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미로운 작품이었습니다. 전 단편에서 나온 설교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단편 간의 상호참조성도 흥미로운 장치이고, 마지막 장면에서 사막을 미로로 제시하면서 닫힌 미로와 열린 미로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 좋았습니다. 보르헤스의 작품을 읽으면 머릿속에서 새로운 연결이 막 생겨나는 느낌이 들어요.
(5) [보르헤스 읽기] 『알렙』 후반부 같이 읽어요
D-29

모시모시

quentin
혼돈에 이르게 하고 경이로움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바로 인간이 아닌 신만이 지닌 고유의 특권이었기 때문이다.
『알레프』 172,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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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entin
앞 작품의 후속작이군요. 단편집을 선호하는 편은 아닌데 종종 이렇게 같은 세계관을 공유하는 작품들을 만나면 정말 즐겁더군요.
화제로 지정된 대화

russist
[기다림~] 누차 말하게 됩니다만, 일견 슴슴한(?) 이런 작품이 더 좋게 읽힙니다. 나른하면서도 이상한 역동성이 느껴지는 작품이었어요. 도망자와 추격자가 합쳐지고 있다는 점에서 보면 반복되는 작품 유형으로 분류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래도 세부 사항으로 들어가면 얘기할 만한 구석이 풍부합니다. 개인적으로 황병하 선생님의 번역본은 명료하지 않은 문장이 많아서 송병선 선생님의 번역을 추천합니다. 그래도 특정 문장만큼은 황병하 선생님의 번역이 압축적이고 은유적인 맛이 있습니다. 특히, 마지막 문장이 그랬습니다.
이 작품은 자신을 쫓는 남자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익명의 도망자 이야기입니다. 익명의 도망자는 과거에 "지하 세계의 비극적인" 일에 몸 담았던 것으로 추정되는데요, 마지막까지도 그의 이름이 끝내 밝혀지지 않는다는 것이 감상 포인트였습니다. 표면적으로만 독해하자면, 익명의 도망자는 애당초 살아갈 수 없는 삶, 추격자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삶을 가장했다는 이유로 죽는 것처럼 읽힙니다. 자신과 똑같은 사람을 만나면 죽게 된다는 도플갱어 괴담과도 유사한 점이 있기는 합니다. 이 단편의 제목이 '기다림'인 것에 저는 주목하고 싶습니다. '익명의 도망자가 과연 무엇을 기다리고 있었냐?' 하는 물음에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 소설은 다양하게 말해질 수 있을 것 같아요.

russist
“ 여자가 이름을 묻자 그는 비야리라고 대답했다. 그 이름을 댄 것은 비밀스러운 도발을 위해서도 아니었고, 이제는 정말로 느끼지 않게 된 굴욕감을 누그러뜨리기 위한 것도 아니었다. 그는 그 이름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고 자기를 괴롭히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다른 이름을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었다. 분명한 것은 그가 적의 이름을 채택하는 것이 교활한 책략이 될 수 있다고 상상하는 문학적 실수에 유혹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
『알레프』 176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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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시모시
소설을 읽는 사람들과 달리, 그는 결코 자기 자신을 예술 작품 속의 인물로 보지 않았다.
『알레프』 기다림,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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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entin
‘그’와 ‘비야리’가 계속 혼동되는 게 재밌네요. 짧은데 결코 단순하지 않은 게 역시 보르헤스의 마력이구나 싶습니다.
화제로 지정된 대화

russist
[~기다림] 마지막에 이르러서 도망자와 추격자는 하나로 겹쳐지고, 한쪽이 이내 다른 한쪽을 완전히 지워버립니다. 익명의 도망자는 여러 해 동안의 도피 생활을 하면서 자신을 추격하는 사람을 떨치지 못합니다. 어느 정도로 추격자에 사로잡혀 있는가 하면, 숙박하는 곳에서 자신의 이름이 아닌 '비야리'라고 대답할 정도입니다. 아마 그때부터 익명의 도망자는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고 죽어 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실제로 비야리가 자신을 찾아왔음에도 익명의 도망자는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하지 못한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중간 부분에서 화자는 도망자가 그저 현재 속에서만 살려고 했다고 말합니다. "권태가 행복인 것처럼" 느낄 뿐 아니라, 자신이 "개보다 더 복잡한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장면에 이어서, 그가 심각한 치통을 느끼고서는 소스라치게 놀라고 공포에 휩싸이는 장면은 인상적입니다. 이 부분에서 익명의 도망자가 이미 죽은 유령과 같은 삶을 살고 있으며, 어떤 실재감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점을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아마도 그는 오랜 도망 생활 때문에 자신을 추격하는 추격자에 너무 몰두했고, 그로 인해 자신의 정체성을 잃었을 뿐 아니라 추격자의 정체성으로 대체되었고, 시간은 오직 현재만을 살아가는 개의 그것이 되었으며, 삶은 영화 같은 꿈 혹은 환영과 비슷한 그 무언가가 되어버린 것이 아닐까요. 마지막 장면에서 비야리를 참칭한 남자는 몽롱한 마술에 잠긴 채 비야리의 총구에 피어오르는 포연처럼 흩어집니다.
어느덧 모임도 막바지를 향해 가고 있습니다. 내일 하루 22일은 쉬고, 모레 뵙겠습니다😃

