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인생의 이야기에서 루이스 뱅크스는 페르마의 원리와 햅타포드B를 통해 생각하는 방식을 바꾸고 미래를 알게됩니다.
살아가면서 어떤 선택들에 대해 돌아보기도 하고 또 다음엔 어떤 선택을 할지 고민하는 과정에서 누군가 이쪽이야, 이걸 선택해, 바로 저기, 이런식으로 힌트를 주면 참 좋겠다, 라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영화를 보면서도, 또 다시 책을 읽으면서도 비슷한 생각과 감정을 느끼게 되네요. 미래를 알고도-아이가 죽는다, 사랑했던 사람과 헤어진다 등- 동일한 선택을 하는 주인공의 사유방식에 감탄하고 존경하면서도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라는 양가적인 생각을 하게 됩니다. 동시적 의식의 맥락에서 보면 자유는 의미가 없고 강제 또한 의미를 갖지 않는다, 라고 했는데 정확히 어떤 말일까요? 또 수행문으로서만 발화되는 햅타포드의 언어를 우리도 사용할 수 있을까요? 어떤 수련의 과정이 필요한 걸까요? 저는 테드 창의 소설 속 수학, 과학적 지식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느끼고 있지만^^ 삶에 대한 작가의 어떤 일관된 태도나 세계관이 참 좋습니다. 그래서 제 삶에도 끌고와서 대입해보고 싶은데, 그러려면 더 정확히 읽고 이해하는 과정이 필요하겠구나, 라는 생각을 이번 모임을 통해 하고 있습니다.
[SF 함께 읽기] 당신 인생의 이야기(테드 창) 읽고 이야기해요!
D-29

jjaann
소유
@jjaann 님께서 인용 두 부분을 해 주셔서, 그 문장들을 새롭게 읽어 봐서 좋았습니다.
햅타포드들이 수행문으로만 언어를 발화하는 이유는 그들이 동시적 인식으로 삶을 통째로 인식하기 때문에, 이미 다 아는 것을 실현하는 것이 언어여서일테고, 사고와 언어의 관계에 관심 많는 테드 창님이 이 부분을 그들의 언어가 깊은 관련이 있다고 하고 있지요. jjaann님께서 ‘수련’이 필요한 걸까요? 라 얘기해 주셨는데, 선형적 언어에 익숙한 우리가 이걸 어느 정도라도 실천해 보려면 모종의 훈련이 필요할 것도 같아요. 직관적 세계 인식? 통째로 보려는 노력?(명상처럼 말이죠.)
그리고 자유가 의미가 없는데 강제도 아닌 이유는, 이렇게 통째로 아는 세상을 완전히 수용하기 때문인 것 같아요. 전후를 동시에 통째로 안다는 것은 곧 ‘그럴 수 밖에 없다’는 걸 아는 걸 테니까요. 이 부분은 정말 생각해 볼 거리인 듯요!
저도 이 아름다운 이야기 속 삶의 방식을 제 삶으로 끌어오고 싶네요. 이 책에서 이 소설이 저에겐 아름답고 감동적인, 제일 마음에 드는 작품이었어요.

