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이 저편

D-29
한 우물을 판 작가를 존경하겠다 작가가 방송에 나와서 까불면 전에 그의 작품으로 좋아했던 것도 물리고 싶고 그가 내놓는 작품에서도 이제 진정성이 안 느껴진다. 나도 형편없는 책 5권을 낸 인간으로서 글쓰기가 엄청난 집중력을 요한다는 걸 잘 아는데 그들도 사람인지라 작품에 쓸 에너지를 방송에 나가 입 놀리는 것에 쓰는 것 같아 왠지 읽고 싶은 마음이 싹 달아나게 된다. 배신감도 든다. “속았다. 이용당했다.” 작가는 뭐니 뭐니해도 글로만 자기 생각을 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게 작가의 진정한 본분(本分)이라고. 그래야 작가 아닌가. 만화도 마찬가지다. 방송에 나오면 전의 그의 작품들이 모두 그의 방송 출연에 대한 수단과 방법으로밖에 안 보이기 때문이다. (나는 허영만 만화를 읽은 기억은 없다. 까치의 이현세나 독고탁의 이상무를 보며 고교 시절을 아름답게 보냈다. 내게 진정으로 그 시절 남은 거라곤 그뿐인 것 같다. 그리고 지조(志操)를 지킨 이들을 존경한다. 그들의 길을 기리고, 내 감수성 예민한 시절을 그들의 작품으로 다채롭게 수놓았기 때문이다.) 그러면 도대체가 에너지가 분산될 것이고, 이젠 방송의 달콤한 맛을 봐서 작품 따위는 거들떠도 알 볼 것 아닌가. 단언컨대 그들은 작품으로 왔다가는 다시 방송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게 그들을 이미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방송을 위해 자기 작품을 희생한 꼴이 된 것이다. 독자까지 배신하고 자기들 인기의 도구로 삼은 것이다. 그들은-이렇게 말하고 싶어 하는-예술 작품을 그만 접고 아예 방송 쪽으로 가서 거기에 뼈를 묻어라. 양다리 걸친 채, 저울질하지 마라. 그들에게 묻고 싶다. 과연 어느 것으로 듣고 싶은지, 방송인지, 작가인지 그러나 작품에 소홀할 거면 작가 소리 듣는 걸 이젠 포기하라고 충고해 주고 싶다. 나는 한 우물을 판 작가만 존경한다.
일반인과 할 수 없이 말해야 할 때 말을 잘하든 못하든 그들의 말을 얼른 알아듣지 못할 때에도 직장에서는 말을 섞기가 실은 싫고 말이 안 통한다고 해도 그들과 어쩔 수 없이 대화를 해야만 할 때는 기본과 효율, 상식선에서 하면 된다. 왜냐면 그들은 책을 안 읽어서 기본적으로 나와 말이 안 통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 말은 인간이 추구하는 거의 궁극에 가까운 정치적 올바름(PC)을 향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알아듣건 못 알아듣건 나는 그 말만 하면 된다. 말이 막힐 때는 그 말 중에서 과연 어느 게 PC에 가까운지 나중에 정리하고 그들과 다시 대화에 도전하면 된다. 그러면 나도 떳떳하고 내 PC를 다시 정리하면서 시간 낭비도 안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 세상에서 그나마 PC는 내가 추구하는 이상에 또한 가깝기 때문이다.
