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보르헤스 읽기] 『알렙』 후반부 같이 읽어요

D-29
화제로 지정된 대화
[자기 미로에서 죽은 이븐 하캄 알 보크하리~] 저는 하나의 작품이 하나의 의문 부호라는 생각들 때가 있습니다. 잠시 샛길로 새자면, 소설의 재미도 바로 거기있는 것 같아요. 흔히 말하는 열린 결말이라는 말은 의문부호가 지닌 성격과도 닮았습니다. 잠정적인 결론을 맺어가면서 특정한 논증 구조로 설득해나가는 글들도 재미있지만, 소설은 끄트머리가 느슨하게 풀려 있는 것을 보는 재미를 가지고 있으니까요. 저는 이론물리학자들이나 수학자들을 참 좋아하는데, 그들이 왜 동서고금의 소설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는지를 조금은 이해할 것 같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저명한 이론물리학자 머리 겔만이 고안한 '쿼크'라는 단어는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에서 빌려온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본격적으로 소설 얘기를 해보자면, 이 단편은 '개연성이란 무엇인가?'에 관한 재미있는 에피소드처럼 읽혔습니다. 개연있는 이야기란 무엇인지 그 의문을 간직한 채 읽어가다 보면, 신화나 전설과 현대 소설의 차이를 어느 정도 추측해볼 수 있으리라 짐작합니다. 정확히 같은 세부사항을 가진 이야기를 그 순서와 말하는 방식만 조금 바꾸어도 전혀 다른 개연성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니까요. 이 소설은 그 프레임이 투명해서 속에 들어 있는 부품이 들여다보이는 아름다운 기계장치 같습니다. 형식과 내용이 일치하는 게 아니라 형식이 내용이고 내용이 형식인 소설 말입니다. 이런 소설은 줄거리를 말하기가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잠시, 중간에 등장하는 '쇠홀', '쇠로 만든 홀(笏)'이라는 단어에 대해서 얘기해보고자 합니다. 이 단어가 무엇인지 몰라서 원문을 찾아보았습니다. 'cetro de hierro'인데요, 영역으로는 'iron scepter'입니다. 화려한 장식이 달린 지팡이처럼 생겼고 철퇴 모양을 띠기도 합니다. 이 '셉터'는 보통 서구권에서 국왕의 권위를 지닌 의장물을 칭하는 것으로, 한역본에서는 흔히 '왕홀(王笏)'로 옮겨집니다. 그러나 한국에서 '홀'은 그 의미와 형태가 '셉터'와는 달라서 꼭 맞는 번역은 아닌 것 같습니다. 한국에서 '홀'이라함은 국가 의례에서 신하들이 손에 드는 것으로서 상아나 나무로 만든 좁고 긴 판을 의미합니다. 반면 왕가에서는 '규(圭)'라고 해서 홀에 비해서 위로 솟은 부분이 좁고 뾰족하고 재질도 다릅니다(첨부 사진에서 왼쪽이 '규', 오른쪽이 '홀'입니다). 이 셉터를 한국어로 옮길 말이 적절치 않으므로 적당히 '왕의 철퇴'라는 의미의 왕퇴(王槌)로 옮길 수도 있습니다. 참고로 디아블로라는 게임에도 이 셉터가 나옵니다.
콘월에서 나는 네게 들었던 이야기가 거짓말일 거라고 말했어. 그 '사건'들은 모두 사실이야. 아니면 사실일 수 있어. 그러나 네가 이야기한 것처럼 이야기하면, 분명 거짓말이 돼. (···) 도망자는 미로에 숨지 않아. 그리고 선원들이 멀리서도 볼 수 있는 진홍색의 미로를 세우지도 않아. 이미 우주가 미로이니, 구태여 미로를 세울 필요는 없어. 정말로 숨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건물의 모든 복도들이 향하고 있는 망루보다 런던이 훨씬 좋은 미로야. 오늘 저녁 네게 전하고 있는 이 현명한 생각은 그저께 밤에 갑자기 깨달은 거야. 우리가 미로의 지붕 위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잠의 신이 우리를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동안에 말이야. 나는 무언가를 깨우치고서 그 생각을 수정했어. 그리고 너의 황당한 '사실'들을 잊고 보다 사리에 맞는 것을 생각하기로 결정했어.
