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ersGX] 1. 미셸 트랑블레처럼 일상 포착하기

D-29
2nd. 나는 베이비부머 세대로 5남 2녀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내 기억에 배를 곪아본 적은 없는 것 같다. 반면 내 남편은 어렸을 적에 쌀밥을 먹은 기억이 별로 없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아무리 혈당에 나쁘다고 해도 잡곡이 한 톨이라도 섞이면 밥상을 물렸다. 오로지 흰쌀밥만 찾았는데 70대를 앞두고 췌장에 기어코 문제가 왔다. 아무튼 나는 기억이 있는 시절부터 지겹도록 일을 했다. 딸년이란 무릇 집안의 재산이지. 한 겨울이었나? 아무튼 대략 다섯 살 때부터 개울가에 빨래를 하러 다녔다. 하루는 둘째 남동생을 엎고 개울가에 빨래를 하러 갔다. 얼음이 꽁꽁 얼어 있어서 빨래하는 것이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그런데 눈치 없는 남동생이 추웠는지 악을 쓰며 울어댔다. 봄이 오면 밭에 갔다. 일을 잘한다고 어른들이 칭찬을 했다. 하나밖에 없는 내 언니는 엄마이자 친구이자 자매였다. 내 언니는 밥을 잘 지었다. 일 곱살 때부턴가 대략 열 명 분 이상의 밥을 뚝딱뚝딱 해냈다. 내 언니가 아이를 낳다가 죽었을 때 나는 정신줄을 놓았다. 그때 이후로 내 세계는 변했다.
2nd. GX/ 24.07.19 명자는 잠에서 깼다. 지금이 몇 시인지 확인하려고 핸드폰을 켠다. 8시 10분. 경일이 아빠는 출근을 했나? 조용한 걸 보니 했겠지. 옛날엔 잠귀가 밝아서 출근하는 소리에 당연하게 깨어났는데 요즘엔 못 일어난다. 내가 늙긴 했다 보다. 카톡이나 문자 온 게 없는지 확인한다. 둘째 선경이가 카톡을 보내놨다. '출근 끔찍해ㅜㅜ' 으휴. 얜 일하기 싫다고 자꾸 카톡을 한다. 어디 갈 데가 있다는 게 좋은 건데. 실업자라는 게 속상한 일이라는 걸 언젠가 알 수 있으려나 모르겠다. 떠듬 떠듬 답장을 쓴다. '월요일이라서 그렇겠다 힘내' 그리고 카톡앱을 나간다. 아직은 심심한 마음에 핸드폰 알림바를 내린다. 어제보다 잠든 황영웅 트로트 영상이 잔뜩 떠 있다. 하나를 눌러서 본다. 저번주에 서울에 있는 선경이 집에 놀러 갔는데 그때는 눈치본다고 못 봤던 터라 집에 와서 실컷 본다고 어제도 2시가 넘어서 잤다. 문제가 있니 마니 말이 많아도 노래를 잘해도 너무 잘한다. 명자는 속에 한이 많아서 구슬프게 노래 부르는 애들한테 마음이 간다. 나는 임영웅보다 황영웅이 더 좋더라. 임영웅이는 키도 크고 노래도 잘하는데 마음이 가진 않다고 생각한다. 트로트 영상에 실컷 빠져 있었는지 어느새 10시가 넘었다. 뭘 챙겨 먹긴 해야 하는데... 날이 더워서 입맛이 없다. 이놈의 집구석은 겨울엔 춥고 여름엔 덥다. 날이 갈수록 춥고 더워지는데 난방기도 에어컨도 없으니. 안 그래도 더위에 피부가 따끔따끔하고 내 몸뚱이는 왜 이러는지 모른다. 그냥 라면이나 끓여 먹어야겠다. 나이 먹으면 과자나 밀가루 음식이 싫어진다는데 나는 없어서 못 먹는다. 선경이가 보면 라면이 뭐가 좋다고 먹냐고 타박할테지. 이 나이 먹고도 라면이 맛있는 걸 어째.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니 선경이가 또 카톡이 왔다. '벌써 배고프당 점심 뭐 먹을거야?' 이런!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고민이다. 선경이를 내가 낳은 줄 알았는데 진짜 호랑이 새끼인가? 이런 생각을 하며 명자는 킬킬거린다. 그래도 이렇게 연락 오는 데가 있어서 좋다고 생각하며 답장을 쓴다.
지난주에 받은 건강검진 결과가 나왔다. 메일을 열어 보려다 순간 멈칫했다. 사오 년 전부터 매년 안 좋다는 곳이 하나씩 늘어나고 있으니, 올해도 분명 나빠진 데가 또 생겼을 거야.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마우스를 클릭했다. 그래, 이럴 줄 알았어. 당뇨 전 단계이니 정기적으로 혈당을 점검하라는 문장이 눈에 확 들어왔다. 몸무게를 줄이고 꾸준한 운동과 식이 조절이 필요하다는 조언도 이어져 있다. 작년에 공복혈당이 99라는 소리를 듣고 100은 결코 넘을 수 없다고 다짐했는데, 결국 102를 찍고 말았다. 아, 짜증 나. 구글에 ‘공복 혈당’, ‘당뇨 전 단계’, ‘당화 혈색소’, ‘당뇨 기준’, ‘당뇨 관리’, ‘당뇨 증상’, ‘당뇨 치료’ 치고 수많은 사람들이 올린 끝없는 링크를 열었다 닫기를 반복했다. 다들 메일 속 의사와 비슷한 소리를 하고 있었다. 눈을 부릅뜨고 봐도 102는 정상이라는 정보는 없었다. 목이 빠지게 노트북 화면을 들여다보다 억울하다는 생각이 불쑥 올라왔다. 솔직하게 우리 사무실에서 오십 넘은 사람 중에 나 정도로 몸 관리하는 사람이 있나? 내가 좀 동글동글해 보여도 결코 뚱뚱한 건 아니거든. 아랫배가 조금씩 나오고 있지만 그렇다고 나보고 뱃살 빼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그래 바지가 꽉 끼긴 하지. 그래도 회사 사람들이랑 매일 술 먹을 궁리나 하는 우리 팀장과 비교해 봐. 난 정말 표준이라고. 건강을 위해서 출근 하기 전에 사무실 근처 헬스장에서 1시간 운동하지. 술도 안 마시고 담배도 안 피우지. 맵고 짠 음식은 원래 안 먹지. 커피도 끊었고, 회식도 거의 안 가지. 작년부터 더 열심히 관리를 했단 말이지. 그런데 어떻게 혈당이 102가 될 수 있느냔 말이야. 하라는 거 다 했고, 좋다는 거 다 했다고. 그랬는데 어떻게 당뇨가 오냐고!
