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후담 12·12·29

D-29
'피해입은 특권'에 대한 시화님의 의견을 잘 보았습니다. 저도 실제로 '피해 입은 특권'은 저자가 지적하고 있는 왜곡된 공정담론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시화님의 개인적인 경험뿐 아니라 사회적인 경험에서도 그렇지요. '조국 사태' 때 고려대학교에서 있었던 '조민 입학 취소 시위'가 이를 잘 보여주었다고 생각합니다. (논제에 맞는 논의를 위해 조국 사태를 둘러싼 개인의 잘잘못은 일단 제쳐두겠습니다.) 그 때 시위에 참여한 학생들은 훼손된 공정에 대해 외치고 있었습니다. 힘들게 공부했던 자기자신의 권리에 대한 당연한 외침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어쨌든 이 외침에서 '공정하게 얻어진 특권'에 대한 반성과 의심은 찾아보기 어려웠습니다. 이렇듯 '공정'은 '공정하게 얻어진 특권'을 어떤 의심도 없이 정당화한다는 점에서 위험합니다. 저자 역시 이런 뉘앙스로 지적을 한 것일테고요. 그렇게 아무런 의심 없이 정당화된 특권은 조금이라도 상처받았을 때 '피해 입은 특권'이 되어 다시 '공정'을 외치게 될 겁니다. 시화 님의 말씀대로 이러한 공정은 정치인들이 이용하기 좋은 먹이감이 되겠지요. 어쨌든 이에 대해 계속해서 사고하는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공산주의 체제가 아닌 이상 남들과는 다른 개인의 노력이 무언가 특별한 것으로 보상받아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사회의 원리가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특권'이 올바르게 정당화될 수 있는 원리는 무엇일까요? 그래도 공정일까요? 공정이여야만 한다면 그 공정담론이 왜곡되지 않는 방법으로 공정을 사유할 수 있는 방식은 무엇일까요?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것은, 공정이 특권을 정당화할 때 작동하는 현대의 중요한 심리적 기제가 '능력주의'에 대한 맹신이 아닐까 하는 의문입니다. 공정담론 속에 깃들어 있는 능력주의에 대한 맹신을 파훼할 수 있다면, 어쩌면 우리는 진정한 공정을 상상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질문을 너무 많이 던졌는데, 이에 대한 토론자분들의 생각이 궁금합니다.
4. 번아웃을 개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개인과 구조가 맺고 있는 관계의 문제’로 볼 것을 제안하는 대목에 공감이 되었습니다.(<엘리트 세습>에서는 편향된 구조의 문제가 계급 세습을 이어나가야 하는 엘리트 계층에도 극심한 피로감을 주는 것으로 분석했던 것이 떠올라 흥미롭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저자도 인정하고 있는바, 구조의 변혁 자체가 개개인의 과업이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에 저자가 제안하는 기초 원리는 ‘돌봄 윤리’인데, 관계적 존재론, 급진적 자기돌봄 등의 이론 자체에는 큰 공감이 되지만 결국 개개인의 실천에 맡겨질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근원적인 한계를 노정하고 있는 건 아닌지 우려가 됩니다. (특히나 신자유주의가 일상을 잠식한 상황 속에서 당장 대의를 위해 ‘직무 불안정성’을 견디거나 이해하라는 식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을까요? - 멘토 HJ) 결국 문제의식을 자각하고 돌봄 윤리를 실천해나가는 건 일부에 지나지 않을 듯하고, 정작 공정 담론의 생산 계층들에게 이런 호소가 얼마나 유효하게 받아들여질지는 의문이 남습니다. 그렇다면 한 청년 독자로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아, 참여하신 분들께 묻고 싶은 질문이 하나 더 있습니다. 얼마 전 일본 사회운동가가 쓴 책을 읽다가(<어른 없는 사회>) 신박한 주장을 봤는데요, '남녀고용평등법'에 대해 '왜 모두 똑같은 걸 원한다고 생각하지?'라는 의문을 제기한 것이었습니다. 음? 그러고 보니 '(누가 봐도) 좋은 기회'를 두고 '공정'이란 담론이 이렇게 뜨거운 것도 모두 같은 것을 원하기 때문인가? 하는 생각이 들던데요-- 모두가 의사 되기를, 모두가 SKY를, 모두가 고연봉 정규직을. 부적절한 생각일까요? (앗, 그나저나 제가 토론에 끼면 반칙일까요ㅠ)
그럴리가요, 선생님! 저도 방금 선생님이신 걸 알았습니다. ㅎㅎ '(누가 봐도)좋은 기회'라는 것 또한 깊이 생각해봐야 할 주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말씀해주신 대로 공정담론이 이렇게까지 뜨거운 이유와도 직결되어 있는 것 같고요. "누가 봐도"라는 말을 '객관적'이라는 말로 달리 말해도 된다면, 제 생각에는 객관화될 수 없는 것들이 '돈'으로 객관화될 수밖에 없는 사회가 현대의 자본주의 사회라 그런 게 아닐까 싶습니다. 직업이든 대학이든 혹은 전공이든 전부 연봉과 스펙 등의 지표로 통계화되고 수치화되니까 객관화된 것처럼 보이게 되고, 마치 교환가치를 가지고 있는 '재화'처럼 표상됩니다. 한정된 재화를 탐내는 것은 경제학적 인간의 당연한 생리이니, 모두가 같은 것을 바라는 것처럼 비춰지는 것도 무리는 아닐 거 같습니다. 또한 재화를 분배하는 것이 정치라면, 이 분배와 직결된 '공정' 담론에 대한 목소리도 이쪽저쪽에서 계속 뜨거워질 수밖에 없을 것이고요. 쓸데 없이 말이 길어진 것 같은데, 저도 다른 분들의 생각을 들어보고 싶습니다!!