알레프 167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미스터리는 초자연성, 심지어는 신성성과도 관련이 있지만, 해결은 인간의 손장난에 불과하다.
알레프 167,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너는 그런 변신이 이런 장르의 고전적인 책략, 그러니까 독자가 준수해야 한다고 요구하는 진정한 규칙이라고 말하지도 몰라.
알레프 170,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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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로 지정된 대화
[~자기 미로에서 죽은 이븐 하캄 알 보크하리] 이 단편 전체를 현실의 파편들을 주워서 개연 있는 이야기로 만들어가는 과정으로 이해한다면, 던레번과 언윈 각각의 역할이 무엇인지도 말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요약하면 이 단편이야말로 보르헤스가 추구하는 '직선 속에서 무한한 원주의 일부를 보는 것', 시적인 상상력과 수학적인 엄밀함의 조합이 아닐까 합니다. 현실에서 일견 허무맹랑하게 들릴 법한 조상의 신화를 흡수하는 시인 던레번, 그리고 그런 조상 신화 속에서 더 개연있는 탐정소설의 구조를 보는 수학자 언윈은 우연히 친구가 된 것이 아닐 겁니다. 표면적으로 던레번이 언윈에게 들려준 신화를 언윈이 수정해주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애당초 던레번이 신화적 사실을 현실로 끌어왔다는 점 자체를 간과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단지 현실의 우리는 이 단편을 읽으면서 던레번과 언윈, 전자의 이야기와 후자의 이야기의 차이를 살펴볼 수는 있겠습니다. 신화적 이야기는 크든 작든 교훈적인 구조를 띠는 것 같습니다. 반면 소설은 교훈성 너머에서 어떤 인간성의 일면을 증거합니다. 만일 언윈이 수정한 후자의 이야기가 전자의 그것보다 더 개연 있게 느껴진다면, 그 이유는 언윈의 이야기가 아븐 하캄 알 보크하리의 내면을 설득하는 데 더 집중했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해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개연성'은 무엇인지 물어볼 수도 있습니다. 개연의 사전적 정의를 찾아보면, '단정할 수 없지만 대개 그럴 것이라고 생각되는 상태'라고 나옵니다. 정의 자체가 두루뭉술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대개 그럴 것이라고 생각되는 상태'를 받아들이는 정도 역시 시대와 사람에 따라서 달라질 것입니다. 과거에는 신화였던 이야기의 구조가 오늘날에는 소설인 이유를 생각해보면 이해하기 쉬우리라 생각합니다. 흔히 사람은 옳은 인생을 살기보다 (자기가 판단하기에) 좋아 보이는 인생을 산다고 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오늘날 우리가 신화가 주는 비교적 경직된 교훈성에서 떨어져 나와, 소설에 등장하는 작고 소소하고 때론 추악하기까지 한 인간에 매혹된 이유가 있지 않을까 합니다. 시인 던레번의 이야기에서 이븐 하캄 알 보크하리는 자기 탐욕과 두려움에 눈이 멀어 신하를 죽이고 그런 신하의 유령에게 복수당한다는 일견 교훈적인 결말을 맞습니다. 그러나 수학자 언윈은 그 이야기에서 신하였던 사이드의 내면과 행적을 봅니다. 그리고 '탐욕'이 아닌 왕에 대한 '증오와 공포'를, 나아가 그러한 감정을 실행하기 위한 현실의 정교한 '밀실살인' 장치를 봅니다. 던레번에게는 신화적 계시였던 것이, 언윈에 이르러서는 소설적 암시가 되고 있습니다. 탐욕이 아닌 증오와 공포, 왕과 신하라는 고정된 정체성이 아니라 왕이자 신하가 되는 혼재된 정체성의 문제, 저는 이렇게 읽었습니다.
