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스토예프스키는 <죄와벌>만 읽었어요. 카라마조프로 넘어가지 못한 이유가 있어요. 제가 견디기 힘든 것 중 하나가 그 책에 있다고 하더군요. 그거슨 바로바로 장.광.설. 참을 수 없을 것 같아요 ㅠㅠ
[책걸상 '벽돌 책' 함께 읽기] #16. <마오주의>
D-29

소피아

장맥주
<죄와 벌>의 장광설은 <악령>에 비하면 약과입니다(근데 저는 그 장광설 좋아하는 사람이에요.^^). 막상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에서는 유명한 장광설 몇 개가 아예 극중극 형태가 되어서 나름 읽기 수월합니다.
도스토옙스키 5대 장편소설 중 정말 힘든 작품은 <미성년>인데 저는 추천하지는 않아요. 장광설 싫으시면 <백치> 추천합니다. 도스토옙스키 본인은 <백치>를 가장 아꼈다고 합니다.
(도스토옙스키의 매력에 빠지면 톨스토이와 위고에 대한 평가가 좀 바뀌실지도...? ㅎㅎㅎ 저한테는 도스토옙스키 >> 톨스토이, 위고거든요.)

미성년 - 상불행한 운명을 타고난 한 청년의 이상과 현실 사이의 방황을 그린 도스토예프스키의 성장 소설. 삶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야 할 아버지 세대의 부재로 인해 온갖 불의와 도덕적 타락의 유혹에 무방비 상태로 내던져진, 위험하고 불완전한 상황에서 보호받을 수 없는 자식들에 대한 작가적 문제 의식에서 씌어졌다.

백치 1도스토옙스키가 평생에 걸쳐 추구한 ‘진실로 아름답고 선한 인간 존재’에 대한 고민이 담겨 있다. 주인공 므이쉬킨 공작은 작가가 만들어낸 그리스도적 이상에 가까운 인물로, 사회의 규범이 아닌 선한 인간성을 따르기에 속물적인 사회에서 그는 ‘백치’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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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피아
도스토예프스키를 더 읽어볼까 생각은 자주 해요. <가난한 사람들>, <백야>,<백치> - 이 순서로 장광설은 피하고 보려는 로드맵도 가지고 있어요 ㅎㅎ
장맥주님의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한 애정이 흥미로워서 한 가지 질문 드립니다 (갑분 작가와의 만남 모드). 제가 읽은 장맥주 님의 작품에서는 현재 대한민국의 어떤 작가보다 두 발을 땅에 단단히 붙이고 서서 현실을 그대로 바라보려는 노력이 느껴졌거든요? 현실지상주의? 그런 면에서 장맥주님의 작품 세계는 도스토예프스키보다 톨스토이나 빅토르 위고 쪽에 가깝지 않을 까 싶은데요. 도스토예프스키는 보다 존재론적이고 근원적인 질문에 천착한 작가라는 생각이 들고요. 좀 더 형이상학적이라고나 할까요? 저에게 도스토예프스키의 질문은 이 삶이 끝날때까지 해답을 칮을 수 없는 것이 라면, 톨스토이나 빅토르 위고의 질문은 지금 여기서 방향을 찾아 나아가면 해답의 실마리라도 발견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에요.
물론 작품세계와 좋아하는 작가는 다를 수 있고요, 제가 도스토예프스키를 많이 읽지 못해 얼토당토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장맥주님의 작품을 오독한 것일 수도 있고요. 그냥 문득 궁금해져서 질문 드립니다. 답을 안하셔도 괜찮아요.