'차별 철폐'는 그 부분이 맞습니다. '청년에 대한 streotype'은 책의 전반부에서 '공정이라는 구실 좋은 개념에 매몰된 청년들을 비판하는 내용'을 말하는 것입니다. 청년들을 이러한 본인의 청년상 안에 가두는 듯한 어조가 또다른 '차별'이라고 저는 주장하는 것이구요.
젊은 세대를 보는 시각이 고정되기 쉽다는 데 동의합니다. 세대론적 구분을 다 믿진 않으면서도 저부터 자꾸 '요즘 젊은 세대는..' 하게 되더라구요(ㅠ). 그나저나, 이제 김정희원 선생님께서 날아오실(ㅎ) 텐데, 지금까지 의견 나누는 중 궁금했던 내용도 정리하고 또 책 내용을 구체적으로 언급하면서 논의를 더 이어가면 좋을 것 같습니다. 다들 학기 중에 바쁘지요? 그래도 한번씩 더 관심 기울여 줬으면.
안녕하세요, 토론자분들! 독서모임 기간도 이제 막바지를 향해 가고 있습니다. 토론자분들께서 제시해주신 모든 의견들이 흥미롭고 유익했지만, 아직까지 많은 논의가 다양하게 진행되지는 못한 것 같아 아쉬움이 조금 남네요. 책에 대한 얘기도 생각보다는 부족하다는 느낌이고요. 그래서 다시 토론이 활발해졌으면 하는 마음으로, 일단 지금까지의 주제들을 간단히 정리하고, 가장 인상 깊게 읽었던 대목을 인용하고 간단한 코멘트를 한 분씩 남기는 것으로 진행해보면 어떨까 싶은데요. 먼저 간단히 지금까지의 주제들을 정리하자면, 1. 공정-공정담론을 둘러싼 이야기 ➀공정 자체에 대한 이야기: 현대 사회에서 공정은 어떻게 정의되어 있는가? 공정을 구성하는 기본적 개념(예컨대 평등, 올바름, 도덕 등)은 무엇인가? 논리적이고 관념적인 차원을 떠나, 현실적으로 공정은 필요한가? 필요하다면 공정-공정담론은 어떻게 이야기되어야 하는가? 필요 없다면 ‘공정 이후의 세계’는 과연 이상적일까? ➁사회 갈등과 저마다의 불공정: 파편화된 사회에서 공정이란 통일될 수 있는 담론일까? ‘저마다의 불공정’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면 우리는 저자의 말처럼 공정 이후로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➂공정담론을 이용하고 부추기는 사회: 공정담론으로 이득을 보는 것은 누구인가? 정치 집단은 실제로 어떤 의도를 가지고 공정담론을 이용하고 왜곡할까? 그 결과로 사회는 어떻게 변화하고 있을까? ➃공정을 왜곡하는 기제들: 잘못된 능력주의? 피해입은 특권과 특권주의의 정당화? 이런 것들을 해결하면 공정에 대해서도 올바르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아니면 공정 담론은 결국 변질될 수밖에 없는 것인가? 2. 책의 내용과 형식에 대한 이야기 ➀제목의 ‘공정 이후(post)’라는 말이 주는 뉘앙스: 공정 이후를 이야기하는 것은 아직은 시기상조가 아닐까? 반대로, 공정이 훼손되고 모두가 그 담론에 지친 상태에서 그 이후를 바라보는 상상력은 현재를 벗어나는 중요한 계기가 되지 않을까? ➁저자가 청년이나 능력을 바라보는 관점: 현대 한국의 청년 전반을 능력주의를 맹신하고 정치적 공정담론에 무기력하게 이용당하는 것처럼 묘사하는 것은 문제적이지 않을까? 반대로, 그것이 현실을 어느 정도 반영하고 있고, 어느 정도의 집단을 형성하고 메시지를 전달하려면 비판적인 관점을 설정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정도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혹 제가 토론자분들의 논지를 흐리거나 왜곡한 것이 있다면, 편히 아래에 댓글로 피드백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리고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인용문을 하나 제시하면서 다시 논의를 시작해보고자 합니다! 너무 체계적인 코멘트를 작성하려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만 편하게 인용문에 대한 인상을 말씀해주시면 됩니다.^^ “우리는 삶의 원리이자 가이드라인이면서, 동시에 정책적 기반으로서 새로운 의미의 보편을 구상해야 한다. 오래전 철학자들처럼 “남성 일반”에게 적영되는 것이 곧 “보편”이라고 말하던 그런 일방적인 의미가 아니다. 기존의 보편 이론은 남성, 백인, 이성애자, 비장애인의 시선에서 일반화를 추구하는 이론이 가능하다는 세계관을 바탕으로 구축되었다. 