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보르헤스 읽기] 『알렙』 같이 읽어요

D-29
일흔이 넘은 노인이 있었습니다. 집도 절도 없고, 편지도 접견도 없는 분입니다. 전과는 본인이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많았습니다. 당연히 감방에서 대접도 못 받고 한쪽 구석에서 조그맣게 살고 있는 노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자기의 존재감을 확실히 드러내는 때가 있습니다. 신입자가 들어올 때입니다. 신입자가 입소 절차를 마치고 감방에 배치되어 들어오는 시간이 아마 이 시간쯤 됩니다. 대부분의 신입자들은 문지방을 밟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들어와서 누가 지시하지 않아도 알아서 화장실 옆 자리에 가서 앉습니다. 대단히 긴장된 이 순간이 노인이 나서는 순간입니다. "어이 젊은이" 하고 부릅니다. 그렇게 다정한 소리는 아니지만 신입자는 그 소리가 매우 반갑습니다. 그러고는 노인다운 몇 가지 질문을 합니다. 어디 아픈 데는 없는지, 형은 몇 년이나 받았고 만기는 언제냐는 등 정말 눈물 나는 얘기입니다. 그러고는 이어서 "일루 와 봐" 하고는 노인 옆으로 불러 앉히고는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내가 말이야"로 시작되는 긴 인생사를 이야기합니다. 신입자가 들어오자마자 시작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삼일 지나서 이 노인이 감방에서 별 끗발이 없다는 걸 알고 나면 일정日政 때부터 시작되는 그 긴 이야기를 끝까지 듣는 사람이 없습니다. 첫날 저녁에 바로 시작해야 꼼짝없이 끝까지 듣습니다. 그가 빠트린 것이 있으면 우리가 채워주기도 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노인의 이야기가 계속 각색된다는 사실입니다. 창피한 내용은 빼고, 무용담이나 미담은 부풀려 넣습니다. 1~2년 사이에 제법 근사한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어 있습니다. 자기도 각색된 이야기에 도취되어 어떤 대목에서는 눈빛이 달라지기도 합니다. 젊은 친구들은 노인네가 '구라푼다'고 핀잔하기도 하지만 우리는 그런 심정을 잘 이해합니다. 과거가 참담한 사람이 자위하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비가 부슬부슬 오는 늦가을이었습니다. 하염없이 철창 밖을 내다보고 있는 그 노인의 뒷모습을 우연히 목격하게 됩니다. 노인의 야윈 뒷모습이 매우 슬펐습니다. 저분이 늘 얘기하던 자기의 그 일생을 지금 회상하고 있는 건 아닐까. 만약 저 분이 다시 인생을 시작한다면 최소한 각색해서 들려주던 삶을 살려고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각색한 인생사에는 이루지 못한 소망도 담겨 있고, 반성도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노인의 실제 인생사와 각색된 인생사를 각각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전자를 '사실'이라고 하고 후자를 '진실'이라고 한다면 어느 것을 저 노인의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 소망과 반성이 있는 진실의 주인공으로 그를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쩌면 그가 늘 이야기하던 일정 시대와 해방 전후의 험난한 역사가 그의 진실을 각색한 것이 사실로서의 그의 삶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사람을 이해하는 방식이 어떠해야 하는가에 관한 고민이기도 하지만 진실이 사실보다 더 정직한 세계 인식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현실에서 보는 것은 그때 그곳의 조각에 불과합니다. 시적인 관점이라는 것은 사실성과 사회미에 충실하되 사실 자체에 갇히지 않는 것입니다.
담론 - 신영복의 마지막 강의 31-32쪽, 신영복 지음
담론 - 신영복의 마지막 강의<강의> 출간 이후 10년 만에 출간되는 선생의 ‘강의록’이다. 이 책은 동양고전 말고도 <나무야 나무야>,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등 선생의 다른 책에 실린 글들을 교재 삼아 평소에 이야기하신 존재론에서 관계론으로 나아가는 탈근대 담론과 세계 인식, 인간 성찰을 다루고 있다.
