미래 등에 대한 시간과 관련된 tense 또는 성별에 관련된 세세한 차이가 떨어지잖아요? 예전에 한국에 사는 필리핀 노동자들과 프랑스에서 사는 한국입양아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면서 확실히 영어/불어와 한국어의 차이가 확연히 느껴지더라구요. 그리고 아버지는 가끔 정말 감정 뿐 아니라 생각의 흐름이 너무 지나친 질환이 있고, 그리고 아들도 집중을 못하고 생각이 자꾸 여기저기 방황하는 데다가 사회성이 떨어지고 아들의 친구들을 통해서도 신경다양성을 접하게 되었는데요. 저는 실은 선천성 뇌혈관질환에 의해 작년에 뇌출혈로 입원했는데 감각이상 뿐 아니라 이상하게 제 머리 속은 엄청 빠르게 생각중인데 말의 발현이 그걸 못 따라가는 느낌? 뭔가 어눌한 느낌을 받고 의사를 호출해서 응급MRI를 찍어보니 아니나 다를까 엄청난 뇌출혈이 생겼더라구요. 중환자실에서 꼼짝 않고 누워만 있었고요. 다행히 수술로 회복되었지만 그 때 제가 느낀 것은 제가 만약 평생 이런 상태, 아니 더 심하게 감각이나 운동 기능이 심하게 제한된 상태였다면 세상이 어떻게 느껴지고 나 또한 세상 사람들에게 어떻게 비춰질까? 카프카의 거대한 벌레처럼 무시하고 싶지만 무시할 수 없고 거추장스러운 존재가 되지 않을까? 나의 사회적 관계나 정체성은 어떻게 달라질까? 등 여러 고민이 많았어요. 우울증에서도 시간의 흐름이 다르게 느껴진다고 우울증으로 치료받는 친구가 말한 적 있는데 우리는 대부분 광인이거나 좀 그런 이해할 수 없는 비도덕적이거나 반사회적인 주인공을 접하긴 하지만 실제로 광인까지는 아니고 좀 다른 사고의 흐름이나 관점을 가진 사람들의 입장에서 쓰는 책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잘 모르기도 하겠지만.. 카프가의 metamorphosis를 읽으면서 우리는 고의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그런 입장이 있다는 걸 무시하려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필연과 우연에 대한 고민은 선천성 질환이나 유전적 문제에 대해 (저도 친구도 유전학 관련 일을 하기에) 고민이 많아서 그런데 예를 들어 제가 검사하는 환자들 중에 Klinefelter나 Turner 등 평범하지 않은 유전자를 가진 사람들은 그들의 정체성, 그리고 필연과 우연, 자연과 환경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을테지만 평범한 사람들은 이것에 대해 과연 이렇게 고민해본 적이 있을까?하고 생각하게 되더라구요. 존 롤스의 우리가 어떤 운명의 주사위가 던져질지 모른 무지의 베일 뒤에 있다면 우리는 우연과 필연에 대해 모른 척하고 있을 수 있을까?하고요. 작가님이 책에서도 언급한 스피노자의 필연으로 귀속되는 우연도 이전부터 많이 고민하던 부분이에요.