russist
“ 여러 해 동안 고독하게 지내면서, 그는 기억 속의 모든 나날이 똑같게 느껴지는 경향이 있지만, 감옥이나 병원에서 보내는 날이 아니더라도 놀랍지 않은 날은 없다는 것을 알았다. 과거에 은둔 생활을 했을 때는 날짜와 시간을 세려는 유혹에 굴복했지만, 이번 은둔 생활은 달랐다. 어느 날 아침에 신문이 알레한드로 비야리의 죽음을 전하지 않는 한, 끝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또한 비야리가 ‘이미 죽었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렇다면 그의 삶은 하나의 꿈이었다. 그런 가능성에 그는 불안해했다. 그것이 위안처럼 느껴질지 아니면 불행처럼 느껴질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
『알레프』 177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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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ssist
총탄이 그를 지워버렸을 때 그는 그러한 마술 속에 있었다.
『알렙』 196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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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entin
그가 그런 마법의 상태에 있을 때, 총탄 소리가 그를 지워버렸다.
『알레프』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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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entin
전반부 <아스테리온의 집>이 너무 짧아서 아쉬웠는데 이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장편이 있어 소개합니다. 빅터 펠레빈이란 러시아 작가의 «공포의 헬멧»이란 책이고요. 살짝 SF같은 구조를 취하는 것 같은데 그렇지만은 않은…포스트모던이라 읽으면서 머리에 쥐나는 게 한 번 더 읽어야겠네요. 방금 다 읽고 책을 덮었는데 다 이해는 못 했지만 정말 흥미롭습니다.
https://www.aladin.co.kr/m/mproduct.aspx?ItemId=679482
참고로 ‘세계신화총서’ 시리즈도 정말 좋습니다. 각국의 신화를 포스트모던적으로 재해석한 작품들을 출간했어요. 절판된 책이 많지만 중고로 쉽게 구할 수 있습니다.

russist
잠깐 온라인 서점에 들어가서 읽어봤는데 흥미롭네요. 책 추천은 언제든 환영입니다. 너무 좋아요!

공포의 헬멧 - 테세우스와 미노타우로스세계 각국의 대표적인 작가들이 다양한 지역, 다양한 시대, 다양한 신화들을 현대적인 시각으로 다시 쓰는 '세계신화총서'의 네 번째 책. 「뉴요커」 선정 '세계의 젊은 작가 6인' 가운데 한 사람인 빅토르 펠레빈이 신화 속 미궁을 현대의 사이버스페이스로 옮겨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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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ssist
[문턱의 남자~] 첫 문단에서 보르헤스도 언급하고 있듯이 간단하고 고전적인 맛이 있는 이야기입니다.
보르헤스의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나'는 실종된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실종된 사람의 이름은 데이비드 알렉산더 글렌케언으로, 힌두스탄의 중앙 정부가 한 도시의 소요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파견한 관리로 추정됩니다. 글렌케언은 중앙 정부의 권력을 등에 업고서 강력한 대책들을 공포하고 도시의 소요 사태를 진정시킨 적이 있는데, 어쩐 일인지 이후 행방이 묘연해집니다. '나'는 그의 행방을 수소문하는 과정에서 도시 사람들이 무언가를 숨기고 있음을 감지합니다. 그리고 문턱에 앉아 있던 한 노인에게서 이야기를 전해 듣게 됩니다.

