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온지기와 함께 읽기] 욘 포세 <아침 그리고 저녁> , <샤이닝>

D-29
오히려 중역을 했기 때문에 원서의 느낌을 잘 살렸다고 합니다. 초반에 해당하는 1부가 정말 몰입도가 낮긴 했죠. 일반적인 소설도 아니고, 그렇다고 시적인가 싶으면 개인적으로는 그렇지도 않다고 느꼈습니다. 원서는 시적 느낌이 잘 살아있는지 모르겠네요.
이제 에르나는 가고 없는데 빨래통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런 것이다, 사람은 가고 사물은 남는다,
아침 그리고 저녁 p43, 욘 포세 지음, 박경희 옮김
반려자를 잃었다는 상실감, 그 상실감을 채우기 위해 찾는 물건, 그 물건을 보며 느끼는 그리움. 담담하게 썼지만 마음 깊은 곳을 울리는 문장이라 생각이 들어 적어봤습니다.
나의 죽음도 두렵지만, 그보다 더 큰 슬픔은 사랑하는 누군가를 먼저 보내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더욱이 아무런 예고도 없이 찾아온 이별은 오래도록 가슴이 아려오는 상실감을 느낄테지요. 이 또한 삶에서 겪어야 할 일이지만 할 수만 있다면 가장 나중으로 제일 마지막으로 미루고 싶어집니다.
담담함에서 묻어나는 요한네스의 슬픔과 상실감이 제대로 전달되는 부분이었어요. 정말로 오랜시간을 함께 해온 소중한 사람의 상실이라는 거대한 파도에 휩쓸리면 오히려 격렬함을 넘어선 공허함이 오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에르나가 지금 여기 있다면, 어떤 예고도 없이, 그렇게 느닷없이 떠나야 했다니, 죽기 전날 저녁 그녀는 이 식탁 앞에 앉아 수다를 떨었다, 무슨 얘기였는지는 더이상 기억나지 않지만, 아무튼 그랬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잠자리에 들었다, 오랫동안 그래왔듯 그는 거실 옆방, 그녀는 위층 다락방에서였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그녀는 아래로 내려오지 않았고 그것이 마지막이었지, 요한네스는 생각한다
아침 그리고 저녁 p 41, 욘 포세 지음, 박경희 옮김
지금, 안나 페테르센이 다른 사람과 그렇게 되자마자 저 둘이 나타나는구먼,(중략) 저는 마르타에요, 한명이 말한다 그리고 저는 에르나고요, 다른 한 명이 말한다
아침 그리고 저녁 욘 포세 지음, 박경희 옮김
하나의 사랑을 잃으면 세상을 잃은 것 같지만, 살다보면 다음 사랑이 자연스레 찾아온다는 부분 같았습니다.
1장에서 보면 늙은 안나와 어린 안나가 나옵니다. 아마 노인 요한네스가 만나지 못했던 안나 페테르센이 늙은 안나이지 않을까 추측해봅니다. 그 늙은 안나의 손녀(라고 추측)도 할머니의 이름을 이어받아 안나가 되었고, 태어나는 아이는 늙은 요한네스의 이름을 이어받아 요한네스가 됩니다. 한 개인은 사라지더라도, 그 개인의 일부 고유성은 계속해서 물려준다는 것을 여기서 볼 수 있었어요. 요한네스는 할아버지와 같은 어부가 되고, 안나는 할머니를 따라 산파가 되고요.
또하나 마르타가 요한네스의 친구인 페테르와 결혼하는 줄 알았는데, 올라이의 아내가 페테르로 나온 것을 보고 이 둘도 이어지지 않았던 것일까 궁금하더군요ㅎㅎ 요한네스와 페테르의 대화 속에서도 페테르의 가족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더라고요.