화제로 지정된 대화
[아스테리온의 집~] 먼저 말씀드리면 이 작품은 송병선 선생님 번역으로 읽으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양쪽 번역본을 번갈아가면서 보다가 상이한 부분이 꽤 있어서 원문과 영어 번역본을 살펴보니, 황병하 선생님의 번역본에서 오역으로 추정되는 부분이 꽤 많이 보입니다. 특히 각주 5번이 달려 있는 문장, "허망하게도 나의 어머니는 여왕이 아니었다" 부분은 오역으로 추정됩니다. 원문은 "No en vano fue una reina mi madre;"이고, 영역문은 "Not for noth­ing was my mother a queen;"입니다. 영역본의 'Not for nothing' 부분에 대응하는 원문은 'No en vano'으로 추정되는데, 직역하면 '괜히 ~가 (된 것이) 아니다'가 됩니다. 따라서 그 의미는 "허망하게도 나의 어머니는 여왕이 아니었다"가 아니라 '아닌 게 아니라 나의 어머니는 여왕이었다/나의 어머니는 진정 여왕이었다' 이런 의미가 되어야 하지 않나 합니다. 실제로도 송병선 선생님은 이 부분을 "우리 어머니가 왕비였다는 사실은 무의미하지 않았다"라고 옮기셨습니다. 대충 비슷한 의미 같아요. 그 다음에 오는 문장도 황병하 선생님의 번역은 의아한 부분이 꽤 있는데, 이 모임의 목적은 번역이 아니니까 이쯤 하겠습니다. 소설에 대해서 좀 얘기를 해보면, 양쪽 번역의 각주에서 친절하게 스포(?)하고 있듯이 이 작품은 테세우스의 신화 속에서 죽임을 당하는 반인반수의 괴물 미노타우로스의 1인칭 시점에서 쓰여집니다. 송병선 선생님의 각주에서도 말하고 있듯이 아스테리온은 아스테리우스의 대격(accusative case)으로서, ‘별로 장식된’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이 1인칭의 '나'가 자신이 사는 '집'은 다름 아닌 괴물을 가두는 미궁이었음이 밝혀지는 구조입니다. 생각해보면 모든 미로는 지면에서 바라보면 가로막힌 벽과 드문드문 이어지는 통로만을 보여주지만 하늘쪽으로는 완벽히 뚫려 있기 때문에 완벽한 하늘과 무수한 별들을 보여줍니다. 개인적으로 너무너무 아쉬운 점은 한국어 번역본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이 작품을 접했고, 그 때문에 이 작품을 처음 읽는 기쁨을 온전히 누리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영역본만 해도 작품 초반부터 각주로 이렇게 스포를 하고 있지는 않거든요. 제 생각에 이 작품의 핵심은, 이 작품이 영웅된 관점에서 3인칭의 '괴물' 미노타우로스의 이야기를 다루는 게 아니라, 자기가 괴물임을 알지 못하고 다만 자신을 왕의 자손으로만 아는 1인칭의 '왕자' 아스테리온의 입장에서 쓰여졌다는 사실입니다. 추측컨대 보르헤스의 애당초 의도라면(괴물 미노타우로스가 아니라 비운의 왕자 아스테리온을 경험해보라는), 독자들은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아스테리온이 신화 속의 미노타우로스였음을 알게 되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각자 능동적으로 이 작품의 세부 사항을 다시 뜯어보면서 기존의 독해를 반추해보는 기쁨을 누릴 것입니다. 미궁의 중심부에 닿았을 때부터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미궁이 시작되는 것처럼, 그렇게 걸어온 길들을 되짚어나가면서 미궁의 구조를 찬찬히 뜯어보고 경험하는 것처럼요. 개인적으로는 작품보다는 작품을 둘러싼 외적 상황으로서 너무 아쉬운 작품입니다. 양쪽 번역본 모두 그 편집에서 작품의 의도를 충분히 살리지 못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만일 저라면 처음이 아니라 마지막 결론부에서 미노타우로스의 이름이 등장할 때 아스테리온에 관한 각주를 넣었을 것 같습니다. 비슷한 맥락에서 아래에 인용할 '아스테리온의 놀이'는 의미심장해보입니다.