흰벽
루이스는 헵타포드의 언어를 배움에 따라 생각하는 방식이 저절로 바뀐 거라고 생각해요. 언어는 사고의 수단인 동시에 사고방식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헵타포드의 언어를 안다는 것은 헵타포드의 사고방식을 익히는 것인데 헵타포드의 언어는 말을 시작할 때 이미 모든 내용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 발화하는 형식이기에 결국 헵타포드는 앞으로 일어날 일을 미리 알고 있다는 거죠. 그게 아마 '동시적 의식'인 것 같아요. 그러므로 동시적 의식의 맥락에서 보면 자유는 의미가 없겠죠... 왜냐하면 이미 일어날 일을 알고 있고 그대로 수행하게 되어 있으므로. (인용해 주신 '세월의 책'처럼요.) 그리고 세월의 책을 읽는다는 것은 이미 일어날 일을 아는 동시에 아는 대로 수행하게 되지만 그것이 강제가 아니라는 것, 그냥 선험적으로 아는 것일 뿐이라는 것. 그래서 강제도 의미가 없다고 한 게 아닐까 합니다. 결국 헵타포드는 일어날 일을 모두 알고 있기에 그들이 하는 모든 말은 수행문인 거죠....
우리도 루이스처럼 헵타포드의 언어를 익히면 동시적 의식을 가질 수 있을 텐데... 그럴 수가 없네요... ㅎㅎㅎ
소유
저의 해석(감상문)을 올려 봅니다. 좀 길어서 민폐가 될 수도 있겠는데요.. 안 읽으셔도 됩니다.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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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 좋다. 감동.
외계인들이 선물하고 간 것은 '헵타포드B'였고, 그것은 예를 들어 루이즈에게 전달되었다. (아마 다른 몇몇 언어학자도..)
루이즈는 외계인의 언어, 사고를 체득한다. 그래서 그것으로 산다.(살아낸다.-수행performance)
이 소설을 이해하는 것은 독자도 그것을 체험하는 것이다. 루이즈가 '헵타포드B'를 체득하여, 사고도 변환되어 그렇다면,(사고에는 기억, 세계관, 운명 수용, 체험 등이 포함된다.) 독자는 이야기를 통해, 이야기를 머리가 아닌 몸으로(?) 읽으며 그러하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유홍준이 유행시킨 말이 문득 생각났다. 이 말을 이 소설에 적용하자면, '사랑'은 애정을 뿜뿜하는 것이 아니라, '수용'이다. 이 '완전한 수용'이 전체로서의 세계를 동시에 알고, 결과를 알면서 과정을 수행하는 것이며, 이때 보이는 것은 자유의지를 체험하는 선형의 사건 진행이 아니라, 전체의 세계이다. 있는 그대로 통째의 세계. 루이즈는 헵타포드의 문자 언어를 완전히 체득하지는 못하여(우리 인간의 선형적 언어에 여전히 물들어 있기에) 가끔씩 미래 순간을 문득 문득 아는 듯이 그려져 있다. 물론 미래에서 과거를 감전되듯 알기도 하고.(논 제로섬 게임) 그리고 후반부에 헵타포드들이 떠나갈 때, 연극을 수행하듯 정해진 것들을 정확하게 알면서 수행하고 있는 모습이 거의 순간 순간 그렇게 그려져 있기도 하다. 그리고 독자도 이 이야기를 몸으로 흡수하듯 읽었다면, 같은 체험을 하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너'를 사랑하는 루이즈의 마음이 이 소설을 따뜻하게 감싸고 있다. 이 고통과 슬픔이 모두 사랑이라는 한 단어의 일부인 것처럼(거대한 한 원을 그리고 있는 헵타포드의 문자처럼), 그래서 이 문장(문단)의 모든 요소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쳐 서로를 굴절시키고 있듯. -- 또한 이 소설에 나오는 '너'에게 말하는 루이즈의 모든 말들이 그렇게 독자에게 경험된다. 아름답게. 그래서 삶이 선물인 것이다. 헵타포드들이 자신들의 문자와 문자에 담긴 통째로 보고 그대로 살아가는 수행을 선물로 주었듯이. 루이즈의 문장들은 그렇게 독자에게 체험된다.(선물로)
이 소설에는 두 가지 서술 방식이 있다. 우선, 루이즈가 외계의 언어를 공부하도록 부름받고, 게리를 만나고, 게리와 '너'를 얻는 밤으로 죽 흘러가는 일직선의 서사.(이 부분은 언어도 순차적이다.) 그리고 그 사이 사이에, 과거, 현재, 미래가 섞이고, 또 그것들끼리 서로 간섭하며, 언어적으로도 대화체와 과거에서의 미래형(짐작형)등의 부드럽게 섞이는 형태로 흘러가는 원형적 서사. 이 둘은 자연스레 섞이며 흘러가고 있다. 예전 어느 순간 읽을 때에는, 일직선으로 진행하며, 언어면에서도 '~다'로 직선적으로 서술되는 부분이 딱딱하고 경직되게 느껴진 때도 있었는데, 오늘 보니 둘 다 좋다. 각 부분은 다른 종류인 그 부분들을 서로 아름답게 만들어 주고 있다. 이리하여 이 세상은 완벽한 걸까.
어쨌든 "세월의 책"에는 '당신의 이야기'가 처음부터 끝까지 쓰여 있는데, 그 이야기를 알게 되는 순간, 그 이야기가 진실이 아니게 되는(즉 자유의지에 의해 변형된) 모순이 있다, 그렇다면 특별한 사람만 그 이야기책의 독자일까? 라고 루이즈는 말했다가, 후반부에 다시 "세월의 책" 이야기가 나오면서, '당신의 이야기'를 알게 된다 해도, 미래를 아는 사람들은 미래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하고 있다. 이것도 너무 아름답다.(좋다.)
어쨌든 이 소설은 다소 체험하는 소설이라 할 수 있다. 어느 정도는 이해하는 소설이면서. (이건 마치 소설 속 루이즈가 어느 정도는 선형적 사고를 하면서, 또 일부 비선형적, 전체적, 체험적 사고를 하는 것과 같다.)