보루미스님께)) 지식 이해의 폭과 깊이가 대단하시군요. 저는 시간이 흐른다는 것에 스트레스를 받아 늘 지나간 시간의 풍경을 기억해 두려는 강박관념이 있어요. 2017/6/3일에 본 구름의 형태라든지 2018/10/19 황세연 작가 수상모임에서 보인 모습이라든지, 2016/4/11,,한이 작가의 사당에서 만나 맥주를 마시던 상황이라든지~~~ 전 왜 그런지 시간을 큰 단위로 생각하게 돼요. 겁이라는 시간은 long long time이죠. 10살나이를 이제 죽음에 십년 더 가까이 다가선 일종의 늙음으로 해석한 "능엄경"의 한 구절을 읽고 겨자겁과 반석겁을 말한 부처님의 출발점은 허무주의 로 보게 됐어요. 허무주의에서 끝나진 않았지만~왜 그런지 그런 시간감각을 가진 사상가들이 있더군요. 저는 그것을 인간의 시간이 아닌 알 수 없는 억겁의 시간을 건너온 바람의시간으로 느껴요. 근데 이런 느낌이 싫어요. 인간의 존재가 너무 왜소하게 느껴지고 불안해지거든요. 요즘도 가끔 들뢰즈의 시간론을 들여다봐요. 혹시 내 증상에 효과가 있는 처방이 될까봐~~
아뇨.. 저는 전형적 이과생이고.. 인문학이나 철학 관련 책들은 그냥 제목이나 표지만 보고 짚이는 대로 읽어서 체계 없이 저 혼자만의 독학으로 오독이 엄청 많은 경험의 축적일 겁니다. 에티카처럼 얇디 얇은 책도 3번, 그것도 여러가지 다른 책들과 함께 읽은 친구와의 토론을 참고해서 겨우 읽었거든요.. 그래도 작가님 책과 덧글들 덕분에 많은 작가들과 작품들에 대해 또 배워가네요. 책을 읽으면서도 잘 이해 못한 부분을 그나마 해독해보려고 하는데 노력에 성과가 못 미친 곳들을 모아봤는데요. 여러분들에게는 너무 단순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제가 궁금한 건 못 참는 성격이라;; p. 362 서구 사유에서 기이한 점은 바로 이 토대 위에, 즉 본다는 것의 동일성 위에 '듣는 것'을 위치시킨다는 것이다. 믿을 수 없게도 이제 '듣는 것'은 '보는 것'이다. .... 권위를 내주는 대신 청각을 빼앗아, 은유를 통해 청각을 초월함으로써 시각에 의한 원리의 통일이라는 대업을 성취하게 된다. --> 니체 이전에 보는 것의 동일성으로 사유가 이루어 진 것은 이해했는데 그 이후 듣는 것이 어떻게 그 위에 위치했고 보는 것의 권위를 내주는 대신 은유를 통해 청각을 초월한 건지 잘 이해가 안 갔습니다. p. 369 내포의 필연성에 의한 외화 --> 이 부분이 제일 이해가 안 갔는데요. 외화라는 것은 외연화를 얘기하는 걸까요? 내포의 필연성이라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p. 370 내포의 필연성에 의한 외화'에 대한 의심은 '장소의 주체'에서 '공간의 주체'로 이동하기 위한 필요조건이라고. --> 비슷한 이유 때문에 이해를 못했어요. p. 399 들뢰즈의 이산적 외연(discrete extension)이라는 철학 용어 .... 개념에 의해 강제 부과된 외연 (=1)과 그 개념의 취약한 내포가 원리상 요구하는 외연(=무한기호) 사이의 분열이 이산적 외연을 만든다. --> 들뢰즈의 이산적 외연(아니 실은 들뢰즈의 철학 자체)를 몰라서 그럴지도 모르겠는데요. 괄호 안의 수학적 기호나 내포가 왜 취약한지가 명확하지 않았는데요. 여기서 말하는 건 개념에 의해 강제적을 단순화된 1:1로 대응되는 외연과 내포의 다양성 또는 가변성 때문에 무한대로 늘어날 수 있는 마찬가지로 다양한 외연을 나타내기 위해 그 기호들을 쓴 걸까요? 그리고 그 개념에서 빈약한 근거나 연관성 또는 가변성으로 인해 내포가 취약하다는 것일까요?