사실 나는 유일무이한 존재이다. 나는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는 것에 관심이 없다. 철학자처럼 나는 글쓰기의 기술을 통해 전달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내 정신 속에는 분노를 자아내는 하찮은 것들이 들어갈 자리가 없다. 내 정신은 단지 위대한 것만을 수용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결코 한 글자와 다른 글자 사이의 차이를 결코 파악할 수 없었다. 참을성이 그다지 많지 않기 때문에 나는 글을 배울 수 없었다. 가끔 나는 그것을 유감스럽게 여긴다. 밤과 낮이 너무나 길기 때문이다. 당연하지만 내게 소일거리가 없는 건 아니다. 나는 돌진하려는 양처럼 어지러워 바닥에 나동그라질 때까지 돌로 만든 복도를 뛰어다닌다. 또한 우물 지붕의 그늘이나 복도의 한쪽 모퉁이에 쭈그리고서 나를 잡는 술래잡기 놀이를 한다. 그리고 지붕 위에서 뛰어내려 내 몸을 피로 물들이기도 한다. (···) 그러나 그토록 많은 놀이들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또 다른 아스테리온의 놀이이다. 나는 그가 나를 찾아오고 그에게 우리 집을 보여 주는 척한다. 나는 아주 정중하게 인사하면서 "그러면 이전의 교차로로 갑시다."나 "이제 또 다른 마당으로 나가 봅시다." 혹은 "나는 당신이 이 도랑을 좋아하시리라는 걸 알지요."나 "이제 모래로 가득한 저수조를 보게 될 겁니다." 또는 "어떻게 지하실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지 보시게 될 겁니다." 따위의 말을 한다. 가끔씩 나는 실수를 범하고, 그러면 우리 둘은 기분 좋게 웃는다.
알레프 86-87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나는 그들이 누구인지 모르지만, 그들 중의 하나가 죽으면서 언젠가 나의 구원자가 도착할 것이라고 예언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때부터 나는 고독이 고통스럽지 않다. 그건 나를 구해 줄 사람이 살고 있고, 마침내 그가 일어나 먼지 위로 강림할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알레프 아스테리온의 집,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저는 배경지식 없이 읽어서(처음 읽을때 주석 잘 안 읽는편;;;) 마지막에 아스테리온의 정체를 알게 되었습니다. 사실 마지막에 아스테리온이 미노타우르스라는 것을 알게해주는 부분이 없어도 저는 이것저것 상상하며 참 재미있게 읽었겠다 싶긴한데, russist님 말대로 끝까지 읽고나니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게 되더군요. 즐거운 독서였어요. 그리스 신화, 영웅이 아닌 괴물의 시선... 이라는 면에서 결은 많이 다르지만 헤라클레스가 물리친 괴물 게리온의 시선으로 서술한 앤 카슨의 <빨강의 자서전>도 생각났습니다(저에게 다소 난해했던...) :) <아스테리온의 집> 설정이 너무 흥미로웠는데 좀 짧아서 아쉬웠네요. 앤 카슨처럼 더 길게 써달라고 부탁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빨강의 자서전 - 시로 쓴 소설앤 카슨에게 큰 명성을 안겨준 대표작. 그리스 신화 속 헤라클레스의 12과업 중 열 번째 노역의 에피소드를 영웅이 아닌, 그가 화살로 쏘아 죽인 빨강 괴물 게리온의 입장에서 다시 쓴 작품이다. 신화 속 영웅과 괴물의 이야기는 비정하고 아름다운 소년 헤라클레스와 빨강 날개를 단 외로운 소년 게리온의 사랑 이야기로 옮아간다.
제가 이 책의 후속편 레드닥>을 읽으려다가 ㅎㅎㅎ 이건 두 권다 사서 읽어야겠다 싶어서 일단 닫았습니다. 저는 가끔 그런 책이 있더라고요. 꼭 사서 메모하고 밑줄쳐야하는.