눈을 감으면 또 그 장소다. 또 그 소리다. 김회명은 눈을 감지 않으려고 했다. 가도 가도 눈 밭이었다. 험한 산길이었고 겨우 여섯 살 어린 회명은 저 언덕만 넘으면 엄마와 삼촌이 있다는 말을 기억했다. 멀리서 총 소리가 아직 들렸다. 회명은 생각하기도 싫어 무작정 달리고 또 달렸다. 신발 한짝은 어디 갔는지 없었고 옷은 때와 핏자국에 절어 있었다. 눈보라치는 산길이었지만 추위도 몰랐다. 회명은 그게 뭔지 몰랐고 그저 무섭고 이상한 기분만 들었다. 시커멓게 변한 사람이 산처럼 쌓여 있었고 몇몇은 서 있었지만 그 앞에 길다란 막대 같은걸 그들 향해 들고 있는 사람들이 뭔지 탕 하고 무얼 당기면 섰던 사람이 쓰러졌다. 머리가 반이 날아간 사람, 어깨가 뚫린 사람. 배 부분이 파이면서 뒤쪽으로 훅 하며 허리가 꺾이는 사람 하나같이 바닥에 쓰러졌다. 곧 무슨 천둥치는 소리가 엄청나게 들리더니 사람들이 죄다 쓰러졌고 회명을 덮쳐버려 정신을 잃었다. 눈을 뜨고도 움직이지 않는 사람은 회명 뒷집에 살던 아저씨였다 아저씨가 회명을 덮고 등을 반대쪽으로 하고 쓰러졌다. 회명은 눈을 뜨고 고개를 흔들었다. 문득 여기 올 때 저 언덕을 넘어 내려가면 막사가 있고 먼저 마을을 떠난 사람들 중 엄마와 삼촌이 있다고 들었다. 죽음이라는 걸 모를 나이였다. 어떤 상황인지 자세히는 몰랐지만 그 사람들은 움직이지 않았고 어린 회명은 빨리 엄마를 만나야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소리라도 냈다가는 그 무서웃 사람들이 다시 달려올 것만 같아 숨소리조차 죽이고 언덕길로 접어들어 순보라를 뚫고 뛰고 또 뛰었다. 팟! 회명은 깜짝 놀라 넘어질 뻔 했다. 눈보라에 피에 흙더미를 덮고 엎드린 건 사람이었다 회명은 너무놀라 꼼짝을 할 수가 없었다. 까만 손이 슬쩍 움직였다. 엄마한테 군복 색깔을 잘 보라고 말투도 들어봐야된다고 들었지만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고개를 드는 것 같았다. 곧 사람인지 귀신인지 모를 그의 얼굴이 드러났다. 전부 새까맣고 얼굴은 이상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그가 가까스로 쥐어짜듯 말을 꺼냈다. ㅡ얘, 이걸 갖고 돈암동 전차종점 김창준을 찾아줄래. 이걸 좀. 부탁이다. 시커먼 사람이 전해준 건 군번줄과 색깔이 바랜 작은 염낭이었다. 70년도 더 된 일이 어제인듯 선명하게 기억났다. 회명은 그날 언덕을 어떻게 넘었는지 가족을 만났다. 손에 쥔 군번줄과 염낭은 기억나지 않았다. 눈보라 속에서 기진맥진해 어머니를 만날 때까지 손에쥐고있었던 것은 생각났다. 돈암동 전차종점이라고 어머니께 얘기한 것도 같았지만 어쩐지 그 날 이후 그 이야기는 한번도 꺼내지 않았다. 몇번 도망인지 이사인지를 갔고 어머니와 터 잡고 살기 시작한 건 그 몇년 뒤였다. 다시 눈을 떴다. 햇살이 링겔 줄에 비치는 게 보였다. 의사와 간호사가 회진을 다녀간 건 기억났다.
순자말자 하던 시대에 태어난 나는 인텔리한 아버지 덕분에 이지영이라는 이름을 갖게되었다. 어려서부터 꿈이라면 레이스 달린 홈드레스를 입고 살림을 하는 현모양처였다. 제 시간에 출근해서 따박따박 월급받아오는 남편이랑 아들딸 두고 소소한 살림이나 하면서 사는 게 꿈이라면 꿈일까? 하지만 꿈은 꾸라고 있는 것인 듯.. 따박따박 월급은 커녕 결혼 후 얼마 후에 딸 자식 하나 남겨놓고 세상을 떠낫다. 형님들은 다 아들 자식들이 있는데 나만 떨렁 딸 하나만 남으니 세상이 원망스럽고 적적했다. 딸도 딸 하나만 낳았다. 나는 아들도 없는데 손주도 없는 인생이다. 그래도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딸(강춘남씨)은 똑똑하고 야무져서 알아서 잘 컸다. 그래도 그렇지 정말 스스로 혼자서 큰 줄 아는 딸을 보면 얆밉기도 하다. 춘남이에게 남편 잘 만나서 월급 잘 받는 신랑 만나서 좋겠다고 하니. 그런 구시대적인 말이 어디있냐며 자기가 남편보다 월급을 더 받는다며 어디가서 그런 소리하고 다니면 옛날 사람이라며 욕먹는다며 퉁을 주고 가버린다. 내가 옛날 사람인걸 어쩐다니.. 최근에 허리가 아파서 병원 갈려니 겁이나서 춘남이에게 같이 가자 부탁했더니 시원하게 반차를 내고 데려다주었다. 이래저래 약 한 바가지 받고 왔는데 춘남이는 약 먹으면 낫는다니 다행라며 자기 딸 픽업 가야 한다고 서둘러 집으로 행했다. 반차까지 내주고 신경써준 춘남이에게 고맙기도 하지만 얼마나 아프고 불편했겠냐는 입발린 말도 없이 간 딸이 야속하기도 하다. 그래도 남들은 손주도 키워달라고 부탁아닌 부탁도 한다는데, 손도 벌리지 못하고 알아서 딸 키우고 하는 춘남이가 기특하기도 가엽고 안쓰럽기도 하다.
“아버님. 오늘도 집에 계실 건 아니죠? 다른 분들처럼 노인정 같은데도 가시고 하면 좀 좋아요? 이 좁은 집에서 하루 종일, 답답하지 않으세요?” 오늘도 박 영감은 며느리 눈치에 쫓겨나듯 집을 나섰다. 집에서 나온 박 영감은 하늘을 한번 바라보았다. 그러곤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박 영감의 목적지 없는 발걸음은 무척이나 느릿하고 버거워 보여 그를 나이보다 더 늙어 보이게 했다. 그리고 자신도 자신을 늙다 못해 하루하루 죽어가는 중이라 여겼다. ‘한 걸음 한 걸음 시원하게 걸은 적이 언제였던가? 하긴…. 죽어가는 송장이 씩씩하게 걷는 것도 웃긴 일이지….’ 힘겹게 발걸음을 내디디며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던 그때, 박 영감의 눈에 저 멀리에 있는 한 할머니가 들어왔다. ‘몇 살쯤 됐을까? 나이는 제법 있어 보이는데 참 곱게 늙었구나. 곱다 고와. 살면서 고생 한 번 안 한 얼굴이 딱 저런 모습일까? 저 할망구는 대체 무슨 복을 타고 난거지?’ 박 영감은 괜스레 자기 얼굴을 한번 더듬었고, 두터운 손으로도 확연히 느껴지는 깊은 주름이, 패인 그 주름 속에 아로새겨진 자신의 지난날이 떠올라 얼굴이 잠시 어두워졌다. 고개를 한번 들어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 조각들을 바라본 박 영감은 이내 기운을 차린 듯 조각조각 난 자신의 마음을 맞추는 열쇠라도 되는 거처럼 시선을 할머니의 발길 끝에 다시 고정한 채 그 뒤를 천천히 따라갔다. ‘이쪽으로 가면 미르공원밖에 없는데…. 역시 우리 같은 노인네들을 받아주는 곳은 공원밖에 없는 건가?’ 