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리의 서재로 📙 읽기] 11. 아우스터리츠

D-29
그리고 화자가 아우스터리츠에서, 아우스터리츠가 다른 애쉬만이나 제랄드 등 다른 인물들의 이야기 속에서, 그리고 다른 건축물과 사물들 속에서 자기 자신의 파편일지도 모르는 것을 탐색하고 퍼즐 조각들을 끼어맞추는 것 같은 느낌도 듭니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나오는 배낭이나 당구대 등 기타 사진들을 보면서 얼마 전 Daniel Arsham의 전시를 보면서 미래의 관점에서 현재 문명 (8,90년대 게임기나 잡지 등)의 잔존 유적을 발굴하는 현장처럼 만든 조각들이 생각났어요. 마치 고고학자가 되서 인간 문명의 유적을 파내면서 묻혀진 과거의 과오와 우연과 엇갈리는 필연을 짚어가는 기분입니다.
나는 이제 기억하는데 내가 얼마나 훈련되어 있지 않은지, 반대로 가능한 한 아무것도 기억하지 않고 이런저런 방식으로 나 자신이 알지 못하는 나의 근원과 관련된 모든 것을 피하기 위해 항상 얼마나 애를 써 왔는지를 알게 되었지요. (...) 내게 세상은 19세기의 종식과 더불어 끝난 것이었지요. 나는 감히 그것을 넘어서려 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연구한 시민 세기의 전체 건축사와 문명사는 당시 이미 나타나기 시작한 파국을 향해 치닫고 있었지요.
아우스터리츠 W. G. 제발트 지음, 안미현 옮김
외국에서 오래 살아서 공교육으로는 중학교 때 배운 한국사가 전부였는데 당시 국사 선생님은 '근현대사는 아직 논란도 많고 시험에 안 나오니까 그냥 자습하렴~'하고 나갔던 것 때문이라고 핑계를 대지만 어쩌면 지금 나의 현재 대한민국의 실상에 가장 근접하고 현재를 향해 계속 나아가고 있었던 단서들로 가득한 근현대사를 왜 나는 가장 적게 알고 있을까.. 나는 차라리 서양 현대사에 대해서는 더 잘 알고 있다. 어쩌면 나도 의식적으로 가장 나 자신의 정체성에 맞닿아 있는 고통스러운 역사에서 눈을 무의식적으로 돌린 게 아닐까.
프리즈 (frieze): 방이나 건물의 윗부분에 그림이나 조각으로 띠 모양의 장식을 한 것, 모놉테로스 (monopteros) : 원형기둥이 둘러싼 신전
고서점의 여주인 이름을 피넬러피 피스펄이라고 번역했는데 Penelope Peacefull은 영국인이라고 생각하면 '피넬러피'는 원 발음에 더 가깝긴 하지만 '페넬로페 (오딧세우스의 아내) 피스풀(평화로운)'이라고 번역하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요런 디테일이 아쉬워요;;
그리고 낱말 퀴즈도 원래는 One way to live cheaply and without tears?인데 ('눈물'이라고 번역되었는데 tears는 '찢어진 데, 구멍'이란 뜻도 있죠) '저렴하고 찢어진 데 없이 살아갈 방법은?'이어서 rent-free (rent는 방세, 임대료란 의미도 있지만 옷이나 스타킹 등의 찢어진 곳을 의미하기도 하죠)라고 답을 찾은 것 등 영문 pun을 이용한 거에요. 제발트가 영문학을 전공하기도 했고 20대에 독일을 떠나 한참 영국에서 살았기에 제발트를 번역하기 위해선 영어도 갖춰야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실은 아우스테리츠를 영어로 번역한 Anthea Bell은 카프카, 스테판 츠바이크, 에리히 캐스트너 등 독일 작품도 번역 많이 했지만 꼬마 니콜라, 아스테릭스 등 프랑스어 작품도 언어유희까지 잘 살려 번역한 번역가로 유명한데요. Anthea Bell의 아버지 Adrian Bell이 타임즈지의 크로스워드퍼즐을 처음 만든 사람이었습니다. 저도 실은 크로스워드 퍼즐 너무 좋아해서 한때 타임즈지를 구독했죠.^^;;
우리의 세계가 어떤 기반 위에 서 있는지 스스로에게 묻곤 했단다.
아우스터리츠 55%, W. G. 제발트 지음, 안미현 옮김
마치 절망에 찬 한솜 소리를 - 그녀는 이것을 gémissements de désespoir라는 말로 표현했다 - 듣는 것처럼 그들 속에서 뭔가를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 마치 사진 자체가 기억을 가지고 우리를 기억하며, 살아남은 우리와 우리 사이에 더 이상 머무르지 않는 사람들이 이전에는 어떠했는지를 상기시켜 주는 것 같아. (...)