하지만 동시대의 많은 학자들과 활동가들은 이제 정반대의 입장에서 보편을 말한다. 즉 기존의 권력관계를 영속화하지 않으며, 공통 기반으로서의 인간성을 그 어떤 순간에도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미로서의 보편이다. 모두를 돌아볼 겨를이 없다는 이유로 뒷자리에 버려지는 이들이 없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결의다. 우리 모두 동등한 주체로서 상호연결되어 있으므로, 모두가 전적으로 평등하며 존엄한 대우를 받을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160~161) 근대의 이성적 주체가 실패한 이후, 쉽사리 ‘보편’을 결정하는 것은 현대 철학에서 기피되어 왔습니다. 원초적으로 그 보편을 누릴 수 있는 주체가 한정되어 있고, 그럴 경우 타자에게 보편은 강요된 폭력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이제는 알기 때문이겠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를 묶어줄 보편을 끝없이 상상하려는 노력은 그 자체로 인간적이고 낭만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자는 공정-공정담론의 편향된 보편을 비판하지만, 보편 자체를 포기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공정 이후’에 그 편향된 보편을 뛰어넘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믿었던 듯합니다. 저는 이 믿음이 좋았습니다. ‘공정 이후’에 ‘우리 모두’를 또 다시 연결해줄 수 있는 담론이 나타난다면, 그 역시 높은 확률로 이용당하고, 왜곡되고, 타락하겠지요. 그러나 그것을 알면서도 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미덕이라고 생각하는 저는, 저자의 이러한 지향성이 굉장히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는 장애인 정책을 논하는 행사에서 “우리 장애우”라는 표현을 썼다. 반복해서 지적을 받았고 언론의 비판도 이어졌지만, 그는 배울 마음도 없고 고칠 의지도 없어 보인다. 왜 어떤 사람들은 차별적인 언어를 쓰지 않기 위해 늘 공부하며 의견을 묻는데, 반대로 어떤 사람들은 아무리 호소해도 신경을 쓰지 않을까? 평생을 “선택적 무지”의 상태로 살아도 사는 데 아무 지장이 없는, 무지와 무감이 타인에게 폭력이 될 수 있다는 사실조차 모를 정도로 기득권의 덫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우리 사회에 얼마나 많을까?” 무지의 유형 중 ‘선택적 무지’에 대한 예시로 언급된 내용입니다. ‘무지’한 ‘무심함’이 어떤 방향성을 전제한 동조로 기능할 때가 훨씬 많은 만큼, 무지는 사회적 폭력의 고착화‧재생산에 일조할 수 있다는 점을 더욱 유념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때의 무지는 ‘무의지’와 동일어로 보아도 무방할 텐데, 그 근원이 ‘무시’로부터 비롯되어 이중적인 비하의 기능을 수행한다는 점에서 더욱 문제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러한 선택적 무지의 사례들을 일상에서도 빈번히 마주치곤 합니다. 모두가 고민하는 중요한 사안에 대해, 굳이 알아야 할 필요가 없으며 과거 한 번 형성된(실상 본인의 주체적인 탐색 결과라기보다는 상위 권력자에 의해 주입된 경우가 대부분인) 입장을 결코 갱신하지 않겠다는 무의지적 태도로 일관하는 사람들 말입니다. 이들이 이토록 당당하게 무지를 내세울 수 있는 근거가 권력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빈번하다는 점에서 폭력이 강제되고 있다는 인상마저 받곤 합니다. 적어도 우리는 이렇게 무책임한 시민으로 살아가지는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품어봅니다. 사용하는 단어 하나하나에 책임감을 갖고, 선택적 존중이 아닌 존재론적 존중을 실천해나가면 좋겠습니다.