장맥주
칭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저도 제 정체성이 당대를 다루는 리얼리즘 소설가라고 생각하고, 계속 그런 작품을 쓰고 싶습니다. 그런데 소설가이기 이전에 인간으로서, 인생의 의미라는 질문에 무척 매달리고 있습니다. 세상과 삶에 의미를 부여해줄 신이 없고, 저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면 허무에서 벗어날 수가 없음을 압니다. 제 나름대로 의미를 찾는 방법이 소설이고, 그때 제가 걷는 길이 취재를 바탕으로 한 사실주의 소설이나 논픽션, 혹은 현실적인 근미래 SF들이고요.
도스토옙스키는 세상과 삶에 의미를 부여해주는 존재로서의 신, 그리고 그런 신을 거부하는 무신론의 문제를 가장 깊이 파헤친 작가입니다. 무신론자의 삶에 대해서 가장 깊이 성찰한 작가이기도 하지요. 이반 카라마조프는 ‘신이 없으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결론을 내리고, <악령>의 키릴로프는 인간이 신이 되어야 한다는 ‘인신사상’을 주장하며 논리적 자살을 실행하게 됩니다.
도스토옙스키는 무신론을 반박하려고 그런 탐구를 했는데, 결과적으로 무신론자들이 좋아하는 소설가가 됐지요. 대표적으로 니체와 카뮈가 도스토옙스키의 팬이었고, 카뮈의 경우에는 도스토옙스키의 탐구를 이어 받았습니다(<시지프 신화>가 바로 그런 책입니다). 제 경우 무신론자로 살다가 도스토옙스키를 발견하게 된 것이 아니라, 도스토옙스키를 읽다가 무신론자가 되었습니다. 이후로 계속 신의 부재, 그리고 의미의 발명에 대한 압박감을 느끼며 살고 있어요.
@소피아 님이 거론하신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 위고가 모두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는 점이 재미있네요. 그런데 톨스토이, 위고와 도스토옙스키는 달랐습니다. 톨스토이와 위고는 자기 작품 안에서 그리스도의 사랑과 그로 인한 구원을 보여주고 싶어 했죠. <레 미제라블>은 문자 그대로 뮈리엘 주교로 시작해서 뮈리엘 주교로 끝납니다. 뮈리엘 주교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감화시킨 사람이 바로 장발장이며, 장발장은 숱한 고난에도 불구하고 결국 구원받습니다. 톨스토이는 <부활>의 네흘류도프, <전쟁과 평화>의 베주코프, <안나 카레니나>의 료빈, 그리고 말기의 우화소설들을 통해 구원과 낙원에 대한 희망을 말합니다.
반면 도스토옙스키 소설에는 신기하게도 그런 게 없습니다. 가장 역설적인 사례가 바로 <백치>일 텐데, 그리스도와 가장 닮은 사람을 그리겠다는 목표로 쓰기 시작한 이 소설에서 그리스도를 닮은 뮈시낀 공작은 자기 자신을 포함해 아무도 구원하지 못합니다. 이 소설에서 중요한 등장인물은 모두 파멸합니다. <악령>은 이보다 더한 파국이 없을 것 같은 파국이고,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역시 뭔가 희망을 2부에서 말하겠다는 듯이 끝나지만 도스토옙스키가 그 2부를 쓰지 못했죠. 도스토옙스키가 무신론의 문제를 다룬 소설들 중에서 그나마 희망적으로 끝나는 게 <죄와 벌>인데, 여기서도 잘 보시면 라스콜니코프가 작품이 끝날 때까지 성경을 펼치지 않습니다.
즉 도스토옙스키는 자기 작품에서 무신론자를 비판하지, 그리스도의 사랑을 말하지 않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질문은 이 삶이 끝날때까지 해답을 찾을 수 없는 것이라면, 톨스토이나 빅토르 위고의 질문은 지금 여기서 방향을 찾아 나아가면 해답의 실마리라도 발견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라는 말씀에 저도 공감하는데, 저는 그래서 도스토옙스키가 더 좋네요. 삶의 의미라는 질문에 대해 저희가 끝내 대답을 할 수 없다고 믿거든요(카뮈도 같은 결론에 이르렀지요). 그래서 저한테는 '구원'이라는 말 자체가 기만적으로 느껴집니다. 톨스토이나 위고나 대가들이니까 뭔가 구원의 실마리를 보여주는 듯한 이야기를 쓸 수는 있었지만, 그게 구원은 아니라고 저는 생각해요.
저는 답 없는 문제를 향한 도스토옙스키의 그런 공격성이 좋네요. 톨스토이나 위고가 말한 사랑과 구원을 뛰어넘는 어떤 정직함이 느껴집니다(제 또 다른 인생 작가는 조지 오웰인데, 오웰도 해답을 내려는 것이 아니라 질문을 던지려는 공격적이고 정직한 소설가였습니다). 제가 그 옆에 이름을 올릴 수 있는 작가는 아니지만, 저 역시 답변보다 질문에 관심이 훨씬 더 큽니다. 조금 더 나아간다면, 문학은 구원이나 천국을 묘사하는 데에는 전혀 적합한 도구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파국과 지옥을 묘사하는 데 적합한 도구이며, 그런 때 문학이 긍정적인 힘을 발휘한다고요.