전 미생물 유전자를 대학원때 연구해서 날파리나 생쥐들의 life cycle보다 더 엄청난 차이로 번식하는 세균들의 복제와 mutation을 생각하면 인간과 얼마나 다른 시간을 달려가고 있는 게 참 놀랍다고 생각되었는데요.. 진화론이나 심지어 생명체가 나타나기도 전의 우주의 나이로 생각하는 물리학을 전공한 사람들을 만나면 또 다른 차원의 시간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어요. 자폐증 환자의 세계관과 저의 세계관이 다르고 시각에 주로 의존하는 인간과 청각에 의존하는 박쥐, 후각에 의존하는 개미 등이 각각 너무 다른 세계관을 갖지만 공존하듯이 시간도 너무나 다른 감각으로 흐른다는 게 느껴질 때가 실은 아이들을 키울 때와 과학을 공부할 때였어요. 말씀해주신 들뢰즈의 시간론도 나중에 읽어봐야겠습니다.
보루미스님께)) 톡으로 전부 대답하기엔 너무 길어져 좀 벅차네요. 죄송합니다. 일단 첫물음만 대답할 게요. 제가 보기에 서구문화에서 은유(metaphor)가 도드라지게 발달한 것은 듣는 것(유대문화)과 보는 것(그리스문화)을 결합해야 필요성 때문이었어요. 메타(meta)는 ~넘어서이기에 시각도 넘어서고 청각도 넘어서는 곳에서 양자를 결합할 교두보를 찾자는 전략이죠. 당연히 두 감각을 넘어서는 것만으로 양자가 결합된다는 보장은 없죠. 그럼 에도 일단 넘어섬으로써 감각적 대립을 지양하고 새로운 가능성 속에서 진일보한 느낌을 갖게 되는 거죠. 한데 원리란 하나의 근거를 가지고 설명하 는 것이기에, 양자의 문제가 다시 불거지죠. 철학 이 발생한 그리스에서는 끝내 시각을 포기할 수 없었기에(보는 의미의 이데인이라는 단어에서 그 것을 감각을 초월한 이데아라는 단어를 생산해 내 잖아요.) 역설적이지만 듣는 것을 다시 설명할 수 밖에 없는 것이죠. 원리는 시각적이어야 할 것. 그 럼 어쩌지, 청각은? 메타를 통하면 청각을 넘어설 수 있다며? 이제 청각에게 감각경험을 떠날것을 요구해서 사실 넌 가장 탁월한 봄이었어라고 말하 는 것이죠. 논리적으론 청각을 넘어섰다고 시각이 되는 건 아니죠. 납득이 안되고 기이하지만, 거의 모든 사유가 이런 허점과 한계를 지니는 측면이 있어요. 유교에서도 소리의 동일성을 강조하며 음독에 초점을 맞추다가(논리) "성=장"(크게 이 룰 성, 볍씨를 창고에 보관할 장)에 이르러서 음독 도 어긋나고 훈독도 어긋나니까 더이상 탐구하지 못하게 방해하죠.(탐구할 자격이 없다거나 파고들 어도 알 수 없는 신묘함이 있다거나). 이 기이함은 이해가 가지 않는 게 정상입니다. 다음 질문에 바로 대답하지 못하는 점 양해 바랍니다. 지금 밖이라 핸드폰은 계속 만지고 있을 수 없어서요.
아, 천천히 써주셔도 됩니다. ^^;; 역시 서구문화의 듣는 것은 유대문화의 logos와 연관되었군요. 그런데 그 앞의 361페이지에서는 '적어도 니체 이전의 서구 사유는 시각으로 이해된 동일성의 사유다'라고 해서 오히려 '신은 없다'고 유대문화의 logos 등을 거부한 니체 이후보다 그 이전에 고대 그리스 문화의 시각적 동일성의 토대 위에 유대기독교 문화의 듣는 것을 위치했던 것 같았다고 생각해서 헷갈린 것 같아요.
