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ersGX] 1. 미셸 트랑블레처럼 일상 포착하기

D-29
①어느 날 아침, 잠에서 깨어보니 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②아름다웠던 여섯 개의 다리는 끔찍한 두 개의 다리와 두 개의 팔로 바뀌었다. ③한 쌍의 더듬이로 모든 감각을 느낄 수 있었던 나는 이제 귀, 코, 혀, 손을 모두 이용해야만 비로소 느낄 수 있는 열등한 동물이 되었다. ④무엇보다 두 쌍의 날개까지 사라지는 바람에 이제 자유롭게 날지 못하고 언제나 비참하게 걸어야 한다. ⑤카프카는 책을 통해 사람이 하룻밤 사이에 벌레가 되었다는 소설을 썼고 그것을 읽는 사람들은 경악했다지만, 우리 벌레 입장으로는 오히려 하룻밤 사이에 사람이 된 게 더 끔찍하다. ⑥세상에는 수많은 동물이 살고 있는데, 그중 균이 제일 많고 다음은 우리와 같은 벌레다. ⑦열등한 인간들은 우리를 보고 하등동물이라 여기지만 과연 그러할까. ⑧인간들은 자신들을 긴 진화를 거친 고등동물이라고 생각하고, 복잡한 기관을 가지고 뛰어난 두뇌로 자연을 이용할 줄 안다고 착각한다. ⑨진화는 더 나아지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고, 환경에 잘 적응한다는 말이 꼭 맞는 표현은 아니지만 더 적확한 말이다. ⑩신생대에 나타났다고 보는 사람은 중생대에 이미 살고 있던 우리 벌레들보다 뛰어나다는 건 한쪽만 본 것으로, 우리가 진화하지 않은 게 아니라 굳이 사람이 생각하는 진화를 하지 않아도 환경에 적응하기 쉬운 몸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한 추론이다. ⑪사람들은 대체로 모기, 파리, 바퀴벌레 등을 나열하며 우리를 좋아하지 않는다. ⑫그런데 우리도 사람들이 싫다. ⑬날개가 없어 비행기를 타고 다니는 바람에 지구를 뜨겁게 만들고, 지금 글을 쓰고 있는 이 자식처럼 10문장으로 표현하지 못해 시답지 않은 글을 덧붙이며 데이터 저장 공간만 차지하고 지구 온난화를 부채질하는 건 인간이지 않은가. ⑭우리 벌레는 식물 수정을 도우면서 지구와 공생하며 살아가려고 하는데, 인간은 식량과 과일이라는 이름으로 몇 가지 식물만 집중적으로 키우며 도시니 문명이니 하는 걸 건설한다고 숲을 태우고 이산화탄소를 내뿜으며 우리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고 있지 않은가. ⑮모기가 사람 피 빠는 것 말고 뭐 하는 게 있냐고 말하는 놈들은 우리를 잡아먹는 곤충이나 물고기 등의 생태먹이사슬을 고민하고 초콜릿 먹을 생각일랑 절대 하지 않았으면 한다.
3rd. GX (7/2~7/5) 과제입니다 :) “모두 수업 시작하기 전에 강의실 앞 컴퓨터에 발표 자료 준비하세요.” 다미는 강의실 앞으로 걸어가며 가방 앞쪽에 달린 지퍼를 열고 손을 집어넣었다. 있어야 하는 usb 대신 작은 모래알들만 손에 잡혔다. 뭐지? 내 usb 없어진 거야? 걸어가던 다리가 멈췄다. “다미 선배, 왜 그러세요? 설마 usb 사라졌어요?” 같은 조인 후배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아니야, 오늘 나오기 전에 분명히 여기 넣었었는데….” 나머지 두 조원마저 미묘하게 표정이 변하자 얼굴이 불덩이처럼 뜨거워졌다. 허겁지겁 가방 곳곳을 열어보았지만 어느 곳에도 usb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미어캣처럼 두리번거리며 급하게 강의실을 둘러보자, 불행하게도 다른 조는 모두 준비를 마친 것 같았다. 아. 망했다. 침착하게 행동하라는 게 이거였어? 아침에 습관처럼 보는 타로 어플의 충고가 머리를 스쳤다. 다미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허공의 먼 곳을 응시했다. “저희 조 어떡해요, 교수님께서 오늘 발표 못하면 기회 없다고 하셨었는데….” 이런 바보 같은 실수는 멍청이들이나 하는 거로 생각했는데, 내가 이렇게 멍청했었나? 후배들 앞에서 망신 제대로다. 웅성대는 강의실 속에서 홀로 점점 멀어져 다른 공간으로 분리된 느낌을 받았다. 쉴 새 없이 뻐끔대는 조원들의 입 모양을 보니 계속 뭐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았지만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을 만큼 귀가 먹먹했다. 아까부터 무의식적으로 잘근거리던 아랫입술에서 피 맛이 났다.
