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내가 아직 내 안에 살아있다면

D-29
학교가 제시한 평등이라는 환상을 나도 믿고 싶었지만, 감히 그 믿음을 시험대에 올릴 수는 없었다. …… 어쩌면 작가가 되고 싶다는 학생들이 그렇게 많았던 것도 그래서인지 모르겠다. 내가 그랬듯 다른 소년들도 작가가 된다는 건 혈연과 계급의 문제에서 탈출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작가들은 일상의 위계 서열 바깥에서 그들만의 사회를 이루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그들은 특권으로는 얻을 수 없는 권력을 얻었다. 체제와는 한 발 거리를 둔 채 그 체제에 대한 이미지를 창조해내고, 그럼으로써 체제를 재단할 권력. 작가들이 권력을 가졌다는 얘기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오비디우스를 추방했다. …… 하지만 이 모든 이야기를 듣고 나서 나는 황제의 권력이 아니라 오비디우스에 대한 황제의 두려움을 느끼게 되었다. 황제는 왜 우비디우스를 두려워했을까? 신의 뜻을 받은 자신도, 그 모든 군대도 잘 쓴 시 한 줄의 공격은 결코 막아낼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던 게 아니라면 말이다.
올드 스쿨 p.52, 토바이어스 울프 지음, 강동혁 옮김
말/혀/글/펜 은 칼보다 강하다-라는 표현이 떠올랐다. 찾아보니 “펜이 칼보다 강하다.” -에드워드 불워 조지 리튼의 희곡 <리슐리외 또는 모략> 2막 2장의 대사라고 한다. 보통 문학, 언론의 영향력을 표현할 때 인용되는 표현이고 나도 그런 의미로 이 문장을 떠올렸지만 바로 뒤에 이어지는 대사 ‘펜 자체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 펜에 깃든 권력이라는 마법, 이것을 빼앗아보아라. 황제들은 얼어붙고 대지는 조용해질 것이다. 권력자들로부터 칼을 뺏어도 나라는 구원받을 수 있다.’를 보면 본래 의미가 특권을 뒤집거나 흔든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손에 피 한 방울 안 묻히고 원하는 것을 남에게 시켜 얻을 수 있는 문서, 서류의 권력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 이 또한 전체 맥락을 보지 않은 채 인용되어 뜻을 오독하는 사례가 될 수 있겠다.
하나 더. 말은 칼보다 강하다는 표현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이 있다. “붓이 칼보다 강하다고 말하는 문필가는 많습니다. 하지만 그들 중 적지 않은 이들이 붓으로 이루어진 범죄가 칼로 이루어진 범죄보다 더 큰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면 억울해합니다. 바르지 못한 일입니다. 붓이 정녕 칼보다 강하다면, 그 책임 또한 더 무거워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붓에 보내는 칼의 경의로 생각할 것입니다. -이영도의 소설 피를 마시는 새 중, 엘시 에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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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스트 램지 선생은 프로스트가 따르는 “특정한 전통적 방식(경직되고 형식적인 언어의 배치)을 통해서도 현대적 의식을 충분히 표현할 수 있느냐”고 물으며 “산업화, 정부 및 광고업자들에 의한 프로파간다의 범람, 두 차례의 세계대전, 강제수용소, 과학으로 인한 신앙의 암전, 핵무기로 인한 인류 절멸의 가능성이라는 지속적 위협—들이 우리의 사유 체계를 바꾸어놓았다”고 말했다. 나는 위의 사건들이 욕망과 그것을 다스리지 못하는 이기심 때문에 일어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우리 세대에서는 욕망과 그 부산물들의 종류와 영향을 끼치는 범위가 굉장히 커졌다. 특히 ‘자아’라는 것은 너무나 비대해진 반면 공동체는 궁핍해 졌다. 세상은 개성을 강조하면서도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삶을 혐오하고 멸시하도록 부추기고 사람들은 거짓된 자아를 쫓으며 욕망 그 자체가 되고 파편화된 개인, 통제할 수 없는 대중, 조직되지 않는 시민이 될 뿐이다. 