앗 그런 방법이ㅠ 저로선 각주 안 본 눈을 사고 싶을 정도였어요··· 앤 카슨의 책은 꼭 한번 읽어보리라 다짐하는데 자꾸 뒤로 밀리고 있네요. 책 추천도 감사합니다!
얼핏 대화를 훑어만 보다가 각주 이야기와 그리스 신화 니야기가 있어서 각주를 가리고 읽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아스테리온이 미노타우로스임을 알게 되니 쾌감이 살짝 있네요. 한 번 더 읽고 돌아오겠습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또 다른 아스테리온의 놀이이다. 나는 그가 나를 찾아오고 그에게 우리 집을 보여 주는 척한다. (…) 가끔씩 나는 실수를 범하고, 그러면 우리 둘은 기분 좋게 웃는다.
알레프 87,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의식은 단지 몇 분만 지속된다. 내 손이 피로 물들지도 않았는데 그들은 차례로 하나씩 쓰러진다. 그들이 쓰러진 곳에 그들은 남고, 시체들은 한 복도를 다른 복도들과 구분하는 데 도움을 준다. 나는 그들이 누구인지 모르 지만, 그들 중의 하나가 죽으면서 언젠가 나의 구원자가 도착할 것이라고 예언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때부터 나는 고독이 고통스럽지 않다. 그건 나를 구해 줄 사람이 살고 있고, 마침내 그가 일어나 먼지 위로 강림할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내 귀가 세상의 모든 소리들을 들을 수 있다면, 나는 그의 발자국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나를 복도들이 더 적고 문들이 더 적은 곳으로 데려다 준다면 좋으련만. 내 구원자는 어떻게 생겼을까? 나는 생각한다. 그는 황소일까 아니면 사람일까? 혹시 사람의 얼굴을 지닌 황소일까? 아니면 나처럼 생겼 을까?
알레프 88,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아침 햇살이 청동 검에 비쳤다. 이제 칼에는 피의 흔적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믿을 수 있어, 아리아드네?" 테세우스가 말했다. "미노타우로스는 거의 방어하려고도 하지 않았어."
알레프 89,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아스테리온의 집] 완전히 동일한 한 사람도 관점에 따라서 둘로 갈라지고 분열될 수 있다는 것이 '아스테리온 놀이'가 아닐까 합니다. 동일한 신화적 대상이 3인칭의 영웅된 관점에서는 괴물 미노타우로스이지만, 1인칭으로 들어가면 스스로 고귀한 아스테리온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요. 우리는 미로 바깥에서 미로의 역사와 그 의미의 변천사와 미노타우로스의 신화를 자세히 논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미로 속에 들어간 사람으로서 아스테리온이 어떠했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그것은 신화가 현실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고, '괴물'은 언제나 타인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괴물 미노타우로스가 아니라 1인칭의 '나' 아스테리온으로 들어가는 경험은 허구의 장르인 소설로만 가능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한번씩 어떤 소설을 볼 때, 이 작품이 다른 장르라면 어땠을까 하는 질문을 던져봅니다. 예컨대 ⟨아스테리온의 집⟩이 영화였다면 어떨까요? 저로선 잘 그려지지 않습니다. 보르헤스가 의도했던 탐정 소설적인 구도는 오직 텍스트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영화는 좋든 싫든 관객에게 스크린이라는 매체를 통해서 보여져야 하고, 또 스크린은 좋든 싫든 우리 바깥의 외부 대상을 시각적으로 재현해서 관객 앞에 내놓아야 하기 때문에 아스테리온의 목소리가 아니라 외양을 처음부터 드러내야 합니다. 그 점에서 영화는 시각적인 것에 일차적으로 묶여 있는 장르가 아닌가 합니다. 그렇다면 이 단편 소설에서 1인칭은 필연적인 선택일 것입니다. 우리는 타인의 삶을 얼마든지 논할 수 있지만, 자기 자신의 삶을 타인의 삶처럼 논하지는 못합니다. 소설은 그 불가능함을 잠시나마 가능하게 해주는 장르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소설은 1인칭의 내면으로 곧장 이행할 수 있다는 대단히 특출한 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단편 소설을 통해서 우리가 영웅의 관점에서 괴물 미노타우로스가 아니라 1인칭의 왕자 아스테리온을 경험할 수 있는 것만 봐도 그렇습니다. 이 단편을 통해서 제가 알게 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괴물은 언제나 타인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연관성은 너무 방대하고 비밀스러워서 현재를 무효화하지 않고는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도 단 하나의 머나먼 사건조차 폐기할 수 없다. 과거를 변경한다는 것은 단 하나의 사건을 바꾸는 것이 아니다. 그건 그 결과들을 무효로 만드는 것인데, 그 결과들은 무한하게 확장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그것은 두 개의 세계사를 만드는 행위이다.