나는 내 노예에게 사막의 정면을 지키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나와 사이드는 지쳐 잠들고 말았지요. 그날 밤 나는 뱀 떼에게 사로잡히는 꿈을 꾸었습니다. 나는 공포에 질려 잠에서 깨었어요. 내 옆에서는 새벽의 햇살을 받으며 사이드가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내 피부에 거미줄이 스쳤는데, 그것이 내게 그런 꿈을 꾸게 했던 겁니다.
알레프 161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탕진한 건 아니야." 언윈이 말했다. "이교도의 땅에 벽돌로 지은 커다란 원형의 함정을 세우는 데 투자된 거야. 왕을 함정에 빠뜨려 죽이기 위해서 말이야. 만일 네 추측이 옳다면, 사이드는 탐욕 때문이 아니라 증오와 공포에서 그 일을 했던 거야. 그는 보물을 훔쳤지만, 나중에 보물이 자기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어. 중요한 것은 이븐 하캄이 죽는 것이었어. 그는 이븐 하캄으로 위장했고, 이븐 하캄을 죽였고, 마침내 이븐 하캄이 되었어." "그래, 맞아." 던레번이 동의했다. "그는 죽어서 그 누구도 아닌 사람이 되기 전에, 언젠가 자신이 왕이었거나 왕인 것처럼 위장했던 사실을 기억할 떠돌이였어."
알레프 171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미스터리들은 단순해야만 해. 포의 잃어버린 편지를 떠올려 봐. 아니면 장윌의 닫힌 방에 대해 생각해 봐.” “아니면 복잡해야겠지.” 던레번이 대답했다. “우주를 떠올려 봐.”
알레프 자기 미로에서 죽은 이븐 하캄 알 보크하리,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저도 시인과 수학자 간의 티키타카(이렇게 부르면 너무 가벼워지려나)가 인상깊었습니다. 마지막에 수학자 언윈이 자신의 논리를 설명하면서 (오히려) 미노타우르스를 가져오는 부분에서 보르헤스의 교묘함에 무릎을 탁!
나는 무언가를 깨우치고서 그 생각을 수정했어. 그리고 너의 황당한 ‘사실’들을 잊고 보다 사리에 맞는 것을 생각하기로 선택했어.” “말하자면 집합 이론이나 차원의 공간 같은 것이군.” 던레번이 말했다. “아니야.” 언윈이 진지하게 말했다. “나는 크레타 섬의 미로를 생각했어.
알레프 자기 미로에서 죽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두 명의 왕과 두 개의 미로] 매우 짧은 이야기입니다. ⟨자기 미로에서 죽은 이븐 하캄 알 보크하리⟩에 등장하는 "이상한 책들을 많이 읽은" 교구 목사가 설교대에서 말했다는, "미로를 세웠다는 이유로 하느님이 벌을 내린 어느 왕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서 이븐 하캄은 교구 목사를 찾아와서 자기 이야기를 털어놓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일전에 던레번이 말한 '미스터리가 신의 소관이라면 그것을 푸는 것은 인간의 손장난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일견 뒷받침하는 일화로 읽히기도 합니다. 미로는 실재하는 구조물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상징적인 공간입니다. 미로는 미스테리이자 신의 의뭉스러움 자체입니다. 신이 미스테리한 성격을 띤다기보다는, 신과 신성이 미스테리 자체가 아닌가 합니다. 이런 생각에 비추어 보면, 미스터리를 파헤치고 설명하는 것은 일종의 반신성적인 행위일 수 있습니다. 바빌로니아의 왕와 아랍의 왕의 태도는 대비됩니다. 바빌로니아의 왕이 신성을 흉내내어 미로를 인위적으로 만들었고 그로 인해 훗날 화를 입었다면, 아랍의 왕은 사막이 다름 아닌 상징으로서 미로임을 알고서 바빌로니아의 왕을 사막에 내버려둠으로써 진정한 미로의 의미를 알려줍니다. 이처럼 아랍의 왕과 바빌로니아의 왕이, 사막으로서 미로와 건축물로서 미로가, 상징과 구조물이, 신성과 반신성이, 신위와 인위가, 삶과 죽음이, 끝으로 '풂'과 '가둠'이 마주보고 있습니다.
