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보르헤스 읽기] 『셰익스피어의 기억』 1부 같이 읽어요

D-29
화제로 지정된 대화
[타자~] 소설가 L.P. 하틀리는 이렇게 말한 적 있습니다. "과거는 외국이다. 거기서 사람들은 다르게 산다." 이 말에 꼭 어울리는 단편이 아닐까 합니다. 보르헤스라면 이렇게 썼을 것 같아요. "내 과거는 타인이다. 그는 나와 다르게 산다." 좀 이상한 얘기를 하자면, 이 단편은 언어로 돼 있습니다. 영상이나 사진이 아니라요. 그리고 그것이 핵심이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미지의 부재가 이 단편을 단편일 수 있게 만듭니다. 롤랑바르트는 사진과 달리 언어는 근원적으로 허구이며, 언어를 비허구화하기 위해서는 논증을 하거나 맹세를 하는 식으로 온갖 판단 장치를 동원해야 한다고요. 실로 그러합니다. 이 단편은 당연히 픽션적인 요소로 가득합니다. 보르헤스는 사는 동안 서서히 ("여름철의 황혼처럼") 눈이 멀어서 나이 오십에 이르러 완전히 시력을 잃었다고 전해집니다. 이 단편에서 1918년의 열아홉 보르헤스를 만난 늘그막의 보르헤스는 이미 칠십살입니다. 이런 배경을 알고서 다시 이 이야기를 읽으면 왜 이것이 소설이라는 장르로 이야기되어야 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젊은 보르헤스를 처음 만나는 장면에서 노년의 보르헤스인 '나'는 휘파람 소리로 과거의 자신을 알아봅니다.) 소설 속으로 들어가 보면, 1969년 케임브리지에서 칠십 살의 보르헤스는 1918년의 스무살도 채 되지 않은 청년 보르헤스를 만납니다. 그리고 젊은 보르헤스에게 자신이 미래의 '너'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청년 보르헤스는 혈기왕성한 문청답게 그 말을 귀담아 듣지 않습니다. 그는 과연 청년 시절의 보르헤스처럼 "내가 당신을 꿈꾸고 있다면"이라는 전제하에 미래의 보르헤스가 과거의 자신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다는 점에 그다지 놀라워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까지 합니다. 청년 보르헤스와 노년의 보르헤스는 이 만남이 꿈에서 이뤄지고 있다는 데 동의합니다. 장자의 나비꿈 비유처럼, 현재가 과거의 '나'가 꾸는 꿈인지, 아니면 과거가 현재의 '나'가 꾸는 꿈인지 알 수 없다는 식으로 얘기가 진행됩니다. 나아가 두 사람은 현실 역시 계속되는 꿈일 수 있다는 데 동의합니다. 다만 두 사람이 처한 상황은 분명 다릅니다. 젊음은 늘 자신의 미래를 궁금해하고 꿈처럼 여기지만, 노년의 입장에서 과거는 꿈이 아닌 지나온 현실입니다.
⟨아니오⏤그가 말했다⏤그것들로는 어떤 것도 증명되지 않아요. 만일 내가 당신을 꿈꾸고 있다면 내가 알고 있는 것에 대해 당신이 알고 있다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 아닐까요. 따라서 비록 상세하기는 하지만 아까의 그 목록은 전혀 소용이 없는 거예요.⟩ 그의 반박은 옳았다. 내가 그에게 말했다. ⟨만일 이 아침과 이 만남이 꿈이라면, 우리 둘은 서로가 꿈꾸고 있는 바로 그 대상이라고 생각해야 할 거야. 아마 우리는 이미 꿈을 꾸기를 멈췄는지도., 아직 그렇게 하지 않았는지도 모르지. 어찌됐든 우리의 명백한 의무는 마치 우리가 세계와 태어난 것과 눈으로 보는 것과 숨을 쉬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꿈 또한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이야.⟩
셰익스피어의 기억 12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타자] 마지막 즈음에 이르러서, 노년의 보르헤스는 자신이 갖고 있던 미국 달러를 청년 보르헤스가 갖고 있던 동전과 교환합니다. 청년 보르헤스는 건네받은 달러 지폐 속에 찍힌 1974라는 숫자를 보고 놀라워 합니다(동전에는 발행일이 각인되지만 지폐에는 발행일이 찍혀 있지 않는데, 여기서 달러에 찍힌 1974란 숫자는 발행일이 아닌 시리즈 넘버로 추측됩니다). 그러나 노년의 보르헤스는 건네받은 동전을 봐도 놀라워 하지 않습니다. 생각해보면 현재 우리는 과거보다 미래에 경중을 둡니다. 