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저도 자러 가야겠네요. 모두 굿나잇 ^^
[박소해의 장르살롱] 13. 추리소설로 철학하기
D-29

박소해
poiein
이제 남은 독서를 이어갈 건데요, 꼼꼼하게 읽어 보겠습니다. 작가님과 나비클럽, 그리고 이 책을 함께 읽고 계시는 책친구님들의 말씀들 모두 소중히 담아 잘 읽어보겠습니다. 모두 고맙습니다!

박소해
일요일 자정까진 열려 있으니까요. 그때까지는 궁금한 걸 질문 남겨놓으셔도 되고, 공부하신 내용, 리뷰를 여기 올려주셔도 됩니다. :-) 와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브라이언
추리소설로 철학 재미있을 것 같아요

박소해
조금은 힘들었지만(?) 네! 재밌었습니다. 재미있어요. ^^

borumis
이 책을 열어보기 전에는 최근 워낙 가볍게 읽을 만한 독서에세이나 철학입문서들이 많이 나와서 목차에 나와있는 쟁쟁한 이름들에도 불구하고 그런 종류의 책인 줄 알았다. 그런데 첫 장부터 이 추리소설 작가와 작품은 친숙하지만 이에 대한 이 책의 작가의 생각은 낯설고 작가가 이 작품과 연관해서 언급하는 철학 개념들은 더 생소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면서 실은 예전에 읽었던 현대철학 입문서나 가이드들을 다시 읽어보기도 하고 인터넷에서 철학가와 관련 논문들을 많이 찾아보기도 해가며 읽느라 시간이 꽤 오래 걸려 겨우 완독했다.
서구의 모더니즘의 태동에 반발하는 움직임으로 전통적 추리소설이 나왔다면 변증법적으로 이보다 더 나아간 형이상학적 추리소설 등 다양한 추리소설 작품들의 발자취를 따라간다. 그래서 그런지 추리소설의 시초인 에드거 앨런 포부터 시작해서 차츰 시대를 따라 나아가며 일본 및 우리나라 추리소설 작품들까지 다양하게 다루었다.
추리소설도 서구 근대화에 의해 나와서 그런지 서양 근현대 철학의 개념들을 많이 가져오지만 마루야마 마사오나 최인훈 등 동양의 사상적 토대, 그리고 서양과 다른 유교 및 불교적 사유의 차이, 한글의 원리에 담은 은유 등 단지 서양철학에만 멈추지 않고 분주히 경계를 넘나드는 작가의 생각이 돋보인다. 그렇다. 추리소설은 변두리에서 시작하고 경계를 끊임없이 넘나드는 문학이니까.
이런 틀을 벗어나거나 깨뜨리는 성격 때문일까 보르헤스, 오스터, 에코 등 여러 작가들과 지젝, 들뢰즈 등 여러 사상가들의 관심을 받아왔다. 경계선에서 인사이더가 되려고 애쓰지 않고 도리어 밖을 향해 나아가는 당돌한 탐구심이 너무 강해서 그런가 그런 변두리를 탐험하는 대리만족이 독자를 너무 매혹시킨 나머지 단순 오락이라는 낙인을 받은 추리소설의 위상은 독서인구가 나날이 낮아지고 있는 우리나라에서는 더 낮은 듯하다. 한국 추리소설 자체도 이웃나라 일본에 비해 턱도 없이 낮지만 이런 대접 받는 추리소설에 대해 이토록 깊은 사유를 해보고 또 독자들에게서도 단순히 오락으로 소비하지 말고 생각을 더 많이 해보라는 골치 아픈 작가가 국내에 또 있을까. (마치 훈장님이 생각 좀 하고 살라고!하고 지휘봉으로 머리를 두드리는 듯)
작가 분은 철학 전공으로 너무 박식하고 폭 넓고 깊이 있는 사유를 하다보니 가끔 논지를 따라가기 힘들 때도 있고 심지어 문장에 나온 개념들의 태반을 이해 못 할 때도 있었다. 문제는 그것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보다는 철학이나 정신분석학이나 문학 평론을 전공하지 않은 이들에게도 마치 당연한 상식인 듯 어물쩍 넘어간다. 다행히 인터넷의 세상에서 관련 사상가의 논문들이나 후에 이어진 글들을 읽으면 문맥으로 얼추 가늠할 수 있기도 했지만 어쩔 때는 이것은 대체 무슨 의미일까? 무슨 의도로 여기서 갑자기 저런 말을 한 것일까?하는 지점들도 있었다. 특히 12장은 다른 챕터들보다 특히 작가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지조차 감이 안 올 때도 있던 나에게 가장 혼란스럽고 힘겨운 챕터였다. 반면 내가 잘 모르는 부분에서는 별 설명이 없던 반면, 인쇄 측의 실수 때문에 주석이 날라갔다는 4장 빼고는 주석마저도 단순 참고문헌 정도를 언급하는 게 아니라 상세한 코멘트들이 마치 이 자체로도 또 다른 철학 에세이의 토대가 될 것 같았다.
