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작가님의 <소년이 온다> 다시 한번 읽어볼게요.

D-29
그녀는 책을 덮고 기다렸다. 창밖이 더 어두워지기를 기다렸다. 그녀는 인간을 믿지 않았다. 어떤 표정, 어떤 진실, 어떤 유려한 문장도 완전하게 신뢰하지 않았다. 오로지 끈질긴 의심과 차가운 질문들 속에서 살아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소년이 온다 (특별한정판, 양장) P.95-96, 한강 지음
한달 전 그의 부고를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이 바로 그 눈이었습니다. 멀건 콩나물국에서 콩나물을 골라 먹다 말고 멈칫 나를 보던 눈. 그가 콩나물을 다 먹어버릴까봐 긴장하고 있던 나를, 우물거리는 그의 입술을 혐오하며 쏘아보고 있던 나를 묵묵히 마주 바라보던, 나와 똑같은 짐승이었던 그의 차갑고 공허한 두 눈.
소년이 온다 (특별한정판, 양장) P.107, 한강 지음
김진수의 생각에 대해선 알지 못합니다. 그는 자신이 죽으리라고 예상하면서도 도청 밖까지 나갔다가 되돌아왔던 걸까요. 아니면 나처럼, 죽을 수도 있지만 살 수도 있다는 생각, 어쩌면 도청을 지킬 수 있을 것이고, 그렇다면 평생 동안 부끄러움 없이 살아갈 수 있을 거란 막연한 낙관에 몸을 실었던 걸까요.
소년이 온다 (특별한정판, 양장) P.113, 한강 지음
아니요, 쏘지 않았습니다. 누구도 죽이지 않았습니다. 계단을 올라온 군인들이 어둠속에서 다가오는 것을 보면서도, 우리 조의 누구도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습니다. 방아쇠를 당기면 사람이 죽는다는 걸 알면서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린 쏠 수 없는 총을 나눠 가진 아이들이었던 겁니다.
소년이 온다 (특별한정판, 양장) P.117, 한강 지음
우, 우리는······ 주, 죽을, 가, 각오를 했었잖아요. 김진수의 공허한 눈이 내 눈과 마주친 것은 그때였습니다. 순간 깨달았습니다. 그들이 원한 게 무엇이었는지. 우리를 굶기고 고문하면서 그들이 하고 싶었던 말이 무엇이었는지. 너희들이 태극기를 흔들고 애국가를 부른 게 얼마나 웃기는 일이었는지, 우리가 깨닫게 해주겠다. 냄새를 풍기는 더러운 몸, 상처가 문드러지는 몸, 굶주린 짐승 같은 몸뚱어리들이 너희들이라는 걸, 우리가 증명해주겠다.
소년이 온다 (특별한정판, 양장) P.119, 한강 지음
해쉬태그나 키워드 3개를 이 책에 붙인다면?
소년, 태극기, 먹는 일
이 책의 시작과 끝을 장식하는 소년, 동호의 이야기가 가장 기억에 나서 '소년'을 뽑았고요. 관에 태극기를 두른 부분도 인상적이었고, 결국 한 나라 안에서 벌어지는 일이기에 더 기묘하고 슬픈 역사적 사건이라고 생각이 들어서 '태극기',도 짚었습니다. 그 다음은 '먹는 일'을 뽑았는데요. 먹는 데는 치욕스러운 데가 있다고 책에서 나왔던 것 같은데 그 말이 와닿아서 뽑았어요. 결국 살아남으려는 사람들, 삶의 어떤 것들을 더 가지려는 마음, 그걸 지키려는 욕망 등등... 그런 욕망들 중 가장 익숙한 욕망으로 식욕이 있는 것 같은데 그걸 갖고 사람들을 싸우게 만들고 고문 하니.. 그게 너무 끔찍하고 생생해서 기억에 남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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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은 책을 다시 읽는 일이 잘 없는데 이렇게 읽게 됐네요. 좋은 일로(한강 작가님 노벨문학상) 읽으려고 했다가 최악의 일로도 다시 읽게 만드는(계엄령)... 진짜 다이나믹 코리아! 2025년에도 꾸준히 읽고 남겨야겠어요. 감사해요!
카, 카스테라가 제,제,제일 머, 먹고 싶어요. 사,사이다하고 가,같이. 외사촌이 죽던 이야기를 하면서도 울지 않던 그 아이는, 뭐가 먹고 싶으냐는 말에 주먹으로 눈언저리를 문지르며 대답했습니다. 눈을 문지르지 않는 그 아이의 왼 주먹, 곽 움켜쥔 그 손가락들 사이에 약솜이 끼워져 있는 것을 나는 묵묵히 바라봤습니다.