장맥주
참, <가난한 사람들>는 짠내 나면서 다소 코믹한 소품이고, <백야>는 ‘엥, 도스토옙스키가 이런 것도 썼어?’ 싶은, 은은한 수채화 같은 단편입니다. 좋은 소설들이지만 도스토옙스키가 왜 거장인지는 설명해줄 수 없는 작품이에요. ^^

소피아
오오, 장광설 피하려다 도스토예프스키 세계에 들어 가지도 못하고 주변부만 맴돌뻔 했네요?

borumis
안그래도 어제 연뮤클럽에서 백치를 읽고 연극 후 뒷풀이에서 수다 떨면서 톨스토이는 해답을 제시하려고 하지만 도스토옙스키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진다고.. 그리고 저도 그래서 그런지 단테의 지옥과 연옥편은 정말 좋았는데 천국편은 너무 지겨워서 겨우겨우 끝냈어요;; 아마도 난 천국에 가도 지겨워져서 연옥으로 탈출할 것 같다고;; 아, 근데 어차피 전 무신론자니 지옥행 확정일까요? ㅋㅋㅋ

CTL
저는 그래도 어떤 식으로라도 해답을 하려고 하는 작가들이 좋습니다.
질문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해답없는 질문만 자꾸 던지는 건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질문하는 거 자체가 답을 찾으려는 노력의 일부분 아닐까요?
수학 문제에서도, 좋은 문제는 질문을 자꾸 들여다보면 이미 답이 거기 안에 있지요.
답이 들어있지 않은 질문은 ...음...어린아이들이 무턱대고 던지는 "그건 왜요?" 같아요.
저는 작가가 관찰한 현상에 대해 스스로의 답이 조금이라도 들어있는 질문들을 던지는 책을 읽고 싶어요.

borumis
아하하 맞아요. 수학문제 풀다보면 답이 질문 자체에 있는 경우가 많죠.
하지만.. 수학문제는 그렇지만 삶의 모든 질문이 그렇게 구조적으로 완벽하지가 않죠.
아니 오히려 대부분의 질문들이 어린 아이들의 질문들 같아요.
답이 들어있지 않은 질문들.. 그래서 어쩌면 제가 아직도 풀리지 않은 수학적 난제나 철학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아 그리고 해답이 없다고 해서 답을 찾는 노력을 하지 않는 건 아니니까요. 오히려 해답이 없으니 답을 찾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게 인간의 본성인 것 같아요. 물론 안 풀리는 문제 갖고 즐거워하는 절 보고 남편과 제 아이들은 자학적 변태같다고 합디다;;;;

장맥주
1. 삶의 의미에 대해 아무리 질문을 던져도 해답을 얻을 수 없다.
2. 사람들은 그 사실을 알면서도 답변을 원한다.
3. 그게 바로 부조리. 우리는 1과 2 사이의 긴장 속에서 살 수밖에 없다. 아니면 삶에 의미가 없다며 자살하거나.
이게 제가 대강 이해하는 카뮈의 주장이에요.
카뮈는 이때 사람들이 신앙으로 도약하고 싶은 유혹을 받는다고 썼는데, 톨스토이와 위고도 그런 유혹을 못 이긴 사람에 해당하겠습니다. 즉 톨스토이와 위고는 제대로 대답한 게 아니라는... 너무 시니컬한가요? ^^

CTL
제대로 된 답이 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나름의 답을 하는게 답을 안 하는 거보다 낫지 않나요?
오답의 감점이 없는 한에서는 답지를 공란으로 두기보다 뭐라도 쓰는게 나을텐데...
그런데 삶은 오답에 치명적인 감점을 받을수도 있는 문제이긴 하네요.

