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소설이 좋아서 2> 고영범 소설가와의 온라인 대화

D-29
이 전화는 좀 더 유명해졌고,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전화국에서 공중전화를 철거하고 맙니다. 이 전화는 연결하지 않아도 되는, 서로 연결될 일이 없던 사람들이 의지를 가지고 연결을 시도했던 상징인데, 연결의 제도적 상징이자 실질인 전화국에서 이걸 끊어버린 겁니다. 여러가지 변명을 제시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 사건에서 우리가 사는 세계의 어떤 근본적인 비극성을 읽어냈습니다.
저 역시 그랬던 거 같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그 자리를 찾아갔습니다. 전화기가 있던 자리. 비극성의 현장. 하지만, 사막 한 가운데에 전화기가 있었다고 해도 찾아낼 깜냥이 제로에 가까운 자가 그것이 사라진 자리를 찾아낸다는 건 말이 안되는 거죠. 그래서 비실비실 웃으면서 아무 데나 배회하다가 돌아왔습니다.
그 정도라면 소설 소재로도 훌륭할 텐데... 그걸 소재로 한 소설이 있음직한데 말입니다. 이미 구상하고 계신 거 아닙니까?
이 이야기는 몇 해 전에 서울에서 공연한 <방문>이라는 희곡에 한 에피소드로 삽입시킨 적도 있고, 앞으로 쓸 소설에서도 써볼 계획입니다.
그러셨군요. 엮으면 꽤 재미 있는 주제가 되겠는데요.
사막은 없음, 사라짐, 이런 손에 잡히지 않는 이야기를 손에 잡힐 수 있는 것처럼 보여주는 막막한 힘이 있죠. 너무 막막해서 손가락 새로 다 빠져나가고 결국 아무 것도 남지 않게 되기도 하지만요. 하지만 그 과정을 통과하는 경험 자체도 놀라운 데가 있습니다.
사라진 하천을 찾다가 그 생각이 난 거죠. 그런데 아마 충격적으로 새롭게 떠오른 기억, 이런 건 아니었습니다. 거리에서 구체적인 건물들과 사물들이 지워진 모습, '사막'이라는 관념은 사실 늘 있었던 거거든요. 화곡동이라는 사막, 서교동/동교동이라는 사막.
----- 의견을 묻고 싶습니다. ----- 저는 <한국 소설이 좋아서 2>라는 서평책에 대해 무척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부러 마음을 낸 그 호의, 선의가 신선하고 감격스럽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애써서 마련해 주신 이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겠다고 마음 먹었는데, 아무런 제약도 없는 너른 마당이라는 게 사용하기가 마냥 만만한 건 또 아니네요. 그렇다고 해서 굳이 울타리를 치거나 장치를 만들 필요까지는 없을 거 같고, 다만, 한 번쯤은 시간을 맞춰서 실시간 온라인 미팅 같은 형식으로 이야기를 주고 받아보는 건 어떨까 싶습니다. 그냥 아이디어일 뿐이니까 부담없이 의견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작가님 시간 편하실 때를 알려주시면 좋을거 같습니다~^^ (처음 시작 단계에서 1번 그리고 끝나는 시점에서 1번 정도는 있으면 좋겠습니다~) 작가님과의 대화는 읽는 독자들에게는 정말 귀한 시간이랍니다~
그렇다면, 화요일이나 수요일 저녁 아홉시쯤이 어떨까 싶네요. 주말에는 다른 일들이 있으실 거 같고, 저녁식사 마치시고 나서 조금 여유있게. 다른 날이나 다른 시간도 좋습니다.^^
화요일에 하시지요. 제가 수요일은 시간이 맞지 않아서요
저도 화요일 9시도 가능합니다~^^
제목 정하는 게 늘 어렵습니다. 소설은 이번이 처음인데, 희곡을 쓸 때에는 늘 대충 정하는 편이었습니다. 첫 작품이 <태수는 왜?>였는데, 그 작품이 등장인물인 태수의 어떤 행위에 대한 질문에서 시작됐기 때문에 그렇게 붙였습니다. 그 다음 건 <이인실>이었는데, 이건 이인실 병실에서 시작된 이야기라고 그랬고요. <방문>은 동생이 오랜만에 형을 방문하는 이야기라서, <에어콘 없는 방>은 에어콘이 없는 호텔 방에서 벌어진 일이라서... 대략 그런 식입니다. 물론 중요한 공간, 중요한 사건에서 따온 것이라 나름대로 중의성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팽팽하게 맞서는 중의성이 아니라 뒤에 슬그머니 숨어 있는 중의성이죠. 제가 이런 걸 선호하는 편인 듯합니다.
<서교동에서 죽다> 역시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서교동에서 이야기가 시작이 됐고 마무리를 서교동에서 하는데, 그곳에서 이 아이는 내적인 죽음을 경험합니다. 처음에 떠나기 전에 그랬고, 돌아왔을 때 다시 한 번 그렇습니다. 처음에 이야기를 쓸 때에는 돌아오고 나서 아이의 내적 죽음에 대한 부분이 좀 장황하게 기술되어 있었는데, 그 장황한 게 마음에 안 들어서 계속 옆눈으로 흘겨보다가 결국은 빼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되고 나니 제목이 조금 허공에 떴는데, 이미 그 제목으로 연극 공연이 결정되어서 책도 그대로 가게 됐습니다. 그야말로 어영부영 그렇게 된 경우죠.