철학에서 가장 논쟁적이고 중요하게 다뤄진 가치를 꼽는다면 자유와 평등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아주 오랫동안 자유와 평등의 균형을 잡는 일이 정치적으로 학문적으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합니다. 자유만을, 평등만을 말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자유와 평등을 동시에 말하는 것은 참 어렵습니다. 두 개념이 개념적으로 상충되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는 두 개념이 충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위에서도 말씀하신 것처럼 이 책은 공정(어쩌면 자유와 비슷한 개념으로 사용된) 이후의 가치로 평등을 제시하고 있는 것도 같습니다. 평등은 정말 좋고 당연히 나아가야할 방향이라는 것에 동의하지만, 평등에만 치우친 생각들은 단지 탁상공론 그칠 확률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그 평등이 누군가의 권리를 빼앗고 (심지어 이것이 특권이었을 지라도) 누군가의 자유를 조금이라도 침해하는 것이라면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그에 대해 반발하고 심하면 '평등'에 대한 혐오가 생기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는 이미 그런 혐오가 만연해있지요. 물론 이를 평등이 해소되는 성장통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요. 이에 대한 해결책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저는 남에게 피해주지 않는 자유, 강요하지 않는 평등을 추구하며 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영화감독인 김조광수 님이 커밍아웃을 했을 때 '승승장구'에 출연해서 한 말이 있습니다. "이성애자가 동성애 자체를 이해할 수 있다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요. 영화 '건축학개론'을 보면서 수지가 아닌 납득이에게 성적 매력을 느꼈다는 것을 이성애자인 남자가 이해할 수 있을까요? 동성애를 이해할 필요도 이해해줬으면 하는 마음도 없어요. 다만 다름을 인정하고 신경 꺼줬으면 좋겠어요" 이 말이 인상 깊어 오래전 일인데도 마음속에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자유와 평등이 대립되는 것처럼 서술했지만, 역설적으로 평등하다는 것은 자유를 주는 것과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책의 아쉬운 점에 대해서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전반적으로 새로운, 대안적인 개념을 많이 제시한 점은 좋았지만, 그 사례나 적용례가 부족하여 설득력이 다소 떨어지는 느낌입니다. 예컨대 선별적 보편주의를 논하는 6장 후반부의 166p에서는 '하지만 미국의 지방 정부, 학교, 비영리 단체 등 많은 곳에서 선별적 보편주의를 정착시키기도 했다.'라는 부분 등이 그렇습니다. 선별적인 보편주의가 기존의 보편주의 혹은 선별주의와 구체적으로 어떻게 구분될 수 있는지 고민되는데, 실례를 보여주었다면 더 설득력 있지 않았을까 합니다. 이론적인 부분만 봐서는, 최소한의 보편적 수준에 닿도록 보장하는 선별주의가 보편적 기준에 미달한 층을 선별하는 기존의 선별주의와 어떻게 다른지 의아합니다.
219p에 등장하는 '유예의 정치'를 실질적으로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책에서 언급된 것처럼, 어떤 부정의는 다른 부정의에 의해서 후순위로 밀려나고는 합니다. 교차성 등의 이론이 이러한 유예의 정치를 '당위적'으로는 공격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무너뜨리진 못한 것 같습니다. 예컨대 바로 직전의 대선 및 지선에서 소소하게 이슈가 되었던 것이 정의당의 정치적 몰락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정의당의 실패는 정당 내부의 사정들, 그리고 몇몇 이슈에 있어서 부적절했던 대응 등 복합적으로 검토해야 하는 문제이지만, 유권자들은 정권 교체 혹은 유지라는 미명하에 정의당이 표방한다고 생각되는 가치들(퀴어 문제,소수자 문제, 노동 문제등)을 유예한 것으로 보입니다. 