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보르헤스 읽기] 『알렙』 같이 읽어요

D-29
과거를 변경시키는 것은 단지 사실 하나를 바꾸는 게 아니다. 그것은 무한으로 펼쳐져 있는 그것의 결과들을 폐기시켜 버리는 것이다. 다른 말로 바꿔 말해 본다면 이러하리라. 그것은 바로 두 개의 세계 역사를 만들어내는 것과 같다.
알렙 111,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아 저는 요즘 총기가 떨어지는지 이런 소설은 여러 번 안 읽으면 무슨 소린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두 판본이 있다는 게 이럴 땐 좋은 것 같아요! 항상 모임 꼬박꼬박 참여해주셔서 감사해요! 또 뵐게요:)
화제로 지정된 대화
[~또 다른 죽음] 보르헤스는 이런 식의 추측이 "두 개의 세계 역사를 만들어내는 것"이라서, 의도치 않게 현실에서 혼란을 만들어낸다고 주장합니다. 현실에서 페드로 다미안에 관한 주변 인물들의 증언이나 목격담이 서로 상충하거나, 더 이상 그를 기억할 수단이나 사람이 남지 않았다는 사실 역시 이런 "두 개의 세계 역사"에 동반하는 혼란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보르헤스의 추측/상상이 지니는 특별한 점이 도드라집니다. 그것은 바로 (a)와 (b)로 이루어진 두 가지 추측이 일종의 픽션의 세계에 속하며, 픽션의 세계란 상식적인 세계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상식적인 추측은 당연히 이런 초자연적인 추측을 배제할 것입니다. 타바레스 대령과 아마로 박사의 증언을 늙은이의 오락가락하는 정신이나 망각 탓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상식'에 따르면, 1904년에 전사한 다미안과 1946년에 죽은 다미안이 전혀 다른 이름을 지닌 두 인물이구나 동명 이인이라고 대답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픽션은이런 상식을 염두에 두되, 상식에 매이지 않습니다. 사실에서 출발하되 사실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뭇사람들이 혼동과 망각을 말하면서, 별개로 치부하거나 미치광이의 헛소리라 부를 만한 사건들에서 단 하나의 이야기를 봅니다. 보르헤스로 추측되는 '나'는 현실의 논리를 따져서 '있을 법한 현실'을 채택하고 나머지를 모두 폐기하는 게 아닙니다. 현실의 논리를 넘어서 모순되는 것이 양립하는, 그리하여 '어떠한 것도 가능한 픽션'을 봅니다. 여기서 픽션의 역할이 무엇인지 드러나고 있다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보르헤스는 다미안을 아는 가게 주인 아바로아가 죽은 이유는 다미안에 관한 모순된 기억을 너무 많이 갖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모순된 기억이 공존하는 현실을 더 이상 살아갈 수 없어서 죽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에, 보르헤스는 왜 자신이 이런 모순 속에서도 죽지 않았는지 궁금해 합니다. 보르헤스는 그 이유로 '픽션'을 듭니다. 픽션이란 모순된 것의 공존이기 때문입니다. 전적인 화해는 아니지만 서로 모순되는 현실을 잠시 허용하는 수단이 되는 것입니다. 이는 바꿔 말하면, 서로 상충하는 현실을 간직하고 살아가기 위해서라도 픽션이 필요하다는 의미가 됩니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보르헤스는 재밌게도 자신의 이러한 모든 추측을 의심합니다. 자신의 기억조차 의심하면서 앞서 서술한 증언들을 의뭉스럽게 만듭니다. 자신의 이야기 속에서 과연 사실만 있었는지, 허위는 없었을지 곰곰이 생각해봅니다. 11세기의 이탈리아 신학자 피에르 다미아니의 논문을 읽고 나서 단테의 신곡에 등장하는 피에트로 다미아노를 연상한 것처럼, 자신이 페드로 다미안이 아닌 인물을 페드로 다미안으로 불렀던 것은 아닌지 마지막까지 생각해봅니다. 그렇다면 보르헤스에게 이 픽션은 이런 의심의 수단임과 동시에 그 결과입니다. 이런 픽션적인 의심만이 모순된 것의 공존으로서 존재한다는 아이러니와 함께요. 마지막으로 짚어보고 싶은 것은, 보르헤스가 초반부에 언급한 랄프 웰도 에머슨의 시 ⟨과거⟩입니다. 보르헤스의 기억에 따르면, 친구 가논이 이 시를 번역하고 있다는 얘기와 함께 피에르 다미안의 부고를 전해왔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가논은 그런 사실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에머슨의 시는 가논에 의해서 번역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에머슨의 시가 없는 셈 될 뿐 아니라 뒤집히기도 함을 말하는 것일까요? 마지막으로 에머슨의 시 ⟨과거⟩ 전문입니다. 한국어 번역은 Claude에게 간단히 규칙을 정해서 요청했습니다.
The debt is paid, The verdict said, The Furies laid, The plague is stayed, All fortunes made; Turn the key and bolt the door, Sweet is death forevermore. Nor haughty hope, nor swart chagrin, Nor murdering hate, can enter in. All is now secure and fast; Not the gods can shake the Past; Flies-to the adamantine door Bolted down forevermore. None can re-enter there,— No thief so politic, No Satan with a royal trick Steal in by window, chink, or hole, To bind or unbind, add what lacked, Insert a leaf, or forge a name, New-face or finish what is packed, Alter or mend eternal Fact.
알렙 에머슨, The Past,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빚은 탕감되었고, 판결은 선언되었네. 퓨리스(Furies)는 물러났고, 역병은 잦아들었네. 모든 운명이 정해졌으니; 열쇠를 돌리고 빗장을 걸어라. 이제 죽음만이 달콤하리. 교만한 소망도, 짙은 실망도 죽일듯한 증오도, 들일 수 없네. 이제 모든 게 굳건하고 단단하여; 신들조차 흔들 수 없는 과거; 아다만틴의 문으로 날아가 영원히 빗장이 내리 걸렸네. 아무도 다시 그곳에 다시-들어갈 수 없네. 그토록 교활한 도둑도, 고결한 비책을 지닌 사탄도 창문, 구멍이나 틈새로 숨어들어 묶거나 끄를 수도, 벌충할 수도 없네. 한 장을 삽입할 수도, 위명(僞名)할 수도, 완성된 것을 완성하거나 새로이 할 수도, 영원한 사실을 변경하거나 수정할 수도 없네.
알렙 에머슨, 과거,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그래서 나는 내가 과연 줄기차게 진실을 기록했는가에 대한 확신이 서질 않는다. 나는 나의 이야기 속에 허위 기억들이 게재해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나는 (만일 그가 실제로 존재했다면) 뻬드로 다미안으로 불리지 않았는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든다. 그리고 내가 그 이름으로 그를 기억하고 있는 것은 나중에 가서 삐에르 다미아니의 논거가 그의 얘기를 구상케 해주었다고 믿기 위해서 그러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알렙 112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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