제목에 관한 한 두 가지 맥락에서 약간의 후회가 있습니다. 하나는 동사원형을 쓰는 게, 뭐랄까, 너무 열어놓는다는 점에서 조금 비겁하다는 느낌이 있고요, 다른 하나는, 비슷한 맥락일 수 있는데, 종결부의 그 서술을 빼버리면서 제목의 의미가 모호해졌다는 겁니다.
작가님의 긴 답변글 너무너무 영광입니다!!^^ 보통은 책을 읽을 때 궁금한 점들이 있어도 혼자 상상하거나 그냥 넘겨버려 아쉬운 점이 많은데 정말 작가님께 직접 여쭤볼 수 있고 그러면서 작품을 다시 살펴볼 수 있어 너무 좋습니다~ 책을 읽는 동안 느낀 점은 어쩌면 글이 이렇게 매끄러울수 있을까 신기했습니다 음 걸리는 부분없이 고급 승용차의 광고문구처럼 '도로위에서 흔들림없는 최고의 승차감' 같아요~^^ 작가님 소개글을 보니 번역과 시나리오를 작업하셨던데 그래서 일까 혼자 예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1974년 서교동의 모습이 너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네요 작가님의 답글을 보니 주로 해외에 계셨다고 하셨는데 이런 구체적인 묘사는 자료를 통해서 일까요?? 아니면 픽션일까요?? 진영이 아버지의 사업위기가 이제 나오기 시작하네요~ 그냥 밝은 성장소설인가 했는데 어떤 일들이 펼쳐질까 걱정됩니다~~ㅜㅜ
제 동생이 막내인데, 세상에 나가기 전까지는 소설 속의 진구처럼 엄마 치마 끝에 매달려서 지내는 아이였습니다. 진영이의 집이 부자집으로 묘사된 건, 근대화가 한창 진행되고 살림살이가 대체로 조금씩 나아지는 시점이었지만 사회적 안전망이 전혀 없었던 사회의 모습을 그려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 시절에 집안에 중환자가 생기면 그 집안은 그 환자를 포기하지 않는 한 대책없이 몰락할 수밖에 없었죠. 특히나 그 환자가 가장이라면 끔찍해지는 거죠.
88년에 상계동 철거민들을 몇 명 인터뷰한 적이 있는데, 스토리가 대체로 비슷합니다. 빈농(의 자식)으로 살다가 50년대 후반에서 60년대 중반 사이에 서울로 올라옵니다. 청계천이나 양동, 도화동 같은 빈민촌에 자리를 잡고 부부가 일을 합니다. 대개 처는 가정부, 남편은 막일을 하죠. 이게 벌이가 그리 나쁘지 않습니다. 특히 서울에 건설이 붐인 시대였고, 막일은 늘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아이를 (더) 낳으면서 처의 벌이가 없어지거나 현저하게 줄어듭니다. 아이가 두셋 이상 되면 여자들은 도시환경에서는 현실적으로 일을 하는 게 불가능해집니다. 형편이 조금 나아지는 듯하면서도 빈민의 형편을 벗어나기는 여전히 어려운 거죠. 그러면서 남자도 나이가 들어가고, 그러면서 숙련공이 되어 조금 안정되는 경우도 있지만, 혹시라도 다치게 되면(그런데 이런 일이 상당히 자주 일어납니다) 그 집은 불과 한두 달만에 완전히 몰락합니다. 유일하게 벌던 사람은 사라지고 가장 많이 써야 하는 사람이 하나 생기는 거니까요. 이제 막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아이들은 학교에서 빠져나오게 되죠. '근대화 과정에서의 빈부 격차의 심화'라는 추상적인 표현은 이런 구체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운이 좋으면 이런 상황을 벗어날 수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가장이 다치지 않는다든가, 아이들이 이미 큰 상태라든가, 아이들이 유난히 영특하다든가, 그런 경우죠. 사회적인 안전망과 전혀 관계 없이 그저 운이 좋은 경우들입니다.
저는 그 시대를 그리되, 제가 속속들이 잘 아는 세계를 통해서 접근해보자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리고 '실향민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는 말은 일종의 농담입니다. 90년에 한국을 떠나서, 중간에 육칠 년 돌아가서 살기도 했지만, 계속 외국에서 살고 있거든요. 부모님의 고향이 평안북도인데, 제가 거길 그리워할 이유는 없지만 그곳을 그리워하던 부모님의 마음은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고향이 부모님한테 그리움과 기억으로만 남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해결을 모색해야 한다고 생각하고요. 그리고 저 역시 제가 마음을 두고 있던 곳들과 멀어져 있는 이유에 대해서 이런저런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건 서울이라는 공간의 질적이고 외형적인 변화와 관련이 있을 것이고, 저의 변화와도 관련이 있을 겁니다. 이중의 실향이죠.
88년도에 상계동 철거민들을 인터뷰 하셨다니 대단하시네요~ 근대화 과정에서 빈부격차 심화를 직접 보셨다니 궁금합니다~ 운이 좋아 가장이 다치지 않거나 아이가 유난히 영특해야 이런 상황을 벗어날 수 있다니~ 아직도 개인의 빈곤문제를 개인의 능력으로 짐지우는 경우가 많은데 새로웠습니다 저도 가끔 TV 속에서 그런 모습을 볼때마다 한평생을 부지런히 사셨다는데 왜 저렇게 힘드실까 의아했었거든요~ 미디어에서는 개천의 용들의 신화들만 방송하구요~ 작가님의 답글을 보니 아직 읽고 있는 중이지만 어떤 내용들이 펼쳐질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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