나는 꼬여 있다 나는 작가를 열망하고 있어 성격이 약간 꼬여 있고 괴팍하다. 성격이 먼저냐 작가 열망이 먼저냐에서 나는 성격이 먼저라고 본다. 세상과 사이가 안 좋아 성격도 고약하고 못됐다. 나는 사람의 운명은 기질이 많이 좌우한다고 보는데, 이 성정(性情) 때문에 작가가 되는 경우가 많다고 보기 때문이다. 주로 혼잣말이지만, 입도 거칠다. 굳이 고치려고도 않는다. 어느 때는-안 그래도 되는데-일부러 욕을 할 때도 있다. 그의 글에서도 말에서도 <객지>의 황석영처럼 작가는 모름지기 입이 거친 법이고, “그건 솔직함의 방증이다.”라며 좀 한쪽으로 너무 경도된 논리를 편다. 작가는 무엇보다도 자신에게 솔직한 게 가장 중요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욕을 해야 하는데 안 하는 건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그것으로 공연히 엮이기를 피하면서 바람을 이루려면, 사람이 없는 데서 혼자서라도 욕을 실컷 해라. 술도 굳이 끊이려고도 않는다. 술을 별로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이유는 딱히 없는데 다만 단지 작가란 자고로 술을 좋아해야 하고 거기에 곁들여 예쁜 여자가 있어야 한다는 활력을 위한 풍류적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언제 적 얘기를 하는지 모르겠지만, 홍어와 삶은 돼지고기와 묵은지의 삼합(三合)이나 삭힌 홍어와 막걸리라는 홍탁(洪濁)처럼 작가와 술과 여자는 같이 있어야 제맛이라는 거다. 더 그럴듯한 이유를 억지로 붙이면 뭔가 일상을 멈춰 세우고, 자유분방한 상상력과 영감을 얻을 수 있을까 해서 그렇단다. 중국 당나라 시선(詩仙), 이태백(李太白)처럼. 맨정신이 일상과 현실이고, 취중이 무릉도원(武陵桃源)이로다. “그렇다고 치고, 예쁜 여자는 왜?”라는 질의엔, 예쁜 여자(자기 생각에 예뻐야 신이 나서 막 떠들 거 아니냐는 거다. 여기서 또 예쁜 것도 보통 말하는, 일반적 기준이 아니라 자기 취향에 한껏 부합해야 하는, 그래서 남들 눈엔 그다지 예쁘지 않은 여자와도)와 술을 마시며 일상에서의 흔한 얘기가 아닌 인간과 그들이 수놓는 인생에 대해 치열하면서도 차원 높게 논해야 한다는 나름의 침 튀기는 역설(力說) 때문이다. 일각에서, 뭔가 오해의 소지가 있을 것 같아 확실히 밝혀두면, 작가는 술을 매개로(술의 힘을 빌려 자기가 선호하는 사람과 자연스럽고 진솔한 대화를 위해) 호감 가는 여자 사람과 인간과 그들이 꾸리는 세계에 대해 진지하고 폭넓은 대화를 나누고자 하는 것 외에 다른 건 감히 끼어들 수 없다는 거다. 다른 해석은 콘텍스트와 순수성을 이해 못 한 데서 오는 오해로 치부해 버리고 말겠다는 거다. 작가 술 여자 사람 ⇔ 삼합(三合) ⇒ 인간과 삶에 대한 진지하고 깊은 대화 그리고 나는 사람 말을 잘 믿지 않는 편인데, 그나마 작가 말은 어느 정도 믿는다. 이유는, 다음 세 가지 때문이다. 세상엔 일어나지 않는 일은 없다는 걸 체화해 대상을 다 각도로 볼 줄 알고, 그들은 인물을 많이 다뤄 타인에 대한 공감력이 각별하고, 자신이 추구하는 순수를 지향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순수와 본질을 빼면 아무것도 남을 게 없는 작가같이 보이면, 더욱.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이 시(詩는) 학창 시절 교과서에서 배운 생명파, 인생파*시인 청마(淸馬) 유치환의 시, <깃발>의 첫 구절이다. 1936년 일제 강점기에 쓰여진 시로 해방이 점점 멀어져가는 암울한 좌절을 노래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본래 문학 작품은 독자와 시대에 따라 각양각색으로 읽힐 수 있어 누구는 흰 깃발은 평화를,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은 아름다웠던 옛 추억과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내겐, 여기에 하고 싶은 얘기가 다 들어 있는 것 같다. 