알레프 또 다른 죽음,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다중우주, 평행우주, 메타버스를 연상케하는 재미있는 소설이었습니다. :) 사실 이런 상황(기억의 왜곡, 같은 일에 대한 진술의 엇갈림, 자기가 말한 것도 또는 들은 것도 잊어버리는 망각) 살면서 크고 작게겪지 않나요? (상사가 지시하거나 의견을 말해놓고 망각하는 상황, 분명히 어떤 말을 들은거 같은데 다들 내가 잘못들은거라고해서 혼자 꿈 꾼건가 생각되는 상황 등등) 다음번에 이런일이 제게 생기면 이 작품이 생각날것 같네요. 두 개의 세계가 겹쳐지며 미처 갱신되지 못한데서 혼란이 오는거라고 😂 아, 제사ephigraph읽는 걸 좋아하는데 이 작품에는 제사가 없더군요.
그쵸··· 현실에서 이런 일을 만나면 분통 터질 겁니다🥲 모쪼록 이번 모임도 수고하셨습니다!
화제로 지정된 대화
[또 다른 죽음~] 전반부 모임의 마지막 작품입니다. 정말 멋진 작품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미리 수고하셨다고 인사 드립니다😆 사소한 잡담으로 시작하자면, 최근에 본 독일의 철학자 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의 강연이 떠오릅니다. 그는 철학으로 깨달을 수 있는 세 가지가 있다고 말합니다. 첫째로, 세상은 언어로 종속돼 있지만 언어는 진실의 표현 수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둘째로, 모든 객관적 주장에는 주관적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셋째는 과학적 사실을 포함한 진실은 세상과 완벽히 일치하지 않으며, 외려 진실은 타인에 의해 확인되어야 하는 정당성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 가지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근원적 한계로 인해 '유일한' 진실에 다가갈 수 없고, 다만 각자의 주관성에 매몰돼 있으며, 그리하여 오직 타인을 통해서만 주장의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죽음⟩에도 비슷한 얘기를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어쩌면 한 개인의 역사란, 누군가의 망각 위에 또 다른 망각을 포개는 지난한 행위이고, 그 망각의 연쇄고리를 하나의 일관된 이야기 안에서 이해하고 말하려는 욕망의 산물 이라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본격적으로 본문 얘기를 해보면, 소설에 등장하는 페드로 다미안을 둘러싼 여러 사람의 기억이 얽히고, 그에 따라 각각이 서로 모순되는 현실들로 갈라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소설에 나오는 주장/증언을 시간순으로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1) 페드로 다미안은 엔트레리오스의 괄레과이 출신입니다. 그는 1904년 우루과이 혁명 당시 아파리시오 사라비아를 추종하여 마소예르 전투에서 용맹히 싸웁니다. 이후 귀향하여 1946년 죽는 그날까지 조용히 여생을 살았습니다. 이는 화자인 보르헤스가 페드로 다미안으로부터 직접 들은 내용과 지인인 파트리시오 가논을 비롯한 주변 정황을 통해서 구성한 삶입니다. (2) 페드로 다미안은 마소예르 전투에 참가하긴 했으나 사실은 겁쟁이처럼 도망쳤습니다. 고향에서 40년 간 은둔하듯이 살았던 것은 전투에서 도망쳤다는 죄책감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죄책감 속에서 1946년 죽었습니다. 이는 마소예르에 전투에 참가했던 디오니시오 타바레스 대령의 기억을 통해서 구성한 다미안의 삶입니다. (3) 얼마간 시간이 흘러, 보르헤스는 후안 프란시스코 아마로 박사와 함께 타바레스 대령을 재회합니다. 아마로 박사의 기억에 의하면 페드로 다미안은 1904년 마소예르 전투에서 용감하게 선봉으로 진격하다가 적군의 총탄에 맞아 전사했습니다. 타바레스 대령은 어쩐 일인지 아마로 박사의 증언에 공감하면서도, 과거에 자신이 말한 내용은 기억하지 못합니다. (4) 한술 더 떠서, 소설 초반부에 1946년 다미안의 부고 소식을 전해주었던 보르헤스의 친구, 파트리시오 가논조차 '다미안이 누구더냐'고 묻는 지경에 이릅니다.