흰벽
저도 이 소설집 전체에서 이 소설이 가장 좋아요. 자세히 풀어주신 소유 님의 글, 감사합니다.
저는 예전에 이 소설에 대해 생각을 정리해서 그믐 블로그에 올렸었어요. 그것도 공유해 볼게요~ 아래 링크입니다.
https://www.gmeum.com/blog/12891/4404
소유
오 긴 의견은 이렇게 블로그에 쓰면 되는 것이었군요!ㅎㅎ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밑줄 긋고 싶은 부분이 많았네요. ‘자유의지는 운명에 반하는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미래를 아는 것이 그렇게 살아야 할 의지를 불러오는 것이다’, ‘그들은 보기 위해 왔다.~그러니 그들이 ‘지독히도 호기심이 없을’ 수밖에’, ‘인간은 죽을 걸 알면서도 사는 게 아니라 살아야만 비로소 죽을 수 있는 존재.’ 자유의지와 운명, 살아가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하는 감상이네요.
우리도 ‘보기 위해’, ‘실제로 살아내기 위해’(수행, 경험, 실제화) 태어난 게 아닌가 싶어집니다.
한 가지 덧붙이는 제 생각은, 최소 혹은 최대에 대한 것인데, 빛의 경로에 대한 그 방정식(이름 까먹음)이 특이하게도 최소 혹은 최대를 지향한다 했고(우리에겐 그게 정반대인데 빛에게는 그게 같다는 것) 루이즈가 마지막에 내 삶이 최소를 향할까? 최대를 향할까? 라고 자문했는데, ‘경험하기 위한’(보다, 수행하다와 같음.) 삶이라면 그 둘은 같은 게 아닐까 싶어요. 그래서 루이즈는 질문은 했지만 어느 쪽이 더 좋다고는 판단하고 있진 않을 것 같아요. 저도 최소 혹은 최대를 모두 반기는 ‘경험하는 자’의 삶을 살고 싶네요.

흰벽
아, 소유 님의 덧붙인 의견이 매우 와닿네요. '최소이든 최대이든, 경험이라는 면에서 그 둘은 같은 것'! 마치 손등과 손바닥처럼 말이죠...

김새섬
블로그 글 잘 읽었습니다.
너무 좋은 것을 받은 뒤 그것을 빼앗겼을 때의 상황은 극대화일까요? 극소화일까요? 우리들의 앞날에도 앞으로 많은 기쁨과 그보다 더 많은 슬픔이 있겠지요. 흰벽님의 글을 읽으며 기쁨을 기쁨대로 또 슬픔을 슬픔대로 온전히 받아들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네요.

흰벽
기쁨도 슬픔도 있는 그대로 온전히 받아들인다는 마음가짐… 삶을 사는 데 매우 큰 힘이 될 것 같아요.