깃발은 이상향이고 그걸 순수하게 추구하지만 현실적인 고뇌로 그게 만만치 않은 것이다. (깃발은 아우성치며 이상을 향해 펄럭이지만 현실이라는 푯대에 묶여 꼼짝 못 한다.) 그럼에도 좌절에 빠지기보다는 이상은 중요하기에 지치지 않고 추구하기로 다시 마음을 다잡고 이런 순수성과 고결한 이상을 꿈꾸게끔 내게 기회를 준 사람에게 고마움을 표기하기도 하는 그런 시로 읽고 싶다. “아아 누구던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이런 얘기를 하려는 건 아니고, 침묵(沈默, Silence)에 대해 말하려는 것이다. ‘소리 없는 아우성’, 이 표현은 형용 모순이다. 국어 시간엔 이런 걸 역설적 표현이라고도 배웠다. 말이 안 되지만 그 속뜻은 깊은 진리를 품고 있다는. 나는 일부러나 아니면 진짜 별 할 말이 없어서, 또는 약간 낯을 가려서 말을 하다가 멈추는 경우도 많다. 물론 나는 표 안 나게 침묵했지만, 상대는 이걸 잘 눈치채 우리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흐른다고 굳이 지적해 준다. 이 제목처럼 실은 침묵은 더 많은 말을 주고받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말을 하다 멈춰 안 하고 있으면 상대에겐 별별 생각이 다 들게 만든다. 긴장하기까지 한다. 분위기도 어색하고 불편하게 바뀐다. 이런 침묵을 참지 못하는 사람도 많다. 갑자기 침묵에 돌입하면 상대는, 왜 말을 안 하지, 내 말을 곱씹으면서 뭔가 기분이 나빠 그러나, 아니면 자기가 한 말에 대해 곰곰 다시 생각하면서 정리해 보라고 일부러 틈과 시간을 주려는 건가. 아니면 진짜 할 말이 없어 그런가, 그것도 아니면 아까부터 내게 눈을 못 맞추고 목소리도 약간 떨리는 게 낯가림이 심해 그런가. 말을 안 하니 알 수 없는 것이다. 괜히 불안하고 별별 상상을 다 하게 만든다. 내게 뭔가 호감이 있고 설레어 손에서 진땀이 나는지 바지에 자꾸 손을 문대면서 뭔가 내가 오해하지는 않을까, 걱정하는 것 같으면서도 배려하고 친절을 베푸는 모습이 역력하고 귀엽고 해서 내게 이런 생각을 불러일으키게도 만든다. 물론 이런 효과를 노리는 사람도 있다. 침묵 유지로 더 많은 메시지를 전하고 싶은 것이다. 우리 사이의 함의(含意)를 한 가지 말로 쉽게 정의 내리기 싫은 것이다. 솔직히 말을 멈추지 않고 계속하면 그 말로 인해 그 한 가지로 해석되는데, 소리 없는 아우성으로 오만가지의 신호가 둘 사이에 오가게 된다. 소음의 대화보다 침묵은 더 많은 대화 효과를 주고 더 많은 정보가 둘 사이에 아우성치며 오가는 것이다. 또한 제3자가 있을 때 침묵을 지키고 말이 없는 가운데 불립문자(不立文字)로 둘만의 선문답(禪問答)을 주고받을 수도 있다. 상대만이 내 진정한 뜻을, 말이 아닌 침묵으로, 그 뜻이 언어와 문자로는 한계가 있음을 깨닫고 염화시중(拈花示衆), 둘만의 소통을 완성하는 것이다. 말은 오직 그것 한 가지로 뜻을 정해 버리지만, 침묵은 여러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말로는 표현 불가능한 것까지, 전달 가능할 능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20세기 천재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이 지적했듯이,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 미당(未堂) 서정주, 오장환(충북 보은 출신, 1948년 월북), 유치환이 여지에 속함. 이들은 그들 삶의 족적(足跡)으로 인해 안 좋은 소리도 듣지만 어쨌든 여기선 그런 걸 따지려는 게 아니니까.
유전자의 본능과 인간 뇌에 대한 새로운 지식의 발견에 따라 가치관도 글의 방향도 달라진다.
일본은 여자들이 AV에 탐닉하고, 한국은 먹방으로 탐닉하고 있다. 어쨌든 욕구불만을 해소는 해야 하니까.
드라마에서 여주의 친구는 없는 법이 없는데 항상 나오는 법이고, 그 비중도 만만찮다. 왜 여자들은 이렇게 친구가 없으면 못 사는 걸까.
문학상 수상에서 지금은 여자 작가가 많아 남자는 무슨 들러리 같이 안 넣을 수는 없으니까 실력은 안 되지만 안배 때문에 넣는 것 같은 인상이 짙다.