4th GX 입니다. 나는 청살모. 풀과 나무가 우거져 둘러싸인 단층 빨간 벽돌집, 그래서 안 어울리는 시멘트로 포장된 마당 옆 소나무에서 나는 매일 논다. 소나무 아래 원두막 지붕이 있고, 다른 옆에는 대나무 밭이어서 실수로 떨어져도 잡을 수 있는 것들이 주변에 많아 안전한 놀이터다. 굵은 소나무 네 그루와 야리야리한 소나무 한 그루가 하늘을 덮고 있어 나무 사이로 점프할 때면 내가 하늘을 나는 것 같다. 또한 꺼칠꺼칠한 껍데기가 튼실하여 오르락내리락 할 때는 발바닥이 짝짝 붙으며 차르륵차르륵 소리가 나는데 속도감이 귀로 느껴진다. 더욱 신나게 놀게 만들어준다. 이 소나무는 전에 산불이 났을 때 아래 깔린 소나무잎이 타들어가면서 살짝 그을린 흔적이 있는 아주 크고 굵고 오래된 소나무이다. 산불나고 이 주변 이 정도 크기의 소나무는 모두 파헤쳐져서 큰 트럭에 실려 나갔다. 가끔 이 집 주인 부부도 나무 아래서 쳐다보며 이런 소리를 한다. 이 나무는 팔면 얼마나 할까?, 이 나무들은 뿌리가 뒤엉켜 옮겨 심기 어려워서 팔 수도 없을꺼야. 이 소나무 맘에 들어 여기로 이사왔는데 왜 팔아? 하는 등등의 대화를 나누곤 한다. 결국 이 소나무는 안 팔릴 것이다. 이 집 안주인이 여기를 좋아한다. 눈이 오면 카메라로 사진 찍고, 봄 가을되면 소나무 주변 대나무 잘라내는 일을 엄청 열심히 한다. 나는 안주인의 눈빛으로 소나무 사랑을 느낄 수 있다. 솔방울도 좋고, 가끔 찾아오는 새들도 좋지만 매일 출근하는 집 주인 부부의 적당한 게으름이 딱 맘에 든다. 그래서 여기는 풀과 꽃이 어우러져 있고, 가꾼 듯 안 가꾼 야생의 주변이 고양이가 와도, 매가 날아다녀도 몸을 숨기기도 좋고, 가끔 친구들과 술래잡기하기도 좋다. 낮엔 완전 내 세상이다. 시멘트 마당을 가로질러 다녀도 멀쩡하다. 풀이 많아도 제초제를 치지 않는다. 봄에 조금 낫들고 잘라내다 한여름엔 그냥 내버려둔다. 그러면 풀과 나무 아래 먹을 것이 많아진다. 가금 고라니도 찾아와서 울부짖어 놀랄 때가 있지만 적당히 풀숲에 집을 만들어 며칠 밤 자고 그냥 가 버린다. 그래서 여기는 내 친구들도 엄청 좋아하는 내 아지트이자 놀이터이다.
[3차 과제] “출입문 닫습니다.” 문이 닫히는 소리에 여자는 핸드폰에서 고개를 들고 차창 밖을 봤다. 어디쯤 왔지? 마포역인가? 맞은 편 승강장 스크린 도어 뒤로 역명이 기둥에 가려져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열차가 서서히 빠져나가고 있는 승강장의 모습이 낯설었다. 어, 여기 어디지? 목을 빼고 정차역 안내 전광판을 찾아 이리저리 두리번거렸다. 저쪽 천장에 매달린 안내 전광판 위에는 “수리 중”을 알리는 종이가 붙어 있다.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여자는 급하게 지도 앱을 클릭했다. 로딩 중을 알리는 동그라미가 뱅글뱅글 돌았다. 아, 진짜! 왜 이렇게 느려! 여기가 도대체 어디야! 아직도 지도 앱을 로딩 중인 핸드폰을 손에 쥔 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일단 다음 역에 내리자. 출근 시각이 아닌데도 지하철 안은 복잡했고 조용했다. 여자는 “실례합니다”를 연신 중얼거리며 사람들을 뚫고 문 쪽으로 움직였다. 이마에 땀이 맺혔다. “이번 정차역은 오목교, 오목교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왼쪽 입니다.” 명랑한 민요풍 음악에 이어 안내 방송이 나왔다. 목적지와 정반대 방향이었다. 아이 씨. 여자의 미간이 확 좁아졌다. “실례합니다, 좀 내릴게요.” 여자는 내리지도 않을 거면서 출입문을 막고 있는 승객들의 등을 밀치며 승강장에 내려섰다. 지도 앱은 여전히 열리는 중이었다. 어쩌지? 15분 남았는데. 죽었다 깨도 회의 시간까지 못 가. 큰일 났다. 택시를 타? 바로 잡힐까? 길은 안 막힐 시간인가? 차라리 지하철로 가는 게 더 빠르지 않을까? 아, 우선 담당자에게 전화 해야지. 지랄하겠네. 여자는 급히 회의 담당자 핸드폰 번호를 눌렀다. 담당자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회의 준비하느라 못 받는 것 같았다. 다시 걸었지만 마찬가지였다. 순간 피곤이 덮쳤다. 여자의 감정이 납추를 매단 것처럼 가라앉기 시작했다. 뭐 어쩌겠어, 이미 엎어진 물인데. 내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여자는 승강장 벤치로 가 앉았다. ‘수석님, 여러 차례 전화를 드렸는데 안 받으셔서 카톡 드립니다. 지하철을 잘못 타서 30분 이상 늦을 것 같습니다. 최대한 빨리 가도록 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여자는 담당자에게 메시지를 보낸 뒤 타박타박 계단을 올라 맞은편 승강장으로 향했다. 어차피 늦은 거 뭐 하러 비싼 돈 주고 택시 타?
배가 고프다. 밤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거리로 나가봐야겠다. 눈 부릅뜨고 어슬렁거리다 보면 분명 얻는 게 있을거다. 아 하필 오늘 달이 이렇게 휘영청 밝다니 망했다. 구석진 곳으로 살금살금 다녀야겠다. 헉. 저 차는 왜 저리 쌩쌩 달리는거야. 깜짝 놀랐네. 배도 고픈데 놀라느라 에너지를 소진했다. 큰일이다. 너무 배고파. 킁킁. 어디선가 달콤한 냄새가 난다. 가로등 아래 버려진 케이크가 있다. 먹을까 말까. 달도 밝은데 가로등 불빛은 꼭 대낮처럼 환하네. 케이크. 케이크. 케이크. 모르겠다. 일단 먹자. 갑자기 앞이 안보인다. 누군가의 손길이 느껴진다. 난 살게 될까. 살 수 있을까.