그리고 책 후반으로 갈수록 내가 받은 인상은 제목에서 호명된 철학가들 외에도 다른 철학가들의 사유와 추리소설 작가의식이 더 돋보이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9장 서미애와 칸트에서는 서미애의 소설이 칸트의 초자아보다는 그와 뫼비우스 띠의 대치면에서 나아가는 사드와 더 통하는 것 같고, 10장의 황세연과 슬라보예 지젝에서는 황세연이 지젝보다 지젝과 결별하는 로티와 닮아있다. 8장의 류성희와 한나 아렌트에서는 아렌트의 정치공간보다는 칸트의 취미판단에 더 밀접하고 11장 정유정과 조르조 아감벤에서는 아감벤보다 알랭 바디우의 입장이 정유정의 주제의식을 대변하는 것 같아보였다. 이건 훈장님이 강론하시다 삼천포로 빠지시는 걸까? 얼핏 보면 그렇지만 샛길은 또 다른 길이 되고 길은 모두 서로 통한다.
처음에는 제목에 나온 사상가의 이론만이 작가의식과 관련된 것 같다가도 또 헤겔의 변증법적 합?또는 지젝이 말한 오독을 거쳐야 도달하는 반보다 더 한 반?이 나오듯 결국 다른 사상가의 이론에도 다가가는 반전이 보이는 것 같다. 그리고 이전 챕터에서 다음 챕터의 추리소설의 예고편이나 복선처럼 다음 사상가의 생각들이 살포시 엿보일 때가 많았다. 이런 것에서 나는 마치 추리소설을 읽을 때 범인이라고 처음에 다들 의심했던 사람이 red herring이고 결국 전혀 뜻밖의 사람이 범인으로 지목되는 그런 구조가 연상되었다.
만약 그렇다면 12장에서 나온 '내포의 누적이 필연적으로 외적 대상 - 쌓인 증거가 필연적으로 범인k를 가리킨다는 것-을 지시한다는 것을 의심하게 한 것처럼 백휴 작가님은 이를 통해 어떤 사유를 유도하는 것이 아닐까? 실은 이건 우리가 항상 '당연시'했던 관점의 틀을 무너뜨리는 데 의의가 있다고 생각했다. 진화론과 생명과학의 발전에 의해 우리가 동물이든 인간이든 종에 대한 분류가 무너지고 새로운 눈으로 생물을 바라보게 된 것처럼 너무나도 당연하고 친숙한 움벨트(umwelt) 속의 분류에서 벗어나고 그 틀을 도끼로 내리찍기 위해 철학과 문학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당연시된 개인적/사회적 구조를 파헤쳐보면 다른 이면이 있고 다른 길이 있다는 것을 경고하고 조금 더 심층적으로 나아가보라고 권유하는 듯하다.
각 챕터에 나온 작가와 철학가의 매칭이 실은 동어반복인 a=a’가 아니라 변항인 x의 함수 a=f(x)=x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어쩌면 백휴 작가는 뜻밖의 인물이 범인인 게 밝혀지는(또는 아예 mystery로 남고 밝혀지지 않는) 것처럼 제목에서 지목된 철학가의 사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더 초월한 변항의 사유에 바통터치를 하고 더 나아간 독자의 사유도 기대하는 게 아닐까?
개념에 의해 강제적으로 단순히 내포와 외연이 1:1로 대응하는 것보다 무한대로 외연이 증폭될 수 있는 변항감각과 가능성을 내포하는 추리소설 장르를 단순히 오락으로 소비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더 넓은 시선으로 새롭게 바라보길 바라면서 쓴 이 책은 확실히 쉽게 읽히는 책도 심심풀이 땅콩같은 책도 아니다. 하지만 추리소설을 진정 사랑하는 이들이라면 범인을 추리해내기 위해 머리를 쥐어짜는 노력과 고통(?)을 즐기는 이들이다. 그렇게 공 들인 사유만큼 얻어낼 수 있는 짜릿한 반전적이고 변항적인 사유를 위해 오늘도 추리소설 작가들은 머리를 쥐어짜고 독자들과 승부하는 것 같다.
표지가 귀스타브 도레가 그린 에드거 앨런 포의 The Raven 삽화인데 이에 붙인 시의 구절이 참 좋다.
And my soul from out that shadow that lies floating on the floor
Shall be lifted--nevermore!
영혼이 하늘로 올라가는 게 너무 당연하게 넘겨짚는 생각을 갈까마귀는 부정부사 한마디로 깬다. Nevermore!
어둠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사유를 하기 위해서는 이제는 그런 자동적 조건반사같은 생각을 죽여버려야 하지 않을까?

