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나눔] 여성살해, 그리고 남겨진 이들의 이야기 - 필리프 베송 <아빠가 엄마를 죽였어>

D-29
나는 할아버지가 넋이 나간 채 절망감에 휩싸여 운전했을 그 길을 상상해보았다. 누가 할아버지와 함께 와주면 좋았겠지만, 너무 급해서 미처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했다. 나는 할아버지가 겪은 수난을 상상해보았다. 누구도 그런 형벌을 받아서는 안 되었다. .... 할아버지가 그날 저녁에 주차장에 있었다. 얼빠진 상태로. 완전 넋이 나가 있었다. 할아버지는 슬픔덩어리 그 자체였다. 25년 전 아내를 잃고, 이제 외동딸을 잃었다. 이보다 안 좋은 일이 또 있을까?
아빠가 엄마를 죽였어 19 /p90,91, 필리프 베송 지음, 이슬아 옮김
그날 저녁, 나는 동생에게 모두 쓸데없다는 말을 하지 않기 위해 애썼다. 앞으로 동생을 짓눌러 바닥까지 끌어내릴 무게를 생각하면, 지금 동생은 부질없는 것이나 빈껍데기에 매달릴 권리가 있었다.
아빠가 엄마를 죽였어 20 / p97, 필리프 베송 지음, 이슬아 옮김
비극적인 사건으로 가족을 잃은 유가족의 슬픔을 어떻게 헤아릴 수 있을까요. 외할아버지, 레아 그리고 나의 삶을 짓누를 만큼의 거대한 슬픔과 비통함이 느껴졌습니다.
때때로 우리 삶의 궤적은 타인에 의해 결정된다 이리도 슬픈말이 또 있을까
그런 일을 감당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만 열세 살, 열아홉 살 아이들이 얼마나 충격과 공포었을지 …
“너 어디야” “부엌” “혼자 있어?” “엄마랑” 죽은 엄마 옆에서 아무것도 변한 게 없다는 듯 동생이 통화하는 이 장면이 상상되며 너무 끔찍하고 마음이 아팠어요.
어쩌면 그 순간 아버지 노릇을 그만두고 손을 떼기를 내심 바랐을지도 모른다. 그 뒤로는 어떤 것도 묻지 않고, 일말의 관심조차 두지 않고 멀찍이 방관했다.
아빠가 엄마를 죽였어 필리프 베송 지음, 이슬아 옮김
최악인 건, 아버지가 진심인 것처럼 보였단 거야.
아빠가 엄마를 죽였어 p112, 필리프 베송 지음, 이슬아 옮김
저도 이 문장이 너무 기억에 남습니다. 애정(?)이 있었던 존재였기에 그가 보이는 모습의 일부가 진실이 아님을 은연중에 알면서도 다시 믿어보자라고 믿고 다시 그 파편으로 되돌아가는 느낌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문장이었던 것 같아요. 사실 정말.... 알 것만 같지만, 그럼에도 아이들과 나와 함께 보냈던 시간들을 토대로 혹시 몰라 하는 마음으로 돌아가지 않았을까하는 그 모습이 그려지는 것 같아서 너무나도 마음이 아팠습니다.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아 다시 빠져들고 싶지 않았다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상처받은 사람들 특유의 순백의 확고함을 레아는 지니고 있었다.
아빠가 엄마를 죽였어 필리프 베송 지음, 이슬아 옮김
아버지는 온갖 구실을 붙여서 싸움을 기습 공격을 했다. 그는 편집증, 질투, 나르시시즘의 화신이었다.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그는 범림받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휩싸여 있었다.
아빠가 엄마를 죽였어 p113, 필리프 베송 지음, 이슬아 옮김
나는 거의 군대에서나 들을 법한 '대기하라'는 말에 충격을 받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것은 어머니가 떠날 생각을 한 지 오래되었다는 것을 의미했고, 마음을 굳혔다는 것을 의미했으며, 적절한 때나 상황이 덜 나쁜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아빠가 엄마를 죽였어 필리프 베송 지음, 이슬아 옮김
아버지는 지나치리만큼 어머니에게 가까이 붙어서 이 집 주인이 누구고 누가 왕인지, 누구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보고하고 존경심을 표해야 하는지 끈질기게 말했고, 더는 어머니의 침묵과 의도적인 무시를 견딜 수 없게 되자 따귀를 때렸다.