[4차 과제] 오늘도 옆집 여자가 아는 체를 했다. 이 여자는 매일 아침 해도 뜨기 전에 마당에 나타나 우리 집과 여자 집을 가르고 있는 쇠막대기 울타리로 다가온다. “복순아, 복순이 잘 잤어?” 를 외치며 퉁퉁 부은 두 눈에 입 냄새를 풀풀 풍긴다. 집안에서 자다가 더워졌다고 하루 아침에 마당으로 쫓겨나 가뜩이나 울분의 밤을 보내고 있는데, 간신히 눈을 좀 붙여볼까 싶으면 코맹맹이 소리를 내며 나타나는 이 여자 때문에 노이로제가 걸릴 지경이다. 내가 싫다는 표시를 그 정도 냈으면 아무리 멍청이라도 알아 들어야 하는 게 아닐까? 지난 봄에 이 집으로 이사 왔을 때 마당에서 놀고 있는 나를 처음 본 다음부터 “아이고 복순이 예쁘구나. 너무 귀여워. 밥이 맛있어요. 어쩜 이렇게 잘 놀아.”라며 어쩔 줄을 모른다. 나 주라고 커다란 간식 봉지를 울타리 너머로 건네는 바람에 우리 언니가 난처했던 일도 여러 번 있었다. “아휴, 뭘 이런 걸 다… 이러실 필요 없는데요. 그나 저나 우리 강아지가 좀 예민해서 친해지기가 어려워요.” 언니가 어정쩡하게 간식 봉지를 받으며 매몰찬 나를 대신해 미안해 하면, 여자는 시간이 지나면 다 해결된다고 자신 있게 호호 웃었다. “제가 강아지를 정말 좋아하거든요. 원래 강아지랑 아기는 자기 좋아하는 사람을 먼저 알아보잖아요.” 다른 개들은 그런 여자에게 다 넘어갔던 모양이다. 하지만 난 아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저 여자를 좋아하지 않는다. 자기 맘대로 친한 척하고 무턱대고 들이댈 때마다 등의 털이 쭈뼛쭈뼛 서기까지 한다. 여자는 분명히 내 턱 아래를 살살 긁어 주고, 보글보글한 털에 손을 넣고 머리부터 엉덩이까지 조몰락거리고 싶겠지. 아마도 내가 자기 손등을 연신 핥으며, 네발을 하늘로 든 채 배를 만져 달라고 조르는 상상을 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난 처음이나 지금이나 저 여자가 싫다. 그래서 볼 때마다 친한 척하지 말라, 더 다가오면 물겠다고 경고하고 있다. 아르르르르르. 여자의 두 눈이 뚫어져라 바라보며 콧잔등에 여러 겹의 멋진 주름을 만들고 윗입술을 말아 올려 반짝이는 튼튼한 송곳니를 살짝살짝 보여 준다. 그런데 무슨 생각인지 이 여자는 나를 볼 때마다 꼴 보기 싫은 미소를 지으며 울타리 쪽으로 다가온다. 한번 이빨 맛을 보여 주고 싶지만, 우리 언니가 곤란해질까 봐 “아르르” 인상만 쓸 수밖에 없으니 내 속이 뒤집어 지는 거다.
화제로 지정된 대화
5th. GX (7/10~7/13) WritersGX를 잘 따라오고 계신 GX 팀원들께 감사드립니다. 점점 과제의 어려운 정도도 높아지고 있다는 거, 눈치 채셨나요? 다섯 번째 과제는 쉽지 않습니다. 『옆집 뚱보 아줌마가 임신했대요』 246~252쪽에서는 썩 머리가 좋지는 않지만 무척 잘 생긴 청년 제라르 블레오가 자신의 감정 때문에 혼란스러워 합니다. 소녀라기보다는 어린이라고 해야 할 테레즈와 뽀뽀를 하고는 그만 성욕을 느껴버린 것입니다. 제라르는 그런 자신에게 혐오감을 느끼지만 온전히 혐오감만 느끼는 것은 아니지요. 그는 자신의 감정을 이해하고 통제하려 하지만 그러지 못합니다. 다섯 번째 과제입니다. 자신의 생각이나 행동 때문에 혼란스러워 하는 사람의 모습을 10문장 이상으로 적어주세요. 『옆집 뚱보 아줌마가 임신했대요』 246~252쪽을 참고하세요.
5th.. 쫄깃했던 출근기.. ‘하! 배 밖으로 나올 간도 없을 것 같은 베이비한 녀석인데!’ 출근을 하려다 보니 시선을 잡아채는 녀석이 있다. 개굴! 손톱만큼 과장해서 엄지손톱만 하려나.. 베이비 청개굴이 내 꿈차 뒷유리창에 무임승차를 하고 있다. ‘으, 난 너처럼 몰캉한 녀석들을 좋아하지 않는다구!’ 자동차 키로 슬슬 방뎅짝을 밀어 훈방 귀가를 시키려고 하였지만 웬걸 하차 거부를 한다. 다시 슬슬 옆의 풀숲으로 밀어 치기를 하다 말고 한 가지 호기심이 발동했다. 이 녀석을 데리고 출근하면 중간에 자진 하차를 할까? 안 할까? 뒷유리창에 호기롭게 밧데루 자세로 납작 버티고 있는 요 앙큼한 녀석을 데리고 출근하기로 결정! 아이를 등교시키느라 학교 주변 30km 내 속도에서 녀석은 꿈쩍도 않는다. ‘오호라! 작지만 강하다! 흔들림 없는 편안함! 이라던가...’ 방지턱.. 덜커덩! 힐끗.. 방지턱.. 덜커덩! 힐끗.. ‘떨어졌나?’ 살짝 신경이 쓰이기 시작한다. 방지턱.. 덜커덩! 힐끗.. 힐끗.. 이제 본격적으로 80km 구간 돌입인데 녀석이 잘 붙어 있으려나 싶다. 힐끗.. 힐끗.. 녀석이 여전한 자세로 찰싹 붙어 있다. ‘제법인데... 그래도 앞유리 아니고 뒷유리라 다행이네. 근데 앞유리에 탔으면 바람 저항에 버틸까? 터질까? 으으...’ 힐끗.. 룸미러로 힐끗힐끗 보자니 여간 불안 불안한 주행이 아니다. 주의! 전방주시! 힐끗.. 전방주시! 힐끗.. 신호대기 중에 고개를 돌려 살펴보니 녀석이 미세하게 쪼그라든 것만 같다. ‘그렇지. 지도 쫄리겠지.’ 나도 쫄리긴 마찬가지. 바람에 훅 떨어지는 것은 아닌지, 세상 험한 줄 모르고 펄쩍 뛰어내리는 것은 아닌지, 여기서 뛰어내렸다간 둥근 생김과 달리 은혜롭지 못한 것에 의해 책갈피가 되어 버릴 텐데. 책갈피가 되어 버린 녀석을 생각하니 으아 솜털이 곤두서는 것 같다. ‘괜히 태우고 왔나? 억지로라도 내려줄 걸 그랬나? 아.. 참.. 눈 많이 가는 녀석일세.’ ‘자, 이제 10분 정도만 잘 버티거라. 다 와 간다.’ 아주 잠깐 신호 대기 중 룸미러를 통해 힐끗 녀석의 동태를 보자니 아뿔싸! 사.라.졌.다... 순간 머리털에 피뢰침이 곤두섰다. 부슬.. 비도 오는데 곧 벼락이 칠 것 같다. ‘흡! 어디 갔지? 날아갔나? 떨어졌나? 안 되는데... 아직 너무 애긴데...’ 좌절스럽게 운전대를 부여잡았다. 애도의 마음으로 힐끗.. 룸미러를 보다가 핸들을 놓고 만세를 부를 뻔했다. 거.기.에 녀석이 있.었.다! 아마도 슬금슬금 미끄러져 내려가 잠시 브레이크등을 구경하고 있었나 보다. 브레이크등 오른쪽 윗부분에서 쬐꼬만 녀석이 꼬물꼬물 배밀이를 하고 있었다. ‘휴!’ 녀석은 그렇게 40분이 넘는 시간 무임승차를 하며 기개 좋게 주유소도 따라오고 또 회사까지 따라왔다. 종착지인 내 주차 자리에 도착했을 때 녀석은 아마도 안도의 한숨을 세상이 꺼져라 내쉬었을 듯싶다. 나도 마찬가지. ‘휴~~’ 꿈차를 주차하자 녀석은 옆 화단의 초록초록 안락한 나뭇잎을 향해 폴짝 폴짝 갈아타기에 무사히 성공했다! 다음부터는 절대 동승자를 밖에 태우지 않겠습니다~ㅎ