박 영감의 발걸음은 여전히 느려 할머니의 발걸음을 따라잡을 수 없었으나 초조하진 않았다. 그 공원에 벤치는 딱 두 개-서로 마주 보고 있는- 밖에 없다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이 시간에 나와 한가롭게 벤치를 차지하는 이들은 노인네들 밖이라고, 그래서 미관상 좋지 않아 나라에서 벤치를 계속해서 없애는 추세라고, 젊은 사람 서넛이 벤치에 앉아 있는 박 영감을 보며 농담인지 진담인지를 지껄여대며 지나가던 그날이 박 영감의 머릿속을 스쳐 갔다. 생각대로 할머니는 벤치에 앉아 있었다. 박 영감도 서둘러-물론 아주 느린 걸음이었지만- 맞은편 벤치에 가쁜 숨을 몰아쉬며 앉았다. 어느 정도 호흡이 정돈되자 비로소 박 영감은 맞은편에 앉은 할머니를 제대로 볼 수 있었다. 흰머리를 단정하게 묶고, 고운 한복을 입은 그녀의 모습은 뭐랄까, 티브이 광고 속에나 보고 느낄 수 있던 ‘품위’, ‘품격’ 같은 단어들을 머릿속에 저절로 떠올리게 했다. ‘나도 저렇게 늙고 싶었어. 할 수만 있다면 말이지…. 할 수만….’ 박 영감의 시선은 다시 하늘로, 그의 기억은 그렇게 과거로 향하고 있었다. ‘가난한 건 아무것도 아니었어. 그 시절엔 누구나 다 가난했으니깐. 하지만 부모가 없는 건, 그 흔한 친척조차 하나 없는 건 나 밖이었어. 나 혼자 외딴섬에 표류한 듯 살았지. 평생을 어디에 속하지도 못한 채 말이야. 언제부터 없었는지도 몰라. 어쩌면 난 처음부터 누구도 없이 창조된 거야. 마치 알에서 깨어난 그 누구처럼 말이지. 알을 깨고 나와 볼 수 있는 어른 하나, 그래 딱 한 명이라도 곁에 있었다면. 그 누구라도 좋으니 의지할 곳, 나에게 인생은 이렇게 살아야 한다, 이딴 말을 해줄 사람이 한 명이라도 가까이 있었다면 지금 내 모습이 이렇게 초라하진 않았을까?’ 자기 생각이 버거운 듯 박 영감은 일그러진 얼굴로 하늘을 한번 바라보며 계속 생각했다. ‘그래, 그딴 건 없어도 돼. 내가 만들면 되니깐. 그리 잘나지도 않은 부모를 가진 주제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자랑이라도 되듯 나에게 으스대는 족속들을 보면서 가족 같은 것도 내가 만들겠다 결심했지. 이 세상은 나에게 없는 것들을 내세우며 자꾸 나를 증명하라 요구했으니깐. 그때부터 잘못된 걸까? 사랑이니 뭐니 내가 받아봤어야 알지. 뭘 알아야 줄 거 아냐? 그딴 게 뭔데? 난 아직도 모르겠어. 사랑이니 뭐니 감정같은것도 태어날때부터 어느 정도는 가지고 태어나는 거야. 글로 배우는 건 제대로 아는 게 아니라고. 억지로 익히고 흉내나 내는 거지. 그런 건 탈이 날 수밖에 없다고. 나에게 부모가 없듯, 사랑도 나의 것이 아니었을 뿐이야. 난 그냥, 그냥 내가 바란 건 어디 가서 ’나도 가족이 있다!’ 이 한마디 꿀리지 않고 하는 거였는데. 한평생 나에게 사랑을 갈구하며 나를 원망하며 죽어간 할망구도, 망할! 자기 어미를, 자신을(넌 그 정도면 잘 큰 거 아니냐?) 그렇게 만든 게, 마치 내 탓이란 냥 아직도 날 보면 찬바람처럼 쌀쌀히 대하는 아들 새끼도. 내가 진정 원한 게 이런 거였나? 한평생을 쉬지 않고 일했어. 남들처럼 평범해지기 위해서 나는 하루하루를 죽을 만큼 애써야 했다고! 이젠 정말 쉬고 싶어. 집에서조차 편히 있지도 못하는 나는 어디서 쉬어야 하지? 누구 때문에, 뭐 때문에 그렇게 열심히 산 거지? 그래…. 어쩌면 죽는 것이 나에겐 쉬는 것이겠지. 내가 편히 쉴 곳은, 그곳뿐이겠지…. 알에서 태어나 다시 돌아가는 것뿐이야.‘ 마침내 박 영감의 입에서 알 수 없는 신음이 흘러나왔다. 마치 울음소리 같기도 한. “억” 박 영감은 서둘러 하늘을 보았다. 아주 오래전부터 그는 힘들 때마다 하늘을 보았다. 젊었을 적 읽었던 책 속에서- 이제는 기억에도 없는 어느 작가가- 힘들 땐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라고, 적혀있었다. 그때 깨달았다. 그때까지 살면서 한 번도 하늘을 본 적이 없다는 것을. 돈 드는 것도 아닌데 지금껏 하늘 한 번 못 본 것이 억울해 그때부터 박 영감은 하늘에서 답이라도-혹은 희망일지도- 찾듯 그렇게 힘들 때면 하늘을 찾았다. 한참 하늘을 바라보던 박 영감의 시선이 다시 할머니에게로 갔다. 할머니는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공원에 핀 꽃을 구경하느라 바빠, 박 영감의 시선이 향한 곳이 자신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다시 봐도 참 고운 얼굴이야. 주름조차 저리 선하게 보일 수가 있나? 인상 한 번 안 쓰고 산 건가? 살면서 화낼 일이 한번 없었다고?‘ 박 영감은 하늘을 다시 바라보았다. 마치, 자신이 숨을 쉬기 위해 하늘이 그곳에 있어 다행이라는 듯.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을 보다, 그것들이 모이고 흩어지는 것을 하염없이 바라보다 문득 생각되었다. 박 영감은 서둘러-물론 아주 느려터진 동작으로- 할머니를 다시 바라보았다. 할머니는 아직도 꽃구경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래도 내가 저 할망구보다 나은 점이 하나 있군, 있어! 난 언제 죽어도 억울할 게 하나 없어. 아까울 게 하나 없지. 하지만 저 할망구는 이리 고운 세상 아까워서 어떻게 죽나? 저 꽃 한송이조차 아까워 죽을려고 하는데. 흐흐‘ 박 영감의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번졌다. 박 영감은 마치 어려운 문제를 해결이라도 한 듯, 이번에는 고마움을 표하려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자기 죽음에 한걸음 바짝 더 다가선 기분이었다. 박 영감은 그 기분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좋았다. 자신의 발걸음조차 가볍게 느껴져 어디라도-그 끝이 그곳일지라도- 처음으로 기꺼이 갈 마음이 들었다.(24.7.1)
① 한 노인이 자신 삶을 회고합니다. ② 어린 시절을 돌이켜봅니다. ③ 학창 시절도 돌아봅니다. ④ 대학 다닐 때도 기억합니다. ⑤ 그 노인은 젊은 시절 삶을 회고합니다. ⑥ 연애 했던 기억을 떠올립니다. ⑦ 결혼 했던 추억 속에 빠집니다. ⑧ 첫 아이 얻었을 때 삶에서 한참을 머뭅니다. ⑨ 그 노인은 자신의 중년 시절 삶을 회고합니다. ⑩ 눈물을 흘립니다. 그는 이윽고.