2, 30대 여자는 책을 그런대로 많이 읽는 편이다. 그리고 자기 엄마에 대해 애틋하다. 그들의 마음으로 들어가 자신을 바라보는 글을 얼마든지 쓸 수 있다.
책에서 한가지 소리만 들려 누구든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한다. 우선 자신이 자기 마음에 들어야 남에게 자기를 선보인다. 옷도 남이 이렇게 입는 게 낫다고 해도 그개 정작 자기 맘에 안 들면 그렇게 안 입고 자신이 결국 입고 싶은 것으로 갈아입는다. 남자 작가는 자신이 좋아하는 걸 표현한다, 결국엔. 그러니 그 나이대의 독자가 적어 그의 글은 잘 안 읽힌다. 그러나 2, 30대 여성의 글은 그 글을 선호하는 사람이 많다. 2, 30대 여성이 글을 아무튼 그나마 많이 읽기 때문이다. 2, 30대 여성은-작가는 자존심이 가장 강한 직업군에 속한다-누가 뭐래도 자신이 좋아하고 선호하는 글을 쓰려고 하고 실제 그렇게 쓴다. 그것에 공감하는 사람이 많고 그들은 그나마 넓은 독자층에 속하는 독자들이다. 그들이 그 글에 공감해서 너도나도 읽게 된다. 그 글은 베스트셀러가 된다. 작가는 인기가 더 있어지고 그 힘으로 글을 계속 쓸 수 있고 그 글에 그나마 두터운 독자가 호응해 준다. 그들은 자기들만 만족하게 된다. 글이 한쪽으로 너무 경도된다. 다양한 소리가 나와야 하나 계속 그 누군가의 소리만 들린다. 늙은 70대 남자들의 소리는 안 들린다. 문제다.
소설에 낯선 남자가 등장하면 공포의 대상이고 여자가 등장하면 대개는 좀 일상과 동떨어진 여자가 많다.
내게 맞는 글 내가 보기에 독자의 머리에, 글 내용의 이미지가, 그림이 바로 그려지는 글이 잘 쓴 글 같다. 그 글은 자신에게 맞는 글이기도 하다. 문체에서 독자와 궁합이 맞는다고나 할까. 그림이 안 그려지면 읽기가 싫어진다. 그건 이해가 잘 안 간다는 말이고, 그래, 점점 더 흥미가 떨어진다. 그리고 앞으로의 그림이 점점 더 궁금해지고, 전개가 예상을 뛰어넘는 글이 잘 쓴 글 같다. 그 글은 주변에서 일어날 만한 것이어야 한다. 지역적으로나 시대적으로 딴 세상이면 그 글에 몰입하기가 쉽지 않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 “여기서 이 얘기를 왜 하지?”하며 지금 읽는 문자들이 서로 관련이 없는 것 같게 느껴지면 독자는 곧 그 책을 곧 덮을 것이다.
자기가 주장하는 이상은 다 그럴듯하다. 그러나 현실에선 그것과 반대로 그저 먹고살 궁리만 대부분의 인간들이 한다.
작가는 잘 쓰는 것처럼 이런 수법을 잘 써먹는다. 대화를 하다가 중간에 엉뚱한 소릴 갑자기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호기심을 안 가질 수가 없다.
진실을 알고자 한다면 평범한 정상인은 진실을 말하지 못한다. 그것 때문에 자기에게 소중하거나 자기가 가진 것을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가진 게 별로 없거나 그런 것에 별로 신경 쓰지 않거나 그것이나 현실에서 떨어져, 이상한 사람 취급받는 사람이 바른말을 할 수 있다. 그가 좋은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그는 그것과 상관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가 그나마 진실을 그대로 말할 가능성이 가장 높다. 뭔가 이해관계에서 떨어져 그것에서 한 발 떨어진 사람이 그 속의 진실을 말할 수 있다. 자기는 그것과 별로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내부 고발자에 의한 조직의 치부 폭로나 남한으로의 귀순자에게 북한의 실상을 아는 것과 동시에 그들의 핵심 동기(속사정)를 파악하는 것도 동시에 중요하다. 그들의 주장대로 신빙성을 더하려면 그들의 관련성이 느슨할수록 그들에게 유리하지만 말이다. 상관이 있으면 자신에게 돌아올 몫이나 자기 이익의 영향을 생각하며 진실을 자기에게 맞게 충분히 조정해 왜곡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권에 욕심이 있는 자는 그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에 그가 하는 말을 액면 그대로 믿으면 안 된다. 자기 목적을 향해 거짓말도 하고 자기에게 유리하게 진실을 가공(加工)해 잘 포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 그 속의 진실을 알고 싶으면 그 속의 구조와 조직의 생리, 외부와의 관계를 잘 알면서도 그것과는 상관없는, 이제 그것으로부터 초연한 사람에게 물어야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진실을 말해주지 않는다. 자기가 봤고 눈에 보인다고 정답은 아니다. 진실과 정답은 속에 숨겨져 은폐되어 있을 수 있다.
