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렐은 정통 마르크스주의, 개량적 마르크스주의, 혁명적 생디칼리슴, 극우파에 대한 동조, 반유대주의, 러시아혁명에 대한 동조, 파시즘에 대한 동조 등 여러 국면을 거친다.
하지만, 사상적 변덕쟁이로만 단정해서는 안될 것이다. 음.....
읽고 싶지만 잘 안 읽히는 책 읽기1
D-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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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로 지정된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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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강 벤야민의 폭력론 : <폭력비판을 위하여>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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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야민은 폭력에 대해 줄곧 역사철학적 관점을 유지하고 있다. 따라서 폭력에 대해 외부적인 시각, 즉 초월적인 관점을 요청한다.
폭력 그 자체를 고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속에서 이해하고자 한다. 어떤 행동이 폭력이 되기 위해서는 그것이 '윤리적 상황'과 연관되어야 한다. 그 관계가 정립되는 곳이 '법'과 '정의'의 영역이다.
법이 갖는 강제력이 폭력의 성격을 가질 경우 그 강제력은 어디에서 근거를 확보하는가
법질서의 가장 원초적인 관계는 '목적과 수단의 관계'이다.
"폭력은 목적의 영역이 아니라 우선 수단의 영역에서" 찾을 수 있다. 이처럼 폭력이 수단이라면, 다음과 같은 문제가 나타난다.
이런 폭력이 정당한 목적을 위한 수단이냐, 아니면 부당한 목적을 위한 수단이냐 이다.
이 경우 목적을 판단하는 기준이나 척도가 있다면 이 문제는 쉽게 해결 될것이다. 하지만 벤야민은 목적과 수단의 체계에서도 그 기준이나 척도는 없으며, 오직 사용된 예들에 대한 기준만이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폭력에 대한 두가지 법철학적 입장을 제시한다.
자연법과 실정법이 그것이다.
자연법론에서는 폭력은 자연적으로 주어진 것. 모든 수단이 정당화된다. 따라서 그것의 목적에 대한 비판을 통해 판단할 수 있다.
실정법론에서는 폭력을 역사적 산물로 여긴다. 모든 생성하는 법은 오직 그것의 수단에 대한 비판을 통해 판단한다. 즉, 정의를 구현하는 폭력이 적법한가를 묻는다.
벤야민은 두 입장이 '공통된 도그마'에 수렴된다고 본다. 수단을 '정당화'하려고 하든, 목적의 정당성을 '보증화'하려고 한다.
따라서 기준에 대한 물음은 연구에서 배제하고, 폭력을 이루는 일정한 수단들의 정당화에 대한 물음만을 주요 연구과제로 삼고 있다.
그리고
폭력을 역사적으로 인정된 폭력과 역사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폭력으로 구분한다.
'승인된 폭력'과 '승인되지 않는 폭력'이다.
모든 폭력에 대해 실정법론은 그 역사적 기원에 대한 증명을 요구하며, 또 그 증명이 일정한 조건하에서만 폭력의 적법성과 승인을 획득한다는 것이 벤야민의 주장이다.
따라서 '폭력에 대한 비판은 폭력의 역사에 대한 철학'이라는 벤야민의 주장이 성립한다.
법은 폭력과 분리될 수 없음을 법정립적 폭력과 법보존적 폭력의 구분에 대한 논의로 드러낸다. "모든 폭력은 수단으로서 법정립적이거나 법보존적이다" 법은 폭력을 정당화 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데리다.....)
인간들 사이의 갈등을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화해 시키는 것이 가능한가? 가능하다. 하지만 이 가능성은 개인차원에 국한 되어 있고, 국가가 행사하는 권력이나 폭력의 차원에서는 가능하지 않다.
법이 존재하는 한 폭력은 제거 될 수 없다. 법과 폭력과의 착종을 분쇄할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한다. 신화적 폭력과 신적폭력을 구분하는 데서 찾는다. 결론부터 말하면 신적 폭력에 의한 신화적 폭력의 무효화이다.
신화적 폭력은 신들의 법과 권력을 정립하는 원동력이다.
신적 폭력은 신화적 폭력에 '중단'을 명할 수 있는 순수한 폭력으로 이해된다.