"아이고, 참말로, 선상님. 내 얘기 쪼까 들어보쇼잉. 나가 이, 앉거나 서거나, 누워 자고 인나도, 항시 요 허리가 어찌나 쑥쑥허고 아픈지 아주 딱 죽겄당께. 나가 새끼를 너무 많이 키워 그런가. 우리 손주들 넷을 나가 다 키웠으니께. 자식도 다섯이나 키웠는디, 손주꺼정 넷을 키웠더니 허리가 영 가부렀나벼. 근디 워쩌겄어. 자석들이 힘들다는디 나가 도와줘야제. 우리 장남이랑 막둥이가 요 동네 살어. 뭐, 나는 촌사람이라 잘 몰르는디, 서울서 아조 좋은 동네라고 허드만. 우리 장남이 선상님맹키로 으사여, 으사. 그려서 나를 요 동네 와서 살라고 떡하니 집을 해준 거시여. 덕분에 편허게 지냈제. 사실 애 봐달라고 부른 거는 우리 막둥인디, 갸는 우리 장남만치는 못 혀. 그려도 한 동네 사니께 나가 첫째네 애들도 봐주고, 막둥이 애들도 봐주고 혔제. 막둥이 애들 둘은 징하게 갓난쟁이 때부텀 키워서 아조 허리가 휘었당께. 갸가 날 때부텀 그리 속을 썩이드만, 말년에까지 엄니를 요래 고생을 시킨다고. 우리 막둥이 낳을 적에, 애가 꺼꿀로 들어서갖고, 참말로 죽네 사네 험서 낳았당께. 우리 엄니도 내 동상 낳다가 일찍 가부렀는디, 나도 막둥이 땜시 우리 엄니 따라갈 뻔 혔다니께. 나가 구남매 중에 여덟째여. 근디 아홉째 낳다가 엄니가 가부렀제. 나가 그때 돌이나 겨우 지났을 때였다든디. 참말로, 엄니 없이 크느라고 나가 울기도 많이 울었제. 우리 구남매 중에 여자 형제라고는 첫째 언니랑 나랑 둘 뿐인디, 나가 여섯 일곱 살 되었을 적에 우리 언니가 벌써 시집을 가부렀어. 그러니 위로 오빠만 여섯에 아부지꺼정 계신디, 우리 할매 혼자 그 살림을 워찌 다 헐 것이여. 우리 할매가 가시나넌 공부 시킬 필요도 없다고, 우리 아부지헌티 나 핵교도 보내지 말라는 걸 둘째 오빠가 간신히 설득혀서 나가 국민핵교는 그래도 마쳤어. 시방 생각혀도 그 오빠가 을매나 고마운지 몰러. 오빠 덕에 셈도 허고 글도 깨쳤당께. 근디 뭐 시골 촌동네 아짐씨가 글씨랑 숫자 알아서 뭣에 쓰겄어. 할매 말씸도 틀린 게 없제. 밭 매고 살림 살믄서 애들 키우느라 눈 붙일 새도 없는디 글 읽을 새가 어딨겄어. 우리 할매가 내 인생 훤히 꿰뚫어 보셔서 그랬던 것 같기도 혀. 우리 아부지가 장남이셨응께 할매가 참말로 젊으셨제. 열여섯에 시집와서 열일곱에 우리 아부지 낳으시고, 우리 아부지는 열여덟에 결혼혀서 그 해에 바로 우리 언니가 나왔으니, 우리 할매가 첫 손주 보실 적에 연세가 서른 너댓이었어. 나랑 언니랑 열두 살이나 차이가 나도, 나가 태어날 적에 우리 할매는 오십도 안 되셨던 거시여. 나가 나이는 많이 묵었어도 아직도 요래 기억력이 좋고, 계산도 빠르당께. 우리 할매를 닮아서 그런가벼. 늙은 양반이 힘은 또 워찌나 좋으신지 막 된장이랑 김치 담아놓은 항아리도 번쩍번쩍 드셨제. 그런 양반이 부지깽이 들고 을러대믄 나가 아주 오줌을 다 지렸지. 할매 등쌀에 요만헐 때부텀 새벽 동 틀 적에 일어나서 한밤중꺼정 내가 종종걸음으로 댕김서 허리 한 번 못 펴고 일을 혔어. 그래도 그렇게 무섭게 일을 배운 통에 나가 시집가서도 싫은 소리 한 번을 안 들었당께. 밭일도 척척 잘 혀, 소도 잘 키워, 애들도 다섯이나 낳았제, 살림도 나가 을매나 알뜰허게 잘 살았다고. 우리 시어머니가 나만 보믄 이뻐 죽겄다 하셨어. 뭐, 우리 때는 다들 그렇게 일도 많이 허고 억척시럽게 살았제. 애들 입에 따땃한 밥이라도 한 숟구락 더 떠멕일라믄 이, 궁뎅이 붙이고 앉을 새가 어딨겠어. 그려서 그런가, 나가 인자 일흔다섯 밖에 안 묵었는디요, 선상님. 요래 허리가 아파 갖고 눕도 못 허고 앉도 못 허니 워쩌면 좋겄소잉?"
@박산호 A는 밖으로 나가기 전에 거울을 다시 한 번 보며 자신의 모습을 점검했다. 요즘 들어 부쩍 자신의 외모가 의식이 되어 차기 시작한 줄이 짧은 진주 목걸이. 빨간 립스틱. 립스틱 색이 너무 진한가? A는 거울 속 자신을 보며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본다. 짧게 친 머리는 마음에 든다. 입가와 눈가에 쪼글쪼글하게 팬 주름은 썩 마음에 들지 않지만 어쩌겠는가. 살아온 대가라면 받아들이는 수밖에. 오늘도 혼자 지내는 딸을 보러 간다. 아들처럼 내 모든 희망과 사랑과 믿음을 부어 키운 딸이 작업실에 일하러 간 사이에 집에 들러서 청소도 해주고 딸의 집에서 서너 시간 고요를 맛보다 올 참이다. 혼자 된 후 덜렁 남겨진 딸 하나를 데리고 옷가게를 해서 키우고, 그러다 가게에 불이 났을 때는 가정부로 일하기도 하고, 노점상을 하기도 했다. 그렇게 애면글면 키워낸 딸도 이제 흰 머리가 제법 무성하게 돋아났다. 나쁜 내 팔자를 닮아 혼자 사는 건 안타깝지만 하고 싶은 일 하며 산다니 그건 뿌듯하기도 하고. 지난 내 70년 인생이 딸 하나로 결산된다면 그럭저럭 괜찮은 성적표를 받은 거라는 생각에 거울 속에서 슬쩍 미소가 지어졌다. 에구, 노망이 들었나. 시간을 너무 지체했다. 어여 나가서 냉방 빵빵하게 틀어놓은 지하철을 타러 가야겠다.
화제로 지정된 대화
3rd. GX (7/2~7/5) 『옆집 뚱보 아줌마가 임신했대요』 116쪽에서 120쪽에서는 베아트리스가 어떤 사건을 맞닥뜨립니다. 아직 베아트리스와 독자들은 이 사건이 왜, 어떻게 일어났는지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베아트리스의 남은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뭔가 이 사건이 중요한 분기점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듭니다. 엄청나게 스케일이 큰 사건은 아닙니다. 하지만 독자들은 베아트리스가 느끼는 놀람, 당혹감, 두려움을 함께 느끼고 덩달아 흥분하게 됩니다. 실제로 우리가 어떤 사건을 겪을 때 꼭 그런 기분들을 느끼니까요. 세 번째 과제입니다. 한 평범한 인물이 어떤 사건을 맞닥뜨린 순간을 10문장 이상으로 적어주세요. 사건의 규모가 클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 그 인물이 겪는 감정을 생생하게 묘사해주세요. 『옆집 뚱보 아줌마가 임신했대요』 116~120쪽을 참고하세요. 그럼, 저는 네 번째 과제와 함께 4일 뒤에 돌아올게요.
경이는 요즘 누가 다그치는 것도 아닌데 마음이 급했다. 하필이면 출산예정일이 회사에서 가장 바쁜 시기였고, 연봉과 승급이 결정되는 면담까지 한 달 앞당겨야했기 때문에 태교는 고사하고 연일 이어지는 야근에 몸도 마음도 지쳤다. 그러나 워낙 일 욕심도 많은데다 출산 휴가를 끝내고 당당하게 복귀하려면 휴가를 가기 전까지 맡은 일은 완벽하게 끝내놓아야 했다. 최근 며칠 사이 태동이 거의 없는 게 마음에 걸리면서도 출산일이 임박하면 태동이 현저히 줄어든다는 얘기와 어차피 이틀 후면 마지막 정기 검진이 있는 날이라는 핑계로 무심히 넘겼다. 이틀 후 예약 시간에 병원을 찾았고, 컨디션은 어떠냐는 주치의의 질문에 좀 피곤한 것만 제외하면 괜찮다고 대답했다. 경이는 짧은 진료를 마치고 진료실을 나가려다가 혹시나 싶은 생각에 태동이 거의 없는데 괜찮은지를 물었고, 초음파를 한 번 보자는 의자의 말에 다시 돌아 앉았다. 한참 동안 모니터를 들여다보는 의사의 표정이 점점 굳어갔다. 경이도, 함께 온 경이의 남편도 불안감이 스쳐갔고, 설마하는 마음에도 불구하고 가슴이 두방망이질 치기 시작했다. 잠시 후, 의사는 아기의 심장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고 했다. 경이는 그럴리가 없다는 말을 반복하는 동안 머릿속에는 수많은 그림들이 일렬로 지나갔다. 계속되는 야근, 야근하고 퇴근 후에도 심사 면담을 준비하느라고 새벽까지 책상 앞에 앉아 있었던 날들, 남들은 태교 요가를 한다는데 선배님 아이는 태어나면서 PPT를 하는 거 아니냐는 후배의 농담, 하필이면 1월에 출산할 건 뭐냐는 직속 상사의 농담을 가장한 타박에 더 지독하게 스스로를 다가쳤던 그 시간들. 세상에 나올 날을 불과 며칠 앞두고 떠난 아기를 떠올리면서 경이의 가슴과 입에서는 한순간 괴성과 울음이 터져나왔다.