일본은 골목을 지나도 여기에 사람이 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조용하다. 그들은 개인주의가 강하고 남의 개성이에간섭없이 관대하다. 경쟁력이 한국보단 확실히 덜해 스펙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고 혀영심도 적어 카푸어들이 거의 없다. 다 소형차이고 소형 주택이다.
소설에서 한 마디 대화가 엄청나게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는데, 이게 영화화되면 그 중요한 한 마디를 어떻게 표현할까도 많이 걱정될 것 같다. 소설처럼 그렇게 중요하게 그 한마디를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하려면.
말을 잘못하면 어른도 애 취급을 해 반말을 한다. 외국인이 나이가 많아도 한글을 잘 못해 꼭 애 같아서 반말을 하는 경우가 많다. 이처럼 말은 익은 성숙도와 일치하는 것 같다.
작가는 남의 불행을 조심히 다뤄야 문학상을 받으려고 소설에서 주인공의 자식을 죽이는 경우가 많다. 그 후, 부모는 불행 속에 살아간다. 꿈에서나 깨어서나 하루도 즐거운 날이 없다. 자식 없는 세상이 아무 이상 없이 돌아간다는 게 도저히 이해가 안 되고 원망스럽다. 세상도 같이 끝장났으면 한다. 자식이 없는 데도, “그렇게 목숨은 부지하고 싶니?” 그게 어떻게 가능한지, 스스로에게 자문한다. 부부는 마음 놓고 웃을 수도 없다. 멍한 눈으로 TV만 볼 뿐이다. 자식이 없는 걸 아는 게 두려워 잠에서 영원히 깨어나지 않았으면 한다. 잊어 볼까, 결국 부부가 갈라서기도 한다. 2007년 전도연이 칸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은, 이창동 감독의 <밀양>을 보면 자식 잃은 부모를 어느 정도 알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러나 겪지 않고 감히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교회 신도들이 같이 기도해준다. 마침내 결심이 서서 용서하러 교도소로 향한다. 그러나 내 자식을 죽인 살인범은 이미 하나님께 용서받아 얼굴이 그렇게 평온하고 차분할 수가 없다. 감히 내게 충고 비슷한 걸 지껄이기도 한다. 나는 아직 이렇게 고통 속에 사는데, 그놈은 마음의 평화를 얻었다. 뭔가 한참 잘못됐다. 신애(전도연)는 당황하며 큰 충격을 받는다. “내가 아직 용서하지 않았는데, 누가?” 작가는 조심해야 한다. 이런 부모는 세상에 많다. 그들은 큰 상처를 받을 수 있다. “남의 불행을 소재 삼지 마라.” “다 이해하고, 아는 것처럼 굴지 마라.” 그러나 또 사람 목숨은 어쩌지 못해 그 하늘 아래 꾸역꾸역 살아가야 한다. “어쩌겠어. 인명은 재천인 것을.” 부모는 아직도 자식이 있던 때와 같을 수가 도저히 없다. 버티고 살아갈 수 있게, 부부 둘은 언젠가는 부둥켜안고 오열과 통곡을 쏟아내야 한다. 땅에 묻은 자식을 가슴속에도 묻고 견디며 겨우겨우 살아간다.
일본은 가족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다. 한국의 모든 것의 수렴이 가족인 게 더 이상하다. 너무 집착이 심하고 가족끼리 뭔가 자꾸 하려고 한다. 가족보단 사실 개인이 먼저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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