흰벽
'외계인들이 선물하고 간 것은 헵타포드B였다' 오, 저는 이렇게는 생 각 못했었네요...! 과연, 헵타포드B를 통해 완전히 새로운 시간관? 사고방식? 을 선물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루이즈가 헵타포드B를 습득함으로써 일반적인 지구인들과는 다른 시야를 갖게 된 것, 그것은 '환희의 극치'인 동시에 '고통의 극치'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구요. 그리고 '루이즈의 문장들이 선물로 독자에게 체험된다'는 설명도 지금 다시 읽으니 이제서야 눈에 들어옵니다. '선물'이라는 키워드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고 넘겼었는데... 뭔가 소설의 의미를 확장적으로 이해하게 되었어요!
소유
영화에는 헵타포드의 선물이라고 나왔던 것 같아요. 루이즈가 배운 언어가... 거기서 얻은 아이디어이기도 하지만, 헵타포드가 왜 왔을까? 생각해 볼 때 단지 '보기 위해' 왔다기보다 정말 '선물하러' 오지 않았을까 싶었어요. / 외계인이 인류에게 문명을 전해주었다는 설은 꽤 있기도 하지요. 영화"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에도 그런 아이디어가 있고요. 이런 설도 저는 재미있다고 생각합니다.^^

ssaanngg
헵타포드 B를 배워,
미래를 알지만 수행적으로 살아가는 루이즈의 삶은 환희의 극치를 향해 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게리가 떠나고 사랑하는 딸도 떠나간다는 사실을 알고서도 말입니다.(마음은 아프겠죠...)
헵타포드 B를 통해 극적으로 표현하였지만, 실제 우리 삶에도 미래를 다녀 온 듯 하게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죠.. 사람 보는 눈을 가진 사람들이 있어요.
춤, 무도, 음악에서 키우려는 어떤 역량도 그와 비슷하지 않을까 합니다. 신체적 삼매를 하는 훈련들, 관절의 움직임 하나까지 어떻게 움직이는지 인지하면서 행동(명상 기법)하다 보면 어떤 쾌를 느끼지 않나 생각합니다. 음악을 듣다 보면 과거와 미래로 음악이 들리고요. 그리고 흥얼거리고..
그리고 우리는 기본적으로 어렸을 때부터 그런 훈련을 하며 살아 가고 있는 것을 소설에서도 넌지시 표현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순차적인 의식 양태 에서도요.)
어린이 언어 습득에 관한 구절이요..
honored, maid of honor, made of honor(165page)
이집트어 ken은 작다, 크다 두가지 뜻을 함께 내포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한 예는 무지기수로 많고요. 그때 그때 가장 적절한 한가지 뜻을 지닌 기호를 사용하면 될 터인데, 인간은 그러지 않고요. 그때 그때 파악해야 하는 혹독한 시험들이 가득합니다. 이런 훈련이 되어 있지 않으면 사회생활이 힘들어 지기도 합니다.(우치다 타츠루의 소통하는 신체에서 발췌했습니다.)
이런 훈련이 잘 되어 있는 사람은 선택에 있어서도 왠지 이쪽이 더 나은 선택인 것을 미리 아는 사람처럼 행동하죠..어떻게 보면 이 소설에서 표현하듯이 연극적이죠.
우리는 뭔가가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가 될 수 밖에 없다. 되어야 하는 삶은 지금의 삶을 고통스럽게 만들고 될 수 밖에 없는 삶은 지금의 삶을 환희의 극치로 만들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베가본드 만화책 보면 타쿠앙 스님이 비 속에서 외치는 말이 생각났어요.
'사람의 운명은 결정되었지만, 그렇기에 자유롭다.'
문학에서 겉으로는 모순적으로 보이지만.. 역설적인 문구들이 넘치죠..

소통하는 신체 - 다른 사람의 입장에 선다는 그 위태로움에 대하여우치다 선생이 모든 책에서 던지는 이야기는 결국 커뮤니케이션론이라고 할 수 있다.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과도 소통할 수 있는 힘을 어떻게 기를 것인가 하는 이야기다. 40년이 넘도록 날마다 합기도를 수련하는 것도, 레비나스 철학을 공부하는 것도 거기에 맥이 닿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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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
‘되어야 한다’의 고통과 ‘될 수 밖에 없다’의 환희로 대조하니 이해가 더 잘 갑니다.ㅎㅎ 우치다 타츠루의 책도 관심이 가네요. 저도 우치다의 다른 책에서 무도를 하는 사람들이 미래를 읽는 듯 검을 쓰는 이야기 읽은 거 생각나고요..

ssaanngg
아까 올려주셨었는데, 내리셔서 제가 다시 올립니다.^^
저.. 우치다 광팬입니다.