이쑤시개를 꽂고 나오는 돈부장의 기름진 얼굴에 화색이 돈다. 뒤축이 구겨진 구두를 신기 위해 앞축을 가열차게 박아대며 기우뚱 애쓰는 돈부장을 90도로 꺾인 거래처 너사장이 온몸으로 받들고 있다. 역시나 이쑤시개를 꽂고 뒤따라 나오던 지팀장과 눈이 마주쳤지만 적반하장의 멸시가 담긴 떨떠름한 눈빛으로 인사를 대신하고 돈부장을 재촉하며 등을 지고 사라졌다. 보아하니 오늘은 엔진베어링 하청업체 너사장이 접대 물주인 듯하다. 돈부장과 지팀장은 대학 선후배로 부서를 넘나들며 계약을 빌미로 하청업체에 접대를 요구하며 끌어주고 당겨주는 사이다. 며칠 전 이 문제에 대해 직속상관인 돈부장에게 이의 제기를 했었다. 뒤룩한 배에 힘을 잔뜩 준 돈부장의 얼굴이 접대받은 소고기처럼 붉으락 붉으락 이마에는 힘줄마저 돋았다. "이봐 '유'팀장! 내가 계약을 미끼로 갑질이라도 한다는 건가? 자넨 뭐가 그리 잘 났나?" 이후 돈부장은 지팀장과 협공을 가해오고 있다. "우리 후배님 지팀장이 우리 부서로 왔어야 하는데... 저거는 꽉 막혀서... 에이!" "지금이라도 불러만 주십쇼! 부장님을 하늘 윗분처럼 모시겠습니다! 선배님!" 이와 같은 돈지협공을 눈앞에서 당할 때면 뜨끈히 달구어진 돌멩이가 명치를 꽉 막는 것만 같아 속이 답답하다. 그러면서 서서히 몸속에서 열기와 함께 화가 치오른다. '곧 있을 돈부장의 승진 평가 때 슬쩍 흘려서 낙마를 시킬까?' '아예 감찰팀에 회부해서 징계를 받게 할까?' 하지만 부장, 팀장에 앞서는 가장이라는 타이틀을 생각하면 차마 저들의 면전에 강한 어퍼컷을 퍼붓지도 못한다. 게다가 어마한 금품을 요구한 것은 아니라, 구차하게 끼니를 때운다 생각하면 측은하다는 생각마저 들다 보니 또 뒷걸음으로 물러나며 체념의 속앓이만 하고 만다.
“아줌마 차례에요. 매일 질문만 하셨으니깐 이젠 제가 질문할 차례라고요. 그냥 넘어가시면 저 안 올 거예요! 알아서 하세요.” 존이 짐짓 협박조로 말했다. “그래~ 알았어. 너도 그동안 잘해줬으니깐 나도 그래야지. 그런데 대체 사십 넘은 아줌마한테 한창나이인 네가 궁금한 게 있긴 하니?” 어떤 질문이든 문제없다는 듯 그녀의 종이짝 몸매보다 두세 배는 더 됨 직한 넉넉한 미소를 지으며 제인이 답했다. “기자는 왜 관두신 거예요? 티브이에도 나오는 아주 잘 나가는 기자였다면서요? 로버트 아저씨께 들었어요. 그것도 기자 중에서도 대빵이었다던데요?” 존이 제인의 표정을 찬찬히 뜯어보며 한마디, 한마디를 더해갔다. 그러나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한 제인의 표정을 보고 자신이 그녀의 얼굴에 먹물을 끼얹었음을 바로 알 수 있었다. ’아씨. 괜한 걸 물었나 봐. 어떡하지? 진짜 여기 못 오면 안 되는데... 로버트 아저씨한테 뭐라고 하는 건 아니겠지?‘ 한참 만에 제인의 입이 나이프로 막 개봉된 편지봉투처럼 벌어졌다. “어떤 일은 누군가에게 매우 큰 사건, 그래. 말 그대로 사건이기도 하지만, 누군가에겐 그저 신문 기사에 적혀있는 몇 줄의 글씨 정도도 안 된다는 걸 알았거든….” 존과 제인은 지역사회에서 운영하는 멘토와 멘티 프로그램에서 처음 만났다. 14세의 조손가정의 엇나가는 남자 청소년의 정석처럼, 존의 첫인상은 불량하기 이를 데 없었고, 반면 제인은 딱딱한 인상과 무척이나 어울리는 단정하고 격식 차린 옷차림과 달리 그런 존을 매. 우. 잘 받아들였다. 사실 존은 여러 차례의 매칭을 거쳐도 멘토를 찾지 못해 담당자인 로버트에게 마지막까지 남겨진 골칫덩어리였다. 로버트는 존에게 “이번이 마지막이야. 이번에도 멘토를 찾지 못하면 더는 너를 도와줄 수 없어. 제발 그 코걸이랑 혓바닥에 있는 피어싱이라도 빼고 가!”라고 조언이라기엔 차라리 절규에 가까운 말을 내뱉었지만, 존은 아랑곳하지 않고 매우 그답게 자신의 모습을 유지한 채 제인을 만났다. “아주 멋진데?” 제인의 첫인사는 존의 마음속에 작은 묘목 하나 정도는 심을 수 있었고, 덕분에 그들의 만남은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그녀의 첫인사는 그날 이후 헤어질 때 하는 둘만의 인사말이 되었다. “오늘도 아주 멋졌어!” 이 말은 영양가 풍부한 거름이 되어 존의 마음속에 있는 묘목은 어느덧 멋진 나무로 성장해 가고 있었다. ’이러다 쓰러지는 건 아니겠지? 그냥 말 안 해줘도 된다고 할까? 에이. 난 또 무슨 지뢰를 밟은 거냐고!!!‘ 심장에서 핏물이 다 빠지기라도 한 듯 제인의 얼굴에서는 혈색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럼에도 제인은 아주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어떤 일은 누군가에게 매우 큰 사건이지만, 또 누군가에게는 몇 줄의 기사로도 내보낼 가치조차 없다는 걸, 알았거든.” 존은 제인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자신이 입을 다물고 들어줘야 할 때라는 걸 잘 알았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그냥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제인은 존의 이러한 점을 좋아했다. 처음부터 그랬다. “아줌마는 거짓말을 너무 잘하는 것 같아요.” 신문을 보며 열심히 십자말풀이를 하는 제인을 보며 존이 말했다. “갑자기 무슨 말이야? 거짓말이라니?” 억울한 죄라도 뒤집어쓴 듯한 표정으로 안경까지 벗으며 고개를 들어 존을 바라봤다. “우리 첫 만남 때요. 지금 생각해도 그때 제모습은 너무 부끄럽고 별로였는데, 그런 저한테 멋지다고 하셨잖아요. 저 꼬시려고 그런 거죠? 로버트 아저씨가 그렇게라도 말해서 잘 타이르라고 하던가요? 뭐 결과적으로 잘됐으니깐 뭐라 하는 건 아니에요. 그냥 그렇다고요.” 존이 과거의 모습이 눈앞에 떠오른 듯 어느새 귀까지 빨개져서 기어들어 가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나는 세상의 안 좋은 점만을 보고 살았어. 일을 관두고 이곳으로 내려오면서 거창한 계획이 있었던 건 아냐. 다만 한가지 바램이라면 이젠 세상의 좋은 면만을 보고 살고 싶다는 거. 처음엔 쉽지 않았지만, 물건이든, 사람이든 억지로라도 좋은 점을 찾아내려고 노력하니깐 되긴 되더라. 하지만, 너한텐 그런 노력조차 필요하지 않았어. 넌 정말로 멋졌거든. 사람들은 너 보고 실패자라고도 하고 반항한다고도 하지만 난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해. 네 나이 때 그런 걸 하지 못하면 나중에 나처럼 속이 빈 어른으로 자랄 수 있어. 두고 봐. 너는 아주 멋진 어른으로 성장할 테니까!” 제인의 눈은 보석이라도 박힌 양 반짝반짝 빛이 나고 있었다. “제가 진짜로 멋지다고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세요?” 믿을 수 없다는 듯 존이 물었다. “그럼~ 내가 너 보고 멋지다고 했을 때, 넌 놀리는 거냐며 화를 내거나 말도 안 된다며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갈 수도 있었어. 