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레프] 보르헤스도 말하듯, 다네리의 작업은 그의 작시법에 있지 않습니다. "자신의 작시법이 찬사를 받아야만 하는 이유를 만들어 내는 것"에 있습니다. 어떤 작품을 쓰고서 그 작품이 왜 위대한지 구구절절 설명하는 다네리의 모습은 과장되고 우스꽝스럽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이후에 도로확장공사 때문에 다네리의 오랜 집이 헐리게 될 위험에 처하자 다네리는 지하실에 있는 '알레프'의 존재를 털어놓게 되고, 비로소 보르헤스는 다네리가 왜 그러한 스타일을 가지고 있었는지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게 됩니다.
알레프는 다네리에게 일종의 전지함을 가져다주는 '처음'입니다(알레프 'א'는 히브리 문자와 페니키아 문자의 첫 번째 글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다네리에게 전지함을 줬을 뿐 전능함을 주지는 못합니다. 도로확장공사 때문에 집이 헐리게 되어서 사라지는 것을 막지 못한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게다가 알레프를 활용해서 시를 쓰는 것만 봐도 전지함과 전능함이 서로 연결되지 못함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시라는 사회적 관점에서는 무능한 일에 매달리는 데 그 전지함이 허비되고 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심지어 알레프로써 시를 썼을 뿐 아니라, 그것으로 국가 문학상에서 '2등상'을 수상했다는 것은 보르헤스적인 유머입니다. 이 알레프가 시인에게 주어졌기에 망정이지 다른 사람에게 주어졌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생각해보세요!)
알레프는 어떤 시상에 사로잡힌 시인에 대한 이야기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다네리가 사로잡혀 있는 시심(詩心)의 핵심이 알레프로 형상화 돼 있다고 해도 될 겁니다. 다네리는 놀랍게도 시를 쓸 수 있는 능력을 특권으로 인식합니다. 잠시 샛길로 빠지자면, 우치다 다쓰루 선생은 작가들은 자신에게만 주어진 목소리, 일종의 계시를 듣고서, 그것을 작품 형태로 구현하기 위해서 애쓴다고 말합니다. 작가들은 알레프와 같은 전(前)미래적인 환상 속에서 '앞으로 있게 될 풍경'이 지금 쓰고 있는 글을 적고 있다고 느낀다는 것입니다. 베아트리체를 평생 사모한 단테, 베아트리스의 기억에 사로잡힌 보르헤스, 알레프에 빠져 있는 다네리는 그 점에서 다들 '하나'에 이상하고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몰두합니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단 한 명'에 대해서 얘기해보려 합니다. 보르헤스는 자신의 단편 초입이나 말미에 꼭 편지를 쓰는 듯, 자신의 지인의 이름을 붙입니다. 이런 장치는 작품이 꼭 한 사람을 위해서 쓴 것 같은 친숙함을 불러옵니다. 위대한 대중연설가는 연단에서 대중에게 호소하지 않는다는 말을 떠올려보세요. '국민'을 들먹이는 정치인들이 대개 선동가에 불과한 것을 생각해보세요. 보르헤스는 단 한 명에게 호소함으로써 모두에게 호소하기에 성공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겁니다. 어느 정도로 성공했느냐 하면, 작품이 세계 각국에 번역되었을 뿐 아니라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 정반대편에 있는 여기 한국에도 닿을 정도니까요. 마지막으로 보르헤스가 한 강연에서 나눴던 대담 내용을 인용하겠습니다😀

보르헤스의 말 - 언어의 미로 속에서, 여든의 인터뷰세계 문학사와 지성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노년의 목소리를 담은 기록으로 1976년과 1980년에 한 인터뷰 열한 개를 모은 책이다. 시력을 잃어가던 시기에 대한 담담한 회고뿐 아니라 말년에 이른 보르헤스의 문학, 창작, 죽음에 대한 견해까지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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