소년이 온다 (특별한정판, 양장) p.120, 한강 지음
생각하고 또 생각했습니다. 이해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든 내가 겪은 일들을 이해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소년이 온다 (특별한정판, 양장) p.120, 한강 지음
각진 각목이 어깻죽지와 등허리 사이로 비집고 들어와, 자신의 곧은 물성대로 활짝 펴지며 내 몸을 비틀 때, 제발, 그만, 잘못했습니다, 헐떡이는 일초와 일초 사이, 손톱과 발톱 속으로 그들이 송곳을 꽂아넣을 때, 숨, 들이쉬고, 뱉고, 제발, 그만, 잘못했습니다, 신음, 일초와 일초 사이, 다시 비명, 몸이 사라져주기를, 지금 제발, 지금 내 몸이 지워지기를,
소년이 온다 (특별한정판, 양장) p.121, 한강 지음
그후 우리는 이따금 만나 함께 술을 마셨습니다. 서로가 자격증 시험에 떨어지고, 교통사고를 내고, 빚이 생기고, 다치거나 병을 얻고, 정 많고 서글서글한 여자를 만나 잠시 모든 고통이 끝났다고 믿고, 그러나 자신의 손으로 모든 걸 무너뜨려 다시 혼자가 되는 비슷한 경로를 거울 속 일그러진 얼굴처럼 지켜보는 사이 십년이 흘렀습니다. 하루하루의 불면과 악몽, 하루하루의 진통제와 수면유도제 속에서 우리는 더이상 젊지 않았습니다. 더이상 누구도 우리를 위해 염려하거나 눈물 흘리지 않았습니다. 우리 자신조차 우리를 경멸했습니다. 우리들의 몸속에 그 여름의 조사실이 있었습니다. 검정색 모나미 볼펜이 있었습니다. 하얗게 드러난 손가락뼈가 있었습니다. 흐느끼며 애원하고 구걸하는 낯익은 음성이 있었습니다.
소년이 온다 (특별한정판, 양장) p.126, 한강 지음
그와 내가 가까웠다 한들 얼마나 가까웠겠습니까. 우리는 서로에게 의지했지만, 동시에 언제나 서로의 얼굴을 후려치고 싶어했습니다. 지우고 싶어했습니다. 영원히 밀어내고 싶어했습니다.
소년이 온다 (특별한정판, 양장) p.132, 한강 지음
나는 싸우고 있습니다. 날마다 혼자서 싸웁니다. 살아남았다는, 아직도 살아 있다는 치욕과 싸웁니다.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과 싸웁니다. 오직 죽음만이 그 사실로부터 앞당겨 벗어날 유일한 길이란 생각과 싸웁니다. 선생은, 나와 같은 인간인 선생은 어떤 대답을 나에게 해줄 수 있습니까?
소년이 온다 (특별한정판, 양장) p.135, 한강 지음
네가 여섯살, 일곱살 묵었을 적에, 한시도 가만히 안 있을 적에, 느이 형들이 다 학교 가버리먼 너는 심심해서 어쩔 줄을 몰랐제. 너하고 나하고 둘이서, 느이 아부지가 있는 가게까지 날마다 천변길로 걸어갔제. 나무 그늘이 햇빛을 가리는 것을 너는 싫어했제. 조그만 것이 힘도 시고 고집도 시어서, 힘껏 내 손목을 밝은 쪽으로 끌었제. 숱이 적고 가늘디가는 머리카락 속까장 땀이 나서 반짝반짝함스로. 아픈 것맨이로 쌕쌕 숨을 몰아쉼스로. 엄마, 저쪽으로 가아, 기왕이면 햇빛 있는 데로. 못 이기는 척 나는 한없이 네 손에 끌려 걸어갔제. 엄마아, 저기 밝은 데는 꽃도 많이 폈네. 왜 캄캄한 데로 가아, 저쪽으로 가, 꽃 핀 쪽으로.
소년이 온다 (특별한정판, 양장) p.192, 한강 지음
그들이 희생자라고 생각했던 것은 내 오해였다. 그들은 희생자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거기 남았다. 그 도시의 열흘을 생각하면, 죽음에 가까운 린치를 당하던 사람이 힘을 다해 눈을 뜨는 순간이 떠오른다. 입안에 가득 찬 피와 이빨 조각들을 뱉으며, 떠지지 않는 눈꺼풀을 밀어올려 상대를 마주 보는 순간. 자신의 얼굴과 목소리를, 전생의 것 같은 존엄을 기억해내는 순간. 그 순간을 짓부수며 학살이 온다, 고문이 온다, 강제진압이 온다. 밀어붙인다, 짓이긴다, 쓸어버린다. 하지만 지금, 눈을 뜨고 있는 한, 응시하고 있는 한 끝끝내 우리는......
소년이 온다 (특별한정판, 양장) p.213, 한강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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