russist
“ 내 발치에는 아주 늙은 사람이 문턱에 쭈그리고 앉아서 마치 무생물처럼 꼼짝하지 않고 있었어. 그의 행색이 어땠는지 말해 줄게. 그것이 바로 이 이야기의 핵심적인 부분이거든. 마치 물이 돌을 작고 반들반들하게 만들듯이, 혹은 여러 세대의 사람들이 짤막한 금언을 만들듯이, 오랜 세월이 그를 작고 반들반들하게 만들어 놓았어. ”
『알레프』 184-185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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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시모시
“ “미친 사람에게 맡겼소.” 그가 되풀이해 말했어. “하느님의 지혜가 그의 입을 통해서 말하고, 교만한 인간들을 부끄럽게 만들도록 하기 위해서였지요. 그의 이름은 잊혔소. 아니면 아마도 결코 알려진 적이 없었을지도 모르오. 하지만 그는 벌거벗은 채, 혹은 넝마를 걸친 채 이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엄지손가락으로 자기 손가락들을 세거나 나무들을 비웃곤 했소.” ”
『알레프』 문턱의 남자,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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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entin
“ 바로 이 도시에서 재판이 열렸소. 이 집처럼 다른 모든 집들과 비슷한 집에서 말이오. 집들은 서로 다를 수 없소. 중요한 것은 집이 지옥에 지어 졌는지, 아니면 천국에 지어졌는지를 아는 것이지. ”
『알레프』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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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entin
문턱에 앉은 노인이 글렌케인의 죽음을 전하는 게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 저승의 강을 지키는 뱃사공 카론 같은 느낌도 납니다. 이 책에서 이 작품과 묶어 식민주의와 연관시켜 읽어볼 수 있던 작품이 또 있었나 기억을 더듬게 되네요. 마지막 장면에서 군중들의 열광이 인상 깊습니다.

quentin
나는 기다란 현관보다 조금 커다란 그 비좁은 마당에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나올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어.
『알레프』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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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ssist
[~문턱의 남자] '나'에게 노인은 물결이 깎은 조약돌, 혹은 시대에 걸쳐 짧고 예리해진 금언처럼 "작고 반들반들한" 인물로 여겨집니다. 사라진 글렌케언의 행방을 묻자 노인은 어쩐 일인지 과거의 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19세기 영국의 식민지 시절에서 지금 도시에서 벌어진 한 소요 사태에 관한 에피소드입니다. 당시 혼란한 인도의 한 도시에 영국 여왕이 임명한 재판관이 파견되었는데, 그가 법을 앞세워 무자비한 폭군처럼 군림했던 탓에 백성들이 그를 붙잡아다 재판에 넘겼다는 것입니다. 이때 재밌게도 여왕의 재판관을 재판하는 재판관으로 동네의 광인이 선출되었다고 노인은 말합니다. 백성들은 운명이 그들에게 현자를 금지한다면 남은 선택지는 바보밖에 없다고 하면서, 재판관을 재판할 재판관으로서 광인을 임명한 것입니다. 문턱의 노인이 들려준 이야기 속에서 폭군이었던 재판관은 사형을 선고 받고 죽임 당합니다.
이야기 속 사형된 재판관의 이야기는 '나'가 찾는 글렌케언의 현재 행방을 암시합니다. 노인의 외양에서도 유추할 수 있듯이, 역사라는 조류는 서로 들쭉날쭉 다르게 보이는 사건들도 비슷하게 작고 반들반들한 모습으로 바꾸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주목해봐야 할 점은 노인이 앉아 있던 자리가 문턱이라는 것입니다. 이렇듯 19세기 식민지와 20세기의 힌두스탄이, 폭군이었던 재판관과 글렌케언이, 미치광이와 현인의 판결이 바로 노인이 쭈그리고 앉았던 문턱에서 만납니다. 그렇다면 문턱이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현재라는 시간이 드나드는 과거의 통로가 아닐까요. 문턱은 한 시대에서 다른 시대로 역사적 조류가 뻗어나가는 통로이지만, 그곳은 늘 노인과 같은 자들이 문지기처럼 그 앞을 지키면서 이전 시대와 지금 시대가 미묘하게 닮아 있음을 표지하고 있습니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흔한 금언과 강가의 물결로 세공된 세월의 조약돌은 이렇듯 보르헤스의 야화 속에서 조우하고 있습니다.
내일은 본 모임의 마지막 단편 ⟨알레프⟩로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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