이 개념은 아주 모호해하다. 후일 데리다, 아감벤, 지젝 등에 의해 이 개념이 다양하게 해석되기도 한다.
유대메시아주의적 사유에서 유물론으로 이어지는...<폭력비판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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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강 데리다의 폭력론: <법의 힘>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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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리다는 서구 형이상학 전체가 '폭력'의 역사라고 보고 있다. '일자'가 '타자들'에게 가한 억압의 역사라고 본다.
해체철학의 쟁점은 서구의 형이상학을 관통하는 로고스중심주의의 내적 모순을 밝혀내는 것이다.
질서와 체계는 일사분란하고 균질하게 보인다. 이 질서와 체계에서 차이는 차이로 존중받지 못하며, 오히려 차별의 구실이 된다.
해체는 어떤 체계나 질서를 끊임없이 재편성, 재구축하는 것이다.
해체는 '정의'와 무관하지 않으며, 정치적이며 윤리적이다.
타자들의 요소들에 대한 개방성으로서의 정의는 항상 질서, 체계 규칙을 넘어서는 것을 가리키고 또 그것의 '도래'를 요청한다.
법의 토대에 폭력이 놓여 있다.(벤야민도 마찬가지)
그런데, 벤야민과 달리 정의가 법을 넘어서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또 법과는 다른 곳에서 추구되어야 하는 것도 아니라고 주장한다.
데리다는 진정한 정의가 실현되기 위해서 법과 무관한, 법의 외부에 있는, 법을 넘어서는 또 다른 종류의 폭력, 곧 신적 폭력을 요청해야 한다는 벤야민의 주장을 해체한다.
데리다는, 정의가 법과 구분되며 "법은 정의가 아니"라고 말한다.
데리다에 따르면 정의는 '법의 내부에' 존재함과 동시에 법과는 구분되며, 그럼에도 이 법을 지속적으로 개선시킬 수 있는 동력으로 존재해야 한다. 법은 정의를 향해 나아간다. 물론 그 끝은 확실하게 정해져 있지는 않지만, 그것은 당연히 정의일 것이다. 하지만, 이 정의는 언제까지고 아직 도래하지 않은 채로, 미래의 차원에 있을 것이다.
데리다는 벤야민의 <폭력비판을 위하여>을 읽으면서 신적 폭력에 내포되어 있을 수 있는 극단적인 비극을 조심스럽게 지적하고 있다.
여기에 아감벤은 데리다가 벤야민의 글을 잘못 해석했다고 비판하고 있다. 다음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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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강 아감벤의 폭력론: <호모사케르>와 <예외상태>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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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적폭력에 대해 아감벤은 데리다와 다른 입장을 취한다.
아감벤은 신적폭력에 의한 신화적 폭력의 파괴를 법과 폭력의 완전한 단절로 해석한다.
데리다는 신적폭력에 의한 신화적 폭력의 파괴를 정의를 향한 법의 점진적인 개선 또는 재 정립으로 보지만, 아감벤은 기존의 법을 탈정립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 슈미트의 예외상태, 주권권력이라는 개념과 아리스토텔레스의 '현재성'과 잠재성'의 개념을 활용한다.
예외상태라 함은, 한 국가가 내전, 전쟁 등의 위기 상황에 놓여 있을 때, 기존의 법 효력이 주권자에 의해 정지되는 상태를 가리킨다.
슈미트는 이에 법 외부에 있는 폭력을 인정하지 않는다.
벤야민은 <역사 개념에 대하여> 8번 테제에서 예외상태라는 용어를 쓴다.
이 부분은 의미심장하다. 공동체에서 살아가는 피억압자의 입장에서 보면, 억압자들에 의해 자행되는 폭력적인 행위를 제어해야 하는 모든 법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도 있다. 즉, 그들은 지배자들의 의해 선언된 예외상태 속에 머물고 있다.
벤야민은 이런 공동체가 보다 나은 공동체로 나아가기 위해서 당연히 상례가 되어 버린 예외상태를 뒤엎을 만한 진정한 비상사태의 도래, 혁명적인 상황의 창출이 반드시 요청된다고 본다.