이어서 얘기해보면, (1)과 (2)에서 모두 다미안은 마소예르 전투에 참가했고, 이후 엔트레리오스로 귀향하여 조용한 여생을 살다 1946년에 죽습니다. 하지만 그 세부 내용은 조금 달라서 (1)에서 다미안은 마소예르 전투에서 용감하게 싸웠지만 (2)에서 다미안은 겁쟁이처럼 도망쳤음이 밝혀집니다. 그러나 (3)에 이르러서 다미안은 1904년 마소예르 전투에서 전사했음이 밝혀집니다. 요약하면, (1)과 (2)는 같은 현실을 공유할 수 있지만, (1)과 (3), (2)와 (3)은 같은 현실을 공유하지 못합니다. 죽은 시기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4)로 인해서 앞선 사실 관계를 따지려던 보르헤스의 모든 수고가 의뭉스러워지고 있습니다. 각각의 사실 관계는 서로 모순됩니다. 인간의 불완전한 기억과 망각을 언급하지 않고서는 그 각각을 논할 수가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어느 하나를 택하면 나머지 것들은 모두 거짓이거나 불완전한 기억, 망각의 산물이 됩니다. 그런데 재밌게도 보르헤스는 서로 모순되는 세계를 하나로 합칠 수 있는 초자연적인 추측을 채택합니다. 이 추측을 (a)라고 부르면, (a) 울리케 폰 쾰만은 (1)과 (3)을 양립시킵니다. 페드로 다미안은 1904년 마소예르에서 전사했지만, 귀향하고자 하는 영혼의 강한 열망 덕분에 신은 40년 간 그를 고독한 그림자로 살도록 '잠시' 허락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조금 복잡해집니다. 울리케 폰 쾰만의 추측을 생각하면서 보르헤스는 두 개의 텍스트, 두 명의 인물을 떠올립니다. 바로 이탈리아의 신학자인 피에르 다미아니(Pier Damiani)와 단테의 ⟪신곡⟫ 천국 21편에 나오는 피에트로 다미아노(Pietro Damiano)입니다. 보르헤스가 떠올렸다는 ⟪신곡⟫의 두 시행은 “Poca vita mortal m'era rimasa /quando fui chiesto e tratto a quel cappello”으로 추측되는데, 영역본으로는 “Not much of mortal life was left to me /when I was sought for, dragged to take that hat”입니다. (여기서 hat은 추기경의 모자를 의미합니다. 단테에 따르면, 피에트로 다미아노는 주님의 종으로서 추기경이 되었으나 모든 성직에서 물러나 수도원에 들어가 평범한 수사로 일생을 마감하고 천국에 이른 인물입니다.) 정확한 사실은 알기 어렵지만, 단테의 피에트로 다미아노는 11세기 신학자 피에르 다미아니를 연상시키며, 보르헤스에 따르면 그는 '신이 한때 존재했던 것을 존재하지 않게 만들 수 있다'고 주장했다고 합니다. 요약하면, 보르헤스는 울리케 폰 쾰만의 초자연적 추측에서, 단테의 피에트로 다미아노와 11세기 신학자 피에르 다미아니를 떠올리고, 이 두 인물을 통해서 다시 피에르 다미안의 삶을 자신의 방식으로 추측합니다. 보르헤스의 추측을 편의상 (b)로 부르면,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b) 보르헤스는 (2)와 (3)을 양립시킵니다. 1904년 피에르 다미안은 마소예르 전투에서 도망쳐서 엔트레리오스에 숨어 살며, 언젠가 설욕할 그 날을 위해 전생(全生)을 가다듬습니다. 마침내 1946년, 다미안은 죽음 직전의 정신착란 상태에서 1904년의 마소예르로 가고, '그리스식 꿈의 그림자' 속에서 비로소 용맹하게 싸운 끝에 전사합니다.