젊은 현재는 늘 미래를 향해 있게 마련입니다. 그에게는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더 많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노년의 현재는 늘 과거에 관심을 둡니다. 그에게는 살아갈 날보다 살아온 날, 되돌아볼 날이 더 많습니다. 이 비대칭에서 청년과 노년의 만남과 대화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다시 소설로 돌아와 보면, 청년 보르헤스는 1974란 달러의 숫자를 보고서 놀라워 하는 것도 잠시 그 지폐를 찢어버립니다. 성경 속 나자로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이 예수가 일으킨 기적에 공포를 느꼈다고 말하면서요. 그것을 보며 노년의 보르헤스는 "우리"가 전혀 바뀐 게 없을 뿐 아니라 책상물림처럼 매번 책을 인용하고 있구나, 하고 속으로 되뇝니다. 여기서 '우리'란 지칭은 청년과 노년의 보르헤스 양쪽 모두를 가리키는 표현임과 동시에 성서의 이야기가 지닌 보편성을 보여주는 게 아닌가 합니다. 여하튼 이렇게 노년은 과거의 자신을 보면서 낯섦과 익숙함을 동시에 느낍니다. 마지막 장면은 더 재미있는데요, 노년의 보르헤스는 청년 보르헤스를 기억하지만, 청년은 노년을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를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인즉, 둘의 만남이 노년의 보르헤스에게는 현실에서 벌어진 일이었지만 청년 보르헤스에게는 꿈 속에서 벌어져서 그렇다는 겁니다(꿈은 기억되지 않으니까요). 결과적으로 미래는 과거의 꿈이며, 노년의 보르헤스는 청년의 보르헤스가 꾸었던 꿈 속의 풍경으로 밀려나고 있습니다. 근데 하나 더 재미있는 사실이 남아 있습니다. 바로 청년 보르헤스가 보았다는 미국 달러에 적힌 숫자는 1974였으며, 그 숫자는 1969년 케임브리지에 있다고 그간 믿고 있던 노년의 보르헤스에게도 미래였다는 것입니다. 한번 찾아봤는데, 이베이에서 시리즈넘버로 1974년이 찍힌 1달러 지폐를 89달러에 팔고 있네요. 지폐수집가에게 특정한 과거는 우리가 모르는 또 다른 가치가 있나 봐요. 한번 구경해보세요. https://www.ebay.com/itm/395519327472?itmmeta=01J2H0ZEF6B046YWF7REQJGM3F&hash=item5c16c9fcf0:g:XPAAAOSwFuFmiwYY
@russist 깊이 있는 해석 감사히 읽었습니다. 1974년 지폐를 소설 막바지에 배치한 건 읽는 저에게 대단히 훌륭한 소설적 전략으로 보여요. 이베이에서 판매하는 지폐도 잘 봤습니다. 16페이지쯤인가. 어제의 인간은 오늘의 인간이 아니니, 제네바 또는 케임브리지의 한 벤치에 앉아 있는 두 사람이 그 증거라고 하는 대목에서 1969년의 보르헤스는 1918년의 보르헤스를 동일시 하다가도 타자화하고 있네요. 이전에 읽었을 때보다 훨씬 재미있게 다가옵니다.
전작들도 읽으셨으리라 봅니다. 이런 식의 반전은 ⟪픽션들⟫의 ⟨원형의 폐허⟩의 결말과 유사한 것 같아요. 종종 재밌는 감상 남겨주세요.
<타자>를 읽고, 화제글을 본 후에 다시 보았는데요, 저는 이야깃속에서 이것이 꿈속의 꿈이며, 또다른 꿈이 아닐까, 하는 식의 해석도 가능하다고 느꼈습니다. 1969년의 보르헤스가 지금 현실이라고 느끼는 것 역시 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인데요 그것은 마지막 순간 1969년의 보르헤스가 한 말이 단서가 됩니다. "내 나이에 이르면 사람들은 거의 시력을 잃게 되지. 눈앞에 노란 빛깔과 그림자들과 빛들이 어른거리게 돼. 하지만 걱정하지 말아. 점진적인 시력 상실은 비극적인 일이 아니니까. 그것은 마치 여름밤이 오는 것과도 같지." 저는 이 말을 단서로 삼아서, 여름밤 - 청춘 이라고 생각을 했는데요, 그는 자신의 꿈과 같은 청춘(여름밤)을 지금 다시 느끼는 일종의 꿈 을 꾼다고 보았습니다. 그렇기에 꿈속에서 존재할 리 없는 지폐를 과거의 자신이 보았고, 그것을 찢었고, 자신의 현재보다 더 미래의 모습인 자신을 미리 보기를 무의식 중에 거부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느낌이었달까요. 즉, 지금 과거의 자신을 만나는 꿈속 미래의 자신 역시 일종의 타자인 셈이죠.
