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들 덕분에 어렵기만 했던 보들레르의 시들이 어렴풋이나마 이해가 되고 감상하는 재미에 들기 시작합니다.
저는 선생님들께서 올려 주신 글들 읽는 것도 벅차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지내겠습니다.
귀한 글들 감사합니다.
송승환 시인. 문학평론가와 함께 보들레르의 『악의 꽃』 읽기 2
D-29
늦깎이

borumis
백조 전에 나온 <어느 빨강 머리 거지 아이에게>를 읽으면서 시의 초반에서는 소위 male gaze라고 하는 여성을 대상화하는 관음적인 관점이 두드러지는데요. 거지 아이의 몸을 훑어보면서 그 아이를 소유 및 매매의 대상으로 취급하는 부유한 남성들의 시선에 맞서 음식쓰레기를 줏어먹는 거의 야생적인 움직임이 인간을 물질로 취급하는 도시와 자본주의에 대한 외롭고 힘겨운 저항같아 보입니다.

ICE9
이 시를 어떻게 감상하면 좋을까 고민하는데 borumis님의 감상을 읽고 다시 읽어봅니다^^ ‘근대’, ‘도시’라는 조건이 인간과 상호작용하며 적응해가는 도시인들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해요. 인간의 본성, 토착/집단 문화에 급히 익숙해져온 인간은 도시라는 비교적 새로운 조건에 적응하도록 강하게 요구받게된 상황 같아요. 이 과정에서 인간은 기존의 삶의 조건과 연결고리를 영영 잃어버리게 된 것 같구요.
우리가 생각하는 자연은 과연 순수한(?) 자연일까 생각해보다가, 반대로 근대 도시는 인간에게 또 다른 새로운 ‘자연’이 되어버린 것 같기도 합니다. 아파트에서 태어나 자란 세대가 시골의 단독주택/한옥을 상상하기 힘든 것처럼, 이제 도시는 인위적(문화적)인 의미에서 인간에게 ‘자연’이 되어야하는 상황을 뒤에도 나오는 ‘파리 풍경’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도 들고요.

borumis
네 저는 도시화와 빈곤층이 늘어나면서 이런 소외계층의 여자들이 인간으로서 대하는 게 아니라 어떤 사물처럼 부유층의 남자들에게 소비되거나 강제적이고 일방적인 시선에 의해 겁탈되듯 관찰된다는 느낌을 받았는데요. 쓰레기를 주워먹는 모습에서 이렇게라도 살아남겠다는 인간의 긍지와 동시에 마치 쓰레기 취급당하는 인간성의 몰락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 시였어요.

ICE9
말씀해주신 '시선'이란 부분이 저도 요즈음 이따금씩 생각해보게 되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타인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이 어쩌면 불가능한 일임에도, 사회 적인 시선을 나의 것마냥 내재화하여
(무의식적일지라도) 타인에게 되돌리는 행위를 하는 경우가 저도 많지 않았을까 싶거든요.
이른바 사회적 편견이 저를 통해 타인의 외모나 상황을 판단하거나 평가해버리는 경우처럼요.
피부색 혹은 체형과 같은 문제, 그리고 말씀하신 사회적 계급 혹은 젠더의 문제에서 저 역시 자유롭지 못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의 무심한 시선이 (의도치 않게) 한편으로는 타인을 불편하게 하거나, 심지어는 공격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뜨끔하기도 했습니다.
시의 감상과는 또 별개로 '나의 시선은 안그런가?'라고 생각해보게 됩니다.
숨쉬는초록
80번째 시 <백조>를 읽으니 보들레르의 시를 좀 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시는 빅토르 위고에게 전하는 시인데, <악의 꽃> 2판에 포함되어 1861년에 출간되었습니다. 그 당시 빅토르 위고는 나폴레옹 3세에게 반정부 인사로 낙인찍혀 영국령 건지 섬으로 망명을 간 상태였다고 합니다.
이 시는 '안드로마케여, 나는 그대를 생각한다!'로 시작합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트로이의 영웅 헥토르는 아킬레우스의 손에 죽고, 헥토르의 아내 안드로마케는 아킬레우스의 아들 피루스의 포로이자 첩이 되어 그리스로 끌려갑니다. 빅토르 위고도, 안드로마케도 조국을 잃어버린 슬픔과 고통을 겪었지요. 안드로마케는 빅토르 위고를 나타내는 알레고리입니다.
여기서 화자는 파리가 변했다고 말하며 '옛 파리'를 떠올립니다. 화자는 파리에서 추방되진 않았으나 1850년대 파리 개조사업으로 파리가 변해버려 '옛 파리'에서 추방된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 '옛 파리'는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곳이 되었죠. 안드로마케와 백조는 '그때 그곳'에서 추방된 화자와 빅토르 위고를 나타내는 알레고리로 쓰입니다.
화자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아프리카의 야자수 숲을 찾고 있던' '흑인 여자'를, '누구라도 다시는, 다시는! 되찾지 못할 것을 잃어버린 모든 사람을!', '어느 섬에 잊힌 채 버려진 뱃사람들을, 포로들을, 패배자들을! ....... 또 그 밖에도 많은 사람들을!' '생각'합니다.
이 시에는 '나는 생각한다, ~를'이라는 시구가 네 번 나옵니다. 화자 자신만의 개인적인 상실의 경험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상실의 경험을 한 타인을 생각합니다. '그때 그곳'에서 추방되어 '그때 그곳'을 잃어버린 경험을 한 사람들을 생각합니다. '추방당'하고 '다시는 되찾지 못할 것을 잃어버린' 사람의 고통은 화자 혼자만의 경험이 아니라 인간 존재라면 누구나 겪는 보편적인 경험인 것이죠. 알레고리는 화자의 개인적인 경험을 인간 존재의 보편적인 경험으로 확장합니다.
추방, 상실로 인한 고통은 '고뇌', '눈물', '이 불행한 짐승', '빈 무덤 곁에서 넋을 잃고 고개를 숙인 그대', '고뇌의 젖을 빠는 사람', '꽃처럼 시들어가는 말라빠진 고아'로 표현됩니다.
그런데 고통에 짓눌리기만 하는 건 아닌가봅니다. '끝 모를 장엄함', '기개 높은' 이라는 표현도 있는데, 어찌할 수 없는 고통을 감내하며 살아가는 사람에게 깃들어있는 숭고함을 의미하는 걸까요?
그러한 상실을 해결하는 화자의 방식은 과거의 모습을 마음속에 그대로 살려내는 것일까요?
'파리는 변한다! 그러나 내 우울 속에선 어느 것 하나
움직이는 것이 없구나!'
'저 진을 쳤던 바라크들, 설 깎은 대들보와 기둥들,
잡초들, 웅덩이의 물때 올라 퍼레진 육중한 돌덩이들,
유리창에 어지럽게 번쩍이던 골동품들을
이제는 모두 내 마음속에서만 볼 수 있다.'