소수자들의 연대 또한 요원해 보입니다. 이전의 '운동'에 있어서는, 많은 단체들이 연대하여 시위했지만 지금은 대학 총학생회/비대위조차 어떤 의제에 참여하는 것을 극도로 꺼리는 상황입니다. 원자화된 개인들이 소극적으로 각자도생하는 현 사회에서, 어떻게 '후순위'의 부정의를 외면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능력주의에 대한 부분을 읽으면서, 제가 입학 후 느끼는 상황과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관련된 경험을 공유하고자 합니다. 포항공대는 학과 없이 입학해서 과를 4학기부터 정합니다. 그래서 1학년 두 학기 동안에는 기초필수과목을 모두가 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과학고등학교에서 특정 과목을 특정 등급 이상 받으면 그 과목을 수강한 것으로 인정해주는 제도가 존재해서, 과학고등학교 친구들은 특정 과목을 듣지 않기도 합니다. 그렇게 수업을 빼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이미 고등학교 떄 시험 준비를 했었어서 공부하는 데 수월함을 느낍니다. 하지만, 저와 같은 일반고 출신들은 어떻게 보면 출발부터 다릅니다. 분명히 따라가야 하는 부분은 맞지만, 이미 이룬 것들이 있는 친구들과 짧은 시간안에 처음부터 따라가야 하는 사람이 해야 하는 노력의 양은 다릅니다. 지난학기에는 물리를 따라가기 버거워서 공부하다가 반포기 상태로 시험지를 내기도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쟤네는 예전에 했으니까 잘 하는 게 당연하며, 제가 열심히 한다면 따라갈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며 합리화합니다. 그 실력 차이가 과연 어디에서 왔는가에 대해서 생각해보면 부모님의 영향을 온전히 배제할 수는 없기에, 지금 제가 느끼는 것도 구조적 불평등의 일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는 대입이나 취업과도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선행을 해 온 친구들, 이미 좋은 학교에 간 친구들, 이미 좋은 곳에 취업한 친구들을 보면서 능력주의라는 가치 아래에 나를 계속해서 갉아먹고 낮추게 됩니다. 그리고 그 해결책이 다시 능력주의가 됩니다. '우리는 구조적 불평등을 불공정한 보상이라는 개념으로 인식하면서 그에 대한 해결책을 개인적 노력과 능력주의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76)'에 공감이 가는 내용이었습니다. 하지만 능력주의가 포기하기 어려운 달콤한 가치인 이유는, 노력하면 할 수 있다는 생각을 심어주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어쩌면 지금 공부를 하고 성장하고자 하는 동력이 되기 때문에, 쉽게 이를 내려놓을 수가 없습니다.
시험을 없애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능력주의에 의존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는 무력한 답변도, 시험을 공정하게 시행하면 되지 않겠냐는 반문도, 우리에게 발본적인 해법을 주지 못한다. 사회를 안정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서열화와 지위 격차는 필요악이라는 답변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더 많은, 더욱 다원화된 이상과 비전을 상상할 수 있다. 대안적 운영 원리도 충분히 생각해볼 수 있다. 우리에게는 다만 정치적 의지가 부족할 뿐이다. (중략) 능력주의 비판은 이미 충분히 반복되어 왔다. 이제 이 비판을 정치적 의지로 바꿔낼 때다. (79) 이 책을 읽으면서 제 가치관 중 대부분이 능력주의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할 떄마다 '내가 체제를 바꿀 순 없으니 일단 수용하자'는 말을 어른들에게 들었고, 스스로 내면화해서 이제는 친구들에게 제가 그런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저에게 이 책은, 그리고 위 인용구는 뜨거운 울림을 주었습니다. 비판만 할 것이 아니라, 정치적 의지를 통해 개선을 해야 한다는 불씨를 주었습니다. 적어도 이런 생각이 능력주의에 대한 허구에서 비롯되었음을 알고, 이제는 바꾸고자 합니다.
