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란 쿤데라 <농담>

D-29
3부 8장까지 읽었습니다. 루드빅의 오래된 과거와 길고 복잡한 서사를 하나하나 읽어내려가는 것이 재미있네요. 전혀 감이 잡히지 않던 제목의 의미가 참 궁금했었는데, 예상보다 일찍 초반에 속시원히 밝혀져서 좋았습니다. 루치에를 우연히 알게 되고, 첫눈에 반하고, 사랑하게 되는 과정의 이야기는 정말이지 독자를 빠져들게 만드는 표현들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아요. 그 전과의 재질 자체가 확연히 달라, “바보 같은 농담이나 즐기는 치명적 성향”을 지녔다던 주인공이 완전히 딴사람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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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됐거나 젊은이들이 연기를 하는 것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다. 삶은, 아직 미완인 그들을, 그들이 다 만들어진 사람으로 행동하길 요구하는 완성된 세상 속에 턱 세워놓는다. 그러니 그들은 허겁지겁 이런저런 형식과 모델들, 당시 유행하는 것, 자신들에게 맞는 것, 마음에 드는 것, 등을 자기 것으로 삼는다 - 그리고 연기를 한다.
농담 128-129쪽, 밀란 쿤데라 지음, 방미경 옮김
거의 그녀를 다시 부를 뻔 했다. 그녀를 쫓아낸 바로 그 순간 벌써 그녀가 그리웠고, 루치에가 없는 것보다는 옷을 입고 저항하는 루치에와 함께 있는 것이 천 배는 더 낫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농담 165쪽, 밀란 쿤데라 지음, 방미경 옮김
그리고 나는? 역할이 하나도 아니고 여러 개이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나는 혼란스러워하며 이 역할 저 역할을 왔다갔다하던 끝에, 결국 어디로 도망쳐야 하나 어쩔 줄 모르다가 붙잡힌 것이었다. 젊음이란 참혹한 것이다.
농담 130쪽, 밀란 쿤데라 지음, 방미경 옮김
루치에를 통해서 나는 동료들도, 하사관들조차도 가지지 못한 풍요로움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행복하고 자랑스러웠다. 나는 사랑받고 있었던 것이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보란듯이, 그렇게 사랑받고 있었다.
농담 152쪽, 밀란 쿤데라 지음, 방미경 옮김
3부 끝까지 읽었습니다. 이상하게도 루드빅이 20대 초반의 젊은이라는 사실을 자꾸 잊게 됩니다. 그 사실을 의식하고 읽으면, 그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너무나 자연스러운데 말이죠. 3부 전체적으로는 당 퇴출 후 “텅 빈 시간”을 살게 되고, 또 루치에로 인해서 그 시간이 어떻게 채워지는지 등등, 시간이 마치 공간처럼 인식되는 표현들이 좋았고, 젊음의 어리석음와 실수들을 “연기” “역할” 같은 키워드로 풀어내는 부분이 좋았어요. 루치에에 대한 실수(?)와 이후 이별하게 되는 장면들은 몰입도 최상이었고 그래서 덩달아 많이 슬펐어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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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그저 민속에 미쳐버린 사람인 것만은 아니란다. 좀 그런 면도 있기는 할 거야.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기벽을 넘어서서 보다 깊은 어떤 곳을 향하고 있지. 민속 예술을 통해서 아빠는 수액이 올라오고 있는 소리를 듣는 거야. 이 수액이 없다면 체코 문화는 그저 말라비틀어진 나무에 지나지 않게 되어 버리고 말 거란다.
농담 186쪽, 밀란 쿤데라 지음, 방미경 옮김
그들은 우리가 존재할 권리가 없으며, 단지 체코어를 말하는 독일인일 뿐이라고 믿게 만들어놓으려 했다. 우리는 우리가 존재했으며 지금도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해두어야 했다.
농담 187쪽, 밀란 쿤데라 지음, 방미경 옮김
루드빅의 말을 들으며 우리의 감정은 감탄과 반감이 뒤섞여 있었다. 그가 너무 자신만만한 것이 거슬렸다. 그는 그 시절 모든 공산주의자들이 과시하고 다니던 얼굴을 하고 있었다. (…) 우리에게 그는 언제나 좋은 녀석, 매사에 빈정거리는 녀석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거리낌없이, 거창한 말들로 열변을 토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 우리 중에는 공산당원이 아무도 없는데 우리 악단의 운명을 당연한 듯 곧바로 공산당의 운명에 결부시켜 말하는 것도 분명 언짢았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의 이야기는 우리의 마음을 끌었다. 그의 생각들은 가장 깊숙이 감추어진 우리의 꿈과 만나고 있었다. 그 생각들은 갑자기 우리를 위대한 역사의 차원으로 높이 올려놓고 있었다.