아빠가 엄마를 죽였어 필리프 베송 지음, 이슬아 옮김
"최악인 건, 아버지가 진심인 것처럼 보였단 거야."라고 말했다. 게다가 어머니는 결국 아버지를 용서해주었고, 아니 어쨌든 포기한 것 같았다. 어린아이처럼 흐느끼는 아버지를 위로하며 어머니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아무것도 아니야"라고 말했다. 끔찍했다.
아빠가 엄마를 죽였어 필리프 베송 지음, 이슬아 옮김
어머니는 정확한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말하자면 고백하지 않은 것이다. 동생은 어머니의 말에 수긍했다. 구렁텅이를 숨기면서 "그런 일"이라고만 말한 것이다.
아빠가 엄마를 죽였어 필리프 베송 지음, 이슬아 옮김
이 돌이킬 수 없는 일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이 있지는 않았는지, 우리 대부분이 그토록 무심했던 건지, 아니면 모두 똑같이 속은 것인지 알아야 했다. 첫 번째 경우라면 화풀이할 대상이 생길 것이다. 두 번째는 이미 나를 집어삼킨 죄책감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세 번째 경우라면 조금은 덜 외로울 것 같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이 모든 것은 헛된 희망이었다. 희생양을 찾겠다는 발상은 터무니없고 위험하다. 유일한 범인은 아버지였다. 나만큼이나 다른 사람들도 무관심하거나 부주의 했다는 이유로 내 책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에, 잘못을 떠넘길 수 있다는 생각은 착각이다. 가까스로 책임에서 벗어난다 해도, 갑자기 내가 후회도 부끄러움도 느끼지 않는다면 놀라울 것이다. 아니, 이 후회와 부끄러움은 계속 남아 자꾸 재발하고 곪게 될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아빠가 엄마를 죽였어 필리프 베송 지음, 이슬아 옮김
저도 이 문장 올리려고 했는데요, 꼭 독자들에게 하는 말처럼 들렸습니다.
과연 우리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 걸까, 아니면 아무것도 보고 싶지 않았던 걸까? 우리는 의식하지 못했을까, 아니면 양심의 소리를 외면한 것일까? 양심의 목소리가 들렸을 때, 스스로 변명거리를 만들지는 않았던가. (...) 심지어 이런 결정적인 한마디도 덧붙이면서. "상상할 수 없는 것을 상상할 수는 없으니까..."
아빠가 엄마를 죽였어 필리프 베송 지음, 이슬아 옮김
28장까지 읽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말씀했듯 시종일관 너무 담담한 레아가 자꾸 마음에 걸립니다. 화자가 스스로에게 묻는 질문들은 마치 책을 펼쳐서 읽고 있는 독자들에게 던지는 말들 같았습니다. 이렇게 노골적으로 표가 나는데 당신들은 왜 아무것도 몰랐냐고, 알면서 왜 가만 있었냐고, 설마 폭력을 사생활이라고 변명하는 거냐고, 말이죠. 28장을 읽으면 특히나 어머니가 남매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아들을 "내 사랑"이라고 부르고, 아들의 동성애 고백을 뭐가 문제냐는 듯 받아들이며, 아들이 꿈을 이룰 수 있도록 아버지로부터 방어와 버팀목이 되어준 사람. 저는 여기에 이르러서 남매의 상실감이 뼈저리게 느껴졌습니다. 정말 너무 속상했어요. ㅜㅜ
지금 28장 까지 읽었는데, 28장에서 남매가 떠올린 엄마와의 소중한 순간과 "내 사랑" 이라는 호칭까지.. 사소하게 흘러간 일상의 찬란함을 깨닫는 화자의 허망한 마음이 제게도 맺혀서, 책을 쉬이 넘길수가 없네요. ㅠㅠ 먹먹한 마음 허공에 흩뿌리듯 심호흡 서너번 깊게 하고 29장으로 넘어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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