능력주의 신화는 시험의 승자들이 스스로를 남들보다 우월하다고 믿는 것을 정당화한다. 반대로 세속적인 기준으로 '실패했다'고 간주되는 이들은 '능력이 없어서' '노력하지 않아서'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67) 이제는 마이클 샌델의 한계를 직시해야 할 때다. "운의 영향을 인정하고 겸허해지자"는 샌델의 제안은 우리가 구조적 개혁을 모색하고 적극적으로 대안을 추진하는 것을 어렵게 한다. '저 사람과 나는 다르다'가 아니라 '나는 맞고 저 사람은 틀리다'라고 생각하는 것, 집단의 한 특이 케이스만 보고 그 집단 전체를 매도해버리는 것을 선민사상으로 본다면, 선민사상에 빠지지 않도록 계속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고, 스스로가 선민 의식을 가지는 것을 막는 수단으로 마이클 샌델의 제안을 받아들였었습니다. 내가 노력할 수 있는 성향을 가진 것도 운과 환경의 영향 아래에 있다는 생각을 통해, 좋은 대학 다닌다고 해서 잘난 척하고 남을 깔보는 행실을 자제하곤 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구조적 문제를 개별적 마음가짐과 자세의 문제로 치환시키며 이를 뛰어넘어 정치적 의지를 가져야 한다는 저자의 말에 동의합니다. 그러나 정치적 의지를 가지는 것도 좋지만, 샌델의 제안을 완전히 버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내부를 바라볼 때는 샌델의 방식을, 자신의 외부와 세상을 바라볼 때는 정치적 의지를 가지는 게 좋을 듯합니다. 제 자신의 내면을 바라볼 때까지 구조적 불평등을 생각하면 건전한 발전이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정의로운 공동체를 만들기 위한 국가와 사회의 역할은 무엇일까? 공동체의 구성원이라면 모두가 보장받아야 할 보편적 권리를 이상적 목표로 설정하고, 모든 이들이 그 목표에 이를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 국가의 역할이 아닐까. 그 누구도 자신만의 능력으로 홀로서기를 할 수 없는 세게에서 모두를 위하여 돌봄과 정의가 우리의 삶과 관계를 어떻게 변혁시킬 수 있을지 함께 사유하자. 구조적 불평등을 '자유'와 공정의 이름으로 정당화하고 동시에 개인의 '무능'과 '무책임'이라고 비난하는 세계를 무너뜨리자. 경쟁과 능력주의로는 결코 실현시킬 수 없는 공동선의 세계를 상상하자. 우리는 모두의 기회, 안전, 존엄을 위한 정의의 원직을 만들고 우리 사회 전체를 위한 더 높은 목표와 기준을 세울 수 있다. 각자가 평등하면서도 고유하게 대우받는 보편적 저의으이 이상을 그리기 위해 함께 마음을 맞대자." (p.166-167) 저는 지금까지 구조적 특권 위에서 살아왔다고 생각하며, 좋은 학교에서 그믐같은 좋은 프로그램에 참가해 자신의 생각을 논리적으로 풀어낼 수 있는 사람들의 생각을 들을 수 있는 것 또한 강도 높은 특권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책을 읽을 때에도 과연 특권이 있는 사람은 누구이며 기득권자는 어떻게 행동해야하는가?에 관심을 갖고 책을 읽었습니다. 그러던 중, 6장의 마지막에서 위 구절이 나왔습니다. "구조적 불평등을 '자유'와 '공정'의 이름으로 정당화하고, 동시에 개인의 '무능'과 '무책임'이라고 비난하는 세계를 무너뜨리자.". 이 말을 들으니 '과연 내가 가진 특권은 무엇이고, 이 특권은 어디서부터 오는가?'가 그 시작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물안의 개구리'란 말이 있듯이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제 자신이 가진 특권을 인식할 수 있는 시점은 항상 '그 특권이 없는 상황에 놓였거나, 놓인 사람을 보았을 때'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을 '절대적'으로 평가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이 '상대적으로' 남들과 다른 상황에 놓여야 했습니다. 그래서, 다양한 경험을 지양하는 '한국의 착한 어린이상'이라는 인식에 굉장히 반발감이 들면서도, 그 '다양한 경험'을 막는 '구조적 불평등'이란 이슈로 인해 그 반발감이 위선이 아닐까 라는 생각도 해보게 됩니다. 1934년 IBM의 사장은 인터넷에 대해 '아마 5대 정도를 위한 시장이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지만 결국에는 전세상 사람들 모두가 사용하는 서비스가 되었죠. 이 이야기는 결코 그 분의 인사이트가 잘못된것이 아닌, 그 당시의 정보로는 인터넷의 잠재력을 정확히 판단할 수 없었을 것이다 라는 평가가 어룰릴 것입니다. 이 '공정' 혹은 '능력주의'의 담론도 과거 신분제의 입장에서 보면 상상할 수도 없는 세상이었을 것입니다. '공정' 혹은 '보편적 정의'에 대한 계층에 관계없는 지속적 관심과 개발이 이루어질 때, 지금은 상상하지도 못할 새로운 세상이 펼쳐지지 않을까 하는 상상 합니다.
