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계절의 소설_겨울] 『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 함께 읽기

D-29
어느덧 2024년도 몇 시간 남지 않았네요. 말도 많고 탈도 많은 한해였는데요, 모쪼록 내년에는 좋은 일들이 더 많아지기를 바라봅니다. <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 즐겁게 읽으시고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화제로 지정된 대화
이 대답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요? 필연적이고 불가피한 것에 대해서는 그저 받아들여야 할 뿐, 불평할 필요는 없다는 뜻일까요? 어쩌면 EF는 저 질문을 자기연민적인 질문이라고 여겼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드네요.
'삶은 필연적인 동시에 불가피하다'라는 문장이 우리나라 판본의 제목과 맥락이 비슷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연은 비켜갈 수 없죠. 비켜갈 수 있는 건 이미 우연이 아니니까요. 우리는 태어남으로써 (일단은) 살아갈 수 밖에 없고, 죽기 전까지는 살아가는 것을 멈출 수도 피해갈 수도 없잖아요. 저는 죽음은 선택할 수 있지만, 삶은 선택이 아니라고 읽혔습니다. 이는 엘리자베스뿐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나 안고 가야하는 숙명이 아닐까싶기도 하고요.
우연은 비켜갈 수 없다는 말이 일종의 역설처럼 느껴졌는데, 말씀을 듣고 보니 정말 우연은 비켜갈 수 없는 것이네요. 그런 의미에서 우연과 필연은 생각만큼 다르지 않은 것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삶은 선택이 아니라는 말을 새해 화두로 삼아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저도 이 대답이 알쏭달쏭했어요. 다만 ‘현혹하는 망상‘이라는 데에서 힌트를 얻자면, 필연적이고 불가피한 삶에 대해서 슬픔이니 아름다움이니 의미를 부여하려는 게 소용없다는 것인가? 싶었어요. 여하튼 질문은 감상적이고 대답은 냉철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개인적으로 삶의 의미에 대해 고민하는 고질적 병증(?)이 있는데 요즘 들어 그 고민이 얼마나 무의미하고 무익한가… 라는 생각을 해요. 의미를 고민할 시간에 그냥 더 열심히 살아야(살았어야) 한다는 생각이… ㅎㅎㅎ
언젠가 제가 아는 분이 나이를 먹다 보니 삶에서는 '왜'가 아니라 '어떻게'가 더 중요한 것 같다, 라는 요지의 말씀을 하신 적이 있는데 이 책을 읽으며 그 생각이 나더라고요.
EF의 부고 소식, 유언장 내용에 따라 EF의 아파트에 간 닐의 시선으로 EF적 생활이 그려지는 아래 대목이 좋았습니다. 죽음으로 텅빈 아파트나 주택은 종종 버려진 듯한 우울한 느낌을 줄 수 있다. 우리는 애도를 하는 중에는 보통 그런 장소를 의인화한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그게 여기에서는 적용되지 않았다. 아마도 EF가 이 장소를 한 번도 품거나 사랑하지 않고, 그저 점유하기만 했기 때문인 듯했다.(p.85-86) 집을 꾸미거나 반려동식물과 살거나 사진을 넣은 액자들을 집 안 군데군데 두거나 하지 않았을 것 같은 EF의 공간이 그려졌습니다.
저도 그 부분이 인상깊었어요. 그런데 한편으로 닐은 왜 그렇게 EF의 그런 면모를 좋아했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기기도 했어요. 그러니까 닐은 EF가 세상과 특정한 방식으로 단절되어 있다는 점을 굉장히 높이 평가하고 아주 좋아했던 것 같거든요. 현실에 '제프' 같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를 떠올려보면 그게 당연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면서도요...ㅎㅎ
(…)대부분은 삶에서 결핍을 느끼기 때문에 와요. 자기가 뭔가 놓쳤을지도 모른다는 느낌, 그런데 이제 상황을 바로잡을 기회가 왔다는 느낌. 나는 그게 대단히 감동적이라고 생각해요.
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 p.72, 줄리언 반스 지음, 정영목 옮김
저도 그 부분을 읽으며 지금 내게 필요한 건 EF의 강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조금 번외이지만, 아주 오래 전에 저도 줄리언 반스의 <플로베르의 앵무새>를 읽은 적이 있는데요, 지금은 내용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지만... 혹시나 해서 메모를 뒤져보니 이런 대사가 적혀 있네요. “자신에 관하여 사람들에게 자세히 이야기하려는 것이 부르주아적 유혹인데 나는 항상 그것에 지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아마 이건 작중 플로베르의 대사 같아요.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플로베르가 자기연민을 극도로 경계했던 EF와 어딘가 닮아보이기도 하고, 줄리언 반스가 어떤 인물을 좋아하는지에 대해서도 좀 더 힌트가 되는 것 같네요.
