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나눔] 여성살해, 그리고 남겨진 이들의 이야기 - 필리프 베송 <아빠가 엄마를 죽였어>

D-29
어머니는 정확한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말하자면 고백하지 않은 것이다. 동생은 어머니의 말에 수긍했다. 구렁텅이를 숨기면서 "그런 일"이라고만 말한 것이다.
아빠가 엄마를 죽였어 필리프 베송 지음, 이슬아 옮김
이 돌이킬 수 없는 일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이 있지는 않았는지, 우리 대부분이 그토록 무심했던 건지, 아니면 모두 똑같이 속은 것인지 알아야 했다. 첫 번째 경우라면 화풀이할 대상이 생길 것이다. 두 번째는 이미 나를 집어삼킨 죄책감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세 번째 경우라면 조금은 덜 외로울 것 같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이 모든 것은 헛된 희망이었다. 희생양을 찾겠다는 발상은 터무니없고 위험하다. 유일한 범인은 아버지였다. 나만큼이나 다른 사람들도 무관심하거나 부주의 했다는 이유로 내 책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에, 잘못을 떠넘길 수 있다는 생각은 착각이다. 가까스로 책임에서 벗어난다 해도, 갑자기 내가 후회도 부끄러움도 느끼지 않는다면 놀라울 것이다. 아니, 이 후회와 부끄러움은 계속 남아 자꾸 재발하고 곪게 될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아빠가 엄마를 죽였어 필리프 베송 지음, 이슬아 옮김
저도 이 문장 올리려고 했는데요, 꼭 독자들에게 하는 말처럼 들렸습니다.
과연 우리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 걸까, 아니면 아무것도 보고 싶지 않았던 걸까? 우리는 의식하지 못했을까, 아니면 양심의 소리를 외면한 것일까? 양심의 목소리가 들렸을 때, 스스로 변명거리를 만들지는 않았던가. (...) 심지어 이런 결정적인 한마디도 덧붙이면서. "상상할 수 없는 것을 상상할 수는 없으니까..."
아빠가 엄마를 죽였어 필리프 베송 지음, 이슬아 옮김
28장까지 읽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말씀했듯 시종일관 너무 담담한 레아가 자꾸 마음에 걸립니다. 화자가 스스로에게 묻는 질문들은 마치 책을 펼쳐서 읽고 있는 독자들에게 던지는 말들 같았습니다. 이렇게 노골적으로 표가 나는데 당신들은 왜 아무것도 몰랐냐고, 알면서 왜 가만 있었냐고, 설마 폭력을 사생활이라고 변명하는 거냐고, 말이죠. 28장을 읽으면 특히나 어머니가 남매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아들을 "내 사랑"이라고 부르고, 아들의 동성애 고백을 뭐가 문제냐는 듯 받아들이며, 아들이 꿈을 이룰 수 있도록 아버지로부터 방어와 버팀목이 되어준 사람. 저는 여기에 이르러서 남매의 상실감이 뼈저리게 느껴졌습니다. 정말 너무 속상했어요. ㅜㅜ
지금 28장 까지 읽었는데, 28장에서 남매가 떠올린 엄마와의 소중한 순간과 "내 사랑" 이라는 호칭까지.. 사소하게 흘러간 일상의 찬란함을 깨닫는 화자의 허망한 마음이 제게도 맺혀서, 책을 쉬이 넘길수가 없네요. ㅠㅠ 먹먹한 마음 허공에 흩뿌리듯 심호흡 서너번 깊게 하고 29장으로 넘어가야겠습니다.
"순식간에 공기에 전기가 흐르거나, 갑자기 경직되거나, 깊은 불안감이 느껴지면 동생과 나는 어쩔 줄 몰랐다. 불화를 원하지 않았던 우리는 편의상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것처럼 굴고, 상황이 정상으로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결국 그렇게 되었다."p.105 어렸을 때 느꼈던 불안이 다시 되살아나는 문장이었어요.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는 덮어두고 그냥 괜찮아지기를 강요하고 강요당한 것은 아닌지 생각되구요. 진실된 사과가 꼭 필요한데 말이죠. 몇십년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는 두려움과 불안을 책을 통해 직면해보게 되네요.