우리 엄마는 멋진 여자였다. 여기서 중요한 건 ‘였다’이다. 그렇다. 과거형이다. 그리고 두 번째로 중요한 건, 언제부터 ‘였다’가 되었냐인데 바로 어제부터라는 거다. ‘멋진 여자다‘에서 어제부터’멋진 여자였다‘가 된 사람이 바로 우리 엄마이다. 그녀는 아주 어렸을 적부터 현모양처가 되고 싶었다고 한다. 뜻도, 그 한자도 모를 아주 어린 나이일 때부터. 훗날, 그 이유를 찬찬히-엄마 성격상 그리 오래 생각해 보진 않았을 것 같긴 하지만- 생각해 보니 맞벌이 부모의 부재 탓이 아닐까 싶었다고…. 그래서 본인은 자식을 낳으면 그들 곁에 있어 주겠다고 다짐했고, 그리고 그녀는 그 꿈을 이루었다. 음식을 잘하지 못하고, 아니 안 하고. 청소도 안 하고. 주야장천 우리 곁에만 있어 주는 것도 현모양처라고 쳐준다면 말이다. 사실 나는 엄마가 ’현모양처‘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한 번도 찾아보지 않은 건 아닐지 의심해 본 적이 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아직도 유효하다. 하지만 21세기형 현모양처라고 우긴다면 뭐 틀린 말도 아닌 것 같기에, 나도 가만 듣고 있다. 이런 우리 엄마가 그제까지 멋진 여자라 불린 이유를 굳이 찾자면, 그녀는 인정할 줄 알고, 사과를 잘하기 때문이다. 꿈을 이룬 현모양처인 엄마는 살림에는 별 관심이 없는데, 그렇게 내팽개쳐 친 살림살이와 우리를 뒤로하고는 그다지 할 일이 없기에 우리 곁에서 자주 책을 읽곤 했다. -그럼에도 쓰는 단어가 그다지 고급스럽지 못한 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라고 나는 종종 생각한다.- 그녀는 책을 읽으며-대체 무슨 책을 읽길래- 가끔 말을 툭툭 내던졌는데, 9살, 7살짜리 남자애들 둘을 배경에 두고, “옥자는 아들의 남자 애인을 받아들이지 못하지만, 요즘 세상에 그런 게 어딨니? 그건 말도 안 돼. 성별은 중요하지 않아.”라는 말을 시작으로 우리에게 성별을 넘어서는 사랑에 대해 강의를 시작했다. 우린 몇 마디 들어주는 척하며 또 시작이네, 속으로 구시렁거리며 자동차 장난감으로 시선을 돌리는 식이었다. 그렇게 이십여 년을 살아온 우리다. 그렇게 우린 엄마로 인해 ’고급 교육’을 받아왔다. 우리 엄마는 누구보다 쿨했고-정의의 범위가 한없이 넓다- 이해의 범위도 한없이 넓다. 그런 그녀에게 어제 나는 진우를 소개했다. 물론 나도 걱정하지 않은 건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부모에게 소개하는 자리는 누구나 가슴이 떨리고 긴장될 것이다. 그 사람의 성별을 떠나서. 나도 딱 그 정도의 긴장과 떨림을 지닌 채 엄마를 만났다. 그동안 엄마와 한집에서 살면서 쌓아온 데이터로, 엄마가 어떤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할지 정확히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예측할 수 있을 거로 생각하며 머릿속으로 여러 번 시뮬레이션도 돌려보았다. 그때 내 얼굴에 슬며시 미소까지 번졌던 걸 생각하면, 다시 돌아가 내 머리를 한 대 치고 싶다! 그 누구라도 우리 집 서재를 잠시만 둘러봐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녀가 얼마나 강한 인권 신념과 개방적인 사고방식을 지니고 있는 멋진 여자인지를. 나는 단 한 번도 입 밖으로 꺼낸 적은 없지만 그런 엄마를 존경해 왔다. 어제 그런 엄마에게 진우를, ’평생을 함께하고 싶은‘ 이라는 수식어를 붙여 소개했을 때의 엄마 표정을 봤어야 한다. 그래야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이 조금은 내 마음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감히 말한다. 엄마의 얼굴에 가감 없이 드러나는 내적 갈등은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이러한 만남이 평소 그녀의 소신과 어긋나는 일이었다면-우리에 대한 반대입장도 충분히 이해한다. 물론 가슴은 몹시 아프지만- 오히려 웃으면서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 어떻게 헤어졌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확실한 건 엄마는 딱히 무례하게 대하진 않았다. 드라마에서 보는 물세례나, 돈봉투나, 김치 싸대기 따위의 일은 없었다. 그녀의 정돈되지 않은 그 찰나의 표정을 내가 읽었을 뿐이다. 진우를 집에 데려다주고 오겠다 하고, 나는 식당 앞에서 엄마와 헤어졌다. 도저히 집까지 같이 갈 자신이 없었다. 오늘은 엄마와 집에 같이 가겠다고, 미리 양해를 구해놓은 상태라 진우는 어리둥절해하며 나를 쳐다보았다. 평소에도 둔한 편인 진우는 아무것도 모를 것이다. 우리 엄마가 얼마나 멋진 사람인지 그동안 내가 얼마나 큰소리를 뻥뻥 치고 다녔는지, 그는 내 말만 철석같이 믿고 있고, 식사 자리를 끝낸 지금도 그 말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나는 싱글벙글 웃고 있는 그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기에 미소로 답했다. 그곳에서 진우가 사는 곳까지 멀지 않아서 우린 걸어갔다. 걸어가는 내내 진우는 기분이 좋은지 옆에서 뭐라 뭐라 종알댔다. 마치 시험하나 잘 끝낸 학생같이. 진우를 보면서, 나는 엄마를 생각했다. 멋진 엄마이던, 멋진 엄마였던, 그녀를. 엄마는 인정하고, 사과해야 한다. 그래야 멋진 엄마이다로 돌아올 텐데, 을 생각하며 나는 계속 걸었다. 엄마를 생각하고, 위선과 소신이라는 단어를 생각하고, 자식이 뭔지를 생각하고, 생각을 생각하고, 이것을 생각하고, 저것을 생각하고, 그러다 진우가 뭐라 했는지를 생각하고, 저러다 내가 아까 뭘 생각했는지를 생각하고, 그렇게 생각하다 생각하다 보니 어느새 진우집앞이다. 어제와 달라진 것이 하나 없는듯한데 아직 내 오른쪽엔 엄마가 있고, 내 왼쪽엔 진우가 있는데, 오른쪽도, 왼쪽도 왠지 어느 한쪽이 시큰한 듯 시리고, 허전해서 상당히 추운 밤이었다. 올 겨울밤은 상당히 추울 것 같다.