하지만 그러지 않았지. 또 내가 어떤 말을 너에게 들려줄지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줬어. 다른 어른들은 너의 겉모습만을 보고 그 기다림에 ’반항‘이라는 이름의 딱지를 붙였지만, 넌 진정한 남자야. 말해야 할 때와 하지 말아야 할 때를 잘 아는 진정한 남자!” 존은 아무 말 없었지만, 누구보다도 집중하고 있다는 걸 제인은 잘 알았기에 말을 계속했다. “너 그거 아니? 실패를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인간만큼 멍청한 인간은 없어. 내가 그런 인간이었지…. 아주 멍청한 인간. 어떤 수식어를 갖다 붙여도 부족할…. ...조차 아까운…. 그런…. 인간.” ’질문인가? ‘존이 잠시 생각했다. 하지만 딱히 대답을 바란 건 아닌 것 같았다. 모른다고, 몰랐다고, 그리고 아줌마는 멍청하지 않으니, 멍청한 건 나니깐 앞으로도 곁에서 많이 가르쳐달라고, 존은 입가에 맴도는 말들을 밖으로 끄집어내어 말하고 싶었지만, 꾹 참아야 할 것 같았다. 그리고 여섯 살에 엄마가 집을 나간 이후로 참는 것은 존이 제일 잘하는 일이었다. 그것으로는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존은 침묵으로 대신 말하였고, 그 여백에 제인은 말을 이어 나갔다. 그 어느 때보다도 그녀는 차분했지만, 말속에서 물기가 느껴지는 기분이 이런 걸까, 존은 생각했다. “난 늘 정신없고, 정신없고, 정신없으니깐. 다른 기자들이 사건·사고를 취재해 오면 나는 그것이 기사가 될지 말지를 정해. 재단사라고나 할까. 보통은 쓸만한 것보다 버리는 게 많았어. 대중들은 웬만한 사고에는 꿈쩍도 하지 않았고 더 자극적인 기사를 원했으니깐. 그날도 그랬어. 기자들이 갖고 온 기사를 발표하기 시작했고, 난 거만하게 눈을 지그시 감고 그들의 말을 듣는 거야.” 제인은 존은 바라보고 있었지만, 어쩐지 그 너머 어딘가를 헤매고 있는 것 같았다. “기자 한 명이 이런 말을 해 ’s대 병원 응급실에서 주취 폭력으로 구속이 일어나‘ 그럼 내가 말을 자르지. ‘겨우 그런 걸 기사로 낸단 말이야? 뭐 다른 거 없어? ‘그럼, 옆에 있는 다른 기자가 곤란하다는 듯 수첩을 뒤적이며 겨우 말을 꺼내는 거야. ‘s 면에서 엽총 사고가 발생해 2명이 사망했는데….‘ 어찌나 겁을 먹었는지 본인 스스로 말하기를 멈추지. 말이 생명인 기자가 말이야! 그럼 내가 이렇게 말하는 거야. ‘그래! 이거야! 사람 몇 명은 죽어 나가야지. 좋아! 그런데 요즘 세상에도 엽총을 쓰나? 정말 이러고도 기자라고 어디 가서 명함 내밀 거야! 한바탕 퍼붓고 공기가 차디찬 얼음처럼 꽁꽁 얼어붙어 있을 때 어떤 기자가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한껏 꾸민 채 말하는 거야. 주인공은 마지막에 나타나기라도 한다는 듯, 마치 자신이 그 위기를 구해낼 구원자라도 된다는 듯이 말이야.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선배. 여당 정치인 뇌물 사건 조사하고 있어요. 증언이랑 증거는 확보했고, 지금 더블 체크 중입니다.’ 그때 나는 눈을 번쩍 뜨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거야! ‘그래! 이거야. 이런 거라고! 사람들은 정치인들을 싫어해. 여기서 정치인 좋아하는 사람 있어? 우리에겐 공통의 욕받이가 필요하다고. 백업 필요하면 언제든 요청해. 그리고 다음 사람?’ 때마침 핸드폰이 울려. 한쪽 눈으로 확인한 액정에 뜬 남편의 번호는 무시하기 딱 좋은 전화지. 나는 핸드폰을 뒤집어 알림 소리를 없앤 다음 아주 온화한 미소를 장착한 채 수습기자에게 눈길을 주는 거야. 스무 개의 눈동자가 자신을 집중하고 있다는 걸 안 수습기자는 더듬거리며 말을 겨우 시작하지. ‘저…. 논현동에서…. 여학생 한 명이 무단…. 횡…. 단을 하다가 5톤... 트....럭....에…치..여..서. 사…. 망….’ 겨우겨우 참으며 듣고 있던 나는 인내심에 달해 소리를 버럭 질러. ‘여학생 한 명 죽어 나가는 게 오천만 명 인구, 대한민국에서 신문에 날 만큼 큰일이야? 사람은 누구나 죽어! 그게 왜! 기사 같은 기사를 찾아오라고!’라는 말로 회의를 끝냈어. 평소와 같이 말야. 그날이 특별한 날이라서 내가 아주 많이 화를 냈다거나, 혹은 화를 아주 적게 낸 날이 아냐. 아주 평범한 날이었어. 어떤 사건이 일어났다고 해서 항상 전조현상이 있는 건 아니구나, 싶어. 그런 건 모든 일을 다 겪은 후, 이러했기에 그랬구나, 정도로 끼워서 맞추는 별 의미 없는 결과론적 말밖에 되지 않아. 그날도 무척이나 평범한 하루였어.” 제인은 갑자기 말을 멈췄고, 존은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다. 그저 자신이 잘하는 걸 하는 수밖에. 존은 기다렸다. 한참 만에 제인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존에게 차를 권했고, 존은 두 번째로 잘하는 것을 하기로 했다. 차를 마시며 다시 기다리는 것이다. 평소 차에는 관심 없던 존도 혈색이 처음보다 많이 나아진 제인을 보고 그녀가 마시는 차 이름을 기억하기 위해 속으로 ‘녹차, 녹차, 녹차,’라고 세 번 되뇌었다. 언젠가 제인에게 그 차를 꼭 선물해야지 다짐하면서. “집으로 가는 길에 핸드폰을 보니 집에서, 아니 정확히 남편한테서 부재중 전화가 52통이나 온 거야. 무슨 짓인가 싶어 그땐 그냥 화가 났어. 이미 회사에서 한바탕 난리를 쳤으니, 예열은 충분히 된 상태였지. 남편에게 전화했어. 처음엔 전화 연결이 잘못됐구나, 했어. 남편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고, 울음소리가, 사실 그땐 짐승 소리라고 생각했어. 그렇게 들렸거든. 전화번호를 몇 번이나 확인해도, 몇 번이나 전화를 다시 걸어도 분명 남편 번호가 맞는데, 알 수 없는 소리만 들려왔어. 나중엔 나를 가지고 장난치나 싶어서 화가 나더라? 그래서 나도 그냥 전화를 끊고 다시 전화는 안 했어. 집에 가서 제대로 싸워야겠다 싶어서, 계속 전투태세 상태로 그렇게 집으로 간거야.” 제인은 잠시 멈추고 차 한 모금을 마셨다. 창밖 어딘가에 그녀의 다음 할 말이 적혀있기라도 하다는 듯 그녀의 시선은 창밖에 고정되어 있었다. "집에 도착해서 문을 열었을 때, 이상한 냄새가 났어. 마치 뭔가 타는 냄새 같았지. 순간 집에 불이 난 줄 알았어. 부엌으로 달려가 보니, 냄비 속에 있던 된장국이 졸아들어 냄비째로 타고 있었어. 나는 서둘러 불을 껐지. 화가 나서 집안을 돌아다니며 남편을 찾아도 집에 없었어. 그때 처음으로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어." 제인은 천천히 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옷을 갈아입고 화장대에 앉았을 때 그때야 발견한 거야. 거기에 그게 있었어. 남편이 휘갈겨 쓴 메모가. 그건 병원 이름이었어. 