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G 님, 싸랑해요~ 이런 고급팁은 공유해주시다니... 저는 북트리, 옵시디안, 아이폰 메모장 등을 이용하는데, 뭔가 여기저기 흩어져있고 정리가 잘 안되고... 뭐 그런 상태인데... vFlatScan 검색해봅니다(아, 스캔앱이군요...) 3M 683-9KP (아, 이것도 집에 많이 있는 것이네요~ )라니... 뭔가 덕후들만의 artifact 같습니다.. 저는 지하철이나 버스를 잘 이용안하지만 노인이 되어 운전이 어려워지면 많이 이용할 예정인데.. 그때 노인이 된 덕후 아저씨를 만나면 인사하는 상상을 해봅니다 ㅎ 감사해요~
[책걸상 '벽돌 책' 함께 읽기] #16. <마오주의>
D-29

오구오구

Beaucoup
우와 독서 꿀팁 감사합니다
정리를 못해서 맨날 좋은 부분만 남겨두는데 이렇게 정리하면 어떻게 보나 싶긴하거든요.... 마음같아서는 모든 책을 가지고 있고 싶지만 ㅋㅋㅋ 당장 따라해봐야게씁니다+_+

borumis
비트겐슈타인은 버트란드 러셀 또는 케인즈, 벤야민은 절친 베르톨트 브레히트 또는 게르숌 숄렘

YG
오! 비트겐슈타인-케인스, 벤야민-숄렘 맞습니다!

장맥주
와... 이런 걸 어떻게 밎추시나요. 세상에 고수가 많네요. ^^

오구오구
증오의 시대 읽을 때 나왔던 그 브레히트 맞죠? ㅋ

borumis
증오의 시대는 아직 안 읽었는데 그 브레히트 맞을 거에요. 고등학교 영어시간에 브레히트의 Mother Courage 희곡을 공부했거든요.

장맥주
사르트르나 하이데거나 그들이 보부아르와 아렌트를 대한 방식을 보면 지성 이전에 인성이 문제인 인간들이었다고 봅니다. 너무 싸늘한 평가인가요.

borumis
저두요. 말은 번드르르하게 하지만 공장이나 농장에서 하루도 못 버틸 것 같은..;;

장맥주
‘관념 좌파’였다고 생각해요. 제가 최근에 지어낸 용어입니다. 현실에 어두운 채로, 관념 속에서 살면서 그 관념에 맞춰 자기가 듣는 정보를 평가하고 그걸로 멋대로 주관적 현실을 재구성하는. 그런 분들의 그런 주관적 현실에서 사실(fact)은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 묶인 불쌍한 손님마냥 팔다리가 잘립니다. (‘관념 우파’도 당연히 있습니다.)

오구오구
왠지 저 같아요... 제 이야기인듯,,, 관념 좌파? 현실에 어두움, 관념속에 살고, 자신의 생각속에 정보를 평가하고 , 내 멋대로 주관적 현실 subjective reality? 재구성

장맥주
에이... 아니실 거예요. 현실이 너무 복잡해서 그걸 다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모두가 관념에 기대 외부 정보를 평가하고, 그걸로 주관적 현실을 구성하는 걸요. 저는 그게 너무 심한 분들을 지적하고 싶었는데, 그게 심한 분들은 아무런 회의 없이 자신의 주관적 현실을 객관적인 현실이라고 믿으실 거예요.

오구오구
주변과 상황에 대해 sensitivity를 가지고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나이가 들수록 그런 성찰이 감소되고, 뭐든 보이는대로 판단하고 인식이 rigid 해지는 것을 느낄때가 많아요 ㅠ 읽고 성찰하고 반성하려고 하는데, 그조차 인식 혹은 관념에 머무르고 realty? 현실에서의 반응은 인식과 매우 다르게 흘러갈 때가 많더라구요.... 아, 맥주님께서 아니라고 해주셔서 ㅋ 쪼매 감사합니다. 다시 생각해봅니다 ㅎㅎ

오도니안
누구나 다 자기 관점으로 보는 독단 속에서 살아가는 건 맞는데, 이 차이가 하나의 기준선은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자기의 믿음이 진리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 것과 믿음에 의지하지만 그것이 진리는 아니라는 것을 가끔 기억해내는 것 사이의 차이.

장맥주
그게 어마어마한 차이더라고요. 회의감 없이 사는 분들 무섭습니다.