박소해
@borumis
님 총평이로군요. 감명 깊게 읽어보았습니다.
저는 장별로 나누어 요약정리 중인데 이런 총평도 읽어보니 아주 좋네요. 책의 흐름이 보이고 큰 줄기로 다가와서 깊이 생각하고 공부해가며 읽으신 흔적이 엿보입니다. 보르미스님이 유전자 분야에서 일하신다고 하니 연구원이거나 비슷한 직종이 아닐까 하는데 저는 개인적으로 이과쪽에 계신 분들을 좋아하고 존경합니다. 그 인내와 근면에 경의를 표합니다. 보르미스님 총평 덕에 책에 대한 생각을 더 잘 정리하게 됐습니다. 고맙습니다.
VIP 독자선물 관련해서 답장 보내드렸으니, 확인해 보시겠어요? 감사합니다.

박소해
“어둠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사유를 하기 위해서는 이제는 그런 자동적 조건반사같은 생각을 죽여버려야 하지 않을까?” 이 말이 참 좋군요.
당연한 것으로부터 벗어나기. 기존 관념에서 탈피하기. 그래야 도약할 수 있지 않을까요?
많은 고민을 해보게 하는 말이네요.

borumis
대충 여태까지 덧글들 참고해서 리뷰를 써봤는데.. 검토한 서평은 SNS와 온라인 서점에 각각 올리겠습니다. 박소해님도 작가님도 나비클럽 출판사에도 감사드립니다.

박소해
헙! <12. 추리소설은 은유를 의심하는 정신이다> 파트에 나왔던 빌렘 플루서 책을 제가 어제 샀네요. 우왕. 신기합니다. @추리문학 님.




박소해
<몸짓들> 빌렘 플루서. 워크룸프레스인데요.