화제로 지정된 대화
@모임 여러분 안녕하세요? 약 28분 후에 13번째 라이브 채팅이 시작됩니다. 어제까지 완독하려고 했지만 아직 후반부가 조금 남았네요. 요약정리는 살롱이 열려 있는 금주 일요일까지 완료하려고 합니다. :-) 모두 저녁은 잘 챙겨드셨어요? 전 애들과 로제 파스타 해먹었어요. 모두 식사 잘하시고 좀 이따가 8시에 여기서 봬요. :-)
여러분
네🤩
작성
글타래
화제 모음
지정된 화제가 없습니다
[책나눔 이벤트] 지금 모집중!
[📚수북플러스] 5. 킬러 문항 킬러 킬러_수림문학상 작가와 함께 읽어요[길속글속] 『잊혀진 비평』, 함께 읽어요:) ‘도서 증정 이벤트’도 하고 있습니다.[책 증정] 호러✖️미스터리 <디스펠> 본격미스터리 작가 김영민과 함께 읽기
💡독서모임에 관심있는 출판사들을 위한 안내
출판사 협업 문의 관련 안내
그믐 새내기를 위한 가이드
그믐에 처음 오셨나요?[메뉴]를 알려드릴게요. [그믐레터]로 그믐 소식 받으세요
조지 오웰에 관하여
[책걸상 '벽돌 책' 함께 읽기] #26. <조지 오웰 뒤에서>불멸의 디스토피아 고전 명작, 1984 함께 읽기[그믐북클럽X교보문고sam] 20. <위건 부두로 가는 길> 읽고 답해요[책걸상 함께 읽기] #7. <오웰의 장미>조지 오웰 [엽란을 날려라] 미리 읽기 모임
매달 다른 시인의 릴레이
[ 날 수를 세는 책 읽기 ㅡ9월 '나와 오기' ] [날 수를 세는 책 읽기ㅡ8월] '내가 네번째로 사랑하는 계절'〔날 수를 세는 책 읽기- 7월〕 ‘잠시 작게 고백하는 사람’[ 날 수를 세는 책 읽기ㅡ6월] '좋음과 싫음 사이'
앤솔로지의 매력!
[그믐앤솔러지클럽] 1. [책증정] 무모하고 맹렬한 처음 이야기, 『처음이라는 도파민』[그믐미술클럽 혹은 앤솔러지클럽_베타 버전] [책증정] 마티스와 스릴러의 결합이라니?![책나눔] 어딘가로 훌쩍 떠나고 싶을 때, 시간을 걷는 도시 《소설 목포》 함께 읽어요. [장르적 장르읽기] 5. <로맨스 도파민>으로 연애 세포 깨워보기[박소해의 장르살롱] 20. <고딕X호러X제주>로 혼저 옵서예[그믐앤솔러지클럽] 2. [책증정] 6인 6색 신개념 고전 호러 『귀신새 우는 소리』
좋은 스토리의 비밀을 밝혀냅니다
스토리 탐험단 8번째 여정 <살아남는 스토리는 무엇이 다른가>스토리탐험단 7번째 여정 <천만 코드>스토리탐험단 여섯 번째 여정 <숲속으로>
믿고 읽는 작가, 김하율! 그믐에서 함께 한 모임들!
[📚수북플러스] 4. 나를 구독해줘_수림문학상 작가와 함께 읽어요[책증정 ]『어쩌다 노산』 그믐 북클럽(w/ 마케터)[그믐북클럽] 11. <이 별이 마음에 들어> 읽고 상상해요
AI와 함께 온 우리의 <먼저 온 미래>
책걸상 인천 독지가 소모임[도서 증정] <먼저 온 미래>(장강명) 저자, 편집자와 함께 읽어요!
혼자 보기 아까운 메롱이 님의 '혼자 보기'
파인 촌뜨기들썬더볼츠*고백의 역사버터플라이
🎁 여러분의 활발한 독서 생활을 응원하며 그믐이 선물을 드려요.
[인생책 5문 5답] , [싱글 챌린지] 완수자에게 선물을 드립니다
모집중밤하늘
내 블로그
내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