이후 밤안개가 자욱하게 내려앉았고, 우리는 마치 준비한 것처럼 동시에 그녀에 관한 이야기가 하고 싶어졌다. 그녀, 우리 어머니. 죽은 사람, 살해당한 여자, 조사 해당이 아닌 생전에 우리 어머니였던 그녀에 관해서 말이다. 우리를 집어삼킨 혼란을 잠재우고 잠시나마 고통을 잊기 위해 우리는 추억하고 이야기해야 했다. 우리는 어머니와 행복했고, 어머니는 좋은 사람이었다. 남은 것, 그러니까 범죄 현장 사진들이나 부부 싸움에 대한 소문, 기나긴 법정 공방과 끝나지 않은 애도가 이 같은 사실을 대체해서는 안 된다. p.127
아빠가 엄마를 죽였어 필리프 베송 지음, 이슬아 옮김
"그리고 내가 남자를 더 좋아한다고 어머니에게 고백했던 날도 생각나." 어느 일요일 봄날, 어머니는 거실에서 다림질을 하고 나는 한가로이 소파에서 시간을 보내다 불쑥 말해버렸다. "레오에 대해 얘기했던 거 기억나? 그 애를 사랑하는 것 같아." 사랑한다고 하면 커밍아웃이 더 잘 받아들여질 거라는 결론을 내렸던 것 같다. 어머니는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허공에 다리미를 들고 있다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다림질을 했다. 어머니에게는 몇 초면 충분했다. 어머니는 "사랑에 빠지는 건 좋은 거야"라고 말했다. 그보다 더 나은 답을 찾을 수 있을까? "가게에서 팔고 있는 <제임스 딘> 특별호를 지난번에 넘겨봤어. 이유는 모르겠어. 우리 때 인물도 아닌데, 아마 표지 때문이었던 것 같아. 아무튼, 제임스 딘 어머니가 아들이 다른 애들과 같지 않아서 자랑스러워했다는 이야기를 읽었어. 근데 그걸 읽으면서 나도 똑같다고 생각했어." 나는 눈물을 삼켰을 것이다. p.130-131
아빠가 엄마를 죽였어 필리프 베송 지음, 이슬아 옮김
해결책도 없고 끝도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어머니는 아무 죄가 없었기에 아버지의 화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바로잡을 것도 없고, 내보일 증거도 없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어머니는 진짜 죄인이라도 된 듯 아버지를 안심 시키기 위해 약속하고 맹세했다. 어머니는 그런 지경에 이른 것이다. 그런데 그것도 충분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절대로 만족하지 않았고, 절대로 그만두지 않았다.
아빠가 엄마를 죽였어 24 / p113, 필리프 베송 지음, 이슬아 옮김
"그런 일"로 오빠를 귀찮게 해서는 안 된다고 말이다. 어머니는 남편의 구타, 가정 폭력, 가스라이팅을 "그런 일"이라고 불렀다. 어머니는 정확한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말하자면 고백하지 않은 것이다. 동생은 어머니의 말에 수긍했다. 구렁텅이를 숨기면서 "그런 일"이라고만 말한 것이다.
아빠가 엄마를 죽였어 24/ p114, 필리프 베송 지음, 이슬아 옮김
남편의 구타, 폭언, 가스라이팅이 일상이 되었지만, 해결책도 없고 끝도 없다면. 하룻밤 사이에 일어난 일이 아니기에.... 생기를 잃어버린 엄마를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니. 결국, 자신을 구할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 뿐이란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를 사랑했다면, 남편의 부당한 대우를 견디고만 있을 수 있었을까. 다툼과 폭력이 일상이 되기 전에 끊어내야 했다. 주위에 도움을 청하고, 경찰을 불렀어야 했다. 아들에게 숨길 것이 아니라, 알리고 적극적인 개입을 요청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엄마의 심정이 너무도 이해되어, 그 비극 앞에 눈물만 흐른다.