박소해
@모임
시간이 부족한 관계로 10-에필로그 파트는 요약정리보다는 간단한 의견을 정리하는 쪽으로 했습니다.
여러분, <추리소설로 철학하기>를 더 깊숙이 공부하실 분들은 나중에 스터디 그룹을 따로 만들면 어떨까요? 그건 가장 마지막 글로 한번 더 남겨놓겠습니다. 스터디 그룹에 대한 제안은 @윤명한 님이 해주셨고요.
일단, 참여에 관심 있는 분들은 grauworld@gmail.com 으로 의사를 표명해주시길 바랍니다.
<10. 변증법을 이해하는 자의 유머감각: 황세연과 슬라보예 지젝>
많은 고민 끝에 작년 여름 추리학교에 가기로 한 건 탁월한 선택이었습니다. 그날, 백휴 작가님의 ‘황세연과 시간의 변증법’ 강의를 들으면서 얻은 여러 인사이트를 <해녀의 아들>에 반영할 수 있었으니까요.
황세연 작가님은 한국 추리소설계에서 참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계시는 선배님이시지요. 앞서 다룬 류성희, 서미애 작가님 같은 여자 선배님들과 다르고 다른 남자 선배님들과도 결이 다릅니다.
저는 백휴 작가님이 설명하신 철두철미한 변증법 외엔 황 작가님의 개성을 설명할 방법이 없다, 는 생각이 드네요. 이 파트에서 여러 번 언급된 <염화나트륨>을 꼭 구해서 읽어보고 싶네요.
헤겔의 변증법이 정,반,합이라면 지젝의 변증법은 정, 반, 더 심한 반이라는데요. 유머와 위트, 때로는 과장된 설정 등에서 엿볼 수 있듯이 황세연 작가님의 변증법은 지젝의 그것에 가깝다고 백휴 작가님은 말씀하십니다.
저는 여기에 덧붙여 지극히 한국적인 토속성도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봐요. 황 작가님의 유머와 위트는 지극히 한국적이거든요. 거기에 황 작가님 소설의 매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소설이나 영미권 소설에서는 못 느끼는 지극히 한국적인 토속성. 하지만 이것만으로 황 작가님을 단정짓는 건 무리이죠.
백휴 작가님 말씀처럼 겉으로는 시골스럽지만 속으로는 왠만한 까도남 저리 가라 할 만큼 지성과 세련미를 가지고 있는 작가님이 아닐까요? 황 작가님이 소설 안에서 구사하시는 트릭과 반전만 보면, 우아하고 세련된 까도남 같은 느낌이에요. 황 작가님은 마치 겉만 보면 막걸리 같지만 마셔보면 뒤끝이 아주 깔끔하고 날카로운 증류주 같은 소설을 쓰시죠.
그래서 백휴 작가님이 황 작가님을 지독한 아이러니스트라고 말씀하신 게 아닐까요? :-)

박소해
<11. 이야기는 호모 사케르의 생존도구다: 정유정과 조르주 아감벤>
저는 정유정 작가님을 생각하면 마음이 복잡해집니다. 동경 그리고 불편감이라는 양가적 감정을 동시에 느낍니다. 전자는 정유정 작가님이 남다른 인생을 관통해오시면서 쌓아올린 작가적 성취와 소설의 작품성에서 오고, 후자는 정 작가님의 소설을 읽고 나서 며칠이고 계속 저 혼자 소설 내용을 여러 번 반복해서 되새김질할 수밖에 없는 강렬한 뒤끝에서 옵니다.
<7년의 밤>으로 정유정 작가님의 소설을 처음 접한 후, 저는 계속 정 작가님의 팬이었습니다.
백휴 작가님의 정유정 론을 읽으면서 무릎을 탁 쳤던 게... 제가 왜 이분을 동경하면서 동시에 어려워했는지 저도 모르던 그 이유를... 백 작가님 글을 통해 알 수 있었어요. 저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정 작가님의 소설 세계 안에 엄청난 고통의 근원 같은 것이 도사리고 있다고 느꼈던 게 아닐까요? 그게 바로 80년 5월 광주였군요.
<추리소설로 철학하기>의 매 파트마다 무릎을 탁 치는 지점들이 있었는데 정유정 월드를 크게 세 가지 키워드 - 호모 사케르, 생존도구로서의 이야기, 모든 소설에 깊숙이 자리한 광주사태라고 분석한 부분에서 감탄에 감탄을 거듭했네요.
백휴 작가님 덕분에 앞으로 한결 편안해진 마음으로 정유정 작가님의 소설을 읽을 수 있을 거 같아요. :-)