그런 다음 그를 묶었던 끈을 풀어 주었고, 그를 사막 한가운데 남겨 두었다. 그곳에서 바빌로니아의 왕은 굶주림과 갈증으로 죽었다. 영원히 죽지 않으실 '그분'과 영광이 함께하기를.
알레프 173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바빌로니아에서 당신은 내게 수많은 계단과 문과 벽으로 만들어진 청동 미로 속에서 길을 잃어버리게 하려고 했소. 이제 전지전능하신 알라신께서 당신에게 내 미로를 보여 주도록 허락하셨소. 그곳에는 올라갈 계단도 없으며 힘들게 열어야 하는 문들도 없고, 돌아다녀야 할 진저리 나는 복도들도 없으며 당신의 길을 막을 벽들도 없소.
알레프 두 명의 왕과 두 개의 미로,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흥미로운 작품이었습니다. 전 단편에서 나온 설교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단편 간의 상호참조성도 흥미로운 장치이고, 마지막 장면에서 사막을 미로로 제시하면서 닫힌 미로와 열린 미로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 좋았습니다. 보르헤스의 작품을 읽으면 머릿속에서 새로운 연결이 막 생겨나는 느낌이 들어요.
혼돈에 이르게 하고 경이로움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바로 인간이 아닌 신만이 지닌 고유의 특권이었기 때문이다.
알레프 172,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앞 작품의 후속작이군요. 단편집을 선호하는 편은 아닌데 종종 이렇게 같은 세계관을 공유하는 작품들을 만나면 정말 즐겁더군요.
화제로 지정된 대화
[기다림~] 누차 말하게 됩니다만, 일견 슴슴한(?) 이런 작품이 더 좋게 읽힙니다. 나른하면서도 이상한 역동성이 느껴지는 작품이었어요. 도망자와 추격자가 합쳐지고 있다는 점에서 보면 반복되는 작품 유형으로 분류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래도 세부 사항으로 들어가면 얘기할 만한 구석이 풍부합니다. 개인적으로 황병하 선생님의 번역본은 명료하지 않은 문장이 많아서 송병선 선생님의 번역을 추천합니다. 그래도 특정 문장만큼은 황병하 선생님의 번역이 압축적이고 은유적인 맛이 있습니다. 특히, 마지막 문장이 그랬습니다. 이 작품은 자신을 쫓는 남자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익명의 도망자 이야기입니다. 익명의 도망자는 과거에 "지하 세계의 비극적인" 일에 몸 담았던 것으로 추정되는데요, 마지막까지도 그의 이름이 끝내 밝혀지지 않는다는 것이 감상 포인트였습니다. 표면적으로만 독해하자면, 익명의 도망자는 애당초 살아갈 수 없는 삶, 추격자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삶을 가장했다는 이유로 죽는 것처럼 읽힙니다. 자신과 똑같은 사람을 만나면 죽게 된다는 도플갱어 괴담과도 유사한 점이 있기는 합니다. 이 단편의 제목이 '기다림'인 것에 저는 주목하고 싶습니다. '익명의 도망자가 과연 무엇을 기다리고 있었냐?' 하는 물음에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 소설은 다양하게 말해질 수 있을 것 같아요.
여자가 이름을 묻자 그는 비야리라고 대답했다. 그 이름을 댄 것은 비밀스러운 도발을 위해서도 아니었고, 이제는 정말로 느끼지 않게 된 굴욕감을 누그러뜨리기 위한 것도 아니었다. 그는 그 이름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고 자기를 괴롭히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다른 이름을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었다. 분명한 것은 그가 적의 이름을 채택하는 것이 교활한 책략이 될 수 있다고 상상하는 문학적 실수에 유혹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알레프 176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소설을 읽는 사람들과 달리, 그는 결코 자기 자신을 예술 작품 속의 인물로 보지 않았다.
알레프 기다림,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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