아우스터리츠 56%, W. G. 제발트 지음, 안미현 옮김
우리는 과거로의 회귀가 일어나는 법칙을 알고 있는 것 같지는 않지만, 더 이상 시간은 존재하지 않고, 단지 좀 더 높은 구적법에 따라 안에 차곡차곡 들어 있는 공간들만 존재하며, 그 공간들 사이에서 살아있는 사람들과 죽은 사람들이 자신의 기분에 따라 여기저기 다닐 수 있다는 생각을 점점 더 많이 하게 되고, 내가 그런 생각을 오래 하면 할 수록, 아직 살아 있는 우리는 죽은 사람의 눈에는 비현실적이고 단지 이따금씩 빛의 특정한 상황과 대기 조건에서만 보이는 존재처럼 생각되었지요.
아우스터리츠 57%, W. G. 제발트 지음, 안미현 옮김
어디서 솟아나지도 않고, 어디서도 합쳐지지 않은 채 항상 원위치로 되돌아 흐르는 강물
아우스터리츠 60%, W. G. 제발트 지음, 안미현 옮김
테레진의 상점에 들어오게 된 장식품들과 도구들, 헤아릴 수 없는 인연 때문에 본래 소유주보다 오래 살아남았고 파괴의 과정을 견뎌 낸 기념품들은 모두 이렇게 초시간적이고 영원화한, 항상 지금 일어나는 구원의 순간이었고, 나는 그것들 사이에서 나 자신의 희미한 그림자를 거의 알아볼 수 없었어요.
아우스터리츠 60%, W. G. 제발트 지음, 안미현 옮김
하지만 모든 것이 다 하얗게 되면 다람쥐들은 자기들의 먹이를 숨긴 곳을 어떻게 알아요? (...) 그래요, 다람쥐들은 그걸 어떻게 아는지, 그리고 우리는 대체 무엇을 아는지, 우리는 어떻게 기억하고, 결국에 가서는 무엇을 찾지 못하나요?
아우스터리츠 63%, W. G. 제발트 지음, 안미현 옮김
가슴이 먹먹해지고 더이상 읽기가 힘들지만 멈출 수 없게 만드네요. 저 자신도 베라와 아우스터리츠처럼 물어봅니다. 우리의 세계의 기반은 무엇인지.. 우리는 대체 무엇을 알고, 어떻게 기억하고, 결국에 가서는 무엇을 찾지 못하는지..
우와 borumis님 읽는 과정을 보는 것도 굉장하네요, 꼼꼼하게 읽어나가면서 기록하고, 비판하면서도 느낌을 놓치지 않고 풀어놓는 과정을 보는 즐거움도 좋았습니다. 저도 이렇게 하나하나 기록해가며 꼼꼼이 읽어가봐야겠다는 길잡이를 보는 느낌이기도 했습니다. 책 초반을 읽어나가다 한강 작가 노벨상 수상과 함께 다른 책으로 넘어가버려서 이 책은 아쉽게 끝내지 못했지만 차후에 다시 도전해보고 싶은 책이라 그때는 이 그믐에 남겨진 글들을 가이드 삼아 따라가보려 합니다. 가슴 먹먹해지면서 남긴 질문들을 떠올리면서요, '우리 세계의 기반은 무엇이고, 무엇을 알고 어떻게 기억하고 무엇을 찾지 못하는지'
앗 감사합니다 저도 너무 책이 좋다보니 밑줄친 곳도 많고 막 찾아보고 메모해 두게 되네요^^;;
Dobry vecer는 (늦은 저녁에)라고 너무 말 그대로 번역했는데 그냥 Good evening처럼 저녁 인사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독문학 전공이어서 체코어까지 번역하긴 힘들었겠지만.. 이 외에도 kavarna는 체코어로 카페란 뜻입니다.
내일 눈을 뜨자마자 나는 진심으로 축하를 해 줄 것이고, 그것은 사람들은 그 작동 메커니즘을 알지 못하는 기계가 잘 돌아가기를 바라는 마음과 같은 것이라고 말했어요. 당신에게 다가갈 수 없는 이유를 내게 말해 줄 수 없나요, (...) 당신의 입술은 뭔가 말하는 것처럼, 심지어 뭔가 소리치려는 것처럼 열려 있는데 왜 나는 아무것도 들을 수 없을까요?
아우스터리츠 W. G. 제발트 지음, 안미현 옮김
빛이 더 이상 도달하디 않는 심연은 자기 가족과 민족의 몰락한 과거에 대해 제이콥슨이 가지고 있던 이미지였고, 그도 알다시피 그 과거는 더 이상 아래에서부터 끄집어 올려지지 않았던 것이다.
아우스터리츠 89%, W. G. 제발트 지음, 안미현 옮김
다음에도 제발트의 다른 책들을 읽어봐야겠어요. 이건 저의 2024년 책으로 남을 것 같습니다. 너무 시간이 촉박해서 (벌써 모임이 끝나는 날이네요?) 리뷰는 다음에 개인적으로 쓸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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