오도니안
진화적 관점에서 회의감은 불리한 특성인지도 ^^

장맥주
생존, 승진, 출세, 부귀영화에 하등 쓸모 없는 특성인 거 같습니다. 햄릿이 덜 회의적이었다면 인명 피해도 그렇게 크지 않았겠지요? ^^

punky
사르트르에 대한건 사르트르가 리베라시옹에 아랍과 이스라엘전쟁에 관해 기고한 글과 역사에 대한 좌파적 인식으로 쓴 <아랍과 이스라엘>이란 책에 사르트르가 세계정세 판단과 비판적 논평의 글이 잘 드러나있습니다. 사생활로 사람을 평가하는 건 이런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흐릿하게 만들뿐이죠. 마오주의를 유럽지식인들이 지지했던 것은 제국주의적 행태와 사회주의적 관점에서 본 식민지에서의 착취와 이스라엘이란 나라에 대한 영미제국주의의 주구적 행태를 비판하고자 하는 동기였죠. 지금도 팔레스타인 지지와 이스라엘을 비판하는 좌파적 정치인이 영국 노동당의 제러미 코빈을 반유태주의자로 몰고 당시 프랑스에서도 사르트르를 반유태주의자로 낙인찍었습니다. 분명 마오주의는 폭력적 선동과 포퓰리즘을 기반으로 하는 대중투쟁노선이지만 맑스 레닌주의가 제국주의 미국 영국 프랑스의 공업노동자들을 선동하고 정치경제학적 이론을 제공하는 것에 반해 중국, 베트남 등 인도차이나반도와 인도, 남미에서는 마오주의가 더 적합한 투쟁이론과 노선이었죠. 극혐하자는게 아니라 그 당시의 마오주의노선으로 인한 현재 책에 등장하는 나라들의 불필요한 적대적 폐쇄주의를 응시하고 우리안의 선동적 마오이즘으로 스스로를 갉아먹는 정치세력들에 관해 생각해보는 기회가 됩니다. 얼마전 블랙핑크의 멤버인 뉴진스 하니에 대해 베트남에서 비판적이고 적대적인 네티즌들의 선을 넘은 공격이 있었습니다. 보트피풀출신의 하니가족에 대해 반동이라고 칭하고 적대적 언사로 공격한 것이죠. 하니의 할아버지가 월남 사이공 자유정부를 지지했던 것인데 그 손녀인 하니까지 맹목적인 비난은 거의 적대적이며 폐쇄적인 공격성의 폐해라고 봅니다.

장맥주
사르트르의 철학에 대해서도, 사르트르가 살았던 시대에 대해서도 피상적으로만 알지만 몇 자 적어봅니다. ^^
과학은 덕성과 분리가 가능하지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말하는 철학을 덕성과 분리할 수 있나 싶습니다. 사르트르는 그런 철학을 주창했을 뿐더러, 그 철학의 내용과 그런 철학으로부터 얻은 권위를 사생활에 이용(제가 보기에는 가스라이팅과 성 착취)했지요. 사생활을 이유로 사르트르의 철학이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를 비판할 수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생활을 이유로 물리학자를 비판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맑스의 공산혁명 이론이 프롤레타리아가 없었던 중국 등 농업 국가에 들어맞지 않았다는 것은 옳습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농업 국가에는 마오주의가 상대적으로 더 들어맞는다고 볼 수 있을까요? 마오주의자들은 그렇게 주장했지만 그 주장이 옳은지는 모르는 거죠. 설령 공산주의 세계관을 인정한다 하더라도요.
A라는 방법이 통하지 않을 때 B라는 새로운 방법을 주장하려면 그게 왜 A보다 나은지 설명 정도는 해야 하는데, 마오주의는 그런 논리적인 이론이 아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자본주의 단계에 들어서지 못한 러시아 상황에 맑스주의를 접목시키기 위해 이론에 공을 들인 레닌과 비교하면 그런 점이 더 두드러지지요. 공산혁명 자체에 반대하는 저에게 그래서 마오주의는 이중의 난센스로 다가옵니다.
사르트르는 자신이 믿는 진보를 위해서라면 물리적 폭력을 용인하고 더 나아가 옹호했습니다. 스탈린에 대해서도, 마오쩌둥에 대해서도 그랬지요. 저는 민주주의자라면 ‘진보적 폭력’이라는 개념 자체에 반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민주주의는 ‘어떻게’를 중시합니다. 저는 그게 이 책 <마오주의>의 교훈 같습니다.
마오주의는 말씀하신 ‘폭력적 선동과 포퓰리즘’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실제 극심한 폭력을 행사했고, 그걸 정당화하며 계속했습니다. 그리고 문화대혁명은 몰라도 굴라크의 참상은 사르트르를 비롯한 유럽 지식인들에게 전해졌습니다. 그들이 그런 폭력을 외면할 수 있었던 것은 민주주의자가 아니었거나 지식인이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장맥주
관련 도서 한 권 책장에 꽂습니다. ^^

폭력에서 전체주의로 - 카뮈와 사르트르의 정치사상인간의 자유와 해방을 목표로 하는 공산주의는 역사의 진보를 꿈꾸는 사람들의 혁명적 열정을 타오르게 했다. 그러나 혁명의 공간으로 여겨지던 소련에 폭력과 억압의 강제수용소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알려지고 이는 지식인 사회에 치열한 논쟁을 불러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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