2025년에는 플로베르를 다시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백 투 플로베르!
저도 실은 읽은지 너무 오래 되어 기억이 거의 안 나요. 올해가 다시 읽을 타이밍인가 봅니다!
화제로 지정된 대화
오늘은 새해의 첫 날이고, 함께 읽기 첫 주차의 마지막 날이기도 하네요. 다들 1부를 어떻게 읽으셨는지 궁금해요. 매력적인(누군가에게는 그렇지 않은) EF가 등장하고, 주인공을 사로잡으며 존재감을 뿜뿜하는가 싶더니 갑자기 수십 년의 세월이 훅 지나가고 (*스포일러주의*) EF가 세상을 떠난 후 얼떨결에 EF의 책과 문서들을 물려받은 닐이 그것을 이어가겠다고 결심하면서 1부는 끝이 납니다. "이것이 '미완성 프로젝트의 왕'이 이번만은 완성해 보겠다고 결심한 과제였다"라는 부분이 개인적으로 인상 깊었어요. 저 역시 미완성 프로젝트의 왕...까지는 아니더라도 중간 계급 이상 되는 사람의 한 명으로서, 올해는 이것저것 완성하는 해를 보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하네요. 내일부터는 2부를 함께 읽겠습니다!
몇 개의 인상적인 부분을 꼽아보면, 먼저 단종 재배(단일 작물 재배)를 단일 문화와 유럽의 제국주의까지 확장하는 부분(p51~ )이 기억에 남습니다. 이 대목은 뒤에 이어지는 게오르기우스나 율리아누스의 이야기, 그리고 과거사에 대한 후대의 책임 논쟁과도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또 엘리자베스 핀치의 자기 연민에 대한 혐오인데요, 그녀가 역사적이든 개인적이든 자기 연민을 질색하는 이유가 궁금해지더라고요.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은 엘리자베스 핀치와 닐의 대화였습니다. 닐은 핀치를 이념이나 사상과 관련해 정의하려고 들어요. 냉소주의자, 무정부주의자, 에피쿠로스파, 페미니스트까지. 그러자 핀치는 닐이 자신에게 '딱지'를 붙이려고 한다면서 그 부분에 대해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닐은 결국 그녀를 '로맨틱한 스토아철학자'라고 나름대로 규정을 짓습니다. 이러한 점들이 우리 사회가 무의식적으로 갖는 단일성, 집단성과 연관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단종 재배와 단일 문화, 유럽의 제국주의, 일신교 등등이 말씀하신 단일성, 집단성, 획일적인 문화 등등과 이어져 있는 것 같아요. 많은 분들이 말씀하셨지만 자기 연민에 대한 혐오는 결국 '바꿀 수 없는 것은 받아들여야 하고 그것은 삶이다' 같은 핀치의 인생관에서 나온 게 아닌가 싶습니다. 살면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딱지'를 붙일 수밖에 없고, 소설이 인물을 다루는 이상 그 자체로 다면적이고 풍요로운 인물을 어느 정도 축소할 수밖에 없는 것에 대한 작가의 문제의식이 EF를 바라보는 닐의 시선을 통해 그려지고 있다고 생각해요.
EF 가 모노라는 말로 시작해서 좋은게 없다고 하죠 여기서 이분법적이거나 배타적인 문화에 대한 그녀의 날선 시선이 보였어요 부드럽게 말하는 것 같지만 그런 날카로운 일침들이 시원하다고 해야 할까요 뭔가 통쾌한 면이 있네요 이런 인문학 강의를 대학 때 못들어본게 아쉽네요
저도 EF가 말하는 방식이 정말 부드러운데도 언제나 핵심을 피하거나 비껴가지 않는 방법이라 좋았어요
대학이 아니더라도 여러 통로로 이런 강의를 들을 수 있으면 좋겠어요. 시간도 여유도 없긴 하지만요...
나는 우리와 반대되는 사람이나 우리가 반대하는 사람과 익숙해지자고 제안하고 있어요. 살아 있는 인물이든 죽은 인물이든, 종교적 반대든 정치적 반대든, 심지어 일간신문이든 주간 잡지든. 네 적을 알아라—단순하고 설득력 있는 규칙이죠—심지어 죽은 적이라 해도, 그 적이 쉽게 부활할 수도 있으니까. 또 어떤 위대한 작가의 표현대로, ‘이 괴물들이 우리에게 역사를 설명해 준다.’
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 53쪽, 줄리언 반스 지음, 정영목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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