아까 수습기자가 물고 온 기삿거리도 안 된다고 내가 뭐라 한, 그게 생각나더라? 순간 오싹했어. 그 병원이 논현동에 있었거든. 갑자기 모든 조각이 맞춰지는 것 같았어. 울음소리만 듣고도 무슨 일이 일어난 지 알아챘어야 했는데, 그땐 그저 화가 나서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했지. 난 곧장 병원으로 달려갔어." 존은 충격을 받은 듯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병원에 도착했을 때, 한 번도 본 적 없는 남편의 모습을 보게 되었어. 완전히 망가진 사람처럼 주저앉아 울고 있었지. 나를 보고도 남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어. 사실 어떤 말도 할 필요가 없었어. 우리 아이가, 무단횡단을 하다 트럭에 치인 그 여학생이 바로 내 딸이라는 걸 나는 병원 가는 길에 이미 수습기자에게 전화를 걸어서 확인했거든. 아까 그 여학생 몇 살이냐, 이름은 알고 있냐, 목격자는 없냐 같은 것들을 꼬치꼬치 캐물으니 그 기자는 본인의 능력을 뒤늦게 인정받는 줄 알고 신나 하며 나에게 자세히 브리핑을 해줬지.“ 제인의 목소리는 떨렸고, 눈가에 맺힌 눈물은 볼을 타고 그녀의 목까지 내려왔다. 존은 충격을 받은 듯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분명 한 줄의 기삿거리도 안 되는 여학생의 죽음이었는데, 그것이 내 딸의 이야기가 되면…. 내가 발 딛고 살고 있는 세상 전체가 흔들려. 나의 모든것이 부정당하는 느낌이었어. 모든 걸 잃었어. 딸도, 남편도. 남편을 볼 때마다 딸아이 생각이 나서 서로를 힘들게 했거든. 날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서 벗어나고 싶었어. 할 수만 있다면 무인도 같은 데서 살고 싶었지. 그렇게 잘하고 좋아하던 기자 일도 더 이상 할 수 없었어. ‘컷컷’ 하며 잘라내던 무수한 사건들이, 그 누군가에게는 죽고 싶을 만큼 아주 큰 고통이라는 걸 크나큰 희생을 치른 후에야 겨우 알게 되었거든. 그동안 남의 불행을 얼마나 가볍게 여기고 살아왔는지, 내가 얼마나 많은 실수를 하고 살아왔는지를 생각하면…. 아직도 심장이 심하게 요동쳐서 아파와. 나 자신이 너무 무서워서 끔찍해.“ 존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을 꺼냈다. "저는 아줌마가 그런 일을 겪었는지 몰랐어요. 정말 죄송해요. 제가 괜한 걸 물어서..." 제인은 고개를 저으며 미소를 지었다. "아니야, 존. 네 덕분에 나도 마음의 짐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었어. 너와의 대화가 나에게는 큰 위로가 돼" 존은 그 말을 듣고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제인을 바라보았다. "저도 아줌마 덕분에 많이 변했어요. 예전에는 모든 게 다 싫었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아요. 아줌마가 저를 믿어주고 기다려준 덕분이에요." 제인은 따뜻한 눈빛으로 존을 바라보며 말했다. "딸아이가 간 이후로 난, 세상에 신 같은 건 없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너와의 만남을 생각하면 내 생각이 틀릴 수도 있겠다, 생각했어. 어쩌면 내 말이 틀려서 신이라는 게 있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언제라도 우릴 축복해 주길 바라는지도 몰라. 멋진 어른인 척은 다 해놓고, 나 참 나약하다, 그렇지?” 존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아줌마. 아줌마는 진짜 강해요. 내가 지금까지 만난 사람 중에 가장 강한 사람이에요. 모두가 아줌마처럼 자신에게 솔직하지는 못해요.” 제인은 종이짝만 한 자기 몸보다 몇 배나 포근한 미소를 지으며 존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고마워, 존. 넌 반드시 멋진 어른이 될 거야.” 두 사람은 잠시 서로를 바라보며 따뜻한 침묵을 나눴다. 침묵을 깨고 제인이 말했다. “오늘도 아주 멋졌어.” “오늘도 아주 멋졌어요.” 존은 무성하게 잎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자신의 마음속 나무를 떠올리며 그 어느 때보다도 행복한 미소로 화답했다.
경비원 현씨는 최부녀에게서 그렇게 교양미 넘치던 주민대표의 말을 떠올렸고 또 그렇게 특수학교 설치가 백지화되면서 매일 왕복 4시간을 차를 몰아 아이를 돌봤던 아내가 생각났습니다. 여전히 최부녀는 경비원 현씨 앞에서 열분을 토하고 있다. 날은 덥고 구름 한점 없다. 그렇게 퍼붓는 이와 무념무상 우두커니 서있는 이를 지켜보던 한 무리의 고양이들. 대여섯 마리 정도 되어보이는 그 고양이들의 시선을 느꼈는지 현씨는 고개를 돌려 고양이들을 바라본다. 자신의 웅변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현씨를 인식한 최부녀도 고양이들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순간의 정적, 그리고 후두둑. 마른 하늘에서 빗방울이 나리기 시작한다. 고양이들이 제일 먼저 자리를 뜬다. 그 모습을 보던 최부녀도 고양이의 갸르릉 거림같은 소리를 내고는 바삐 가던 길을 간다. 경비원 현씨, 하늘한번 쳐다보고 빙긋 웃는다. "그럼, 수고하소. 난 퇴근할라니까." 비가 쏴아 내린다.
매일 똑같은 일상이지만, 오늘도 정신 없는 출근길에 올랐다. 평소처럼 움직였지만, 오늘따라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도로는 나의 기분과는 달리 꽉 막히기 시작했고, 그 덕에 나는 가까스로 9시 출근을 찍었다. 그 덕에 그래도 지각은 하지 않았다는 안도감과 함께, 역시 오늘 나의 기운이 좀 좋은가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오전 내내 바쁜 일이 없어서 조금은 졸기도 하고 조금은 스트레칭도 해가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점심시간이 다가왔을 때, 갑작스럽게 호출을 받고 미팅에 들어갔다. 점심시간 10분 전이었다. 배가 고파서 숨을 참고 있었는데, 앞으로 진행될 미팅이 언제 끝날지도 모른 채 주변인들의 작은 화이팅모션에 어설프게 감사합니다라는 뻣뻣한 미소와 함께 미팅룸으로 들어갔다. 영문도 모른 채 들어간 미팅에서는 갑작스럽게 나의 새로운 프로젝트가 내 위에 앉았고, 그 덕에 나는 클라이언트의 질문 속으로 같이 빨려들어갔다. 아는 선에서 답을 하고는 있으나, 정신없는 질문 속에서 내가 살펴보지 못한 프로젝트의 특이점이 있을까 등 뒤로 땀을 흘렸다. 점심시간이 다 끝나갈 때쯤 넋이 빠져 회의실에서 나왔지만, 어쩌다 클라이언트와 점심까지 동행하게 되어 옷이 마를 틈이 없었다.
