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소설이 좋아서 2> 고영범 소설가와의 온라인 대화

D-29
안녕하세요 작가님~ 이번에 읽은 부분은 진영의 채변 봉투 사건 후 마귀할멈 담임의 학대부분입니다 6학년 진영에게 교실 친구들 앞에서 바지를 내리게 하거나 채변봉투에 담은 것을 억지로 먹게 하는 부분은 정말 화가 나네요 저 당시에는 왜 아이라는 약자에게 이다지도 가혹한 처사들이 정당한것 처럼 이루어졌을까요?? 바지를 내린 처벌 후 학교로 가지 못하는 진영과 진수의 이야기가 마음 아팠습니다~
이번 이야기 중 인상 깊은 장면들은 진수와 진영이 학교에 가지않고 추운날씨에 바깥에서 시간을 보내는 모습이였습니다 날이 요즘같을 때가 아닌가 싶네요 회수귄으로 만화방에서 시간보내는 모습이 애잔했어요~ 집이 어려워지고 생계에 바빠진 어른들 사이에서 학교에서는 버려진 느낌의 아이들이 따뜻하게 쉴곳은 없을까 안타까웠습니다 ' 우린 살아가는 일의 불안과 고통을 너무 짧은 시간 안에 알아버렸다 만화 바깥의 세상은 너무나 쓸쓸하고 견디기 어려웠다 진수와 나는 이미 어두워지기 시작하는 한강을 노려보면서 아무말없이 집으로 돌아왔다 우린 그 며칠동안 너무 빨리 너무 많이 나이들어 버렸다'(203쪽) 그런데 여기에 병식이란 친구가 나오는데 참 흥미로운 인물이었습니다 '도시계획이 어쩌고 할 때부터. 시작해서 병식이는 교실 한쪽에 쭈그러져서 있는지 없는지 전혀 존재감이 없던. 내가 알고 있던 그 병식이가 아니었다'(225쪽) 와!! 혹시 작가님 친구 중에 있던 분을 모델로 하신것일까요?? 병식이가 어른이 된 모습도 궁금하네요~~
안녕하세요. 지난 겨울에는 내내 송창식의 <밤눈>을 중독된 듯 거푸 들었습니다. 워낙 좋아하는 노래이기도 했지만 그렇게 된 이유는 <서교동에서 죽다>의 결말 때문이었습니다. 그 노래를 듣는 내내 저도 무언가 사무치게 그리워졌어요. 그리워서 더 들었을까요? 실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를 그리워하면서 '더없이 외로웠'습니다. '이미 오랜 세월을 산' 지금 서교동에서 죽은/죽었다고 선언되는 소년을 만나고 나니 소설 속 소년의 나이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마치 오래 살아본 듯 이미 지치고 유치하게 오만했던 한 소녀를 떠올리게 되었지요. 그것이 문학의 힘, 이야기의 힘임을 절감합니다. 어느새 다시 겨울이 되었네요. 오랜만에 <밤눈>을 들으며 몇 자 적습니다.
어이쿠, 이거 죄송하게 됐습니다. 너무 오랜만이네요. 제가 살고 있는 미국은 지난 며칠 동안 추수감사절 휴가기간이었습니다. 제가 어딜 다녀온 건 아니지만, 집을 떠나 대학에 다니고 있는 두 아이와, 매년 추수감사절 기간을 우리 집에 와서 지내는 후배네, 그리고 올해에 대학 신입생이 되어 한국의 집을 떠나 있는 후배의 아들이 와서 같이 어울리느라 컴퓨터를 들여다볼 시간이 별로 없었습니다. 같이 지내는 동안은 즐거웠는데, 짧은 휴가가 끝나고 하나둘씩 있던 자리로 돌아가고 나니 무척 허전하네요. 아이들을 데리고 오고, 데려다주느라 뉴욕의 한인타운 근처에 있는 공항에 모두 세 번을 다녀왔습니다. 오랜만에 장거리 운전을 거듭했더니 한동안 가만히 잠자고 있던 방랑벽이 꿈틀거리는 게 느껴집니다. 멀리서 움직이는 풍경, 어스름, 스쳐 지나는 모르는 사람들, 혼자 돌아오면서 듣는 음악, 앞서 가고 있는 차들의 붉은 미등의 행렬, 이런 것들이 고여 있는 마음을 흔듭니다.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하면 제일 먼저 가벼운 기억들이 떠오르고, 저 밑에 가라앉아 있는 형체 없는 어떤 것들이 스멀스멀 올라옵니다. 그 움직임은 슬픔이 일어나는 방식과 무척 닮아 있습니다. 대학 다닐 때 가까이 지내던 선배가 쓴 시의 한 구절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눈물의 높이에서 세상이 빛날 때 살아있는 것들의 슬픔을 알겠다" 제게 여행이란, 공간적인 여행이나 시간적인 여행이나, 모두 정체모를 슬픔에서 시작해서 그 내용을 알아가는 과정입니다. 이렇게 말하니까 마치 우울증 환자 같은데, 아마 오히려 그 반대일 겁니다. 가라앉아있던 것들을 끌어올려 바람 속에 노출시키게 되면서 오히려 고여 있던 습기를 날려버리게 되는 효과가 있으니까요. '말을 하는 일'이 아마도 그 노출의 과정인 듯 합니다. <서교동에서 죽다> 역시 그런 과정이었습니다. 지금은 진영이의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조금씩 준비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들에 대해 잘 모르는데, 조금 짐작하고 싶어졌거든요. 글쓰기란 제게는 늘 아는 것, 정리된 것을 드러내는 것보다는 탐색과정을 묘사하는 것에 가깝습니다. 쓰게 되는 동력이 아마 거기에 있는 것 같아요. 사실 학비를 대야 할 아이가 있는 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에게 글쓰기란 참 거추장스럽고 구차한 버릇이자 욕망인데, 이 동력이라는 게 매우 미약하지만 절대로 소진되지는 않는 일종의 영구 에너지 같은 것이어서,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계속 하게 됩니다.