역사 1)을 말살하고 역사 2)로 대체하는 과정의 시차에서 발생한 혼란을 화자/작가가 목격해버리고 만 것이군요. 하지만 진실을 곧이 곧대로 옮긴 것이 아니라 픽션으로 완성되었기에 특별대우를 받았고요. 전후 관계를 꼼꼼이 따져야해서 살짝 복잡한가 싶었지만 역시 두 번 읽어서 해결했습니다. 두 판본으로 교차해 읽으니 이해하기가 더 편했네요.
과거를 변경시키는 것은 단지 사실 하나를 바꾸는 게 아니다. 그것은 무한으로 펼쳐져 있는 그것의 결과들을 폐기시켜 버리는 것이다. 다른 말로 바꿔 말해 본다면 이러하리라. 그것은 바로 두 개의 세계 역사를 만들어내는 것과 같다.
알렙 111,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아 저는 요즘 총기가 떨어지는지 이런 소설은 여러 번 안 읽으면 무슨 소린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두 판본이 있다는 게 이럴 땐 좋은 것 같아요! 항상 모임 꼬박꼬박 참여해주셔서 감사해요! 또 뵐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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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노란책 리뷰 <초대받은 여자> 시몬 드 보부아르안노란책 리뷰 <time shelter> 게오르기 고스포디노프안노란책 리뷰 <개구리> 모옌안노란책 리뷰 <이방인> 알베르 카뮈
[그믐클래식] 1월1일부터 꾸준히 진행중입니다. 함께 해요!
[그믐클래식 2025] 한해 동안 12권 고전 읽기에 도전해요! [그믐클래식 2025] 1월, 일리아스 [그믐클래식 2025] 2월, 소크라테스의 변명·크리톤·파이돈·향연[그믐클래식 2025] 3월, 군주론 [그믐클래식 2025] 4월, 프랑켄슈타인
4월의 그믐밤엔 서촌을 걷습니다.
[그믐밤X문학답사] 34. <광화문 삼인방>과 함께 걷는 서울 서촌길
스토리탐험단의 5번째 모험지!
스토리탐험단 다섯 번째 여정 <시나리오 워크북>스토리탐험단 네 번째 여정 <베스트셀러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스토리 탐험단 세번째 여정 '히트 메이커스' 함께 읽어요!스토리 탐험단의 두 번째 여정 [스토리텔링의 비밀]
셰익스피어와 그의 작품들
[책걸상 '벽돌 책' 함께 읽기] #21. <세계를 향한 의지>[북킹톡킹 독서모임] 🖋셰익스피어 - 햄릿, 2025년 3월 메인책[그믐연뮤클럽] 3. "리어왕" 읽고 "더 드레서" 같이 관람해요
봄은 시의 세상이어라 🌿
[아티초크/시집증정] 감동보장! 가브리엘라 미스트랄 & 아틸라 요제프 시집과 함께해요.나희덕과 함께 시집 <가능주의자> 읽기 송진 시집 『플로깅』 / 목엽정/ 비치리딩시리즈 3.여드레 동안 시집 한 권 읽기 13
🎁 여러분의 활발한 독서 생활을 응원하며 그믐이 선물을 드려요.
[인생책 5문 5답] , [싱글 챌린지] 완수자에게 선물을 드립니다
서리북 아시나요?
서울리뷰오브북스 북클럽 파일럿 1_편집자와 함께 읽는 서리북 봄호(17호) 헌법의 시간 <서울리뷰오브북스> 7호 함께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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