ICE9
<백조>에 대해 써주신 감상이 좋아서 출근할 때 또 읽어봅니다^^ 개인만이 아니라 집단이 겪은 상실의 트라우마가 있을 듯합니다. 빅토르 위고도 유배당하는 수모를 겪었네요. 보들레르가 위고에게 전하는 위로의 마음이었을까요? 갑자기 위고와 보들레르의 관계도 궁금해집니다. 개인적으로 알고 지낸 사이였겠지요?

borumis
네, 둘 사이는 frenemy 같은 관계였다고 하는데요. 알렉상드르 뒤마의 ghost writer였던 Paul Meurice가 둘의 공통된 친구였는데 문제는 선배인 위고의 낭만주의에 반기를 들며 낭만주의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보들레르는 위고를 공식적으로는 존경하는 듯했지만 사적으로는 한물 간 구시대의 유물처럼 바라본 듯 합니다. 그리고 레미제라블 등 잘나가는 대가 위고를 내심 질투하는 마음도 있었을 테구요. 반면 위고는 그냥 보들레르를 좀 고생하는 후배 시인으로 바라본 듯 합니다.
보들레르가 보낸 개인적 편지에서 'Hugo continue a m'envoyer des lettres stupides (위고가 계속 나한테 멍청한 편지를 보내고 있어)'를 쓰는 등 여러 자료가 나왔다네요.
https://www.theguardian.com/books/2014/jun/18/baudelaire-victor-hugo-idiot-letter
숨쉬는초록
흥미로운 기사네요.

borumis
저 편지가 6만 파운드에 경매된게 신기하네요 ㅎ
숨쉬는초록
보들레르의 시를 좀 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은 있지만 그래도 여전히 잘 모르겠는데, 저의 감상이 좋다고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시 <백조>에서 화자는 잃어버린 옛 파리를 '그리워한다'고 말하지 않고 상실의 경험을 한 타인을 '생각한다'고 말합니다. 변한 것, 사라진 것으로 인해 고통받지만, 그건 돌이킬 수 없는, 어찌할 수 없는 일로 받아들이는 것 같아요.
보들레르의 시를 좀 더 이해하고 싶어서 <<전위와 고전>>과 황현산 선생님의 번역과 주해가 실린 <<파리의 우울>>을 주문했어요.
늦깎이
저도 ’전위와 고전‘과 ‘파리의 우울’ 주문해야겠네요.
송승환 선생님 시집들과 평론을 샀는데 제가 읽기엔 너무 어렵네요.
그래도 열심히 읽어보겠습니다.