여러 가지 생각에 잠기게 만드는 말씀입니다. 미국의 추수감사절은 한국의 추석과 비슷한 면이 있는 것 같아요. 떨어져 지내던 가족과 친지들이 모여 음식과 시간을 나눈다는 점은 원래의 의미였을 수확의 기쁨에서 파생되는 더 큰 수확이겠습니다. 글쓰기가 탐색과정을 묘사하는 것이라는 말씀 참 좋습니다. 읽는 쪽에서도 활자의 표면과 이면을 살피며 이런저런 탐색을 하게 되지요. 탐색 과정 중 생긴 궁금한 점을 좀 여쭙겠습니다. 1. 진영의 이야기, 작가님의 아버님, 할아버님의 이야기가 모두 과거 혹은 역사일 텐데요. 소설에서 이들을 소환할 때 작가님은 어떤 효과를 염두에 두시는지요. 효과라는 표현은 대단히 거칠고 무례할 수 있지만 달리 적절한 단어가 언뜻 떠오르지 않네요. 아, 의미라고 해도 되겠습니다. 2. 상당히 늦게 소설을 시작하셨습니다. 희곡으로는 이미 큰 성과를 거두신 것으로 알고 있고요. 한때는 시를 쓰셨다고도요. 다른 장르와 비교하자면 소설 쓰기가 이렇게 나중에야 찾아오게 된 이유가 있으실까요? 3. 작업하실 때 루틴 같은 것이 있다면 어떤 것인지, 없다면 없는 대로 어떤 식으로 작업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앗, 이렇게 빠른 반응이라니요. ㅎㅎ 혹시나 하고 들어와 봤다가 살짝 놀랐습니다. 1. 다른 사람들은 어떤지 모르겠는데, 저는 쓰기 전에 이야기를 가지고 다니는 기간이 긴 편입니다. 구상을 한다고 말하기는 좀 그렇고, 그보다 더 두서없이 아무 때나 떠올린다고 하는 편이 맞겠습니다. 진영이와 진영이의 가족 이야기도 그런 식으로 꽤 오래 가지고 다녔는데, 이 이야기로 한 아이의 성장, 한 가족의 파괴, 한국사회의 급격한 변화과정을 모두 보여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게 되면서 써보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한 아이의 내면과 그 아이가 속한 크고작은 사회를 비교적 전체적으로, 또 입체적으로 그려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게 된 겁니다. 영화, 연극, 소설 같은 어떤 '구성체'가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왔달까요. 그래서, 막상 타이핑을 시작하면 오래된 이야기와 지금 떠오르는 이야기 간의 긴장과 대화라는 느낌이 강합니다. 2. 희곡도 아주 가끔, 거의 이 년에 한 편 정도 쓰는 편이고, 조용히 올렸다가 조용히 사라지는 편입니다. 유명작가와는 거리가 멀죠. 이야기의 내용이나 방식도 조용조용한 편이고요. '멀리 있는 사람'이라는 게 제 아이덴티티의 한 부분이라는 느낌이 들 정돕니다. 이런 느낌이 나쁘진 않습니다.^^ 저는 워낙 낡은 집에 살고 있어서 가구를 만들거나 집을 고치는 게 늘 하는 일인데, 대개 이미 가지고 있는 공구나 자재를 가지고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꼭 필요한 게 생기면 뒤늦게 구하러 다니죠. 저한테도 비효율적이고 다른 사람 보기에는 바보 같을 수도 있는데, 살아온 과정도, 글쓰기도 별로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시와 희곡 모두 교회에서 쓰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중고등학교를 다니던 칠십년대에는 중고등학생들이 정신적이고 문화적인 활동을 지속적으로 할 수 있는 곳은 교회가 거의 유일했습니다. 한 해에 한 번 회보를 내는데 시가 필요하다고 해서 중학교때 처음으로 시를 써봤고, 희곡은 고등학교 때 <세일즈맨의 죽음>을 보면서 충격을 받고 저런 걸 쓰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마침 교회에서 크리스마스 공연을 준비했어야 하는 상황이라 대본을 쓰면서 자연스럽게 시작했습니다. 대학에서도 연극반에 들어가 계속 희곡을 쓰고 싶었는데 선후배 간의 강압적인 분위기가 싫어서 나왔고, 그런 문제가 전혀 없는 문학회에서 주로 놀았습니다. 