“즉 남성이 100만원을 받는다고 가정하면 여성은 64만원을 받는다는 뜻이다. 한국의 남녀 임금격차는 다른 OECD 국가들과 비교할 때 언제나 부동의 1위다.”(85p) 남녀간의 임금 격차 얘기는 처음 들어보있습니다. 남성의 입장에서 여성 차별이라 하면 잘 와닿지 않았는데 직접적인 수치를 보니 와닿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차별인지 차이인지는 면밀히 따져보아야 할 문제인 것 같습니다. 단순히 다른 나라와 비교한 것만으로 우리는 이만큼의 차별이 더 있다라고 하는 것은 조금 섣부른 것 같습니다. 인종에 따른 생리학적인 차이도 분명히 존재하며 사회문화적인 맥락도 고려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여성과 남성의 임금 격차가 자연적인 능력의 차이에 의한 것이고 차별에 의한 것이 아니라고 하면 그것이 과연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인지에는 의문이 생깁니다. 능력주의의 논리에 의한다면 능력의 차이에 따른 소득의 격차는 당연스러운 것입니다. 하지만 능력만으로 사람의 가치가 정해지는 게 맞을까요? 사람의 가치는 돈으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면 사람들이 다른 가치는 모두 포기하고 직장을 얻고 돈을 버는 데만 매진하는 것은 정말 돈 말고 더 중요한 가치가 있기 때문일까요? 이 능력주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능력이 아닌 다른 요소에 의해 사람의 가치를 정할 수는 없을까요? 시장의 수요가 사람의 능력에 값을 매기고 그것이 능력주의로 정당화되어 능력이 사람으로서 가치까지 좌우하게 된 현실에서? 아니 그 전에 사람의 가치를 매기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요? 토론 거의 끝나갈 때쯤 이런 의문들이 생겨 아쉽긴 하지만 제시하는 것만으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동안 토론을 지켜보면서, '새로운 정치철학적 언어가 필요하다. 결과를 진단하는 데 그치지 않고 기초 개념 자체부터 다져가는.' 이런 얘기를 여러 명이 해준 데 조금 놀랐습니다. 그런 의견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공정 이상의 가치가 가능한가'(파르페디엠 님) 라는 질문과 깊게 연결돼 있는 것 같았구요. 어떤 세계를 원하는가, 그 세계는 어떻게 접근 가능한가-- 그런 생각들을 진지하게들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입니다. 김정희원 선생님께서 오늘 내일 정도부터 토론에 참여해 주신다고 했는데, 선생님 생각도 궁금하고 여러분들 의견도 궁금합니다.
<공정 이후의 세계> 읽기 모임 참가자 여러분들께: 고려대학교와 포항공대 재학생 여러분, 안녕하세요? 김정희원입니다. 얼마 전 두 학교의 학생들이 모여 대학원생 멘토들과 함께 <공정 이후의 세계>를 읽는다는 소식을 듣고 무척 반가웠습니다. 남겨주신 글들 재밌게 읽었습니다. 여전히 ‘공정’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는 것도 느낄 수 있었고, 능력주의가 큰 화두라는 점도 재확인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과 경험에 대해서도 더욱 자세히 알 수 있었네요. 고맙습니다. 아마 1부까지 읽으신 것 같은데, 2부에 대한 토론이 그다지 이어지지 않은 것은 아쉽기도 합니다. (2부가 훨씬 더 중요해서요.) 마음 같아서는 모든 글에 댓글을 달면 좋겠지만, 여의치 않으니 인사글로 대신할까 합니다. “이후의 세계”는 대안 세계, 즉 우리가 함께 바꿔나갈 미래를 뜻합니다. 그리고 미래 세대는 당연히 여러분들이지요. 책에서 직접적으로 느껴지지는 않을지 모르지만, 저는 앞으로 저보다 훨씬 더 오랫동안 이 세계를 만들어 갈 2030들을 떠올리며 절박한 심정으로 글을 썼습니다. 왜곡된 ‘공정’을 핑계로 원자화된 우리가 바뀌지 않으면, 말 그대로 사회와 공동체가 존속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 책의 프롤로그에서부터 저는 이같은 목표를 분명히 했습니다. 부당하게 목숨을 잃은 이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더 나은 세계는 이 모든 사람들이 여전히 살아있는 세계라고요. 구의역 김군이 세상을 떠났을 때, 혹은 불과 얼마 전 신당역 살인사건이 발생했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마지막 자리를 찾아가 포스트잇에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혹시 여기에도 포스트잇에 글을 썼던 분이 계신가요? 그날을 기억하신다면, 그때 어떤 심정이었는지요? 저는 그 포스트잇에 글을 쓰는 심정으로 <공정 이후의 세계>를 집필했습니다. 밝은 한낮에도 어둠을 살고 있는 사람들을 떠올리며 글을 썼고, 더 나아가 나 자신도 그들로부터 멀지 않다고 생각하며 책을 집필했습니다. 