①내 마음은 내 것인가? ②요즘 이런 생각이 왜 자꾸 떠오르는지 모르겠다. ③마음은 어디에 있는가. ④누구는 머리 속 뇌에 있다고 하고 누구는 가슴 속 심장에 있다고 한다. ⑤아마도 누구나 자신의 마음 속에 괴팍한 도깨비 하나쯤은 살고 있지 싶다. ⑥말로 표현하지 않을 뿐이다. ⑦예전에 장영희 교수가 <마음속의 도깨비>라는 글을 쓴 적이 있다. ⑧“커다란 범죄 욕구는 아니라도 가발 쓴 사람을 보면 가발을 벗겨 보고 싶은 충동이나 아름답고 완벽한 화음으로 노래 부르는 합창단이 있다면 갑자기 이상한 불협화음을 내고 싶은 충동, 아주 조용한 성당이나 도서관에 들어가면 ‘아-악’ 하고 소리 질러 보고 싶은 충동, 굽이 아주 높고 가는 구두를 신고 얌전하게 걸어가는 여자를 보면서 구두굽이 톡 부러지면 어떨까 기대하는 마음 등, 조화보다는 부조화, 타협보다는 갈등을 위해 논리도 체면도 없이 제멋대로 행동하는 도깨비는 누구에게나 잠복해 있어서 언제라도 튀어나올 준비가 되어 있다.”(‘마음속의 도깨비’ 일부) ⑨내 마음이라도 내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가 많다. ⑩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도덕에 관한 세뇌가 만든 마음은 때로 생뚱맞게 떠오르는 도깨비 같은 마음 때문에 괴롭거나 찝찝할 때가 있다. ⑪열린 마음으로 도깨비와 친해져야 실제로 엉뚱한 행동을 하고 후회하지 않을 수 있다.
"야!!" 일단 소리를 질러놓고 순간 연이는 당황했다. 자신이 고작 세 살짜리 아이에게 한음절로 지칭하며 고함에 가까운 소리를 내지르다니. 연이는 하민이를 키우면서 한 번도 아이에게 화를 낸 적도, 아이를 "야"라고 부른 적이 없었다. 인내심을 가지고 아이 눈높이에 맞춰 대화를 해야한다는 것, 훈육을 하되 화를 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녀가 갖고 있는 육아관이다. 오래 전 휴일에 친구 윤희와 그녀의 두 아들과 함께 키즈 카페에 갔을 때 윤희가 자기 아들들한테 "야"라고 소리지르자 옆에서 멀쩡한 아이들 이름을 놔두고 야,라고 부르냐며 타박을 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둘째를 낳고 세 살 터울의 형제를 키우면서 연이의 육아관은 수시로 흔들렸다. 남편 기현이 도와준다고 해도 결국 두 아이가 가장 에너지가 넘치는 시간은 온전히 연이의 몫이었다. 더구나 남자 아이 하나 일 때와 둘 일 때의 양육은 하늘과 땅차이였다. 아이가 마냥 사랑스럽기만 한 날은 없었다. 감정 기복이 롤러코스터를 탔고, 마침내 연이 스스로 최저선이라고 그어놓았던 그 선을 넘어버린 것이다. 호민이도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연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실 아이보다 연이 스스로가 더 놀라고 자괴감이 들어 눈물이 차올랐고, 동시에 몇 년 전 친구 윤희에게 거들먹거리며 교양 있는 척 했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러면서 역지사지 할 일이 어디 육아뿐이겠는가, 싶었다.
허겁지겁, 더위 때문인지, 아니면 방금 한 소름돋는 생각 때문인지, 붉어진 얼굴로 카페안으로 들어왔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스스로가 한 생각에 끔찍해 하다가도, 실제로 그러면 어떨까? 하는 이상야릇한, 혹은 짜릿한 감각이 온 몸을 내달렸다. 아무래도, 미친거 같아. 라는 생각과는 다르게 목소리는 차분하게, 아이스 아메리카노요. 라고 말을 내뱉었다. 카페 주인이 자신을 이상하게 생각할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아무리 그래도 내 머릿속을 읽을 초능력은 존재하지 않지. 하는 생각. 이 두 생각이 번갈이 가면서 나타났다. 네, 아이스 아메리카노 주문받았습니다. 하고 차분한 목소리와 함께 돌려 받은 카드를 들고, 최대한 사람이 없는 좌석에 앉았다. 아무리 그렇게 화가 나더라도, 살인이라니! 라는 생각이 들다가도, 아니야, 그래도 그 작자는 그렇게 죽여도 누구하나 슬퍼하는 사람이 없을거야. 하는 생각, 그리고 아무도 없는, 속도 제한이 없는 고속도로를 내달리듯, 잔인하고, 폭력적인 상상들이 계속해서 증폭해 나갔다. 그러다가, 자신의 손에서 울리는 카페 진동음이 정신을 차리게 만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 사람이라고 그런 꼴을 당해도 된다는 생각을 하다니! 에어컨 냉기 때문인지, 혹은 자신의 끔찍함 때문인지 몸이 부르르 떨렸다. 커피가 올려진 쟁반을 들고, 자신의 자리에 가서 앉은 다음에 커피와 얼음을 한 번에 마셨다. 몸이 다시 한 번 부르르 떨렸다. 자신의 폭력성과 잔인함에 부르르 떨리는 지, 아니면 분노로 떨리는 지 잘 모르겠다.