장맥주
저도 사실 인문학 논의를 볼 때 그런 생각이 자주 들어요. 무언가를 반성하고, 그렇게 반성한 것을 반성하고, 그렇게 반성한 것을 반성한 방식을 반성하고, 그렇게 반성한 것을 반성한 방식을 반성하면서 무언가를 간과했음을 반성하고, 그렇게 반성한 것을 반성하는 방식이 누군가를 배제했음을 또 반성하고... 가끔 그 논의 전체가 그렇게 느껴지거든요. ‘이제 반성 좀 그만하고 문제를 해결해!’ 하고 외치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많습니다. 그 반대편에는 빅테크 CEO들이 ‘문제를 해결하겠다’면서 자신을 대단한 사상가로 치켜세우고 있고... 어지럽습니다.

borumis
이게 어쩌면 이과와 문과의 차이인지 아니면 제 딸이 말하는 T와 F의 차이인지 모르겠어요.. 제가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려고 답을 하면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내 마음에 공감하는 이야기를 해달라구..!하고 반격하는 극 F의 딸;; (아 그렇구나 해결해달라는 게 아니었구나;;깨갱;;)

borumis
그럼요 모로 가도 고라고.. 백지로 내느니 죄다 찍어보는 노력이라도 해야지 할말이라도 하죠 ㅎㅎㅎ
그래서 백치에서 나온 그 말이 좋았어요. "문제는 끊임없이 그 삶을 추구하는 데 있지, 그 삶을 발견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게 답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건 알고 헛된 노력일지도 모르지만 확답이라고 자만하거나 안주하지 않고 계속 노력을 멈추지 않는 그런 삶이 공허와 무의미 속에서 반항하는 걸지도요.

오도니안
제 생각에 스피노자의 철학과 뇌과학과 진화론을 종합하면 대략 삶의 의미를 정의하는 방식에 대한 윤곽은 나온다고 보는데, 그렇게 어떤 답을 가진 듯한 느낌이 꼭 좋은 건지는 모르겠습니다. 1과 2 사이의 긴장 속에서 뭔가 창의적인 것도 나오고 다른 사람들과의 깊은 공감도 나오 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도를 깨달은 장자의 도인들은 마음이 편하긴 하겠지만 사람들의 인정을 받을 만한 일을 이루거나 세속의 범인들이 공감을 느끼기가 쉽지 않은 것처럼요. 다만 스피노자의 에티카가 마지막 부분엔 신비주의 비슷하게 끝나듯이 언어와 논리로 다 해명되고 이해되지 않는 의미의 영역이 있을 것 같습니다. 도인 이야기를 하다 보니까 산자들에 나오는 '음악의 가격'이 생각나네요. 다른 단편들도 그렇지만 이 작품도 정말 인상적이었어요.

borumis
저도 에티카를 읽으면서 막판에 제3의 지식 부분에서 갑자기 신비주의로 빠지는가 하고 제일 혼란스러웠던 부분이어서 마치 노자의 도덕경을 해독하는 기분이었어요;; 뭔가 제가 알고 있는 논리 로는 커버 안되는;;

오도니안
저도 그런 편이었는데, 뭔가 논리를 넘어서는 무언가를 스피노자가 얘기하고 싶었다는 느낌이 요즘 들기 시작했어요. 얼마 전 그믐 독서모임에서 다시 읽은 테드 창의 단편 <지옥은 신의 부재>랑 제가 올해의 책에 넣었던 <오늘의 법칙> 중의 마지막 장 영향인 것 같습니다. 스피노자는 무신론자라고 생각하지만, 신을 그 나름의 방식으로 정의내리는 방식으로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데, 그것이 단지 기독교 중심 사회에서 무신론을 포장하려는 것이 아니라 무신론의 논리만으로는 포착이 안되는 일종의 직관과 감성, 삶에 대한 자세를 이야기하려고 했던 것 같아요. 이에 대해 요즘 생각을 좀 해보려고 하는 중입니다.
이번 마오 주의는 천천히 혼자 읽어봐야겠어요. 지금 에드가 스노우 편을 읽는데 옛정이 남아서인지 좀 불공정하게 스노우를 다루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진도가 늦어서 이야기는 나눌 수 없게 되었지만 더 계속 읽어보려구요.
다음 독서 모임에서들 봬요~

장맥주
신곡 천국편 정말 지루하죠. 지옥편의 압도적인 매력에 비하면 너무 시시하죠. 근데 도스토옙스키에 따르면 무신론자는 지옥에 가기 전에 현생에서 공허와 무의미에 빠지게 됩니다. 카뮈는 거기에 반항하라고 했는데 구체적으로 뭘 하라는 건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ㅎㅎㅎ

CTL
그믐에는 북마크 기능이 왜 없나요?
이 정성스러운 글은 꼭 나중에 다시 찾아 읽을텐데요.....
도스토예프스키는 <죄와 벌>만 유일하게 완독했지만 기회가 되면 더 읽고 싶어요.
자세한 의견 올려주셔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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