박소해
<12. 추리소설은 은유를 의심하는 정신이다: 추리소설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사유>
이 파트는 결코 쉽지 않았는데요. 이 파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선행 지식이 좀 요구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렵다는 생각과 동시에 이런 글을 쓰려면 얼마나 많은 지식을 쌓고, 얼마나 깊은 사유를 해야 했을까 생각하니 백 작가님께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더라고요.
이 파트에서 가장 핵심은 추리소설가는 은유에 대한 불신을 표명하며 새로운 은유 사용법을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추리소설은 그 정신에 있어 은유에 대한 의심 속에서 태어난 장르라는 것. 이것만 챙겨가도 요점은 파악한 거라고 봅니다. :-)

박소해
<13. 본다는 것과 듣는다는 것: 최인훈과 체스터튼의 브라운 신부>
여러분은 어떠실지 모르겠는데 제 경우는 이 13파트가 제일 난해하게 다가왔습니다. 최인훈 작가님이 추리소설가가 아니라서 그런지... 아니면 너무 오래 전에 읽었던 소설 <광장> 내용이 잘 기억나지 않아서 그런지 저는 이해하기가 좀 쉽지 않았어요. 그나마 좋아하는 작가님인 체스터튼 이야기가 있어서 체스터튼을 통해 최인훈 작가님을 이해하는 방법으로 이 파트를 읽었던 것 같아요. 만약에 스터디 그룹을 하게 된다면 팀원들에게 의견을 구해 가장 난해했다고 의견이 모아진 파트를 한번 더 공부해보려고 하는데 제가 얘기할 파트는 이 13부가 될 확률이 높아요. ^^;;;
이 파트에서는 ‘입감’ 개념이 널리 다뤄지는데요. 먼저 나왔던 정유정 작가님 파트에서 상세히 나왔던 개념이 여기서도 반복되어 복습 효과가 나네요. :-)
이 파트는 한 번 더 공부해야겠다고 마음 먹게 되네요.

박소해
<14. 나는 아이러니스트의 편에 서겠다: 추리소설이란 무엇인가>
백휴 작가님은 이 파트에서 우리 사회가 경험의 폭을 넓히려면 개인이 약점을 드러내는 것을 수치스러워하지 않음으로써만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더불어 그것만이 허구의 이미지나 조작된 완전성 뒤에 숨는, 힘은 세지만 비겁한 지식인과 정치인을 걸러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설파하십니다.
”진리와 삶의 그 어떤 확고한 근거도 믿지 않는 아이러니스트. 아이러니스트의 정신 속에서는 자기창조와 자기파괴가 반복되기 때문에 타인과의 완전한 의사소통을 위한 시도는 난관에 직면한다. 파편화된, 분열된 자아는 창조와 파괴의 회로 그 자체에서 자기 초월의 정신을 발 견한다. 아이러니스트는 그것을 겁내지 않는다.“
결론에서 좋은 추리소설을 쓰기 위해서는 아이러니스트가 되기를 겁내지 않아야 한다로 읽었습니다.. :-)