종종 스트레스를 받거나 기분이 가라앉으면 둥당둥당거리며 피아노를 친다. 그러다 마음의 불안함이 손으로도 전파되어 건반의 리듬이 버벅거리기 시작하면 나는 화가 난 듯이 피아노를 천둥번개가 내려오듯 만지기 시작한다. 그러면, 내 주위에 있던 작은 줄리는 불안한듯 도도도도독 캣타워 위로 달려가 나를 뒤에서 조용히 지켜보기 시작한다. 조용히 나만의 시간을 감당해주는 아이가 감사함과 동시에 여전히 풀리지 않는 감정의 실마리를 손에서 놓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나면 퇴근하고 들어오는 가족들도 나의 모습을 보고는 오늘은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한 날이구나라고 여기고 조용히 각자의 일을 하기 시작한다. 어제와는 다른 모습에 혼란하겠지만, 그럼에도 서로 배려하기 위해 공감하려고 애를 쓴다. 저녁을 먹고 잘 시간이 되어서도 평소보다 움직이는 소리가 크다고 느낄 때엔 문을 닫고 있는 내 방문 뒤로 가족들이 소근소근, 웅성웅성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걱정이 되어 나를 위로해주고 싶은데 어떻게 다가가는게 좋을지 고민하는 거겠지. 갑작스레 원인도 모르고 분노를 분출하는, 버겁고 혼란스러울 떄가 많은 가족구성원이지만, 그럼에도 가족이라는 이유 하나로 노력하는 모습이 나를 너무 따스하게 안아주는 느낌인 것 같다. 그래서 내가 집을 좋아하게 된 이유이지 않을까.
망했어. 교수의 시체를 발견한 이후부터 D의 머리를 떠나지 않는 단어였다. 깜짝 놀란 후배를 다독이며 119에 신고를 하고, 나중에 도착한 경찰에게 목격했던 상황을 진술하는 동안에도 계속 머리 속에서는 그 생각 뿐이었다. 장례식장에서 엉엉 우는 동기들, 선후배들과 함께 있을 때는 같이 울기도 했지만 그건 교수의 죽음 때문이 아니라 갑자기 캄캄해진 미래가 걱정돼서가 더 컸다. D의 속마음을 알 수 없던 사람들은 교수의 애제자였던데다가 시체를 처음 발견했으니 충격이 얼마나 크냐고 위로했지만, 정작 D는 글쎄. 미래를 걱정하는 자신이 조금 속물같기는 했지만 교수가 장담해준 일들이 다 어떻게 될지 모르게 된 상황에서 충분히 걱정할 수 있지않나 싶기도 하고, 일을 도우며 망연자실한 교수의 가족들을 보고 있으면 그런 마음을 먹은 게 미안해지기도 하고 냉혈한 같은 자기가 싫어지기까지 했던 것이었다. D는 대학원 생활을 하면서 교수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 주변 다른 연구실을 둘러봐도 이런 교수가 없다고 생각할 정도로 원생들을 잘 챙겨주고 특히 D를 학부생때부터 눈여겨 봤던터라 다들 D는 교수가 밀어주는 한 걱정이 없을 거라는 말을 하곤 했다. 그런데 이렇게 죽어버려? 나는 어떡하라고? 죽은 사람을 향해 말도 안되는 원망의 마음이 생겼다가, 그래도 그 동안 정말 잘해주셨는데 이렇게 돌아가시다니 슬프고 안타까운 마음이 생겼다가. 장례식 내내 D의 감정은 놀이기구처럼 상승했다 추락했다 흔들렸다 멈췄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어찌하다 보니 강춘남씨는 가방끈이 길어졌다. 처음부터 의도한 바는 아니나 대학원에서 인턴생활을 시작하면서 의도치 않게 실험을 하고 연구를 하면서 석사를 거처 박사까지 공부하게 되었다.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 세계를 벗어날 용기가 없어 유야무야 하다가 그 생활에 묻힌거겠지만 말이다. 강춘남씨는 외국 박사고 아니고 그나마 서카포 같은 졸업생도 못됐다. 그렇게 덜렁 그냥저냥 그런 국내 박사졸업장 하나 들고 취업하려니 이 또한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 그랬을까. 그가 취업한 직장도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그런 곳은 못 되지만 이 업계에서는 어느정도는 아는 그런 곳의 기업 연구소로 들어가게 되었다. 기업연구소가 그리 크지 않은 지라 선임이나 주임같은 직위 부여는 없고 과장이라 직급을 얻었다. 늙은 신입이면서 과장이라는 어정쩡한 위치에서 애매모호한 느낌으로 일하는게 영 미적지근해서 과장들 모임인 과장계에 들어가게 되었다. 고졸로 15년이 넘어 과장이 된 사람 40중반이 넘었는데 만년 과장인 사람.. 과장에 걸친 사람들은 하나같이 모두 다른 사람들이었다. 과연 내가 이 곳에서 이 사람들과 함께 잘 지낼 수 있을까.. 여전히 미적지근하고 혼란스러운 마음이다.