ICE9
저도 <전위와 고전>이 어려워서 송승환 선생님께서 <악의 꽃>읽기 끝나고 또 열어주시면 참여하고 싶은데요? ^^;

borumis
저는 실은 그 다음 나오는 <키 작은 노파들>도 <어느 빨강 머리 거지 아이에게>처럼 인상적이었는데요. 보들레르는 위고가 <레 미제라블>에서 그렸던 빈곤층, 그리고 가장 허기지고 불행에 시달리고 천대받는 사람들에 주목하며 그 와중에 굽은 등에도 불구하고 '꼿꼿하고 당당'한 자세로 불운의 삶을 의연하게 받아들이는 자세, 매혹적인 눈물로 이루어진 강을 '멀리서 다정하게' 살펴봅니다. 그래서 저는 빅토르 위고와 사이가 안 좋았다고 해도 빅토르 위고에게 바치는 이 시들이 마음에 드네요.

borumis
저는 실은 불문학과도 관련 없고 시도 잘 모르는 이과생이어서;;
아직은 백조가 다른 시들에 비해 어떻게 확연히 탁월한 건지 알레고리 시학이 분명히 드러나는지 주제나 수사법, 시적 태도 그런 건 하나도 모르겠는데요. 송승환님은 이 시를 다른 시에 비해 더 추천하시는 이유가 있을까요?

ICE9
90번 시 <일곱 늙은이>를 다시 읽어보면서 등이 거의 ‘직각’으로 굽은 상태로, 넝마를 주워담은 채 진흙길을 힘겹게 나아가는 한 노인의 모습을 상상해봅니다. 이 중에서 ‘바로크풍 유령’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요, ‘바로크풍’은 어떤 이미지를 떠올리면 좋을까요?

borumis
이게 원문에서도 baroque로 되어있는데요. 영어로는 strange, odd로 번역되기도 합니다.
보들레르가 1864년 벨기에에 2년 있으면서 여러 바로크풍 교회들을 다니면서 바로크풍 예술에서 영감을 받은 듯한데요. 여기서 style jesuite (예수회 양식)와 style joujou (장난감 양식?)와 루벤스 양식과의 조화를 발견하고 감명받았다고 하는데요. 바로크풍 양식에서 그는 antiquite nouvelle (새로운 옛날)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제가 찾아본 논문에서 (프랑스어여서 죄송) 보들레르는 baroque를 한 시대의 양식이 아니라 좀 다른 의미의 형용사로 썼다고 합니다. Baroque의 동의어인 bizarre한 느낌으로 썼을지 모르지만 이 논문의 저자는 보들레르가 또 다른 의미로 baroque 를 썼다고 합니다.
이 글을 제가 어설프게나마 번역해보면:
'바로크는 비어있는 여백을 싫어했다. 보들레르는 거기에서 원죄에 얽매인 인류의 상징을 볼 수 있었다. 웅장한 예수회 양식의 설교단 앞에서 그는 원죄로부터 세상이 새로 재현되는 것을 보았다'
https://www.academiedesbeauxarts.fr/sites/default/files/inline-files/Colloque-Baudelaire-Andr%C3%A9%20Guyaux.pdf

borumis
위의 글에서 보들레르는 Malines의 Saint-Pierre-et-Paul 교회에서 고해성사 의자들이 벽을 따라 쭉 붙여서 진열되어 있는 걸 보고 원죄에 사슬로 묶여 있는 인류를 보았다고 하는데요. 이처럼 원죄에 묶여있는 인류의 사슬을 불멸의 얼굴을 지닌 일곱 명의 똑같은 쌍둥이들의 똑같은 걸음걸이로 빈틈없이 나아가는 바로크풍 양식의 예술같은 행렬에서 보았던 게 아닐까요?

borumis
그리고 저는 '는개'라는 표현을 이 시에서 처음 알게 되었는데요. 원서에는 그냥 brouillard (안개)인데 그걸 안개비와 이슬비 사이 정도의 '는개'로 표현한 번역가 분의 표현력이 멋집니다. '누런'과 '는개'는 뭔가 그냥 안개보다 더 alliteration도 느껴지고 더 늘어지는 듯이 잘 어울리네요. 그 뒤에 오는 '누런 누더기'와도 두운이 맞고요.
그리고 이 시에서 한 명의 노인이 아니라 계속 반복되고 증폭되는 노인들의 모습이 나오는데요.
'나는 일곱 번을 헤아렸다, 일분마다 하나씩.
늘어나고 늘어나는 이 음산한 늙은이를!'
'그 추악한 일곱 괴물이 불멸의 얼굴을 지녔다는 걸!'
그 외에 '똑같은 허울이 그 뒤를 따랐다' '무엇 하나 구별되지 않았다.' '똑같은 지옥에서 나온~ 쌍둥이는~ 똑같은 걸음걸이로 ' '똑같은 전율' '쌍둥이를' '하나를 둘로 보는'
이렇게 자기 자신을 복제하는 듯이 똑같은 쌍둥이들이 하나 둘 복제되는 걸 보고 보들레르가 도시에서 마치 판에 찍듯이 화폐나 책이나 상품들이 복제되는 양상으로 인간들이 획일화되고 상품화되는 양상을 그렸다고 보는데요. 이들은 끊임없이 복제되고 마치 썩지 않는 플라스틱처럼 계속 죽지도 사라지지도 못하고 지옥을 떠돌아다닙니다. 저주받은 불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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