박소해
<에필로그: 우리 사회는 변항 감각을 얼마나 수용할 수 있는가>
변항 감각- 무엇이라고 특화하거나 확정할 수 없는 한에서 그 무엇이라고 지칭할 수 있는 대상x에 대한 감각.
저는 이 에필로그에서 변항 감각이 추리소설을 쓰거나 이해할 때 필수적인 감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오픈 마인드일 것이요 또다른 표현으로는 아이러니스트의 관점이겠지요.
백휴 작가님께서 무려 20년 동안 썼던 원고 중에서 추려내어 편집한 <추리소설로 철학하기>.
“돌이켜보니 내가 줄곧 관심을 두어왔던 분야는 작가론이다. 작가의 단편적인 생각이나 사상 혹은 여러 작품에 드러난 구조를 들여다보며, 작가 특유의 세상을 향한 외침이 무엇인지 밝혀보고자 했다.
나는 그 외침의 메아리가 작가의 흔적이며, 그 흔적만이 삶의 훈장처럼 자긍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으며, 예술가와 사상가를 제외한 다른 직업은 감히 꿈꿀 수조차 없는 작가라는 직업의 어드밴티지라고 생각했다.”
이 파트에서 저는 왜 백휴 작가님이 집요하게 작가론을 쓰며 추리소설로 철학하기를 시도했는지 깨달을 수 있었는데요. 주변부 문학 혹은 오락으로 낙인 찍힌 추리문학을 지하실에서 지상으로 끌어올리려는 시도이자, 외면 받았던 추리소설가들에게 자긍심을 되찾아주고 더 훌륭한 소설을 써낼 것을 독려하는 응원이 아니었을까요? 결국 더 좋은 추리소설을 쓰는 것만이 그동안의 추리문학이 겪었던 보릿고개를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이 아니겠습니까.

박소해
“ 하지만 나를 포함한 우리 세대가 추리소설을 주변부 문학으로 낙인찍는 지독한 폄하 속에서 작업해 왔음 또한 시억해야 한다. 내 글은 그런 폄하에 저항하고 인식의 괴리를 메우기 위해 줄곧 관심의 끈을 놓지 않고 이어온 결과물인 셈이다. 추리문학과 관련하여 다른 학자들의 빼어난 저작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은 사회사의 관점에서 추리문학에 접근하려는 태도를 보여 나를 실망시켰다. 추리작가이기도 한 내가 보기에 그들은 추리작가를 작가로 다루기엔 아직 시기상조라거나 민망하다고 여긴 것 같았다. 나는 그런저런 굴욕적인 상황을, 굴복하지 않으려는 문화 투쟁의 관점에서 다뤘다. ”
『추리소설로 철학하기 - 에드거 앨런 포에서 정유정까지』 <에필로그: 우리 사회는 변항 감각을 얼마나 수용할 수 있는가> , 백휴 지음
문장모음 보기

박소해
표현에 둔감한 자는 자유에 둔감한 자다.
『추리소설로 철학하기 - 에드거 앨런 포에서 정유정까지』 -백휴-, 백휴 지음
문장모음 보기
화제로 지정된 대화

박소해
@모임
자, 이렇게 제가 완독 후 프롤로그 - 에필로그까지 전체 내용을 요약정리, 혹은 의견 정리해서 올렸는데요.
몇몇 어려웠던 파트는 다른 분들 리뷰도 찾아 읽으며 더 복습해야 할 것 같습니다.
여러분, <추리소설로 철학하기>를 더 깊숙이 공부하실 분들은 나중에 스터디 그룹을 따로 만들면 어떨까요?
스터디 그룹에 대한 제안은 @윤명한 님이 해주셨고요.
일단, 참여에 관심 있는 분들은 제 메일 grauworld@gmail.com 으로 의사를 표명해주시길 바랍니다.
3주간의 기간이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었는데요...
4주로 할 것을 3주로 하는 바람에 따라오기 어렵진 않으셨는지 걱정되네요.
이번에 서평단이 되셨거나 책을 늦게 구매한 분들 중에는 완독을 못한 분들도 계실 듯해요.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읽으시면 틀림없이 새벽 서광처럼... 정신이 번쩍나는 성취감을 얻을 수 있는 책이랍니다. 아직 완독 못하신 분들, 포기하지 마세요.
10인의 서평단 여러분은 온라인 서점과 SNS에 리뷰를 부탁드립니다. :-)
그리고 혼자 읽을 자신이 없다면 위 메일로 스터디 그룹에 지원해 주세요.
저는 전에 예고했듯이 약 3주 예상으로 휴지기를 가졌다가 14번째 장르살롱으로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그때까지 모두 건강하세요, 감사합니다!
작성
게시판
글타래
화제 모음
지정된 화제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