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공감이라는 단어가 이렇게 부정적으로 느껴진 적이 없었습니다.
서두에 나왔던 타인이 슬퍼하면 슬퍼해주고 기쁘면 같이 기뻐해주는 것이 공감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단순히 느껴왔던 이런 공감의 이면을 보고 경계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공감이라는 좋은 표현을 포장하며 무분별한 집단주의를 양산하지는 않았는지 되돌아보게 됩니다.
2. 상황적인 부분에서 큰 영향이 있을거라고 생각합니다. 회사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이 아닐 때 관찰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관점과 직접 그 업무에 투입되었을 때 관점은 큰 차이가 있다고 봅니다.
이렇게 경험적으로 축적이 되고 그것으로 인해 자신의 신념에 믿음이 생겼다면 인지적인 공감이 자연스럽게 발현된다고 생각합니다.
3. 인간의 감정은 지구 반대편의 내가 알지 못하는 사람들 아픔에 신음하며 그들을 돕기 위해 선뜻 손을 내밀 수 있는 초월적인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직접 경험하지 않아도 정서적 공감을 통해 도움을 주려는 마음이 작용하기 때문이죠.
4. 한 집단 내에서 중국집에서 점심메뉴를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가정했을 때 나는 짬뽕이 먹고 싶은데 나를 제외한 다수가 자장면을 선택한다면 먹고 싶은 짬뽕을 포기하고 메뉴를 통일했을 때 빨리 식사할 수 있는 자장면을 선택해야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생길 수 있습니다. 내가 짬뽕을 선택한다면 물론 내가 먹고 싶은 음식을 먹을 수가 있지만 자장면이 먼저 나온다고 해도 짬뽕이 나중에 나왔을 때 내가 식사하는 시간까지 이들이 기다려야 한다는 압박감이 자리잡을 수 있죠. 집단생활을 하다보면 이런 불편한 동조를 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2024 성북구 비문학 한 책 ② 『공감의 반경』
D-29

강츄베베

장맥주
2. 노력을 발휘해서 인지적 공감을 발휘해 봤고, 그런 인지적 공감을 발휘하도록 다른 사람을 이끈 적도 있습니다. 얼마나 성공했는지는 모르겠지만요.
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그런 경험을 하지 않을까요? 소설을 읽거나 영화를 보다가 초반에 ‘뭐 저런 쓰레기 같은 인간이 다 있나’ 싶은 캐릭터가 중반 즈음부터 이해가 가더니 마지막에 푹 빠져들게 되는 경우가 있잖아요. 책을 완독해야 한다는 의무감, 티켓 값이 아깝다는 생각으로 2시간을 꾹 참는 게 바로 노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노력의 결과로 인지적 공감이 발휘되는 거고요. 소설가와 극작가는 다른 사람들이 그런 인지적 공감을 발휘하도록 이끄는 사람 아닐까 해요.
이 과정을 여러 차 례 반복한다고 해서 습관처럼 저절로 인지적 공감이 솟아오르는 것 같지는 않아요. 매번 설득력 있는 서사가 필요해요. 그런 서사가 부족한 작품을 볼 때, 인지적 공감이 결코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건 아님을 여실히 깨닫습니다.
공감할 수 없을 것 같았던 인물에 공감하는 놀라운 체험을 하고 난 독자나 관객은 자기 주변의 사람들도 다른 눈으로 보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픽션의 순기능 중 하나이고요. 그래서 저는 나쁜 놈이 끝까지 나쁜 놈으로 남아서 처절히 응징당하는 ‘사이다 스토리’를 마음 속으로는 우습게 여기고 있습니다.

장맥주
3. 거울 뉴런이라 부르든 뭐라 부르든 사람의 공감을 아주 빨리 발동시키는 특정한 정보와 매체들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 을 해요. (문외한의 생각이라 별 의미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 표정 같은 겁니다. 자식을 잃은 부모만이 지을 수 있는 표정이 있죠. 그걸 보면 우리는 즉각적으로 그 부모의 고통을 알아차리고 저항할 겨를도 없이 울컥합니다. 그 부모가 외국인이어서 무슨 언어를 쓰는지 몰라도 벌어지는 현상입니다. 그때 자식 잃은 부모의 고통은 언어가 아니라 표정을 통해 전해지니까요. 그래서 이런 경우 TV로는 고통이 아주 잘 전달되는데(표정을 볼 수 있으니까) 라디오로는 전달되지 않습니다.
저는 이런 정보는 시각적인 매체를 통해 전달된다면 외집단 내집단 할 거 없이 공감을 두루, 빠르게 일으키는데, 상대에 대한 격렬한 분노나 증오심을 품고 있는 경우에는 그런 정보와 매체도 효과가 떨어지는 것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설명이 좀 두서가 없네요.