그런데 거긴 시 쓰는 사람들이 주로 모이는 데였고, 그러다 보니 저도 어영부영 시를 통해서 하고 싶은 말을 하게 된 거죠. 희곡을 다시 잡은 건, 사십대 후반에 다시 만난 연극반 시절 친구가 짧은 소설 하나 각색해 달라고 한 게 계기가 됐습니다. 그때 저는 주로 시나리오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그때까지 예닐곱 편이 모두 엎어진 뒤였습니다. 그 친구가 각색을 부탁한 건 톨스토이의 '크로이체르 소나타'였는데, 오랜만에 희곡을 쓰니까 재미있더군요. 그리고, 무엇보다, 대본이 나오고 나서 불과 며칠 만에 배우들이 모여서 읽는 게 좋았습니다. 그 공연을 본 다른 연출가가 다른 작품의 각색을 부탁해서 그 작품을 했고, 또 다른 각색 부탁이 들어와서 하다가 좀 과격하게 각색을 하고 싶어지면서 원작과 상당히 다른 독립된 이야기가 나왔고, <태수는 왜?>라는 그 이야기가 공식적으로는 제 첫 희곡이 됐습니다. 그 작품을 올리고 난 뒤 약 칠 년 동안의 한국생활을 청산하고 미국으로 돌아와야 했는데, 그후로도 2년에 한 편 정도씩 희곡을 서너 개 썼습니다. 그런데 희곡만 날려보내고 저는 그대로 미국에서 지내다보니까 연극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성격--과정으로서의 창작--에서 무대적인 성격은 상당히 사라지고, 문학적인 성격만 남았습니다. 연출자들은 불만이었겠지만 저로서는 아마 어쩔 수 없는 면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제가 쓰는 희곡 속에서 소설적인 성격이 점점 강화되고 있었던 거죠. 그러다가 <서교동에서 죽다>는, 중간에 우여곡절이 좀 있었지만, 희곡으로도 쓰고 소설로도 쓰게 된 겁니다. 시나리오에 비해서 희곡이 훨씬 자유로웠는데, 소설을 쓰는 동안에는 희곡에서의 여러가지 동시성(특히 저는 서로 다른 시공간을 무대 위에서 한 데 붙여놓았을 때의 느낌을 좋아합니다)을 구현하기 어렵다는 아쉬움이 있지만 또다른 자유--말하는 자유--를 느끼게 됩니다. 그러니 아마, 앞으로도, 이야기를 다루고 싶은 방식에 따라, 혹은 이야기가 요구하는 것에 따라, 다른 장르들을 왔다갔다 하게 될 것 같습니다. 3. 몇 해 전부터 하던 일을 관두고 집에서 번역하고 쓰는 것만 하고 있습니다. 아내가 직장생활을 하기 때문에 살림을 제가 맡아서 하는데, 작은 애도 지난 가을에 대학으로 떠났고 해서 이제는 많이 홀가분해진 상태입니다. 생활은 비교적 규칙적이고요. 아침에 일어나서 도시락을 싸서 아내를 출근시키고 나면 한두 시간 정도 이런저런 뉴스와 잡지를 읽고 개를 데리고 산보를 한 뒤 무언가를 가볍게 씁니다. 요즘은 페이스북에 주로 씁니다. 그러고나서 번역을 하거나 자료를 읽거나, 쓰거나 합니다. 그렇게 해서 오후 시간이 되면 다시 개를 데리고 산보를 하고 무언가 몸을 쓰는 일을 한 뒤 저녁 식사 준비를 합니다. 식사 후에는 산만하게 이것저것 합니다. 주로 번역을 하거나 무언가를 읽거나 영화를 보거나 하는 식이죠. 열시쯤 되면 잠자리에 들어서 삼십 분에서 한 시간쯤 주로 희곡이나 소설을 읽고요. 누군가를 만나는 일도 거의 없고,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보내는 편인데, 그런데도 읽고 쓸 시간이 늘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자세하고 재미있는 답변 감사드립니다. 글을 쓰는 분들은 거의 예외없이 읽고 쓰는 시간이 부족하다는 절박함을 갖고 있는 듯해요. 하긴 다른 일을 하더라도 시간이 남아돈다고 하는 사람은 보지 못했습니다만 쓰는 일이라는 게 깨어있는 모든 시간 거기 신경이 가 있어서 그렇지 않을까 합니다. 작가님의 글쓰기 역사는 오랜 시간 면면히 이어져온 것이로군요. 소설은 늦게 시작하셨지만 그래서 더욱 다음 작품에 대한 기대가 큽니다. 물론 희곡이나 시도 계속 좋은 작품 보여주시길 바랍니다. 오래 써주시길요. 건강하십시오. 즐거운 대화였습니다. 응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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