작년 전남편과 함께 왔던 병원에 혜선은 혼자 앉아 있었다. 이제는 그년과 함께 올 테지 하는 생각이 들자 다시 속이 쓰렸다. 하여튼 하나도 도움이 안 되는 놈이라니까. 벌써 여러 달 괴롭히고 있는 병증 때문에 먹는 것도 시원스럽지 못해 회식 자리 같은 모임에 참석하지 못한 지가 오래되었다. 아마도 스트레스일 거야. 흔한 병명으로 약만 주면 어쩌지하는 생각이 들었다. 몸이 자꾸 기운이 떨어지고, 가끔은 걷는 것조차 버거운 날들이 이어지자, 혜선은 어쩔수없이 반차를 내고 가장 가깝고 오기 싫었던 병원에서 외로움과 걱정의 힘 싸움에 끼인 채 통상적인 검사를 마쳐야만 했다. "찍어놓은 결과로 보면 좋아 보이지는 않네요. 화면을 보시면 이 부분입니다. 길이를 재보니까 3센티미터가 조금 넘네요. 일단 추가로 검사를 해서 결과를 봐야 할 것 같습니다. 크기가 크다고 해서 다 암인 것은 아니에요. 그래도 징후가 좋지 않으니까, 검사는 꼭 하시는 게 좋습니다. 검사날짜는…."의사가 화면에 띄워놓은 화면에 둥그런 부분을 가리키며 입을 뻐끔거리고 있다. 분명 괜찮다고 하면서도 의사는 한결같이 혜선의 눈을 피하고 있음을 깨닫자, 그 이후부터는 의사의 말이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알았다고 몇 번쯤 대답하고 고개를 끄덕인 것 같았지만, 어느새 진료실 앞 간호사와 대화하고 있었다. "검사날짜는 언제가 편하신가요?" 정확히 며칠로 이야기했는지 생각나지 않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집이었고, 옆자리에는 아무도 없었고, 밖이 어두웠다. 저녁인지 밤인지 알 수가 없었지만, 저녁 먹을 시간은 지난듯했다. 아니 시간이 멈춘 것인지 정신없이 흐른 것인지 오늘인지 내일인지조차 아는 사람도, 알려주는 사람도 없었다. 혜선이 떠올린 것이라고는 한동안 회사에 다니기는 힘들 것이고 그래도 그만두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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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의 일과는 매우 규칙적이었다. 첫 번째 알람 소리에 깨어나서 두 번째 알람 소리가 들릴 때까지 씻고, 세번째 알람 소리와 네 번째 알람 소리 사이에 구운 식빵 두 조각, 잘 익은 달걀 프라이 한 개, 껍질 채 먹는 사과 반쪽을 먹고, 다섯 번째 알람이 울리면 일을 하기 위해 집을 나섰다. 장소에 구애받지 않는 일을 하고 있으므로 집에서도 충분히 할 수 있었지만, 업무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도보로 10분 정도 걸리는 곳에 작은 작업실을 구해서 출, 퇴근을 하고 있었다. 직장을 그만 두고 혼자 일하기 시작하면서 꾸준한 수입을 위해 시작한 규칙적인 생활이지만 그런 생활이 잘 맞았던지 몇 년을 그렇게 보냈는데. C는 화면이 꺼진 휴대전화를 노려보며 화를 삭이는 중이었다. 자면서 배터리 충전하는 것을 잊어버려 휴대폰이 꺼져서 다섯 개의 알람 모두를 놓쳐버렸기 때문이다. 회사에 다닐 때 '상쾌한 기분'으로 일어나면 지각이라는 우스갯소리를 동료들과 했었는데 정말 너무 상쾌한 기분으로 일어나보니 벽에 걸린 시계가 10시를 지나고 있는 게 아닌가. 화가 사그라들자 그 자리를 슬그머니 차지한 건 허탈함이었다. 특별히 늦게 잠에 든 것도 아니고, 술을 마신 것도 아니고, 똑같은 하루를 보내고 똑같은 시간에 잠이 들었는데 알람 소리 없이 잠에서 깰 수 없었다고? 지난 몇 년간 똑같이 깨어났으면 알람 소리 없이도 깰 수 있어야하는 거 아냐? 그 동안 그렇게 열심히 알람 소리에 맞춰서 움직였던 것이 몸에 남아있지 않다 생각하니 마음 한 구석이 텅 빈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아무 것도 하고싶지 않은 생각에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침대에 털썩 누우니 햇빛이 닿는 발끝이 따뜻하게 달아오르자 C는 괜히 발가락을 한 번 꼼지락 거렸다. 뭐... 하루 쯤은 괜찮지 않나. 몇 년 동안 열심히 쉰 나에게 내 몸이 신호를 보낸 건 아닌가. 하루 정도는 늦잠 자고 일을 쉰다고 해서 당장 먹고 살기 힘들어지는 것도 아니고. 그래 이렇게 된 김에 오늘 하루는 늘어지게 쉬어보자. 기지개를 쭉 편 채 대자로 누워서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고 있으니 그렇게 잤는데도 불구하고 가물가물 눈이 감겼다. 아, 그래도 충전은 해야지.
장난 아니잖아?! 긴장되고 두근거리는 마음에 아이스 아이스티만 쭉쭉 들이키고 있다. 평소에 즐겨 가던 문방구에 경찰들이 와 있고, 심각한 표정으로 문방구 아주머니와 아저씨가 경찰과 이야기 하고 있는 걸 보고 저도 모르게 도망쳐서 그 맞은편 카페에 와버렸다. 누군가가 도둑질을 하다가 걸린걸까? 아니면 또 다른 일이 있으려나?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문방구에 경찰들이 올 일은 누가 물건을 훔치는 일밖에 없지 않나? 본인은 잘못한 일이 없긴 하지만, 엄마가 노트와 필기구를 사라고 준 돈을 가지고 아이스티를 사 먹는 일은 아무래도 잘못한 일이 맞긴하다. 하지만, 엄마도 너무 단 건 안돼! 하면서 커피를 마시는 걸 생각하면, 나도 아이스티를 마시고 싶다구! 하는 마음이 슬금슬금 올라온다. 또, 엄마가 마시는 커피대신에 색이 비슷한 걸 마시는 거니까, 나도 한 발 양보한 거 아닌가? 사실은 나도 그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싶다. 아, 이따가 집 가서 뭐라고 하지…? 에라, 모르겠다. 일단 아이스티가 맛있으니까! 이따 집가면 어떻게든 되겠지! 경찰들이 와서 어쩔 수 없이 못 샀다구 하면 엄마도 봐주지 않을까?!
벚꽃의 꽃말은 중간고사라고 했던가. 벚꽃이 핀 것이 먼저일까. 아니면 중간고사 시작이 먼저 일까. 하기야 그런걸 따져 보았자 무슨 소용이랴. 시험공부나 하면 그 뿐인걸. 벌써 막학기다. 이제 더 이상 미루고 뭐 할 것도 없다. 이제 이번 학기만 지나면 더 이상 학생신분으로 버틸 수도 없다. 여름이 지나면 직장인이거나 백수거나 둘 중 하나의 신분이 되겠지... 시험공부도 지긋지긋해서 중도 공용컴퓨터실에서 무의미하게 사이트들이나 뒤적거리다 방학인턴을 뽑는다는 공고를 보고 '열심히 하겠습니다.' 라고 덜렁 쓰고는 온라인 제출을 해버렸다. 그렇게..중간고사도 지나고 기말고사를 앞두고..아..이제 드디어 내 인생의 마지막 시험이겠구나...라는 생각을 하던 때... 띠링 하고 문자가 왔다. '응.?이렇게도 인턴 합격이 되는 거였나.' 싶었지만 백수가 되느니 인턴으로 가자는 생각에 기말고사가 끝나자마자 먼 타지로 가고만다. 교수님과 랩실 선배들은 "너...가... 강춘남씨인가요?" 라며 당황스러워 한다. 교수님과 고참 랩 선배들은 이력서에 열심히 하겠다는 한 줄만 달랑 쓰는 놈은 별 생각없는 놈인가 보다 싶어 여름방학동안 시료채취도 하고 운전도 하고 무거운 시료도 들었다 놨다 해줄 놈인가.. 싶어 뽑았다며... 160도 안되는 체구가 작은 여학우 강춘남을 보고 당황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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