죽기 직전에 있는 사람은 어린 시절의 희미한 기억을 떠올려보려고 애를 쓴다. 전투에 들어가기 직전의 병사들은 진흙 또는 자신들의 분대장에 대해 얘기한다.
셰익스피어의 기억 타자,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우리는 각기 서로의 캐리커처적인 복사였다.
셰익스피어의 기억 타자,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내 나이에 이르면 사람들은 거의 시력을 잃게 되지. 눈앞에 노란 빛깔과 그림자들과 빛들이 어른거리게 돼. 하지만 걱정하지 말아. 점진적인 시력 상실은 비극적인 일이 아니니까. 그것은 마치 여름밤이 오는 것과도 같지.
셰익스피어의 기억 타자,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그는 나를 꿈꾸었다. 그러나 그는 나를 명확하게 꿈꾸지 않았다.
셰익스피어의 기억 타자,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어떤 사람이 말하는 것과 꼭 일치하는 것은 아니잖는가.
셰익스피어의 기억 울리카,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나는 뛰어난 관찰자가 아니다. 따라서 나는 조금씩 조금씩 그런 것들에 대해 발견하게 되었다.
셰익스피어의 기억 울리카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나는 내가 이미 울리카에게 사랑에 빠져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때 나는 그녀 외에는 누구도 내 곁에 있기를 바라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셰익스피어의 기억 울리카,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나이가 한참 든 독신자에게 사랑의 도래는 더 이상 기대되지 않는 선물이다. 기적은 조건을 제시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셰익스피어의 기억 울리카,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나는 그녀에게 나를 사랑하는지 묻는 실수를 범하지 않았다.
셰익스피어의 기억 울리카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나는 이 순간이 영원히 지속되었으면 하는 생각이오." 내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영원히'라는 말은 인간들에게는 허용되지 않는 말이에요."
셰익스피어의 기억 울리카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타자>를 읽고, 화제글을 본 후에 다시 보았는데요, 저는 이야깃속에서 이것이 꿈속의 꿈이며, 또다른 꿈이 아닐까, 하는 식의 해석도 가능하다고 느꼈습니다. 1969년의 보르헤스가 지금 현실이라고 느끼는 것 역시 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인데요 그것은 마지막 순간 1969년의 보르헤스가 한 말이 단서가 됩니다. "내 나이에 이르면 사람들은 거의 시력을 잃게 되지. 눈앞에 노란 빛깔과 그림자들과 빛들이 어른거리게 돼. 하지만 걱정하지 말아. 점진적인 시력 상실은 비극적인 일이 아니니까. 그것은 마치 여름밤이 오는 것과도 같지." 저는 이 말을 단서로 삼아서, 여름밤 - 청춘 이라고 생각을 했는데요, 그는 자신의 꿈과 같은 청춘(여름밤)을 지금 다시 느끼는 일종의 꿈 을 꾼다고 보았습니다. 그렇기에 꿈속에서 존재할 리 없는 지폐를 과거의 자신이 보았고, 그것을 찢었고, 자신의 현재보다 더 미래의 모습인 자신을 미리 보기를 무의식 중에 거부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느낌이었달까요. 즉, 지금 과거의 자신을 만나는 꿈속 미래의 자신 역시 일종의 타자인 셈이죠.
그렇군요. 자기 역시 타자였다는 말씀이 기억에 남네요. 한편, 공지의 규칙을 다시 한번 확인해주시고 [이 대화에 답하기 기능]을 활용해주세요. 그래야 나중에 읽는 사람도 대화 타래의 흐름을 볼 수 있으니까요.
아앗, 공지를 열심히 본다고 봤는데 제대로 이해를 못했나 봅니다! 지금이라도 같은 내용 글타래로 이어놓겠습니당! 지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넵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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