여기서 아감벤은 <호모 사케르>를 통해
호모 사케르라는 수수께끼 같은 존재의 비밀을 밝힌다. 호모 사케르는 이 존재가 살 던 시대의 법질서에서 배제되고 또 종교적 질서에서도 배제된, 이중으로 배제된 존재로 본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중으로 배제 되었음에도 법질서와 종교적 질서에 여전히 포섭되어 있다는 것이다.
즉, 그들은 예외상태인 공간 내에서 역설적이게도 주권자(법 외부와 내부에 동시에 존재하는)의 결정에 의해 호모 사케르가 된다.
주권자가 행사하는 주권은 벌거벗은 생명, 호모 사케르를 산출하는 근본적인 요인이다.
더군다나 아감벤은 8번 테제를 빌려 예외상태가 상례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사회의 가장 두드러운 통치 방법으로 상시 감시 체계이다. 주권자는 그가 통치하는 모든 영역, 모든 공간을 예외상태화하려고 한다. 모든 사람을 잠재적인 호모 사케르로 간주한다. 그들의 생사여탈권을 틀어쥐고 생명을 담보로 하는 생명정치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아감벤은 벤야민의 용어로 말하자면, 신화적 폭력이 법의 가면을 쓰고 관리하고 지배하는 이 같은 폭력적인 상황으로부터 어떻게 벗어 날 수 있는가 한다.
아감벤은 "진정으로 정치적인 행위란 폭력과 법 사이의 연결망을 끊어 버리는 행위"라고 말한다. 그럼 어떻게 가능한가?
여기에 아감벤은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현실성'과 '잠재성' 개념을 차용하여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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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위를 통해 전혀 다른 관계를 맺고자 하는 탐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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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강 지젝의 폭력론: <폭력이란 무엇인가>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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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젝은 폭력을 세 종류로 구분한다.
폭력 성찰의 방법으로 어떤 현상을 직접 보지 말고, 그 배후, 그 맥락을 둘러보는 것이다.
크게 두가지로 구분한다. '주관적 폭력'과 '객관적 폭력'이다.
그리고 '객관적 폭력'은 다시 '상징적 폭력'과 '구조적 폭력'으로 구분한다.
주관적 폭력은 직접적인 폭력, 명확히 식별 가능한 행위자가 저지르는 행위이다.
객관적 폭력은 비가시적이고 간접적인 폭력이다.
여기에 상징적 폭력은 언어가 의미 세계를 대상에 부과할 때 따라 붙는 근본적인 형태의 폭력이다.
언어의 상징성은 '윤리적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예를 들어 각자가 겪어 알고 있는 것(고통)을 망각하고 부인하면서 그 상징적 효력(명분)에 의해 유예하는 '물신주의적 부인'에 의존한다.
그리고 구조적 폭력은 기업의 이윤 극대화를 위한 전략들의 '거짓 급박함' 같은 폭력이다.
지젝은 벤야민의 '신적 폭력'을 다룬다. 이는 신자유주의, 글로벌 자본주의의 체계에 내재된 구조적 폭력의 해결책 모색의 일환으로 본다.
신적 폭력의 구체적인 예로 1891년의 파리코뮌을 든다. 그리고 레닌의 회귀를 주장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론 <필경사 바틀비>의 '하지 않은 것을 행하는 것'을 대안으로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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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강 갈퉁의 폭력론: <평화적 수단에 의한 평화>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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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퉁은 "평화는 혁명적 사상"이라고 선언한다.
이 혁명은 장시간의 인내와 고도의 훈련이 요구되는 끝이 없는 과정이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평화를 직접적 폭력의 부재를 가리키는 소극적인 평화가 아니라 구조적 폭력과 문화적 폭력의 부재까지를 포함한 적극적 평화로 규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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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강 한병철의 폭력론: <폭력의 위상학>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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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병철은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를 '성과사회'로 규정하고, 이 사회를 특징짓는 이른바 '긍정성의 폭력'을 주로 문제 삼고 있다.
자기 실현을 위한 긍정적 노력이 과도해 지면 그것은 피로로 나타난다. 이런 피로는 자기착취의 이면이며 긍정적 노력은 그대로 자기에 대한 폭력으로 나타난다.
'피로는 폭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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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
중간에 참여할 수 없는 모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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