우주먼지밍
<1부>
1. 제가 생각하는 공감이란? 우선 이 책의 저자이신 장대익 교수님이 진화학자이시니 진화생물학적인 시점에서 이야기해 볼게요. 공감이란 사회적 동물들이 진화를 거치며 가지게 된 적응 능력 중 하나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집단생활을 하는 동물들은 다른 개체와 어떻게든 협력해야 했기에 나 이외의 개체들과 어울리고 그들을 이해하는과정에서 자연스레 가지게 된 특징 중의 하나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정서적 공감과 인지적 공감을 무 썰듯이 딱 나눌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어떤 개념을 이해하거나 습득할 때 이항 대립을 통해 효과적으로 배운다고 알고 있습니다. 정서적 공감을 이해하기 위해 인지적 공감을 함께 소개하고 있어요. 물론 두 공감들은 서로 구분되는 특질을 가지고 있는 것도 자명한 사실입니다. 학자들이 어떤 개념을 소개할 때 반대되는 쌍으로 설명을 하였다 할지라도 그 개념들이 현실 속에서 적용되고 관찰될 때는 두 개념 양극단의 어느 중간쯤…이 중간의 위치도 수시로 변한다고 생각해요.
2. 네! 저는 인지적 공감을 반복해서 발휘하면 그것이 새로운 신경회로를 만들고 어느 단계에서는 자동화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그 생생한 예시입니다. 전 생전 처음 들어보는 낯선 아이디어나 사유 등을 책으로 접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입니다.(여기 그믐에 계신 분들이 대부분 그렇겠지요+_+) <공감의 반경>에서 대니얼 카너먼의 <생각에 관한 생각> 시스템1과 시스템2를 소개하고 있으니 이 언어들을 활용해서 말을 해볼게요. 넵 저는 시스템2를 활용해서 처리해야 하는 것들도 반복하다보면 어느덧 그것이 시스템1에서 처리가능한 것이 되기도 한다고 생각해요.
3. 이것과 관련해서 최근에 서문과 1부를 읽은 루이스 다트넬의 <인간이 되다> 에서 관련되는 내용을 본 것 같아요. 이 댓글말고 다른 댓글에서 보강해서 쓰도록 하겠습니다.
4. 1부는 그간 읽어왔던 책들이 계속해서 소환되어 매우 반가웠습니다. 그리고 이 책은 각 장마다 문제제기+논증+우리가 앞으로 공감의 반경을 넓히기 위해 어떻게 해야할지에 대한 방향성 제시!! 하고 있어 무척 유익하고 계몽적입니다.

도리
“ 누군가는 말한다. 오늘날 가속화하는 혐오와 분열은 타인에 대한 공감이 부족해서라고.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공감은 만능 열쇠가 아니다. 오히려 공감을 깊이 하면 위기가 더 심각해질 수 있다. 우리의 편 가르기는 내집단에 대한 과잉 공감에서 온다. 대체 무슨 말인가? 공감은 일종의 인지 및 감정을 소비하는 자원이므로 무한정 끌어다 쓸 수 없다. 따라서 자기가 속한 집단-그것이 종교적 집단이나 정치적 집단이든 아니면 혈연 집단이나 지연 집단이든-에 대해 공감을 과하게 쓰면 다른 집단에 쓸 공감이 부족해진다. 자기 집단에만 깊이 공감하는 것이다. ”
『공감의 반경 - 느낌의 공동체에서 사고의 공동체로』 p.11-12, 장대익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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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
“ 우리는 다른 이의 상태에 신경을 끄고 살고자 해도 거울 뉴런들이 늘 켜져 있어서 타인에게 마음을 쓰는 존재다. 남에게 휘둘리고 싶지 않아 귀를 막고 있어도 거울 뉴런들이 켜져 있어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이렇게 인간은 사회적 네트워크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존재로 진화했다. ”
『공감의 반경 - 느낌의 공동체에서 사고의 공동체로』 p.27, 장대익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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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
“ 이 대목에서 '내집단 선호성'에 관한 한 가지 흥미로운 진실이 나타난다. 그것은 집단을 나누는 방식이 흡연처럼 아무리 사소하고 하찮은 기준에 의한 것이라 하더 라도 심지어 아무런 의미도 없는 우발적이고 임의적인 기준이라 할지라도 집단이 나눠지기만 하면 내집단 선호성이 발동된다는 사실이다. ”
『공감의 반경 - 느낌의 공동체에서 사고의 공동체로』 p.37, 장대익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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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
“ 그렇다면 먼저 집단 동일시는 왜 일어나는 것일까? 사회 정체감 이론은 사람들이 집단과의 동일시를 통 해 자존감을 획득하고 유지한다고 설명한다. 이 이론에 따르면 사람들은 자신을 우리(내집단의 구성원)로 범주화하여 사회 정체감을 얻지만 그들(외집단 구성원)과의 상호 작용 시에는 마치 자신의 자존감과 지위가 위협받는 것처럼 느낀다. ”
『공감의 반경 - 느낌의 공동체에서 사고의 공동체로』 p.44-45, 장대익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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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