몇 년이 걸릴까? 동생이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깊은 심연에서 빠져나오려면? 그건 단지 시간의 문제일까?
아빠가 엄마를 죽였어 p.42, 필리프 베송 지음, 이슬아 옮김
엄마가 아버지로 인해 수차례 칼에 찔리는 모습을 목격한 동생의 트라우마가 얼마나 깊을지 ㅜㅜ; 그런데 열일곱 번이나 칼에 찔리면서도 비명 소리 하나 못내던 엄마.. 그동안 얼마나 많은 폭력과 가스라이팅을 당했으면 그 순간 까지도 참았을까 싶어 읽으면서도 너무 마음이 힘드네요.
분명 우리는 눈이 멀어 있었다. 아니면 겁쟁이거나, 특히 내가 그랬다. 무슨 이유로 부모님이 화해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어떤것도 확신 하거나 단언 하지 못하는 짐작만하는 상황 모호한 모든 환경들이 어린 아이들에게 얼마나 불안하고 과거도 현재도 평안할 수 없었던 어른으로서 부끄럽다는 생각이 드네요
화자인 나의 전공에 관해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네 자식이 고집을 부려서 기둥뿌리가 뽑히게 생겼잖아."(112쪽)라고 했다는데, 어머니에게는 병적일 정도의 소유욕으로 집착하는 모습인 반면, 자식에 대해서는 "네 자식"이라고 말할 정도로 전혀 관심이 없는 아버지의 모습이 극명하게 대조를 이루어 눈에 띄었습니다. 또한, 흔히 가정폭력은 전적으로 가정 내의 개인적인 문제로 여겨지기 쉬운데, 당사자에게만 해당되는 개인적인 문제라기보다는 타인도 연류되어 있는 문제라는 생각을 하게 되네요. 이런 생각을 하게 한 문장을 아래에 수집합니다.
과연 우리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 걸까, 아니면 아무것도 보고 싶지 않았던 걸까? 우리는 의식하지 못했을까, 아니면 양심의 소리를 외면한 것일까? 양심의 목소리가 들렸을 때, 스스로 변명거리를 만들지는 않았던가.
아빠가 엄마를 죽였어 120-121쪽, 필리프 베송 지음, 이슬아 옮김
전자책으로 읽고있는데 페이지가 다르다는걸 몰랐네요~~^^;;
그는 아내의 생사에 대한 권리가 자신에게 있다는 뿌리 깊은 확신을 품고, 그 확신에 이끌렸을 것이다. 그가 보여주었던 끈질긴 폭력이 그 증거였다. 그의 도피가 그 증거였다. 이런 상황에서도 그는 여전히 명령하고 요구했다.
아빠가 엄마를 죽였어 p124, p135, 필리프 베송 지음, 이슬아 옮김
사람의 집착이 심해지고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지 못하는 전형적인 태도임과 동시에 그것이 나의 당연한 권리임을 나타내는 모습을 당연하게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문장이었습니다. 대부분의 범죄는 언제나 가해자가 더 당당한 모습인데 그 모습을 마주보는 것 같아 인상을 매우 찌푸리고 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런 인식은 지금도 여전히 많은 것 같아요. 사람을 사람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애정을 쏟고 사랑을 주었으니 응당 너는 거기에 맞춰서 행동해야 한다. 너는 나의 사랑을 받았으니 되돌려줘야 한다. 사람이 아니라 물건으로 인식하고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지 못하고 행동으로 바로 돌아오길 바라는 폭력적인 태도가 가해자에게만 좋고, 피해자에겐 꿈이 아닌 끔찍한 현실이라는 게, 너무.. 대비되어서 더 씁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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