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나눔] 여성살해, 그리고 남겨진 이들의 이야기 - 필리프 베송 <아빠가 엄마를 죽였어>

D-29
한 번 잡은 손을 놓을 수 없더군요. 기차를 타고 보르도 집으로 가는 나의 모습과 생각을 보며 카뮈의 <이방인>이 떠올랐습니다. 뫼르소가 어머니의 부고를 듣고 마랭고에 있는 양로원을 가는 모습이 겹쳐보였던 것이죠. 현실과 비현실의 느낌이 혼재되어 있는 그런 상태라고나 할까요?
기차를 타고 가는 길에 특별히 기억에 남는 것은 없다. 그 당시 주기적으로 탔던 기차라 눈에 익은 풍경들이 스쳐갔다. 그러나 나는 풍경을 보지 않았거나, 볼 수 없었다. 녹색, 지나가는 녹색, 끝없는 들판. 그 어떤 것도 내 주의를 끌지 못했다. 잡지 읽는 데 푹 빠진 아주머니와 조금 떨어진 곳에 있던 어수선한 여자아이, 그 아이의 고함과 부산스러움이 거슬렸던 게 기억난다. 그런 내가 싫었다. 짜증을 낼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이 얼마나 유약한지도 모르고 주변의 비극에 개의치 않는 이 아이를 경이로워 했어야 했다.
아빠가 엄마를 죽였어 p.34, 필리프 베송 지음, 이슬아 옮김
'일어날 일이었어.' 아니.'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어.? 그렇지만 나는 단 한 번도 그런 예측을 해본 적이 없다. 단 한 번도.
아빠가 엄마를 죽였어 29, 필리프 베송 지음, 이슬아 옮김
자신이 얼마나 눈이 멀어 있었는지 깨달았다.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버린 부부의 문제를 단숨에 살인을 저지른 남자의 광기를 어떻게 못 보고 지나칠 수 있었을까? 베르종 아줌마가 굳이 내게 털어놓지 않아도 공포와 괴로움에 질린 눈빛이 모든 것을 말해주었다. 베르종 아줌마의 표정에 죄책감이 깃들어 있었다. 나는 레아를 더욱 세게 껴안았다.
아빠가 엄마를 죽였어 p47, 필리프 베송 지음, 이슬아 옮김
뉴스에서 만나는 부모의 아동학대 살인 사건, 수 많은 데이트 폭력들... 가장 잘 아는 가족이나 지인으로 인한 이 끔찍한 사건들을 접할 때 마다 마음이 무거운데요. 뉴스 몇줄로 접하던 사건의 이 면을 적나라가게 지켜보는 듯한 ....생생하고도 고통스러운 기분으로 읽고 있습니다. 사실적이고도 깔끔한 문장 덕분에 더욱 몰입하게 되네요
이 폭풍 속에서 분명한 사실과 단순한 진실이 동생에게 나침반이 되어주었다.
아빠가 엄마를 죽였어 p. 25, 필리프 베송 지음, 이슬아 옮김
이제 나는 레아가 내 말을 잘랐다고 믿는다. 나를 보호하기로 한 사람은 바로 동생이었다.
아빠가 엄마를 죽였어 p. 25, 필리프 베송 지음, 이슬아 옮김
일관성과 객관성을 확립하고 그 말에 의미를 부여하려면 큰 소리로 발음해야만 했다. 그 말의 내용과 조금이라도 거리를 두고 싶은 헛된 희망을 품은 채.
아빠가 엄마를 죽였어 p. 29, 필리프 베송 지음, 이슬아 옮김
있을 수 없는 일을 있을 법하게 만드는 것은 종종 평범한 이미지들이다.
아빠가 엄마를 죽였어 p. 31, 필리프 베송 지음, 이슬아 옮김
상상할 수 없는 끔찍한 일이 벌어져도 어떤 반사적 행동들은 여전히 남아 있는 법이다.