배움은 어리석을수록 좋다 - 수업론 : 난관을 돌파하는 몸과 마음의 자세각계 명사에게 ‘다음 세대에 꼭 전하고 싶은 한 가지’가 무엇인지 묻고 그에 관한 응답을 담는 ‘아우름 시리즈’의 다섯 번째 주제는 ‘수업(修業)’이다. 수업(修業)의 사전적 의미는 ‘기술이나 학업을 익히고 닦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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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
ㅎㅎ 우치다는 광팬 할 만한 작가죠~. 괜히 내렸었네요. 이 책도 무척 좋았습니다!

흰벽
어쩜 이렇게 다들 책을 많이 읽으시나요~~ 우치다 타츠루, 듣기만 하고 아직 한 권도 읽어보질 못했는데 두 분이 추천해 주시니 관심책에 담기 바쁩니다 ㅎㅎ

흰벽
저는 헵타포드 언어를 모르니 동시적 의식을 가질 수 없다...고만 생각했는데, @jjaann @소유 @ssaanngg 님의 대화를 읽다 보니, 제가 너무 수동적으로 사고했나 라는 생각이 드네요.
jjaann 님이 수행문으로서의 언어를 의식적 노력으로 습득할 수 있을까 라고 물어주시고, 이에 대한 답으로 이 소설이 '체험하는 것'이라는 소유 님의 해석, 그리고 실제 미래를 다녀오는 듯 행동하는 사람들, 춤, 무도, 음악에서의 역량 습득, 우치다 타츠루 및 배가본드까지 끌어와주신 ssaanngg 님의 말까지... 이 일련의 대화가 제 생각을 좀 깨어나게 하는 느낌이에요. 세 분 모두 감사해요~
화제로 지정된 대화

흰벽
@모임
입추가 지났다고 아침 더위가 조금 덜한 것 같습니다. 오늘까지 '네 인생의 이야기'를 읽는 날이네요. 저는 이 소설집 전체에서 이 소설을 가장 좋아해요. (아마도 많은 분들이 그러실듯 합니다^^)
이 책은 단편집이니까 꼭 순서대로 읽거나 완독하지 않아도 골라 읽는 것으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단 한 편만 골라 읽는다면 바로 '네 인생의 이야기'랍니다! 혹시 일상이 바빠 책을 못 잡으시는 분들은 여가가 생기시면 순서와 상관없이 이 소설을 꼭 읽어보시길 권해 드려요.
내일부터는 '일흔두 글자'입니다. 이건 또 완전 새로운 분위기의 소설이죠. 생각해보면 이 단편집에 실린 작품들은 하나같이 분위기나 배경, 소재가 제각각이라서 정말 매력적 인 것 같아요.
오늘도 즐거운 독서하시고 수다 나눠주세요.