5st. GX/24.7.15 도저히 말이 안 통한다. 엄마는 왜 엄마밖에 모를까. 본인이 가장 큰 피해자고 세상에 자신보다 불쌍한 사람은 없는 듯 슬픔과 우울을 쏟아낸다. 나는 소나기처럼 퍼붓는 하소연을 맞고 있다. 나는 어떤 말도 하면 안 된다. 말을 덧붙이면 자식도 이해해 주지 못한다며 나를 힐난한다. 듣기 싫어해도 안 되고 반박해도 안 된다. 이런 내 고통에 대해서는 더더욱 이야기할 수 없다. 엄마가 말하고 있는 엄마 세상 속 가해자는 아빠다. 하지만 그런 아빠 곁을 아직도 떠나지 못하게 만든 나도 가해자다. 내가 가해자라서 엄마 이야기가 듣기 싫은 건가? 내 고통은 언제나 엄마를 이길 수 없고 그럼에도 고통스럽다. 어떤 고통은 사람을 더 강하게 만든다고 한다. 그런데 이 고통은 아닌 것 같다. 가족이 부끄럽고 내 의지대로 바꿀 수 없음에 무기력하고 지겹다. 아빠를 미워하는 게 더 타당하지만, 엄마를 더 견딜 수 없다. 그냥 그 입 좀 다물었으면 좋겠다. 내가 아빠랑 다를 게 뭐지? 아빠는 엄마의 고통에 무심했고, 이해하지 못했고 오히려 더 분노했으며 물건을 던지고 깨부쉈다. 엄마를 때렸나? 내가 직접 보진 못했지만 맞았겠지. 이런 미친 사람이랑 같이 산다고 엄마가 이렇게 된 거겠지. 엄마가 가만히 순응하고 있어도 나는 엄마를 싫어했을 거다. 그런데 나는 왜 자꾸 싸움을 만드는 요인이 엄마 같다고 느끼지? 제발 그 입 좀 다물라고. 도저히 말이 통하지 않는다. 엄마가 제일 불쌍한 게 맞다. 그런데 나는? 나는 여기서 어떤 걸 할 수 있을까? 엄마는 스스로 해결하지 못한 문제 속에 나를 함께 가둔다. 이 불행 속에 갇힌 나는 영영 행복할 수 없다. 나를 불행하게 만든 건 엄마다. 아니 아빠다. 그래 아빠가 맞지. 그게 정확하다. 끝을 모르고 쏟아지는 엄마 목소리. 나는 방으로 들어간다. 벽을 타고 그 목소리가 흘러온다. 이제 비난의 화살은 나고 스스로 세상에서 제일 불쌍하다고 생각하던 엄마는 나 때문에 더욱 비참해졌다. 나는 내가 가해자라는 게 견디기 어렵다. 엄마의 목소리가 끔찍하다. 나는 귀를 막고 소리를 지른다. 옆에 놓인 책상 스탠드를 잡고 바닥에 내던진다. 스탠드가 산산조각이 나고 바깥이 조용해졌다. 드디어. 힘겹게 얻어낸 고요함에 기쁨과 혼란이 섞인다. 나는 아빠를 이해할 수 있었다.
김대리는 스스로를 진보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이름 있는 대학을 나와 안정된 직장에 취직했지만 운이 좋아 이 자리에 있는 것이지 이게 특별한 특권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비정규직, 마이너스 성장, 평화유지군이라는 말 조합을 조롱했고 더 나은 세상이 되기 위해 ‘연대’가 필요하다는 말을 자주 했다. 월급에 비해 많은 금액을 기부금으로 지불했고, 굵직한 시국문제가 터질 때마다 성실하게 집회에 참여했으며, 여러 인권 현안에서도 흔들림없이 왼쪽 자리를 지켰다. 김대리는 전산팀에서 일하는 K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 컴퓨터 관련 업종은 아니지만 전산담당자가 필요했던 회사는 비정규직으로 K를 채용했다. 나이도 비슷하고 친하게 지내는 사람들도 비슷한 김대리와 K는 인터넷 불통부터 회사 뒷담까지 편하게 이야기를 주고 받는 사이가 되었다. 김대리가 속한 인사부가 워크샵을 가는 날 아침, K는 대절버스 앞을 서성이다 김대리에게 커피 한 잔을 내밀었다. “톡으로 음악 보냈어요. 심심할 때 들어요.” 회사에서 해도 될 일을 무슨 잠까지 자가면서 워크샵을 가냐며 몇번이나 볼멘소리를 했던 김대리라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버스에 올랐다. 일과를 마치고 숙소에 들어온 김대리는 K가 보낸 음악을 틀었다. 설레는 마음, 고백, 사랑... K가 보낸 14곡은 모두 사랑을 고백하는 노래였다. 집에 오면서 들어도, 주말 동안 들어도 사랑노래...이유를 알 수 없는 불편함과 언짢음에 김대리는 당황했다. K는 친절하고 성실한 사람이다. 어느 대학을 나왔는지는 모르지만 해결하지 못한 전산 문제가 없는 인정받는 일꾼. 김대리는 친구들처럼 미래 남편에 대해 정해놓은 하안선 같은건 없었다. 그냥 뭐... 성실하고 평균 외모에 적당한 대학 나와서 월급 착실하게 받고 회사 다니는 평범한 사람. 김대리는 K가 평범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없다. 하지만 14곡의 노래 앞에서 K는 평범하지 않은 사람이 되었다. K가 유능한 일꾼이 아니라 사원이었다면, 김대리와 같은 대학을 나왔다면, 내년 계약 걱정 없이 월급받는 사람이었다면 어땠을까? 김대리는 혼란스러웠다. 김대리는 스스로를 진보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사랑노래 14곡 앞에서 진보가 무엇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평생을 온순하게 살았다. 기억도 나지 않는 갓난아기 시절, 바로 눕혀놓으면 몇시간이고 좌우로 몸을 틀지도 않아서 생긴 그의 뒷짱구가 그 증거 중 하나였다. 손이 많이 가지 않는 아이, 시키면 시키는대로 가만히 따르는 아이가 그였다. 화를 낼만한 일에도 가만히 있고 해서 학교에서 괴롭힘을 받은 시절도 있었다. 그런 그가 아버지의 뜻에 따라 공장에 취직했을 때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마치 군인이 지시를 받는듯 그는 지령을 해치웠다. 어느날은 거래처에서 시행하는 공장평가를 앞두고 청소를 하는데 약품을 받아와야 했다. 약품을 받으러 간 공장의 모든 직원은 공업용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상사는 받아온 약품을 써 청소를 진행할 때 그가 마스크에 대해 묻자 상사는 시간이 없다고 화를 내며 윽박질렀다. 