나에게 돌아오는 몫이 불공정하다고 반응하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이 사회가 부정의하기 때문에 저항하는 일은, 어쩌면 많은 사람들에게 아직도 무척 어려운 일인 것 같습니다. <공정 이후의 세계>를 읽으며 스스로의 경험을 대입해보는 여러분의 글들을 보았습니다. 이제 다른 이의 삶도 떠올려보고, 그 사람과 내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도 생각해 볼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모든 사람이 행복한 세상을 그려본 적이 있는지, 그렇다면 그런 사회 체제는 무엇인지, 그리고 세상을 이롭게 하는 일에 내가 뭔가 기여할 수 있다고 느낀 적이 있는지도 궁금합니다. 바꿔 말하면, 이 책은 a praxiological goal 이 뚜렷한 책입니다. 즉 praxis (실천적 목표) 와 axiology (가치론적 목표) 를 염두에 두고, 우리 사회에 필요한 대안적 가치를 향해 달려가는 책입니다. 그만큼 우리가 지배 이데올로기를 거부하고 새로운 미래를 마음껏 그려보기를 소망했습니다. 예시의 정치와 변혁정의로 책을 마무리한 것도 그 때문입니다. (사실 ‘공정’ 그 자체를 다루는 1부보다 2부 분량이 더 많기도 합니다. 모든 사람이 ‘공정’을 얘기하니, 이것이야말로 세상을 뒤집어보게 하는 개념적 도구이자 통로가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텍스트의 내부로 침잠해 들어가는 방식의 읽기보다는, 그동안 내가 보지 못했던 세상의 구석구석과 소통하며 변혁적 사유와 에너지를 자유롭게 분출하는 토론으로 이 모임이 시작되었다면 어땠을까, 싶은 아쉬움이 듭니다. 정치적 힘과 연대의 가능성을 서로에게서 목도하는, 설익은 시도를 환대하는, 서로의 공통 감각을 느끼는 현장이었다면 좋았겠지요. 초반에는 그런 에너지가 느껴졌던 것 같은데, 논의가 흘러갈수록 오히려 한계가 설정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미 기존 체제를 바꿀 수 없는 것으로 상정하고 얘기한다면 대안적 실천의 범위도 줄어들 테니까요. 동시에 “올바른 공정”이 존재한다고 가정하고 정답을 찾는 시도 역시 변화의 잠재력을 상쇄시킬 수 있습니다. (혹시 공정이나 정의의 이론이나 개념을 공부하고 싶다면, 훌륭한 개론서들이 이미 너무 많이 나와있습니다.) 어떤 개념이든 그 의미는 변화하기 마련입니다. 동시대에도 학자마다 정의내리는 방식이 다르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 변화하는 수많은 의미 중 어떤 것으로 우리의 삶을 읽어낼 것인지, 그리고 그 개념의 (이론적 가치 뿐만 아니라) 실천적 가치는 무엇인지를 스스로 발전시켜 나가는 것입니다. 그 어떤 이론이나 학문도, 심지어 “순수학문”이라고 여겨지는 문학, 철학, 혹은 수학이나 물리학도 그 시대로부터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물론 우리 자신도 그렇고요. 저는 연구 주제를 상담하러 오는 박사과정 학생들에게, “너의 internal systems of values and accountabilities”가 무엇이냐고 먼저 묻습니다. 이론가이자 실천가로서 (세상을 해롭게 할 것이 아니라면) 어떤 가치와 책무를 추구하는지, 그리고 그에 관한 스스로의 내적 체계를 정립해두고 있는지를 묻는 것입니다. 이를 정립해두지 않은 채로 연구 주제를 정하고 학위 논문을 쓰는 것은 그저 능력주의와 학력주의에 올라타는 것에 불과합니다. 박사학위를 받고 취업을 하지 못해도, 번번이 학술지 게재에 실패하더라도, 테뉴어 심사에 떨어지더라도, 흔들리지 않는 가치와 책무의 체계. 혹은 정반대로, 그 시대에 유행하는 주제와 시장에서 환영받는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전전하며 시류에 영합하지 않을 수 있는 가치와 책무의 체계. 이것은 비단 학자와 활동가에게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지금 어떤 일을 하고 있든지, 인생을 살면서 추구하는 사회적 가치와 책무, 그 신념의 체계를 갖고 있다면 좋겠지요. 여러분은 어떤 “가치와 책무의 내적 체계”를 발전시켜 왔으며, 또 앞으로 발전시킬 계획인가요? 이를 염두에 두고 2부를 마저 읽으시면 어떨까요. 비록 부족한 책이지만, <공정 이후의 세계>가 앞으로 여러분이 마음에 담아둘 가치와 책무를 설정하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개인적인 질문이나 하고 싶은 말, 혹은 고민이 있다면 언제든 주저말고 연락을 주시기 바랍니다. 학교 공식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어 있으니 편하게 연락하시면 됩니다. 아마 이 모임은 곧 닫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토론이 끝나더라도 가열찬 공부를 지속하시기를 응원합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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