아빠가 엄마를 죽였어 p.35, 필리프 베송 지음, 이슬아 옮김
동생은 마치 어머니가 아직 숨을 쉬는 듯, 살아 있는 사람인 듯, 마치 아무것도 변한 게 없다는 듯 '엄마랑' 있다고 했다.
아빠가 엄마를 죽였어 p.23, 필리프 베송 지음, 이슬아 옮김
그렇게 난 어머니의 시체 옆에 있는 레아를 보았다. 이 이상한 이야기에는 부연 설명이 필요하다. 나는 실제로 그 장면을 본 적이 없다. 그러나 그 장면이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아빠가 엄마를 죽였어 p. 24, 필리프 베송 지음, 이슬아 옮김
생각해보면 어머니는 자주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 택시 안에서 나는 그동안 그 점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는 것을 깨달았다. 거기에는 분명 원인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빠가 엄마를 죽였어 p.36, 필리프 베송 지음, 이슬아 옮김
이 소설에 나오는 장소를 경찰과의 대화로 유추해서 구글맵에서 찾아보니 그냥 평범한 마을이고 학교 학생들이 다니는 곳 같은데.. Blanquefort, Rue Poumeau Delille에 있는 Republique 버스역은 프랑스 남서부의 보르도시 외곽에 있는 작은 동네입니다.
아버지의 평소 남탓하고 피해망상적인 성격, 그리고 어머니의 불안한 태도 등에서도 사건의 조짐이 보이네요. 어쩌면 두 남매의 반응이 충격받았지만 또한 이상하지 않다는 것도 그런 과거의 아버지 모습을 그려주네요.
책 잘 받아서 읽기 시작했어요. 감사합니다! 한 번 잡으면 놓기 힘든 책이라는 말씀을 1장 읽으면서 완전 공감하게 되네요. 그동안 저도 ‘끔찍한 일이 벌어졌을 때, 우리의 관심이 미처 미치지 못하는 곳에 있는 이들’에게 관심을 두지 못했다는 걸 서문을 읽으며 깨달았고, 그래서 ‘나는 중요하지 않아, 내게는 단어가 없어’라는 말이 더 마음에 깊이 남았습니다. 앞으로 남은 이야기가 어떻게 진행될지 궁금하네요.
보내주신 책 잘 받았습니다. 주말에 절반 정도 읽었는데, 말씀하신 것 처럼 가독성이 있는 책이긴 하지만 중간중간 도저히 책장이 안넘어가 덮어놓고 한참을 멍하게 있다 다시 펼치곤 했습니다. 이렇게 중요한 책을 소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똑같이 생긴 집이지만 베르종 씨의 집에서는 아무도 죽지 않고, 아무도 살해되지 않았다. 벼락에 맞는 나무가 있는 한편 간발의 차이로 무사한 나무도 있다. 이건 불운이냐 행운이냐의 문제다. 그렇지만 이 이야기에 우연의 자리는 없었을 것이다.
아빠가 엄마를 죽였어 p. 43, 필리프 베송 지음, 이슬아 옮김
나약하게 굴 수 없었다. 계속 이렇게 주문을 거는 편이 나았고, 그렇게 난 슬픔과 충격, 증오에 잠식되지 않았다. 내게는 더 중요한 게 있었다. 레아가 있었다. 시간이 흐른 후 나는, 동생이 의도하진 않았지만, 너무 슬픈 격정이나 쓰라린 분노로부터 나를 구해주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 감정은 내게 허용되지 않았다.
아빠가 엄마를 죽였어 p.45, 필리프 베송 지음, 이슬아 옮김
레아는 내가 하는 대로 가만히 있어서 나무를 껴안는 것 같았다. 동생은 팔을 늘어뜨리고 나를 마주 안지 않았다. 이 무기력은 적대감이 아니라, 동생에게서 삶이 빠져나갔다는 뜻이었다. 어떤 움직임도, 어떤 감정의 가능성도 없었다. 생기를 잃고 껍데기만 남은 모습에서 동생이 겪은 폭력성의 위력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아빠가 엄마를 죽였어 p.45, 필리프 베송 지음, 이슬아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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