마스크는 공장평가하는 내일써야 한다고만 말할 뿐이었다. 공장평가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다. 시정해야할 부분이 있었으나 거래가 끊길 정도로 심각하지는 않았다. 문제는 그에게 생겼다. 그날 이후 그는 일하는 도중에 정신을 놓는 일이 생겼다. 일주일에 한번 그럴 때도 있었고, 3일에 한번 그러기도 했다. 한번도 없었던 늦잠을 자버려서 혼나는 날이 늘어나버렸다. 그는 울컥하며 화가 치밀어오르는 경험도 그때가 시작이었다. 아무리 험한 말을 들어도 그냥 흘려버렸던 사람의 가슴 속이 무언가가 막히고 두드리는 것처럼 불편했다. 그날도 그랬다. 상사는 여느때처럼 자신의 화를 입으로 토해내고 있었다. 그의 실수는 작았지만 그것이 중요하지 않았다. '김씨 자꾸만 이럴거야? 요즘 나한테 시비걸려고 일부러 그래? 미친거야? 응?' 사실 상사의 말은 중요하지 않았다. 온순했던 그는 바늘방석에 일주일 내내 앉아있던 사람이 마침내 바늘주인을 찾은 것처럼 받아치고야 말았다. 시비걸려고 하냐니, 시비거는 사람 본적이 없나, 걸어달라는 소린가 하는 생각이 화로 인해 충혈된 머리 끝에서 울리다가 입으로 터져나왔다. 그 소리가 얼마나 컸던지 그 자신의 머리가 깨지는 것처럼 흔들렸다. 그리곤 동시에 스스로의 행동에 놀라서 뒤로 세걸음 물러났다. 소리를 지르느라 감았던 눈을 뜨자 상사의 표정이 들어왔다. 상사는 미간에 주름을 잡은채 크게 뜬 눈으로 이를 악물고 있었다. 저건 화를 내는 표정이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기르던 개가 물면 저런 표정일까 싶었다. 소리를 지를 때 잠시 가벼워졌던 가슴이 다시 쿡쿡 찌르는듯한 불편함 속에 짓눌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그제야 인지했다. 평생 눈에 띄지 않으며 살았다. 불편한 상황에 처하지 않는 선택을 해왔다. 정말 내가 미친걸까? 생각해보면 아무 일도 아니었잖아 그냥 평소의 저놈인데... 그는 자신이 변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무엇이, 왜 이렇게 됐는지 알수가 없었다.
5th. 평소 소극적이고 존재감 없던 A대리는 회의를 할 때면 의견을 내기보다는 늘 듣던 편이었다. 보통 A대리는 발언자의 말에 동조를 한다는 뜻으로 고개를 아래위로 공손하게 끄덕이거나 업무노트에 발언자의 내용을 열심히 열심히 적기만 할 뿐 회의에 영향을 줄만한 그 언행을 삼가는 편이었다. 한 마디로 존재감이 없었고 남들 말에 그저 동조만 하는 맹탕 같은 분위글 풍기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무언가 다르다. 먼저 A대리는 수첩에 아무것도 적지 않고 발언자만 정면으로 쳐다볼 뿐이다. 그렇다면 발언자의 에고를 북돋아주는 동조의 고개 끄덕임을 해야할 텐데 오늘은 그냥 듣기만 하고 있다. 웃음기도 없이 그냥 무표정하게 발언자를 빤히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그러다가 갑자기 ‘흥’하고 콧소리를 냈다. 그것도 다혈질인 K부장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말이다. 기분파에 감정기복도 심했고 가장 문제는 일관성이 없는 업무 지시로 사원들은 미치게 만든다는 것이었다. 어려운 확률을 뚫고 치열한 입사시험과 압박면접을 통과하여 열정과 의욕으로 충만한 신입사원도 단 몇 일 만에 퇴사를 고민하게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가 바로 K부장이었다. 그러나 인사고과를 비롯하여 모든 권력을 움켜진 슈퍼갑 K부장 앞에 말단 사원은 영원한 을일뿐이었다. 그런데 그런 K부장앞에 A대리가 콧방귀를 뀌었다. 본사근무 대신 한적한 지방으로 발령을 받고 싶은 것이었을까.
5th. GX "누구요?" 영자 할머니의 묻는 소리에 저녁을 준비하던 은정은 주방에서 뛰어 나왔다. 하지만 인터폰은 꺼져 있고, 영자 할머니는 휴대폰을 들고 있지도 않았다. 그저 소파에 앉아서 거실 한 구석을 쳐다보고 있었다. "어머니, 괜찮으세요?" 은정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묻자 영자 할머니는 은정을 돌아보며 말했다. "쩌그는 누구다냐?" "누구요? 어머니, 혹시 거기 누가 보이세요?"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던 영자 할머니의 눈빛이 이내 돌아왔다. "아니여. 내가 잠깐 딴 생각 혀서..." 은정이 미심쩍은 표정을 지우지 못한 채 돌아서 주방으로 돌아가는 걸 보면서 영자 할머니는 가슴을 쓸어 내렸다. 최근 들어 영자 할머니는 집안 곳곳에서 낯선 사람을 보고는 했다. 하지만 돌아서서 생각해보면, 모르는 사람이 집 안에 들어와 있을 리가 없었다. 머리로는 이해가 되는데, 막상 그 상황에 닥치면 꼭 진짜 같아서 자꾸 묻게 되는 것이었다. '내가 왜 이러까. 노망이 났능가...' 영자 할머니는 그런 날이면 가슴이 선뜩했지만, 누구에게 털어놓을 생각은 하지 못했다. 자식들에게 말했다가 괜히 걱정 끼치는 게 싫기도 했지만, 혹시 생각조차 하기 싫은 병이면 어쩌나 하는 마음도 컸다. 처음엔 '이러다 말겠지', '요즘 기가 허한가 보다'하고 가볍게 생각했는데, 보약을 달여 먹고 병원엘 다녀도 소용이 없었다. 지금처럼 아들네 집에 있을 때는 그나마 덜 했지만, 혼자 사는 집에서는 훨씬 더 자주 누가 보였다. 그동안 그건 영자 할머니 만의 작은 비밀이었는데, 오늘 그만 며느리인 은정에게 들키고 만 것이었다. 일단 잘 둘러대기는 했지만, 은정의 미심쩍은 표정을 보니 아무래도 아들인 현호 귀에 이야기가 들어갈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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