매일 매일 일어나는 충격적인 사건들로 인해 우리의 감정의 역치를 벗어난지 오래다. 감히 감각할 수 없는, 상상할 수 없는 사건들로 일상은 물들어가고 우리는 점점 무감각해진다. 형식 없이 흩어진 단어들이 정말 아무 의미가 없는지는 모르겠지만 예술은 현실의 모방이다. 어지럽고 혼란스러운 세상을 닮은 어지럽고 혼란스러운 예술 안에서 우리는 얼마나 서로 연결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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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느낀 상실감은 그 소년들의 목숨 때문이 아니었다. 함께 있는 모습이 어찌나 꾸밈없이 다정하고 얼마나 편안해 보이는가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올드 스쿨 p.58 - 자신은 친구들과 꾸밈없이 지내지 못한다는 상실감, 토바이어스 울프 지음, 강동혁 옮김
나는 그애를 잠깐 곁눈질로 보았을 뿐 곧 눈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 그 소년이 선생들에게 나를 팔아버렸을까 두려웠다. ……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그는 혼자 학교 정문을 나섰다. …… 영영 이곳을 떠나버린 사람처럼 학교를 바라보자 가슴 깊숙한 곳이 아파왔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숨겨둔 담배와 라이터, 파이프 등 자살용 도구 모음이라 할 만한 것들을 꺼낸 다음, 복도 끝 화장실로 가 전부 쓰레기통에 쑤셔넣었다. 그후로는 단 한 번도 학교에서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올드 스쿨 P.60, 토바이어스 울프 지음, 강동혁 옮김
……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내 소설은 점점 덜 정직한 무언가로 변해갔다. 나는 동료 학생들이 나를 샘으로 생각해주기를, 시애틀에서의 내 인생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기를 원했다.
올드 스쿨 P.62, 토바이어스 울프 지음, 강동혁 옮김
나는 글쓰기란 마땅히 즐거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보통은 그랬다. 하지만 이 시를 쓰는 건 즐겁지 않았다. 거의 한이 맺혀서 써낸 시였다. …… 이 시는 우리집과 지나치게 비슷했다. 이 자체가 우리집이었다. …… 내게는 그 아파트의 모든 것이 보이고 들렸다. 나 자신이 거기에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보고 싶지 않았다. 더 나아가 누구도 그 모습을 보지 못했으면 했다. 결국 나는 엘크 사냥꾼이 나오는 시를 제출했다.
올드 스쿨 P.69, 토바이어스 울프 지음, 강동혁 옮김
나는 그런 밤이면 나타나던, 몰아의 지경에 이르는 열정을 사랑했다.
올드 스쿨 P.79, 토바이어스 울프 지음, 강동혁 옮김
의리는 며칠 만에 판가름나는 문제라고 했던 탈레랑(프랑스 정치가 샤를모리스 드 탈레랑페리고르)의 말이 사실이라면, 덕성 그 자체는 몇 초 안에 판가름나는 문제다.
올드 스쿨 P.82, 토바이어스 울프 지음, 강동혁 옮김
…… 실수하지 마십시오. 진실이 담긴 글은 위험한 물건입니다. 한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을수도 있으니까요.
올드 스쿨 P.88, 토바이어스 울프 지음, 강동혁 옮김
전쟁은 언제나 있었소. 그 모든 전쟁이 항상 고약했고요. 우리 인간이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우리가 인류역사에서 가장 학대당하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는 건 대단히 그럴싸하고 유쾌한 일이지만…… 태초부터 모든 시대,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해왔습니다. 그러면 온갖 나태함을 정당화할 수 있는 위대한 변명거리가 생기니까요.
올드 스쿨 P.99, 토바이어스 울프 지음, 강동혁 옮김
형식이 전부입니다. 형식이 없으면 그저 여기저기 발가락을 찧고 울부짖는 일밖에는 못하게 돼요.
올드 스쿨 P.99, 토바이어스 울프 지음, 강동혁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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