오도니안
@jjaann @ssaanngg @소유 @흰벽 여러 분들의 글을 읽고 제 생각도 보태 봅니다.
<세월의 책> 이야기는 자유의지의 역설을 표현하는 예화인 것 같아요.
세상의 모든 일이 인과관계를 가진다는 결정론을 받아들이면, 모든 일은 필연적인 것이고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할지도 이미 정해진 일일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가 있다는 것도 주관적인 의식 속에서 자명하게 느껴지죠.
제가 짜장면을 먹을지 짬뽕을 먹게 될지는 필연적인 인과관계에 따라 이미 정해진 일이겠지만, 지금 이순간 저에게 선택의 자유가 있다는 것도 자명하게 느껴집니다.
자유의지란 존재하는 것일까요? 삶은 필연적인 운명을 따라가는 것일까요, 우리가 자유롭게 선택한 결과일까요?
우리는 자유를 중요한 가치로 생각하지만, 자유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생각해 보면 혼란스러워질 때가 있습니다.
저 같은 경우엔 옷가게에서 옷을 사려고 하는데 어떤 옷이 마음에 드는지 결정하기 힘들 때면 무척 부자유스럽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하지만 두 가지 중에서 선택하려고 고민하다가 하나가 불가능하다는 것이 드러나서 다른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게 되면 오히려 자유로워지는 느낌입니다.
저는 ssaanngg님이 인용해 주신 '사람의 운명은 결정되었지만, 그렇기에 자유롭다.'라는 말에 정말 공감이 갑니다. ^^
아마 이 말이 마음에 드는 분이라면 스피노자도 좋아하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정확하지는 않아도 제가 이해한 바에 따르면 스피노자에게 자유란 필연성을 이해하고 그에 따르는 것입니다. 운명론으로 오해받기도 하지만 스피노자가 말하는 필연성이란 자기 자신의 본성과 외부를 함께 아우르는 것이죠.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확실하게 알고 있다면 우리는 선택의 자유라는 것을 느끼지도 않고 원하는 것을 선택할 것입니다. 역설적으로 우리가 선택의 자유를 느끼는 것은 무엇이 좋거나 옳은 것인지 확신할 수 없는 경우이죠. 우리가 선택의 자유를 의식할 필요도 없이 당연히 선택해야 할 것을 선택하며 살아갈 수 있다면, 우리 눈 앞에 있는 대상에만 집중하는 충실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자유라는 개념을 떠올릴 필요도 없이 필연에 따라 사는 삶이 가장 자유로운 삶이겠죠.
동시적 의식이란 그러한 필연을 자동적으로 인식하는 것이고, 그러한 의식을 가진 사람의 삶이란 선택과 필연이 서로 분리되지 않는 삶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자신의 삶 전체와 죽음까지 과거를 기억하듯 인식하면서 사는 삶이란 어떤 것일까요?
현실적으로 그런 삶은 불가능하죠. 우리는 미래를 미리 알 수 없고 무엇이 좋고 나쁜지, 옳고 그른지 확신하지 못하고 항상 의심을 품고 살아가야 하니까요.
내게 주어진 숙명을 찾아 필연적인 삶을 살고 싶은 욕구와 나는 나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피할 수 없다는 의무감 사이에서 정답을 찾기가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스피노자의 이성이나 노자가 예찬하는 물과 같은 자연스러움이 방편이 될 수 있겠지만 적용하려다 보면 걸리는 부분들이 생깁니다.
그렇지만 '동시적 의식'에 가까워지기 위한 지침들을 정하거나 자기 나름의 수련 방법을 배우고 익히는 것은 삶을 살아가는 기본 모드에 영향을 미치는 아주 중요한 과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ssaanngg
루돌프는 나를 바라보면서 진지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형은 강한 사람입니다. 형은 긍정적으로 도달한 그곳에 나는 부정적으로 체념하고 온갖 생명력을 소모한 뒤에야 도달하는 것입니다. 형이 의지를 갖고 노력하여 수행하는 일을, 나는 이 세상 피곤한 것들에 남겨져 있는 크나큰 무에의 귀환이라는 방법으로 수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형의 경우에서도 지고의 자유로운 감정은 자기 자신이 의지한 속박 속에 있기 마련이지요. 진정한 자유는 모든 가능한 것들 중에서 참으로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선택하여 그것에 따르는 자기 긍정 속에 있으니까요."
"물론이지." 하고 나는 말했다.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이 자유는 아니다. 자유는 우리 인생의 최고 순간에 우리에게 구원으로 열려지는 것으로서, 그때의 우리 속마음은 무엇인가를 하고 싶다는 상태에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 여기에 내가 있다는것, 그리고 여기서 나는 이렇게 할 수밖에 없다는것-그런 상태인것이다. 결국 인간에게 있어서 참다운 자유란 진정으로 자기가 원하고 있는것을 따른다는 것이지. 인간이 자유로우면 자유로울수록 그런 의미로서의 운명에의 귀환이라는 뜻이 강해지는 것이다."
루 살로메의 <선택된 자들의 소망> 에서 발췌 했어요.
이것도 비슷하지 않을까 해서요~

선택된 자들의 소망"한 남자가 루와 정열적으로 교제할 수 있다면 9개월 후쯤 그 남자는 한 권의 책을 저술할 수 있다"는 말의 주인공인 루 살로메. 그러나 스스로 훌륭한 작가이자 정신상담가이기도 했던 그녀의 중편소설과 산문들을 모은 책으로 광범위하고 신선한 살로메의 지적세계를 알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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