농담 200쪽, 밀란 쿤데라 지음, 방미경 옮김
우리 음악은 오늘날의 삶 속으로 들어와 이 현재의 삶과 함께 발전해야 한다. 재즈가 그랬던 것처럼, 원래 특성을 견지하면서, 자기 고유의 멜로디와 리듬은 유지하면서, 우리 음악은 늘 새롭게 변화하는 자기 스타일의 양상을 발견해야만 한다. 어려운 일이다. 막중한 과업이다. 오로지 사회주의 안에서만 성취될 수 있는 일이다. - 사회주의가 거기 왜 들어가는데? 우리가 항변했다.
농담 202쪽, 밀란 쿤데라 지음, 방미경 옮김
꽃을 위해서인가요, 열매를 위해서인가요? (…) 누구나 다 알지요, 아름답고 찬란하게 꽃은 피어나고 우리를 기쁘게 한다는 것. 하지만 꽃은 달아나고 열매가 오지요.
농담 211쪽, 밀란 쿤데라 지음, 방미경 옮김
우리 삶의 모든 중대한 순간들은 단 한번뿐,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이렇게 다시 돌아오지 못함을 완전히 알고 있어야만 인간은 인간일 수 있다.
농담 213쪽, 밀란 쿤데라 지음, 방미경 옮김
이 마술적인 순간부터 그녀의 매력은 나무에서 잎이 떨어지듯 그녀에게서 떨어져 나가리라 생각하였다. 그녀에게서는 곧 떨어질 나뭇잎의 모습이 보였다. 이미 나뭇잎의 추락은 시작되어 있었다. 나는 그녀가 이제 단지 한 송이 꽃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며, 지금 이 순간에 벌써 앞으로 도래할 열매의 순간이 그녀 속에 현전한다고 생각했다.
농담 214쪽, 밀란 쿤데라 지음, 방미경 옮김
4부를 읽었습니다. 야로슬라브라는 또 다른 사람의 시점으로 풀어내는 이야기가 루드빅이라는 인물을 더 잘 이해하게 해 줍니다. 개인적으로 이런 탄탄하고 입체적인 서사가 너무 좋네요. 루드빅의 인생이 어떻게 변해 가는지 알아 갈수록, 그럴 수 밖에 없는 시대를 살았던 젊은이들이 참 안타까워요. 그저 개인적인 좋지 않은 사건/기억 내지는 개인 취향에 대한 문제 정도가 아닌, 그 모든 순간순간이 당과 공동체와 국가와 연결지어서 볼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이… 특히 그 어떤 것으로부터라도 해방되고 자유해야 하는,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이 존중되어져야 하는 예술이라는 영역에서까지 말이죠. 지구상 어디에나 이런 시대는 있었던 같습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고요. 4부를 읽고난 후 다시 3부 초반의 루드빅 시점에서 잠깐 언급되었던 야로슬라브의 결혼식 장면도 다시 읽어 보았는데, “나는 클라리넷을 집어들 수가 없었다. 그리고 느꼈다. 민속 의식이라는 이 모든 난리 법석이 얼마나, 얼마나, 얼마나 역겨운가를…” (72쪽) 이 부분이 전보다 더 와닿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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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마음속으로, 내가 그토록 루치에를 사랑했어도, 그녀가 그렇게 완벽하게 “유일한” 존재였어도, 그녀는 우리가 서로 알게 되고 매혹되었던 그때의 “상황”과 떼어놓을 수 없다고 생각하곤 했다.
농담 231쪽, 밀란 쿤데라 지음, 방미경 옮김
나는 한 여자를 우리 두 사람의 이야기의 등장 인물로서 사랑한다. 햄릿에게 엘시노어 성, 오필리아, 구체적 상황들의 전개, 자기 역할의 “텍스트”가 없다면 그는 대체 무엇이겠는가? 무언가 알 수 없는 공허하고 환상 같은 본질 외에 그에게 무엇이 더 남아 있겠는가? 마찬가지로 루치에도 오스트라바의 변두리가 없다면, 철조망 사이로 밀어넣어 주던 장미, 그녀의 해진 옷, 희망 없던 내 오랜 기다림이 없다면, 내가 사랑했던 루치에가 더 이상 아닐지도 모른다.
농담 232쪽, 밀란 쿤데라 지음, 방미경 옮김
내가 얼마나 사람들의 말을 믿지 않는가 하면, 누가 자기는 무어가 좋고 무어가 싫다는 등의 이야기를 내게 털어놓으면 그것을 절대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거나,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사람이 드러내고 싶어하는 이미지가 무엇인지 알려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할 정도이다.
농담 257쪽, 밀란 쿤데라 지음, 방미경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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