이런, 지금 요한네스가 바닷가에서 페테르를 만났습니다. 이 소설 혹시 태어난 날과 죽는 날, 이틀의 이야기 인 건가요? 다소 지루하게 읽다가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네 맞아요! 1장은 탄생, 2장은 죽음으로 각각 하루씩 담겨있어요
요한네스는 가만히 서서 언덕과 들판, 산과 해안에 늘어선 집들을 둘러본다, 부잔교와 부표에 묶여 있는 그의 작은 노 젓는배, 그리고 보트하우스들과 거리 위쪽의 집들을 바라보며 그는 그 모든 것에 마음이 뿌듯해지는 것을 느낀다, 야생초들과 그가 아는 모든 것, 그 모든 것이 이 세상에서 그가 속한 자리다, 그의 것이다, 언덕, 보트하우스, 해변의 돌들, 그 전부가, 그런데 그것들을 다시는 볼 수 없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하지만 그것들은 마치 소리처럼, 그렇다 그 안의 소리처럼 그의 일부로 그 안에 머물 것이었다,
아침 그리고 저녁 p74, 욘 포세 지음, 박경희 옮김
아~ <아침 그리고 저녁>은 제가 최근 읽은 소설 중에 가장 신박한 이야기였습니다. 책 표지에 "욘 포세 장편소설"이라고 써 있어서 의아했습니다. 분량으로 보아 장편이라 할 수가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이렇게 기발하게 인간의 삶 전체를 아우르는 이야기를 만들어 내다니요. 장편소설의 장편은 원고의 분량이 아닌, 담고 있는 서사의 분량이었나 봅니다. 그러고 보니 책의 띠지에 노벨문학상 선정의 이유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의 혁신적인 희곡과 산문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목소리를 부여한다." 저는 '혁신'이란 단어에 방점이 찍혔네요.
욘 포세도 그렇고 최근에 핫했던 클레어 키건 작가님도 그렇고 '장편'의 개념을 깨부순 감이 있어요. 분량은 적어도 그것이 담고 있는 메세지는 어느 장편소설 못지 않게 거대했어요.
<이처럼 사소한 것들>도 초반 진도를 넘어서면 작품의 진면목이 나오는 건가요? 초반 몰입 실패로 덮어 두었는데, 다시 시도해 봐야겠네요.
담담한 부분이 있어서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읽다보면 엄청나게 흡입됩니다!
죽음의 과정이 요한네스의 그것과 같다면, 죽음을 두려워할 것도 슬퍼할 것도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장 친한 친구가 마중을 나오는 죽음이라니요. 이보다 더 죽음을 따뜻하게 표현한 작품이 있을까 싶습니다. 사는 동안 이렇다 할 성공도 업적도 없었지만, 가족들과 이웃들과 친구들과 따뜻하게 지내온 요한네스의 삶은 죽음 이후에도 그렇게 영원할 것만 같습니다.
어디로 가는데? 요한네스가 묻는다 아니 자네는 아직 살아 있기라도 한 것처럼 말하는구먼, 페테르가 말한다 목적지가 없나? 요한네스가 말한다 없네, 우리가 가는 곳은 어떤 장소가 아니야 그래서 이름도 없지, 페테르가 말한다 위험한가? 요한네스가 묻는다 위험하지는 않아, 페테르가 말한다 위험하다는 것도 말 아닌가, 우리가 가는 곳에는 말이란 게 없다네, 페테르가 말한다 아픈가? 요한네스가 묻는다 우리가 가는 곳엔 몸이란 게 없다네, 그러니 아플 것도 없지, 페테르가 말한다 하지만 영혼은, 영혼은 아프지 않단 말인가? 요한네스가 묻는다 우리가 가는 그곳에는 너도 나도 없다네, 페테르가 말한다 좋은가, 그곳은? 요한네스가 묻는다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어, 하지만 거대하고 고요하고 잔잔히 떨리며 빛이 나지, 환하기도 해, 하지만 이런 말은 별로 도움이 안 될 걸세, 페테르가 말한다
아침 그리고 저녁 p131, 욘 포세 지음, 박경희 옮김
저도 이 부분이 상당히 마음에 들었던 구절입니다. 어떤 종교적 구원이라든지, 과학이 제시하는 자연으로의 회귀 라는 것보다 오히려 가장 마음을 따듯하게 했던 죽음의 묘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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